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환(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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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龍煥
1932년 2월 5일 ~ 2017년 4월 7일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선거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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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경제관료, 정치인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정암(靜巖)이다.

2. 생애


1932년 충청남도 보령군에서 태어났다. 공주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제7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면서 관료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박정희 정부 때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재무부(현 기획재정부)장관 등을 지냈다.
오늘날까지도 '''"고리대금업 단속"'''이란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과 VS "헌법에 보장된 '''사유재산권''' 침해", '''재벌감싸기'''의 부정적인 시각으로 평가가 극명히 나뉘는 '''초법적인''' 대통령령1972년8.3 사채동결조치 (긴급명령 15호)[1] 추진자로써 언론에 오르내리며 구설수에 올랐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김용환을 '''젊고 유능한 관료'''로 크게 신뢰하였다고 한다.
이후 제13대, 14대, 15대, 16대 국회의원(신민주공화당, 민주자유당, 통일국민당, 신민당, 자유민주연합, 희망의한국신당, 한나라당)을 지냈다.
1996년 10월 자민련 사무총장으로 김종필 총재를 대리해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만나서 양당간 공조방안을 처음 의논하였다. 이후 자민련과 국민회의는 합동 의원총회, 보궐선거 후보 단일화 등으로 협력관계를 다져가면서 결국 15대 대선을 앞둔 1997년 10월 대선후보 단일화와 당선후 국정 공동운영, 1999년 말까지 내각제 개헌 완료를 내용으로 하는 DJP연합을 합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용환은 새정치국민회의 한광옥 부총재와 막후협상을 통해서 DJP연합을 성사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2]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에는 비상경제대책위원장을 맡아서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재무부 관료였으나 오랜 기간 야인으로 머물고 있던 이헌재를 다시 불러들여서 신설된 금융감독위원장(현 금융위원회)에 앉히기도 하였다.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DJP연합에 앞장섰지만, 개헌시한이었던 1999년 김대중-김종필 양김 회동 끝에 내각제 개헌 연기 선언이 나오자, 이에 반발해서 자민련을 탈당하였다. 이때부터 명백한 반DJ, 반JP 노선을 걷는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하나회 출신인 허화평 등과 함께 희망의한국신당을 창당하였으나 막상 허화평은 민주국민당으로 가버렸고(...) 본인은 고향인 충청남도 서천군·보령시 선거구에서 홀로 당선되었다.[3] 그러나 1인 정당의 한계를 느끼고는 2001년 한국신당을 해산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부총재가 되었다.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에 대한 대응책으로 한나라당 서청원 대표가 이회창-김종필 연대를 추진하자, 격렬하게 반발해서 무산시키기도 하였다.

3. 평가


별명이 '''꾀돌이'''였다. 그러나 말년(2010년대)의 김용환 본인은 이 별명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자기가 나이 80 넘어서까지 꾀돌이(또는 박근혜판 최시중[4]) 소리를 들어야겠냐면서(...)
DJP연합 초창기부터 정권 초기의 중요한 시기까지 김용환의 일처리를 지켜본 김대중은 2009년 세상을 떠나기 전 완성된 자서전에서 김용환의 '''인재보는 안목'''을 다루는데 지면을 할애하였다. 당시 경제, 복지, 산업 관련 분야를 담당할 국무위원은 자민련에서 추천한 인재들이 입각했는데, 김용환의 추천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경제위기를 헤쳐나가는데 중요한 몫을 담당했던 데서 비롯된 찬사일 것으로 추정.
반면에 금융권을 틀어쥐고 한국경제를 쥐락펴락한다는 재무부 출신 경제관료 인맥 즉 모피아(Mopia) 그룹의 시초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김용환은 1970년대 재무부 장관으로 특혜적 정책금융을 법률적으로 제도화, 정권이 금융권을 통제하는 관치경제를 공고히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모피아 인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 언론에선 보통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모피아 인맥의 대부로 지칭하는데, 공직에서 물러난 후 오랜기간 변방을 떠돌던 이헌재를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시켜 준것도 김용환이다.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의원을 적극 지지하였다. 18대 대선 정국에서도 강창희와 함께 박근혜 대통령의 원로자문단 격인 "7인회" 멤버이자 새누리당 상임 고문으로 있었다.[5] 그러나 당선 직후 '''최태민의 그림자(= 최순실 국정 농단)에서 벗어나라''' 라는 발언을 했고 그 이후 박근혜의 눈 밖으로 멀어졌다고 한다. 사실 김용환 뿐만 아니라 이외에도 나라를 잘 이끌어가자는 인물의 가치있는 비판 및 발언조차 박근혜는 멀리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용환은 박근혜가 '임기를 다 마칠 수 있을 지 모르겠다.'라는 발언을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김종필과의 관계는 김대중과 김상현의 관계와 비슷하다. 김대중의 측근이었던 김상현처럼 김종필의 측근이었으나, 둘 다 권노갑, 한화갑같은 가신관계는 아니고 약간 독자적인 정치노선을 밟으며 본인들이 모시던 정치 지도자와 결별과 재결합을 반복하다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로 정치 활동을 마감했다. 김종필과 다르게 김영삼 후보를 대통령으로 지지하기를 거부하며 민자당을 탈당했다가 자민련 창당으로 재결합했으나, 김종필이 이후 내각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자민련을 나가 한국신당을 창당했고, 이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2015년부터 병환으로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2017년 4월 7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까지 지켜본 후 8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죽기 몇개월 전, 한 측근이 병상에 누워있던 김 전 의원에게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전하자 김 전 의원은 '''“거 봐, 내 말 안 들어서 그렇게 됐잖아”'''라며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

4.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대천/보령)
'''신민주공화당'''
'''39,072 (57.46%)'''
'''당선 (1위)'''
1991년 3당합당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대천/보령)
'''민주자유당'''
'''44,246 (69,54%)'''
'''당선 (1위)'''
1992년 탈당
자유민주연합 합류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보령)
'''자유민주연합'''
'''36,945 (70.27%)'''
'''당선 (1위)'''
1999년 탈당
한국신당 창당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보령/서천)
'''희망의한국신당'''
'''35,125 (38.66%)'''
'''당선 (1위)'''
2001년 당 해체
한나라당 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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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업과 사채권자의 모든 채권채무 관계는 72년 8월3일을 기준으로 무효화 한다. 둘째, 정부가 2000억원을 마련해 기업이 은행에서 빌린 단기고리 대출금의 일부를 연리 8% 장기저리 대출(3년간 거치据置 후 5년에 걸쳐 분할상환)로 전환하도록 지원한다. 셋째, 월 3.84%, 연 46%에 달하는 사채 이율을 월 1.35%, 연 16.2%로 낮춘다. 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교수의 평설.[2]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97> DJP연합의 대선 승리. [3] 차마 스스로를 총재라고 하기는 뭐했는지, 직함은 대표라고 칭했다. 애초에 1인 총재 정치를 배격한다는 구호를 내세웠기에, 7인 이내 위원으로 구성되는 중앙집행위원회를 두고 연장자가 의장직을 맡도록 하는 당헌, 당규를 마련했다. 하지만 중앙집행위 위원은 김용환과 허화평 뿐이었다(...) 여하튼, 2000년대에 당 최고직위에 총재라는 직함을 쓰지 않은 첫 정당으로, 열린우리당한나라당이 2004년 총재 직함을 없애면서 이런 흐름이 주류로 이어지게 되었다.[4] 초대 방통위 위원장. MB의 멘토였다. 애초에 방통위 자체가 최시중을 위하여 만들어준 부총리급 자리나 다름 없었다.[5] 대표 진박이었던 이한구새누리당 원내대표와는 동서 지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