이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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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龍萬
1933년 생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의 제36대 재무부 장관. 1960~70년대 박정희표 경제개발의 실무를 담당하는 재무 관료로 치열하게 살았던 인물이다. 현재 우리금융지주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2. 생애


1933년 강원도 평강군에서 자수성가한 부농인 이봉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 슬하에서 평안하게 보냈으며, 어렸을 때 본명은 승만(承萬)이었다. 그러나 해방되고 공산 정권이 들어서 북한 여기저기서 '이승만, 김구 타도'를 외치자, 이름을 용만으로 고쳤다. 공산 정권이 땅을 무상으로 몰수해가면서, 가정형편이 점점 힘들어졌고,[1] 고등학교 때 최우등생인데도 지주 아들이라고 학교 대표(평양 전국최우수생 회의 대표)로 뽑히지도 못하는 등 수모를 겪었다.[2]
그래서 열여덟살때인 1950년 1월 온 가족이 고향인 평강을 떠나 50리 떨어진 큰 댁이 살던 김화로 이사를 갔다. 그런데 이사 간 지 5개월 만에 6.25 전쟁이 터졌고, 다시 공산정권의 지배를 받았다.[3] 전세가 역전돼 1950년 10월 국군이 김화를 점령했을 때 국군이 조직한 학도대에 자원 입대했다.[4] 그의 입대 이후 그의 가족은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1951년 5월 춘천 가리산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5] 그때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어 평생 어깨를 기우뚱한 채로 살게 되었다.[6]
상이군인으로 명예 제대한 후 대전에 정착한 육촌 형의 도움을 받아 대전우체국 서무과에서 일하게 됐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대학입학 공부를 하여 성균관대학교 화학과 시험을 보았고, 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고 한다. 하지만 등록할 돈이 없어 진학하지 못했다.[7] 이후 상경해서 중앙우체국 서무과에서 일했다. 종로구 연지동에 있는 육촌 형 집에 얹혀 한 평짜리 연탄 창고를 방으로 꾸며 살았고, 그렇게 일해가면서 대입 준비를 해[8] 성균관대 법대에 입학해서 1년을 다니다가, 다시 시험을 치러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55학번으로 편입했다. 대학생 시절에도 우체국 근무 인연을 살려 우표 수출입 업무를 배우고 익혔다.
5.16 군사정변 이듬해인 1962년 6월 내각기획통제관실[9]에 자리를 얻어[10] 중앙청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고등전형 시험을 거쳐 행정사무관 4호봉으로 근무했으며, 당시 박정희에게 경제개발 계획의 진행 상황을 수시로 보고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일 잘 한다고 인정을 받아서 1966년에는 청와대 정무수석실에 파견되어 일했다. 6개월 뒤 서봉균 정무수석이 재무부 장관으로 부임하게 되자, 그를 따라 재무부로 소속을 옮겼다.
6개월 만에 재경직 전환 시험을 통과하고 수재들이 모이는 재무부에서 핵심 보직인 이재국 이재2과장을 맡은 게 1967년이었다. 이재(理財) 2과장직을 맡고 보니 요직이자 눈코 뜰 사이 없는 전투직이나 다름없었으며, 저축, 신탁, 은행 관리감독이 주 업무라 5.16 정부의 공약사업 실천을 위한 저축 장려와 내자동원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밤낮없이 뛰는 만근(滿勤)으로 사생활을 거의 포기해야만 했다. 서봉균 장관이 떠나고 남덕우 장관과 김용환 장관이 부임한 시절에도 엘리트 코스인 이재 1과장, 이재국장을 거쳐[11] 기획관리실장, 재정차관보로 거침없이 승진했다.
이재국장 시절부터 당시 살인적인 고금리를 낮추는 데 앞장서는 등 친(親)기업 정책을 폈다. 은행을 새로 만들고 사금융을 양성화하면서 제도권 금융의 틀을 구축하는데, 경제가 급성장하니 물가는 치솟고 자금은 늘 부족했다. 재무부 소속 관료로서 금리 정책 등을 놓고 경제기획원이나 한국은행과 부딪히는 일도 잦았다.
그러다가 19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영문도 모른 채 사표 통보를 받았다. 1980년 5월, 장덕진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장이 재무부 차관으로 옮긴 박봉환 상임위원 후임 자리를 제의하여 경제과학심의회 상임위원으로 옮겨 앉아있을 때 뒤늦게 통보를 받고 해고된 것.[12] 그 후 백수시절을 보내다가,[13] 1982년 2월 동국제강 장상태 회장의 요청으로 중앙투자금융 사장직에 취임하였다.
그 뒤 1985년 2월에는 신한은행 제2대 은행장을 맡았고, 1988년 2월에는 사공일 재무장관 추천으로 외환은행장을 맡았다. 외환은행장 재임시절 국책은행의 안일한 체질에 젖어있던 직원들을 고객에 봉사할줄 아는 은행원으로 변신시키기 위해 매섭게 채찍질하였다. 그리고 정/관계 인사들을 상대로 끈질긴 로비끝에 외환은행을 민영화 시키는데 성공하는 등 굵직한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1990년 3월에는 은행감독원장을 맡으며 관직으로 복귀했다.
1991년 5월 27일에는 노태우 정부에서 제35대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93년 2월 24일까지 재무부 장관으로 일하면서, 중소기업에 신용대출을 확대해주고, 중소기업 대출의 경우 신용보증기관의 보증이 다소 모자라더라도 은행들이 모자란 부분에 대한 보증을 서서 대출해 주라고까지 하며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퇴임 후에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되어 명예에 먹칠을 했다.[14] 1심에서 징역 2년6월에 추징금 1억4천만원이 선고되었고, 1996년 5월 2심에서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및 추징금 1억4천만원이 되어 석방되었다.

3. 여담


  •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은 그를 가리켜 “우리 후배들은 그를 돌쇠처럼 뚫고 나가는 추진력이 있다 해서 ‘용돌이 형님’, 척추에 총탄 박힌 채 독종같이 일한다 해서 ‘총알 탄 사나이’라 불렀다”고 했다. “내 공무원 생활 35년 동안 장관을 수없이 모셨는데 후배한테 일을 제일 지독하게 많이 시킨 장관”이라고도 평했다.
  • 박근혜 정부 시절에 정홍원 총리가 그를 포함한 원로들을 불러 말을 청하자, "관피아, 관피아 하는데 절대 그런 말 쓰면 안 된다. 관피아는 마피아에서 나온 말 아니냐. 마피아는 살인, 밀수, 마약처럼 못된 짓은 다 하는데 공무원을 그런 데 빗대면 어떡 하냐. 그럼 대통령은 마피아 두목, 총리는 부두목이라는 말이냐"라고 하여 화제가 되었다.


[1] 한 해 농사지은 돈을 몽땅 노름해서 날리고 걸핏하면 아버지에게 손 벌리던 친척이 동네 인민위원회 직책을 맡아 그의 아버지한테 자아비판 하라고 나섰다 한다.[2] 평강고급중학교 다닐 때는 수업도 못 하고 평강역 공사에 투입되어 온 종일 일했고, 1948년 여름방학 때는 평강역에서 38선까지 가는 남침용 도로 건설 공사장에서 아버지와 교대로 일했다고 한다.[3] 이때 아버지는 아들들이 인민군에 끌려갈까 봐 아버지는 가마솥을 들어내고 그 밑에 굴을 파서 그를 비롯한 아들들을 숨겼다고 한다.[4] 공비 토벌하러 출동하는 길에 집에 잠시 들른 길에 어머니가 구워주신 콩고물 찰떡 3개를 먹었는데, 그게 어머니가 주신 마지막 음식이 되었다고 한다.[5] 인민군의 따발총 소리가 들렸는데 갑자기 왼쪽 어깨가 도끼로 내리찍는 것 같이 아파왔고, 산 아래로 굴렀는데 기적처럼 나무 등걸에 몸이 걸려 살았다고 한다.[6] 척추에도 실탄이 박혀 있다고 한다. 제거 수술을 받다가 자칫 신경을 건드릴 수도 있다는 위험 때문에 한평생 몸에 지닌 채 그냥 산다고 한다.[7] "형님의 배려로 대전우체국 서무과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대학입학을 준비하는 생활에 돌입했다. 영어는 퇴근 후 학원을 다니며 공부했고 수학은 입시문제집을 사서 공부했다. 때마침 명예 제대한 상이군인에게는 학비를 면제해준다는 병무청 고시가 발표됐다. 북에서의 바람대로 이공계 진학을 위해 성균관대 화학과 시험을 보았고 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대학 등록을 위해 당시 부산에 있던 성대 대학본부로 향했다. 일반석 차표를 살 형편이 못돼 대전발 부산행 야간 화물열차에 몸을 실었다. 부산에서 고향 친구 김해영을 만나 동대신동 성균관대에 가자고 했다. 친구와 함께 대학본부에 합격증을 내니 등록을 위해선 돈을 내라고 했다. 내가 '저는 돈이 없어요'라며 병무청 고시를 언급하자 '무료는 아니다. 50% 감면이다'란 답이 돌아왔다. 극심한 재정난에 명예 제대 군인을 위한 학비 지원 제도가 부실하게 운영됐던 것이다. 50%는 커녕 10%의 등록금도 낼 돈이 없던 나는 낙담했다. 마침 그날이 합격자 등록 마감 전날이라 대학본부 밖에는 돈을 싸들고 와서 미등록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밤늦게 대전으로 올라오는 화물차에 가마니를 깔고 누웠다. 얼마나 서럽던지 눈물이 흘러 내렸다."#[8] 밤에는 장충단 언덕 위에 있는 야간대학인 국제대학에 등록도 하지 않고 법학과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9] 5·16 직후 신정부조직법에 따라 신설된 기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담당하는 컨트롤타워였다.[10] 기획통제관에 평북 출신 김정무(金貞武) 장군이 취임하자 비서관인 한호준 씨가 이용만을 같은 이북출신이라며 추천했다고 한다.[11] 이재 1과장 2년, 이재국장 3.5년의 최장수 기록을 세웠다.[12] 재무부에 인사차 찾아온 공기업(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을 회의 때문에 만나지 못했는데, 정권 실세의 친·인척이었던 그 사장(이순자의 삼촌 이규광)한테 미운털이 박혔다는 말이 있다.[13] 하버드대 객원 연구원 6개월 코스를 잡아 미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 김만제 재무부 장관이 “신용보증기금 이사장으로 추천됐으니 급히 귀국했으면 좋겠다”고 연락하여 돌아왔는데, 와서 보니 대통령 정무비서관 허문도가 “우리가 자른 양반, 우리가 다시 쓸 수 있느냐”고 비토하여 이사장 자리가 무산된 일도 있었다. 그 후 신한은행 초대 은행장으로 추천됐지만 역시 허문도 비서관의 반대로 취임할 수 없었다.[14] 안영모 전 동화은행장으로부터 1억4천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