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대학교
'''CONNECTING MINDS | 연결된 세상, 협력하는 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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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주대학교, 亞洲大學校, AJOU UNIVERSITY'''
경기도 수원시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 인간존중(人間尊重), 실사구시(實事求是), 세계일가(世界一家)라는 교육 이념을 추구하고 있다. 아주대학교는 대한민국과 프랑스 국가 간 협약으로 세워진 대학이기 때문에 설립 주체 및 설립자는 '''대한민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다.[3] 본교 캠퍼스에 모든 단과대와 대학병원까지 이웃하고 있다.
아주대학교가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이유는 1972년 11월 박창원 이사장이 발표한 담화문 내용에 들어 있다. 담화문 문구엔 조국 근대화의 얼이 될 젊은 인재를 육성하여 길이 아시아의 횃불[4] 이 되게 하자라는 문구가 있는데 여기서 '''아시아(亞洲)'''를 따 지금의 아주대학교 이름이 탄생되었다. 대학 설립 초기엔 아시아지역의 대표 대학이 되자는 의미로 아시아를 대학명으로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일본에 아시아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대학이 있어 조국 근대화의 얼이 될 대학이 전범이 세운 대학의 이름과 같게 되는 것을 경계하여 亞細亞의 동의어 亞州를 사용했다.[5][6] 아주대의 설립 초기엔 아시아를 프랑스어로 직역한 Asie를 활용해 'College technique Asie Franco-Coreen'을 대학명으로 사용했다가 후에 Asie를 Ajou[7] 로 바꿔 사용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지원으로 대학이 설립되었기 때문에 영문이 아닌 프랑스어를 대학명으로 사용한 것이다.
담화문의 내용처럼 아주대학의 설립 목적으로 조국 근대화의 얼이 될 젊은 인재를 육성하여 길이 아시아의 횃불이 되게 함이라 소개하면서, 담화문 중반에 연구, 교류 및 국제협력의 일환을 담당하는 아시아 중심대학이 될 것이란 의미로 '아시아 지역'이란 문구를 3번이나 연속 언급하여 아주대학이 아시아의 대표대학이 될 것임을 천명하였다.[9] 아주대학교 교가도 작사한 박창원 이사장은, 교가에 '조국의 전진 속에 밝은 빛', '조국의 얼이 되어 찬란히 빛나리라'라는 문구를 넣으며 담화문에서 밝혔던 대학 설립 목적을 녹여냈다. 또 공통으로 교가 1절, 2절 후렴구에 '아주대학 민족의 횃불이 되자'라고 명시하며 아주대학이란 이름이 '아시아의 횃불'에서 비롯하였음을 강조했다.1965년에 대한민국 정부와 프랑스공화국 정부 간에 체결된 문화 및 기술 협력에 의한 협정의 일획으로 수원 근교에 아주대학,아주공업초급대학, 및 유신고등학교를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본 대학은 조국근대화의 얼이 될 젊은 인재를 육성하여 길이 아시아의 횃불이 되게 함은 물론 한불 양국 정부 간의 문화 및 기술협력을 더욱 증진하여야 한다는...(중략) 본 대학은 한불협력의 상징으로서 양국 간의 문화기술의 교류에 공헌하는 것은 물론, 과학기술의 교육뿐만 아니라 외국어교육, 아시아 지역 연구에도 힘을 기울일 것이며, 아시아 지역과 교수 및 학생교류를 가짐으로써, 아시아 지역에 있어서 국제협력의 일환을 당당하고자 합니다...- 1972년 11월 박창원 이사장 담화문 "학교설립에 즈음하여"[8]
대외 평가에선 개교 50년 미만 신흥대학이며 학부제, 외국 대학과의 복수학위제, 무제한 전과제, 단과대학 책임경영제, 교수업적 및 강의평가제도, 원스톱행정시스템, 비교과시스템, 학생 서비스센터, 캠퍼스정보화, 전자도서관 구축, 정보통신대, 국제학부, 미디어학과, 경영정보학과(e-비즈니스), 소프트웨어융합학과, 금융공학과, 에너지공학과(대학원), SW특성화대학원, 교통·ITS대학원, 사이버 MBA(경영학석사), 파란사다리(취약계층 국제화 프로그램), 파란학기제를 국내 대학 최초로 시행·설립하였다.
2. 대학 연혁
아주대학교는 1962년 3월 추진계획으로 시작된 18개 조항 중, 제4항 '한불문화협정계획을 시작으로 1965년 12월 28일에 외무부 제1 회의실에서 이동원 외무부 장관과 샹바르 주한 프랑스 대사가 한불 문화기술협정을 체결하면서[10] 대학 설립의 첫발을 떼게 되었다.
1968년 7월 15일에 이 조약은 공포되었고[11] 우리나라와 프랑스는 이 협정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한, 불 혼성위원회를 만들었다. 첫 번째 한, 불 혼성위원회가 개최되기 전 1969년 1월에, 박희범 문교부 차관이 프랑스와 영국을 방문하고 양국 정부 당국에 각각 기술초급대학 설립에 협력해줄 것을 제의했는데, 이것이 오늘의 아주대학교를 탄생하게 한 최초의 제의였다. 1969년 4월 19일에, 박충훈 부총리가 프랑스 파리에서 3일 동안 열린 대 한국경제협의체 회의에 참석하여, 대 프랑스회담에서 드브레 외무상과 베탕쿠트 공업 상을 만나 한국과 프랑스 간 통상, 기술 및 문화 협력관계를 증진하고, 프랑스의 차관을 7천만 달러에서 2억 달러로 증액함과 함께 '프랑스 원조계획에 의한, 한·불 기술계 대학설립 확약'을 받아냈다.
1969년 6월 16일과 17일 프랑스 파리에 열린 1차 한, 불 혼성위원회’에서 양국 간 교수교환 및 강사파견, 문화기관 설치, 상호학위 인정, 기술 및 행정요원 교환, 문화 및 기술에 필요한 자료교환, 양국의 언어 보급, 장학금제도 설치, 과학정보의 교환 등에 관한 구체적인 안건들을 논의했다. 이때 한, 불 기술초급대학 설치문제 또한 논의되었는데, 언어교육, 장학, 문화 및 예술교육, 문화 및 기술협력, 기타 문화 및 기술교류 등 다섯 가지가 주요 의제였으며, 특히 전자학과, 정밀기계학과, 발효화학과, 공업경영학과 등 4개 학과 560명을 선발한다는 사항을 결정했다.
프랑스의 지원으로 대학 설립이 기정사실로 되면서 이때부터 대한민국 정부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새롭게 설립되는 대학을 국공립으로 세울 것인지 사립으로 세울 것인지부터 정해야 했다. 국가 간 협정에 따라 설립되는 대학이니만큼 국립대학으로 하여 한국 정부가 단독으로 설립 운영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학교 운영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갈등을 직접적으로 한국과 프랑스 정부 수준의 문제로 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립으로 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이런 정부의 의견에 프랑스 대표단은 난색을 보였다. 프랑스 정부가 한국의 한 개인(사립재단)을 돕는 일이 되어 자칫 프랑스 정부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 된다는 이유로 쉽게 동의하지 못했다. 이에 정부는 한국의 여러 사학도 외국의 원조를 받고 있다는 설명으로 간신히 설득했다.
이렇게 해서 아주대학교의 첫 번째 학교법인은 교하학원(交河學園)으로 정해졌다. 정부는 1969년, 부천산업주식회사의 사장인 김의준 씨를 이사장으로 하는 학교법인 교하학원의 설립을 인가했다. 이때 장차 세워질 학교의 명칭을 서양(프랑스)과 교류하여 설립한 대학이라는 의미로 '서교공과대학(西交工科大學)'으로 정하기도 했다.
다음 일은 학교 교지를 확보하는 일이었는데 여기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시 정부는 수도권의 인구집중을 우려해 수도권 내에 더 이상의 대학 신설을 억제했고, 그래서 울산이나 여수 등 대학이 없는 지방의 중소도시에 설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번에도 프랑스 대표단의 반대가 있었다. 대표단의 한 사람이었던 민선식 박사(낭뜨대 물리학)는 질적으로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서울에 위치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수많은 논의 끝에 정부는 서울 근교로 위치를 합의하고 한국전쟁 당시 프랑스군 전적기념비가 위치한 수원으로 프랑스와의 국가 관계를 반영해 교지를 확정했다.
수원에 교지를 마련한 이유는 서울과의 접근성을 첫 번째 조건으로 삼은 프랑스 정부의 의중에 가장 부합한 서울과 가장 근접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1968년 1월 12일 경부고속도로 서울, 대전 구간이 확정되고, 그 후 제1공구는 서울과 수원 구간으로 정해진 뒤, 1968년 12월 21일 이 구간이 개통되어 수원과 서울의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상승하였다. 덕분에 서울과의 접근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던 대표단에 큰 점수를 받았다. 1973년 1월 10일 자 경향신문 학생모집 광고에도 서울에서 40분 거리를 명시한 것으로 보아 서울과의 접근성 문제는 그 당시에도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12]
두 번째 이유는 수원이 6·25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최초 숙영지였다는 것이다. 1951년 11월 29일 부산을 거쳐 派韓(파한)된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숙영지를 건설한 곳이 수원이었고, 현재 지지대 고개 근처에 프랑스군 참전비가 세워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서울 접근성, 프랑스와 연관된 상징성 모두를 충족한 수원이 대학 부지로 확정되었다. 기술 초급대학의 설립 인가를 받은 김의준 교하학원 이사장에겐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가 있었다. 기존 초급대학들이 도태되어 가는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새롭게 초급대학을 설립해 과연 건실한 대학 운영을 기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4년제 대학으로의 전환을 꾸준히 제안했지만, 번번이 프랑스 정부로부터 거절당했다. 그 당시 프랑스는 우리나라의 공업초급대학에 해당하는 IUT(Institut Universitaire de Technologie) 제도를 만들어(1967년) 생 나제르 시, 낭뜨 시, 낭씨 시 등 3개 도시에 이 IUT를 설치하고 이 새로운 학제의 정착을 위해 큰 노력을 쏟던 중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설립하는 한, 불 기술초급대학도 IUT를 모델로 했다. 프랑스의 거절로 한국 정부도 교하학원의 4년제 대학 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김의준 이사장이 교하학원을 이끌며 아주공업초급대학 설립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끝내 프랑스 정부의 동의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집념은 훗날 2년제 대학인 아주공업초급대학이 4년제 아주공과대학으로 전환되는 데 큰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13]
1973년 3월 개교일을 채 1년도 남겨 놓지 않은 즈음, 교하학원의 대학 설립이 난관에 부딪혔다. 교하학원의 모기업인 부천산업주식회사의 경영부실과 김의준 이사장의 신병, 2년제 초급대학에 대한 불만과 불안 등이 겹쳐 더 이상 대학설립 추진이 어려워진 것이다. 이에 1972년 3월 한불기술초급대학의 설립책임 포기각서를 문교부에 전달하고 김의준 이사장은 완전히 물러났다. 문교부는 곧 교하학원을 인수할 새로운 적임자를 찾아 나섰고, 유신고속관광주식회사의 박창원 사장과 교섭을 벌였다.[14] 박창원 사장도 초급대학의 성공 가능성에 회의적이라 4년제 대학으로의 전환이나 4년제 대학의 병설 인가를 문교부에 요청했다. 이 요청은 즉각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박창원 사장은 추후 전폭적인 협조 노력을 다하겠다는 문교부의 약속을 믿고 교하학원 인수를 결정했다. 그는 1972년 7월 20일에 교하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새로운 이사회는 학교법인의 명칭을 교하학원에서 유신고속관광회사의 이름을 따서 유신학원(裕信學園)으로 변경하고 서교공과대학도 아주대학(亞州大學)으로 변경하였다.[15]
캠퍼스 건설과 더불어 학사계획에 대한 준비도 함께 진행했다. 무엇보다 학장 인선에 큰 정성을 들였다. 불어 구사 능력을 포함해 프랑스에 정통한 사람으로, 기술계 대학교육을 빠른 시일 안에 일류대학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물을 찾아야 했다. 여러 정보를 토대로 천거 받은 김현남 박사가 초대 학장으로 결정되었다. 김현남 박사는 프랑스 낭뜨대학에서 이학박사를 취득한 사람이었다.
개교일이 6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아직 설계도도 완성되지 않았지만, 8월 24일에 임야와 전답으로 된 부지의 정지공사가 착공되었다. 프랑스의 랑디 대사는 불과 1주일 전에 찾았을 땐 첩첩산중이었던 곳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엄청나게 파헤쳐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한국 사람이 지닌 무서운 추진력에 새삼 감탄하였다는 후문이다. 9월 20일에는 교사 본관이 착공되었다. 1973년 3월 15일 오전 11시에 본관 4층 건물, 학생회관, 동관 1층, 서관 1-3층, 실험동 1층, 프랑스인 숙소 등 완공된 건물과 건설 중인 건물이 혼재한 상태에서 학장 취임식과 겸해 입학식이 조촐히 거행되었다. 이때 김현남 학장은 입학 식사에서 한, 불 우호 협력의 정신 아래 프랑스의 솔본느대학과 같은 세계적 수준의 대학으로 발전해나갈 것을 천명했다.[16]
대학개교 1주년인 1974년은 아주대학이 초급대학에서 4년제 공과대학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의미 깊은 해였다. 1972년 9월에 있었던 한, 불 간 추가 교섭 자리에서 우리 정부와 유신학원은 학교 설립 후에도 대학이 건실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프랑스 정부에 이른 시일 내에 대학의 4년제 전환이 필요하단 점을 지속해서 설득했다. 프랑스 측은 현 협정대로 초급대학설립을 추진하되 향후 4년제 대학으로의 변경 논의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대학이 추후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할 전망이 밝아졌다. 이후 1973년 10월에 박창원 이사장과 김현남 학장이 프랑스를 전격 방문하여 한국 경제발전에 필요한 엔지니어를 양성하기 위해 수업 연한을 4년으로 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프랑스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프랑스 정부는 한국의 사회경제적 여건과 공과대학의 편성구조 등을 고려하여, 기존의 학과와 수는 기존 협정대로 유지하되 수업 연한을 4년으로 늘리고 1학년 모집 정원을 최대 480명으로 증원한다는 데 동의했다. 마침내 1973년 11월 대한민국 정부 대표와 프랑스 정부 대표들이 서울에서 한불회담을 하고, 4년제로의 전환을 추구한다는 합의각서를 교환했다. 이에 문교부는 1973년 12월 22일 아주공업초급대학의 아주공과대학으로의 개편을 인가하여 4년제 대학으로의 승격을 허가했다. 설립 9개월 만에 4년제 아주공과대학으로 승격한 것이다. 아주공과대학의 개교식은 1974년 4월 26일 오전 11시에 가졌으며 이때 김종필 국무총리와 민관식 문교부 장관, 피에르 랑디 주한 프랑스 대사가 참석했다. 아주공과대학 초대 학장은 초급대학 학장이던 김현남 박사가 맡았다. 그와 함께 13명의 교수가 충원됐다.
당시 한, 불 간의 협력을 상징하는 뜻에서 대학 명칭의 외국어 표기를 불어(Institut Superieur de Technologie Franco-Coreen Ajou)[17] 로 정했으며, 이때 발효화학과를 화학공학과로, 정밀기계과는 기계공학과로 명칭을 변경했다. 여기에 전자공학과 공업경영학을 포함한 4개 학과 10개 전공에 정원은 480명이었다. 1974년 5월 1일에는 아주대학보가 월간으로 첫 발행 되었고, 총학생회가 구성되었고, 학군단도 창설되었다. 프랑스 단기연수가 실시되었고, 방학 중에 학생 봉사활동을 진행하는 등 대학의 기본 틀에 해당하는 조직과 활동들이 속속 이루어져 갔다. [18]
"개교 초기 재직 프랑스 교원 아주대 방문"
아주공과대학은 1974년 7월 30일 자로 문교부에 실험대학을 신청했는데, 이를 통해 학교의 인재양성 목표와 교육 개선안을 제시했다. 이때 아주공과대학이 밝힌 인재양성 목표는 '국가관이 확립된 엔지니어, 창의력과 응용력을 갖춘 엔지니어, 사회에 기여하고 봉사하는 엔지니어의 양성'이었다. 또 그 목표를 위해 제시된 교육 개선안은 계열별 모집과 졸업학점 감소, 부전공제 도입, 조기졸업제도 도입, 현장 학습 강화 등이었다. 실험대학으로서 학생 교육을 하고 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해 대폭적인 교수충원이 이뤄졌는데, 1975년에 10명, 1976년에 16명의 교수가 확충되었다. 한편 한불 혼성위원회는 1971년의 제1차 회의 후 1979년까지 2년마다 총 5차례 걸쳐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프랑스 정부의 지원은 지속해서 이루어졌다.[19]
아주공과대학은 1970년대 후반 '외국어에 능한 엔지니어와 매니저를 양성하는 아시아의 MIT'라는 대학 발전 비전을 세웠다. 이를 위해 기존 공학 계열의 학과에다 경영학과, 불어학과, 영어학과 등 인문, 사회계열의 학과를 신설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특별장학생제도’를 도입해 우수 학생을 유치하고 이들을 엄격하게 교육하기로 유명했다. 그 결과 당시 학생들이 졸업하던 때, 한국과학기술원에 입학하는 학생 수가 서울대학교에 이어 전국 2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1978년에는 한, 불 문화협정의 일환으로 9명의 장학생을 프랑스로 유학 보내기도 했다.
1977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할 무렵, 유신학원의 지속적인 후원이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유신고속의 이윤만으로 대학 재정을 뒷받침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박창원 이사장의 사재와 일부 부동산을 정리하여 초기 투자금을 마련한 유신학원으로서는 지속적인 투자가 어려웠다. 아주공과대학은 아직 개교 초기 단계라 교수 초빙이나 시설 투자 등에 많은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급기야 대학의 재정 상황이 계속 나빠지자 대한민국 정부는 프랑스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아주공과대학의 운영을 정상화할 새로운 인수자를 물색할 수밖에 없었다.[20] 그 후 1년 뒤 아주대학은 대우학원에 넘어가게 된다.
김우중 당시 대우실업㈜ 사장은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이라는 점에서 육영사업에 뜻을 두고 있었고,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던 대우 또한 국가, 사회적 요청에 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확신으로 흔쾌히 수락하였다. 이렇게 해서 1977년 3월 21일에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당시 대우실업 사장)이 사재 53억 원을 출연하여 학교법인 대우학원을 설립하고 아주공과대학을 인수했다.[21]
77년 4월 20일 이한빈 학장이 취임하면서 아주공대가 대우학원 설립을 계기로 국내 산학협동의 표본이 되고 한국의 국제진출을 위한 교두보가 되자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아주인상(亞洲人象)'을 제시하고, 프랑스 정부와의 유대를 긴밀히 유지할 것도 강조했다. 그가 제시한 아주인상은 '창조하는 인간상, 개척하는 인간상, 봉사하는 인간상'인데 이를 바탕으로 대학의 발전계획이 수립되고 이념이 확정되었다. 이어 개교 7년 만인 1980년 10월에 공과대학, 경영대학, 인문사회대학과 대학원을 가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고 교명을 아주대학교로 바꿨다. [22]
1981년 3월 2일 종합대학교로 첫발을 떼며 지응업 학장서리가 임명된 뒤, 1981년 8월 24일 이용희 초대 총장이 선임되었다. 이용희 총장은 종합대학교의 걸맞은 체제 정비와 경영개선을 위한 노력을 추진했다. 우선 종합대학으로서의 원활한 경영을 위해 학교 규모를 확대하여 문교부에 자연과학대학과 8개 학과 증, 신설을 요청했다. 또한 체제 정비의 일환으로 교수 직위의 정상화 조치도 이뤄졌다. 1981년에 대우학원의 지원으로 대학 본관(현재의 도서관), 인문사회관(현재의 성호관), 화공실험동이 기공되어 1982년에 인문사회관과 화학실험동이 완공되었다.
문제는 이용희 총장은 아주대학교와 프랑스 정부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대우학원 설립 이후 프랑스 정부의 지원이 점차 줄었고,[23] 교육방침도 엇갈리면서 갈등이 불거지게 했다. 1982년 영어교육 강화를 위해 프랑스어 필수 이수 학기를 4 학기제에서 2학기로 줄이는 정책을 폈고,[24] 기존 교수충원계획에 따라 프랑스에 파견되어 학위 과정을 이수하던 교수요원들을 선별적으로 채용하겠다고 밝히며, 프랑스인 교수들과 프랑스 대사관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이용희 총장은 물러났고, 프랑스와의 관계도 소원해져 프랑스인 교수들도 1982년 12월 모두 철수했다.
이후 1982년 9월 28일 나웅배 재무부 장관을 2대 총장으로 선임하며 지금과 비슷한 모습의 단과대학을 설립해 대학의 틀을 마련하고 연구 여건과 시설 확충에 큰 발전이 생겼다. 특히 대학원의 경우 1984년에 3개 학과에 박사과정이 설치됨으로써 박사학위를 수여 할 수 있는 대학원으로 대학이 발전되었다. 석사과정도 10개 과정이 추가되었다. 1983년 9월 이때 세워진 건물이 현재의 에너지센터인 전자계산소다. 나웅배 총장은 프랑스 정부와의 관계 복원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한불관계의 재정립을 모색하기 위해 1983년 2월 프랑스를 방문하여 프랑스의 정부 관계자들과 면담하고 낭트 대학의 교육 기관들을 찾아가 교류 협력 문제를 협의했다. 그 결과 1983년 3월 대학 부설기관으로 한불 기술협력센터가 설립되었다.
나웅배 총장이 정계 복귀를 위해 물러난 후 1985년 2월 26일 김효규 박사가 제3대 총장으로 선임됐다. 김효규 박사의 최대 치적은 의과대학 설립과 병원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25] 정부의 설립 인가를 받기 매우 어렵고, 막대한 설립자금도 필요한 의과대학 설립을 김효규 총장은 해냈다. 아주대학교 의과대학의 교수 상당수가 연세대 의대 출신인 이유. 하지만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에 집중 투자되면서 상대적으로 다른 단과대학의 투자에는 소홀하게 되어 불만이 고조되었고, 덩달아 1991년 대학입학정원 조정을 위한 대학평가에서까지 좋지 못한 결과를 낳자 김효규 총장은 임기가 끝나는 시점에 물러나고 김덕중 교수를 6대 총장으로 선임했다.
아주대는 1990년대 당시 현대그룹과 삼성그룹에 이어 재계 서열 3위인 대우그룹의 강력한 지원으로 유명 교수진들을 대거 포진시켰고, 거기다 당시 아주대학교 총장은 그 김우중 회장의 형이었던, 前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김덕중(김대중 정부 때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이었다. 대학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재원과 인력을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위한 EMBI[26] 정책을 특성화 정책으로 밀었는데 공학에선 특히나 정보통신학이 집중적으로 육성되어 정보통신학에 관한 기틀이 이때 마련되었다.[27] 1996년에는 국내 최초로 교수업적 평가제를 시행했고 전국 최초로 학생 서비스센터를 설립했다. 그리고 학과제를 지양하고 국내 최초로 '''학부제를 도입''', 다양한 학문을 수강할 수 있는 복수전공제를 실시하는 등 내부적 교육개혁을 단행하였으며, 특성화 학부를 신설하여 우수한 신입생들을 데리고 왔다. 무엇보다 포항제철과 포항공대가 하던 방법을 도입해 1997년부터 '''아주대학교 졸업생 중 일정 비율 이상은 대우에서 장학금 주고 무조건 특채'''라는 초특급 떡밥을 EBS 교재에 대대적으로 광고했다.[28] 경영대학의 경우는 '아주대 경영 나오면 100% 대우 취직이라더라' 파워에 힘입어 대우가 망하기 전까지 아주 잘 나가서 서울 강남에 경영대 건물만 따로 지으려는 계획이 있었고 실제로 부지도 있었다. 이 시절 아주대의 입결은 서울 최상위권 대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으며, 지금도 입시 커뮤니티에서 일명 '대우 학번'으로 회자하는 아주대 최고의 리즈시절.
1999년 대우그룹 해제와 함께 잦은 대학 총장의 교체로[29] 리더십이 부재하면서, 아주대학교는 다소 정체기에 있게 되었다. 하지만 기존 가지고 있었던 연구 역량이 강했고 탄탄했던 대학재정 때문에[30] 다시 빠른 속도로 상승세로 전환했다. 지속적인 건물건축 투자[31] 가 이루어졌고, 2006년 간호대학 설립도 이루어냈다. 2008년엔 로스쿨을, 2010년 3월엔 약학대학 설립 인가를 받았고, 2012년엔 스프링어(Springer)를 통해 아시아 최초로 세계 유일 유전자 백과사전을 발간했다. 2016년엔 경기남부권역 외상센터를 개소했으며 2019년에는 서울대병원을 제치고 권역별 호스피스 센터 설립 인가를 받았다.
2015년엔 짧은 임기였지만 굵은 행적을 남겼던 김동연 총장이 선임되었다. 잦은 총장의 교체와 교수들 사이의 반목으로 총장의 권한이 약해지자 이사회는 총장 적임자를 대학 내부에서가 아니라 대학 외부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적합한 인재를 찾던 중 김동연 총장을 데려오게 된 것이다. 김동연 총장은 학교 내 행사에만 힘쓰던 다른 여러 총장과는 달리 파란사다리, Ajou GreatTurning, After You, Brown Bag Meeting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대학 내 외부를 활발하게 오가는 파격적인 활동을 진행했고 이러한 활동은 대학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많은 호응을 받았다. 대학이 본래 가져야 할 의미와 위치를 되새기게끔 했던 총장의 활동에 감명을 받은 사람도 많았다. [32] 후엔 김동연 총장이 취약 계층 학생들을 위해 몰래 자신의 연봉을 모두 대학에 기부했었다는 게 뒤늦게 밝혀지며 김동연 총장의 퇴임식 날 아주대학교 총동문회는 총장을 명예 동문으로 위촉하기도 했다. [33]
아주대학교 40주년지 중 연혁
3. 학교법인
현재 아주대학교의 재단은 대우학원이다. 원래 한국과 프랑스 국가 간 협력으로 설립한 대학이기 때문에 국립으로 세우려고 했으나 최종적으로 사립으로 결정되면서 첫 학교법인을 김의준 사장의 교하학원(交河學園)으로 정했다. 그러나 교하학원이 대학설립 전 재정위기로 물러나자 정부가 나서서 새로운 법인을 찾았는데 그것이 박창원 서장의 유신학원(裕信學園)이다. 이후 1977년 유신학원 또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프랑스 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할 수밖엔 없었던 정부가 또 대학인수자를 찾게 되는데, 이때 사회환원사업의 일환으로 대학설립을 물색 중인 김우중 회장의 대우학원(大宇學園)으로 대학이 넘어가게 되었다. 학교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고 대우학원은 산하기관이 아닌 다른 기업으로 설립되었다.
재단 건전성과 여러 지표가 국내 사립 종합대학교에서는 전국 최고 수준이다. 대학알리미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학생 1인당 교육비, 학교운영경비 부담률, 교육비 환원율에서 별 5개(최대)를 획득하였고 장학금 지급률, 등록금 의존율, 법인전입금 비율, 수익용 기본재산 확보율에서 별 4개, 나머지에서 별 3개를 획득하였다.
대우학원은 4년제 종합대학 '''아주대학교'''와 2년제 전문대학 아주자동차대학, 그리고 '''아주대학교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4. 특징
4.1. 학풍
아주대학교는 실시구시 응용학문 강세이다. 특화된 응용학문은 대학설립 초기부터 산학협력 교육을 대학의 최우선 과제로 주어졌던 대학의 목적성에 기인한 바가 크다. 현재 학교 이념인 '''실사구시''', '''세계일가''', '''인간존중'''은 이러한 산학협력 교육의 연장 선상에서 발전된 이념들이다. 그 때문에 아주대학의 전체적 학문의 지향점은 응용학문 성격이 강한 편이다. 이는 학교 역량이 공대와 경영대가 특히 강세인 면에서도 드러나는 편이다.
아주대학교/성과 문서에서 보듯 각종 대기업, 외국계 기업, 공기업 등 진로에 있어 좋은 성과를 내는 편이다. 취업에 관한 지원이 아주 빵빵한 편이다. 졸업예정자 이력의 DB와 중점관리대상 2천개 기업의 DB 구축 등 취업 관련 자료의 체계적인 활용, 진로 교양과목 ‘자기 계발과 선택, 진로설정 워크북’ 개설과 전문인양성 프로그램 등 시행, 학년별 전공별로 주 1회 이상 취업 정보 이메일 송부, 다양한 기업인과 만남 개최, 취업지원관제 실시, 하계취업캠프 개최, 직무 아카데미 개최 등 1학년부터 학생들이 진로에 대한 준비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고 있고 사회진출센터 주도로 맞춤형 지도를 펼친다. 따라서 취업률, 취업의 질과 진학률이 높다.
채용설명회에서는 메이저 기업들의 선호도가 강해서 매 반기 40회 이상의 리쿠르팅/인턴쉽/채용설명회가 열린다. 전국에서 손꼽히는 수준. 실용적인 인문계열, 이공계열, 의학계열이 한곳에 모여있는 단일 캠퍼스로 기업들이 아주대학교를 찾아온다. 리쿠르팅/인턴쉽/채용설명회 횟수는 경인권에서 독보적이다.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학교의 이념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며 관련 인턴쉽, 경진대회, 공모전도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경영대의 경우 학교의 지원이 전폭적인 편이며, 타학교들과 달리 상경계(금융공학, 이비즈니스학, 경영학, 경제학, 국제통상학)를 포함한 타전공 복수전공이 자유롭다. 명품 공대가 강한 학교 특성상 얻는 이점이 많은데, 아주대에서 리쿠르팅/인턴쉽/채용설명회를 찾아오는 수많은 기업이 당연히 인문계열 채용행사를 함께 진행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아주대학교 인문계열 학생들의 경우 타학교보다 리쿠르팅이나 인턴쉽, 여러 채용행사를 더 많이 접한다는 점에서 유리한 점이 있다.
제15대 김동연 총장 취임 이후로는 청년 창업, 특히 인문계열 쪽에는 해외진출에 대한 학교 측의 지원이 대폭 강화되어서, 창업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늘고 있다. 실제로 학교 측에서도 해외 인턴쉽이나 창업에 대한 지원 혹은 강연 등을 자주 열고, 관련 지원금도 대폭 확대하여서 학생들의 관심도도 상당히 높아졌다. (특히 경영대학 15학번 이후의 신입생의 경우는 의무적으로 한 번 이상 해외 탐방을 한다.) 교환학생도 토익 700점만 넘으면 사실상 거의 프리패스로 통과되며, 3번까지 허용될 정도. 이외에 해외에 다녀올 기회가 무척이나 다양해졌다.
프랑스의 영향으로 유럽과의 교류가 중심이다. 높은 비율의 유럽국 자매대학, 처음 프랑스어권 대학기구(AUF) 가입, 유럽 경영인증, 불어권협력센터 운영 등.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국제화 프로그램이 국내 수준급에 이르게 되었다. 경영학과 학생들이 누릴 수 있는 국제화 프로그램은 10개이다.[34]
국내에선 유일한 올인 원 단일 캠퍼스로 학문융합의 시너지를 낸다. 교육에선 인문계는 이공계열, 이공계는 인문계열 교양을 이수하게 하고 인문학 캠프를 여는 등 여러 소양을 키워주려 노력한다. 연구에선 학제 간으로 성과를 낸다.
정부의 중요한 사업들은 대다수 선정되고 있다. 정부, 지차체 등의 공통적인 지향점에 따라 실사구시 응용학문을 추구하는 대학교로서 받아 간다. 5대 정부재정지원사업으로 불리던 대학특성화(CK), 학부교육선도대학(ACE), 고교교육 정상화 기여 대학 지원, 두뇌한국(BK)21+, 산학협력선도대학(LINC)도 140억 규모로 전부 선정됐다. 박형주 총장 취임 이후로는 미래 산업 수요에 대한 대응으로 스마트 제조 산업 분야를 위한 역량을 쏟고 있다. 아주대학교는 4단계 bk21에서 전국단위 4개 사업단이 선정되었는데, 모두 신산업 분야(인공지능, 에너지신산업/신재생에너지, 차세대통신, 바이오헬스/혁신신약)라는 점에서 한국의 미래산업을 적극적으로 이끌 것으로 보인다.
4.2. 학교 위치와 규모
- 학교의 위치
학교가 수원에 있다는 점은 장점이다. 전국에서 가장 큰 인구상승세, 가장 빠른 기업성장세를 보이는 경기도[35] 의 중심이 수원이기 때문이다. 경기도 소재 기업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으며 대부분의 대기업, 국가기관, 외국계 기업에서 '''경인권 전체를 대상으로 리쿠르팅이나 인턴십, 취업설명회를 찾아올때 아주대를 기준으로 찾아오고 학교의 상징성을 고려하여 규모를 수용하기 위해 문과 이과 단일캠퍼스인 아주대학교의 체육관에서 열린다.'''
일부 공기업, 대기업, 공무원 취업에서 '''지역 할당''' 혜택이 있다.[36] 상경계의 최고봉인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 '''지역인재채용 혜택'''이 있다. 또한 '''국가직 지역인재 7급 공무원'''이 있다. 총장추천을 받으면 PSAT점수와 면접만으로 국가직에 임용될 수 있는데 지역별로 선발하는 것이다. 경인권에서 최상위인 아주대학교 학생의 경우 평균 선발 인원 행정/기술 및 남/녀 안배를 원칙으로 8명을 추천받아 서울권 소재 대학보다 훨씬 수월하게 합격할 수 있다. 다른 지역 소재 대학에 다닐 경우 PSAT 점수를 평균 80점 정도를 맞아야 합격하는데 이는 행정고시나 국립외교원 선발시험 1차 합격점수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이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아주대가 위치한 경기도 소재 대학에서 응시할 경우 이보다 합격점수가 보통 평균 10점 정도 낮게 형성된다. 졸업시에 추천을 받으며, 한 번 떨어지면 다시 총장추천을 받기도 쉽지 않으므로 사실 상 기회가 한 번뿐이라는 점에서 더욱 유리하다.
- 학교의 규모
매년 중앙일보 대학평가 학부생 1만명 이하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고 이것으로 인해 정부의 교육여건 개선과 성과창출 경쟁력을 기르기 위한 교육역량강화사업에서 선정된 총 86개 대학에서 정원의 1만명 이하 7개 대학 중 연간 25억 규모로 가장 많은 지원금을 받고 있다. 지원금은 학부교육 기초역량 강화를 위해 교원 및 학생 역량 제고, 교육과정개편, 교육 인프라 확충 등 대학별로 창의적 사업을 위해 쓰인다.
4.3. 대학 문화
학교 전반에 걸쳐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 사실 대학 초기땐 그렇지 않았다. 영상에서 보듯이 대학 규모가 작아 소수정예를 표방했기 때문에 사제간의 우애가 매우 끈끈했다. 이러한 교풍이 만들어졌던 이유는 초기 아주대학교엔 똑똑하지만 돈이 없는 학생들이 주로 진학했기 때문인데, 그들 사이엔 서러움을 서로 달래줄 수 있었던 가난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 깊은 공감대와 끈끈한 유대감 형성이 가능했기 때문이다.[40] 물론 사제간의 우애가 끈끈했던 과거에도 똥군기와 같은 문제는 없었으며 특정 조직 또는 행사(OT, 개총 등) 참여를 강요하거나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분위기도 없었다.
정치외교학부를 중심으로 한 사회과학대학과 사학과를 중심으로 한 인문대학에는 운동권 성향의 소학회와 동아리들이 있어 사회 문제나 현상에 관해 활발한 논의를 이어나가고 있다.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 몇몇 좌파 성향의 모임에서 대자보를 붙이곤 하는데, 학교 전체적인 분위기는 무관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총학생회 차원에서 집회에 참여하거나 성명을 내는 경우는 드물다. 학교이름을 내걸지 않아 모르는 이가 많았겠지만 반값등록금 시위 때 교내 진보 성향 모임이 시위에 참여했었다.
2010년대 초중반까지만해도 매 총학생회장 선거마다 운동권 후보가 나올 정도였으나 현재는 많이 약해지고 거리가 멀어진 상태이다.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아주대학교 총학생회의 권력구도는 경영대학이 주축이 되고 있어서 학교차원에서 운동권 성향을 띨 가능성은 지금은 사실상 없어 보인다. 적어도 2010년대 이후로 총학생회의 라인구도는 경영대학에서 세습되었고, 실제로도 총학생회장이든 부학생회장이든 매년 경영대 출신 후보가 당선되어왔기 때문이다. 이들의 업무 수행 능력은 피지배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과대와 다르게 지배의 리더 입장에서 공부를 하는 경향이 크다. 다만 2016년 학생회장 선거때는 의외로 사과대와 경영대가 연합해 후보로 나섰으나, 결국 공대출신 후보가 당선되면서 수년만에 경영대 천하가 종지부를 찍었다.
물론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분명히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일례로,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와 함께 학교차원의 입장은 사법시험 폐지였으며, 사법시험 존치논란이 나타나자 타 학교와 마찬가지로 아주대학교 로스쿨 재학생 일괄 자퇴서 제출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국정교과서 논란때는 경인지역 9개 대학교수 27명, "국정교과서 집필거부" 등 교수진들이 국정교과서를 반대하고 나섰고,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도 아주대학교 총학생회 시국선언과 아주대학교 교수회 시국선언,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시국선언이 모두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 학생들이 프라임 사업을 반대하는 아주대행진 집회를 하기도 했다.
- 대동제
도서관 옆 주차장과 신학생회관 앞 광장이 주점으로 가득차고 성호관 앞 잔디밭과 정문에서 올라오는 길은 여러 푸드트럭과 악세사리 판매, 간식 등 축제부스가 들어서게된다. 재학생이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상당히 많은 지역민들이 찾아오고 바로 옆에 있는 유신고, 창현고 학생들이나 학교 뒤 광교신도시 주민들도 대거 놀러오는 편.
저녁마다 있는 공연은 노천극장에서 열리는데, '''가수 싸이가 무려 7번이나 찾아왔을 정도'''로 자주온다. 본인이 가장 공연하기 좋아하는 대학 중 하나라나. 다른 대학 축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아주대학교 축제도 상당히 유쾌하고 재밌는 구경거리가 많은 편.
- 벚꽃축제
- 동아리 박람회
- 길거리 축제
축제 기간에 평소 여기서 버스를 타고 출근 및 통학을 하던 사람들은 정말로 미친다. 미치는 정도를 넘어서 심각한 스트레스가 유발된다. 삼거리의 교통량을 아는 저학번이라면 이러한 축제가 과연 정말로 실시되었는지 의아해 할 것이다. 그 길을 지나는 14개의 버스 노선을 전부 우회시키기 때문. 직행좌석버스는 물론이고 분당-수지를 거쳐 수원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들이 죄다 거치는 길이라서 그렇다.
- International Day
- 수원 드론 페스티벌
드론 경진대회·체험·시연·공연·전시 등의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텔레토비 동산’에서는 ‘숲속 미니드론 FPV 레이싱 대회’가 열린다. 또한 드론 안전·조종 교육이 진행되고, 자유 비행도 할 수 있다. 실내체육관에서는 국내 다양한 드론 관련기업들이 개발한 신기술과 제품을 만나볼 수 있는 기업 비즈니스관이 운영된다.
4.4. 엄격한 학사관리
- 학점 따기의 어려움
타학교와 비교해보아도,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1년에는 학점을 짜게 주는 대학으로 중앙대, 아주대, 서강대 순으로 2위를 차지했다. 중앙.아주.서강대 '학점짠돌이'일반적으로 학점을 짜게 주는 대학으로 서강대를 떠올리는데, 실제 통계를 보면 아주대가 더 학점기준이 엄격한 것. 물론 기업에서도 이런 것을 인식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된다.대학생 90%가 B학점 이상...'학점인플레' 그러나 1학년은 학점을 뿌린다. 30%까지 A, 70%까지 B를 준다.
학점과 관련해서는 관리가 매우 철저해서 F를 성적표에서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재수강 뿐이다. 특히, 수강한 과목이 교과과정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학점포기가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주대 졸업생들은 다른 학교 졸업생과 비교해 졸업학점이 낮은 편이다. 다행히 이러한 엄격한 학사관리체계는 기업들도 인지하고 있으며, 타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학점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주대생의 평점이 4.0이 넘는다면...정말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이다.[44] '''아주대에서는 학점 3.5만 넘어도 선방했다고 하는데, 기숙사에는 누계평점 4.0의 괴수들이 다수 거주한다.
이에 대해선 옆에 있는 고등학교의 학생들이랑 비교해도 별 다를게 없다는 아주고라는 비아냥도 있지만, 아주대 내부에서는 높은 학구열 자체는 자랑스러워 하고 있는 듯 하다. 물론, 학점을 받게 되는 시기에 이르렀을때 충격과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지만. A나 B+를 기대했지만 "내가 C+이라니!!! D라니!!!" 라며 절규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건설시스템공학과에는 무박 6일 시험도 존재한다. KBS 스펀지에도 방송되었다.
- 철저한 강의 평가
4.5. 국내 최초의 전자화 서비스
'''국내 최초의 전자화 학생지원 센터를 도입한 대학이라는 타이틀과 동시에 도서관의 100% 전자화를 이룬 첫번째 학교이기도 하다'''. 이 사실이 말해주듯 정보통신과 캠퍼스 환경의 합작에 있어 선도적인 역할을 해 왔으며, 당시 재단이던 대우그룹의 강력한 선진화 의지에 따라 전폭적인 자금, 설비지원이 따랐기에 가능했다. 전자화 서비스의 성공은 타 학교들의 캠퍼스 전자화 지능화 모델이 되어 많은 견학이 이루어졌으며,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성공사례가 되었다. 지금은 거의 대부분의 대학들이 전자화, 자동화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놀랄만한 투자와 시도였다.
실제로 개발하신 현 아주대학교 정보통신대학 소속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당시에는 학생부 자체는 전산화되어있긴 했지만 졸업사정이라는 것 자체가 수기로 되어있었기에 이를 전산화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전국 최초의 온라인 졸업예비사정 시스템이었고, 여기서 얻은 노하우를 통해 도서관 전산화 작업을 실행했다고 한다.
5. 학사제도
6. 성과 및 대학평가
7. 부속기관
8. 대학 부설 연구소
9. 학부
10. 대학원
11. 캠퍼스 및 시설
아주대학교의 건물은 대우학원이 들어온 이후 '''서울건축이 독점해 설계'''하고 있고, 건설 쪽은 초기 대우건설이 하다가 2000년대 이후 대우조선해양건설이 도맡았다. 지금은 대우조선해양건설도 대우와 아무 상관 없는 기업에 넘어가면서 다양한 건설사에 건물 건축을 의뢰 중이다. 그래도 건물 설계는 '''서울건축''' [46]
'''공원 같은 분위기''': 산학원이나 팔달관, 학군단, 기숙사 정도를 빼면 언덕보다 대체로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경사가 가파른 타학교에 비해서 지리적으로 매우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전반적인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도시적 이미지보다는 한적한 파란색 공원에 가까운 느낌이다. 중앙도서관에서 성호관 사이에 이루어진 녹지에서는 간혹 버스킹이 이루어지기도 하며 특히 봄에 벚꽃이 만개했을 때의 도서관 앞 풍경은 그야말로 일품.
'''계열별 위치''': 학교의 건물들 위치가 이공계/인문계/의학계열로 구역이 거의 나뉘는 편이라 캠퍼스 크기보다 동선이 짧은 편. 전공 수업만 듣게되는 학기의 공대생이면 한 학기 내내 여자 구경하기가 힘들 수도 있다. 기숙사들이 있는 축을 중심으로 이공계 건물은 서쪽, 인문계 건물은 동쪽에 주로 위치. 반대로 인문계열 건물인 율곡관, 다산관, 성호관만 돌아다니는 학생이라면 정말 성비가 막장인 학교 맞나 싶을 정도로 여학생을 자주 보게 된다. 건물 위치가 이공계/인문계로 나뉜 덕에 건물 간의 이동 시간은 늦어도 5분 이내. 구학생회관-신학생회관을 끼고 이동하면 시간을 많이 줄일 수 있다. 특히 1학년의 경우엔 중앙에 있는 성호관에서 많은 수업을 들으므로 멀리 가봤자 연암관, 다산관이다. 공대면 2학년부터 거의 동관이나 서관에 박혀있게 된다.
'''캠퍼스 마스터 플랜''': 캠퍼스가 계속해서 북쪽과 동쪽으로만 뻗어 나가고 있는데, 이는 서쪽에 있는 유신고와 창현고가 유신학원 소속이라 학교법인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는 아주대학교 동쪽의 부지를 구입한 상태이며 캠퍼스 마스터 플랜에 따라 점진적으로 확장해나갈 계획이다. 현재는 캠퍼스 마스터 플랜에 따라 2011년 이후로 연암관, 동물실험센터, 웰빙센터, 약학관, 국제학사, 원천정보관이 신축되었고 운동장에 인조 잔디가 깔렸다. 그리고 기존에 의대와 같은 건물을 사용하였던 간호대학 건물이 신축됐다. 제2 국제학사를 신축할 계획이며 완공되는 대로 구 기숙사 건물이던 남제관은 철거되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될 예정이다. 아주대병원 방면에는 장례식장과 응급의료센터, 경기남부권역중증외상센터가 신축되었고, 중증재활 요양병원이 공사 중인 상태이다. 자세한 캠퍼스 마스터 플랜은 연암관 1층 전시실에서 볼 수 있으며 시기에 따라 총 2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모습''': 건물의 크기 또한 웅장한 타 대학들의 규모와는 달리 작고 단순하고 아담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으며, 도서관의 경우 작은 규모로 인해 지속해서 증축에 대한 요구가 있으나 해당 모양새를 계속 유지하고 있어 '라면박스' 라는 별명을 면치 못하고 있다.[47] 그나마 건물의 건설도 장담치 못했던 신학생회관의 등장과 로스쿨 유치에 대한 연암관의 신축으로 인해 약간은 타 대학과 비슷한 분위기의 현대적인 건물을 갖고 싶다는 학생들의 소원이 일부 이루어졌다. 하지만 수십 개의 건물 중 한가운데 작게나마 현대적인 건물이 들어선 관계로 전체적인 미관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벽돌 건물''': 대부분의 학교가 화려한 건축양식의 건물들을 짓고 있음에 불구, 아주대 캠퍼스 내 건물들은 매우 냉정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대부분 건물이 직육면체 모양이거나 ㄴ자 모양의 세운 건물. 발전한 타입이라고 해 봐야 직육면체 모양의 건물 내부를 사각형으로 뚫어둔 형태가 대부분이며,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한 외벽 소재 등도 빨간벽돌, 시멘트 등으로 건물의 색깔까지도 회색이나 흰색 등으로 정해져 있다. 그에 따라 그리 작지 않은 부지 규모에도 불구하고 세련되지 못한 캠퍼스 모양새를 연출하고 있으며, 학생들의 불만 또한 적지 않다.
'''신축 트렌드''': 2011년 이후 신축된 건물 중 연암관, 웰빙센터, 권역중증외상센터, 응급의료센터 및 공사중인 간호대학을 제외한 국제학사, 약학관, 동물실험센터, 원천정보관, 중증재활 요양병원[48] 등도 이미 지어져있는 벽돌건물들과의 조화를 맞추기 위해서인지 최근 신축건물의 트렌드인 유리궁전이 적용되지 않았다. 다만, 유리외관이 여러 효율성 측면에서는 매우 비효율적이기도 하고, 다른 기존건물들과는 달리 비교적 깔끔하고 현대적인 분위기로 건축되어서 학생들이 별다른 불만을 표출하진 않았다.
'''리모델링''': 아주대 건물의 대부분은 '서울건축'이라는 회사에서 설계하고, 완공된 후 유지관리는 시설과에서 하는데, 본의 아니게 학교의 미관을 조금씩 해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학교 측이 건물의 유지보수 및 리모델링을 꾸준히 하여 내부는 매우 양호한 편이라는 것. 처음 오는 사람의 경우 겉모습에 실망했다가 건물에 들어가서 놀라는 경우도 종종 있다. 정문으로 들어오면 처음 마주하게되는 중앙도서관의 경우 외관보다 내부는 다른 대학 신축건물에 비교해도 별다른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편이며, 2017년 내/외부 리모델링이 진행되어 카페와 커뮤니티 라운지가 만들어졌다. 특히 화장실이 경우 대부분의 건물이 리모델링되어 매우 깔끔하고, 다산관(경영대 건물), 기숙사 식당과 학생 식당도 전체적으로 리모델링 되었으며, 기숙사도 가구들이 지속해서 교체되고 있다.
12. 아주대학교병원
13. 학생 활동
14. 상권 및 주변환경
15. 교통
16. 수업
17. 사건사고
김덕중 전 총장은 1995년 2월 아주대 총장에 취임하였으나 1999년 5월 교육부 장관에 임명되어 총장직을 사임했다. 하지만 김 전 총장이 교육부 장관직에서 경질된 후 2000년 2월, 제6대 총장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곧바로 대학 사유화 논란과 의과대학원 입시 부정 논란에 휩싸였고, 동시에 과거 총장 역임 당시 권위주의적, 독재적으로 행한 학사 운영에 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에 교수협의회, 교직원노동조합, 총학생회를 비롯한 각 단과대학학생회는 퇴진 운동에 돌입하였으며, 비상대책위원회는 김덕중 전 총장의 '대학 사유화 실태조사 보고대회'를 열었다. 이후 김 전 총장 출근 저지 및 연로 교수 성명, 학생들의 총장실 점거 등 퇴진 운동은 점점 활발해졌다. 당시 학보사는 편집장 책임 아래에 호외를 발행하여 김 전 총장의 재취임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알려 3개월 발행 중단 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학생과 교수, 교직원의 퇴진 운동 끝에 결국 2001년 3월 23일, 김덕중 총장은 조기 사임 성명을 냈다.
2015년 4월 3일, 정보컴퓨터공학과에 재학 중이던 남학생이 'ajou.lul.lu'라는 이상형 월드컵 웹사이트를 만들고 운영해 논란이 된 사건이다. 해당 남학생은 학교 종합정보시스템을 해킹해 14, 15학번 여학생들 학생증 사진을 빼냈으며, 영화 소셜 네트워크를 보고 따라 했다고 밝혔다. 사이트는 현재 폐쇄되어 있다.
18. 이야깃거리
- 2018년 초 아주대학교 근처 PC방의 경쟁이 심해져서 시간당 300원에 라면 100원, 심지어 상대 PC방이 망할 때까지 무료선언하는 PC방이 생기면서 신문 기사에 뜨고 화제가 되었다. 아주대학생과 근처 유신, 창현고등학교 학생은 그저 천국.
- 알바를 구하기 쉬운 대학 중 하나이다. 알바몬에 따르면, 2017 상반기 기준 아주대 대학가의 알바 구인 공고는 7,233건으로 무려 전국에서 8번째로 알바 구인이 많은 대학가로 선정되었다.
- 족보를 소스라고 부르는데 놀랍게도 sauce도 source도 아닌 SOS다. 말 그대로 후배가 선배한테 SOS를 쳐서 받아낸다고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재학생, 심지어는 졸업생도 이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 개인주의가 만연해서 그런지 학생들 강제 음주, 인사 강요, 성추행, 똥군기 등이 없다. 학교 측 재단 비리, 등록금 횡령 등에서 언론에서 보도될 만큼 말썽을 피우지 않는다. 매년 다른 대학에서 터지는 각종 문제가 그다지 발생하지 않으며 따라서 보도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학번제는 없다고 보면 된다. 학생들 사이에서 학번은 단순 숫자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완전 철저한 나이제라고도 하기에는 애매하다. 그냥 나이가 자기보다 높든 낮은 일단 존댓말로 시작하다가 친해지면 형한테는 형, 동생한텐 동생이라 하는 편이다. 일반적으로 N수해서 들어온 사람들에겐 같은 학번이어도 형이라고 부른다.
- 대우그룹 시절부터 여러모로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와 비슷한 행보를 걷고 있는 학교이다. 설립 모체인 공과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 발전하였고 약학대학,의과대학,간호대학,법학전문대학원을 보유하고 있고 최상급 대학병원을 보유하고 있는 것까지 같다.
- 국제협력이 잘 돼 있다. 아주대는 국내 최초로 외국대학(뉴욕 스토니브룩대, 일리노이 공대)과 ‘2+2’라는 학부 복수학위 제도를 도입했다. ‘2+2 복수학위 제도’는 아주대에서 2년을 수료하고 뉴욕 스토니브룩대나 일리노이 공대에서 2년을 수료하면 양 학교의 학위를 동시에 취득하는 프로그램이다.
- 인사 맨
과거 아주대 앞 '중국성'이라는 중국식당에 인사 맨 이라는 작은 거인이 있었다. 슈퍼맨, 스파이더맨, 각설이, 산타클로스(특히 눈이 오면 인기 만점!) 등 여러 가지 복장을 갖춰 입고 오토바이를 탄 상태로 '안녕하세요'를 부르짖으며 흥겨운 음악과 함께 나타나는... 사실 인사 맨 중국성의 사장이었다. 그 특이한 행동과 외모는 공중파를 타며 유명세를 치렀고, 곧이어 아주대의 명물이 되었다. 아주대생들에게만 판매하는 인사 맨 세트들이 있었고, 가격대비 맛 또한 일품이었기에 다리원과 함께 배고픈 이들의 구원자였다. 항상 부지런하고 웃음을 띠었기에 볼 때마다 즐거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08~09년에 가게의 명의를 이전하였다는 소문이 들렸었고, 서비스와 맛은 형편없어졌다. 그리하여 작은 거인의 전설은 끝이 났다. 사실은 2018년 6월 현재에도 인사 맨 멀쩡히 장사 잘하고 있다. 다만 2005~08년께에 아주대 중국집 겁을 먹던 다리원이 없어지면서 강력한 경쟁상대가 없어져 질이 하락함과 동시에, '안녕하세요'를 부르짖으며 흥겨운 음악과 함께 나타나는... 인사만이 동네 주민들로부터 시끄럽다고 경고를 받아 그 후로 퍼포먼스를 하지 않는다. 그래도 배달을 굉장히 빨리하며 맛은 떨어졌다 해도 썩 나쁘지는 않은 수준이다. 학년 초 동아리나 과 모임 등에서 선배들이 값싸게 새내기들을 먹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음식 중 하나이다. 2013년 하반기에 리모델링이 이루어졌다(하지만 반대편에 생긴 24점 가게(짬X타X) 때문에 망했어요...). 덕분에 이래저래 우만동 쪽 중국집들이 아주대 내에서 성업 중이다.
YTN 조코위 대통령 아주대 방문..."노력과 소통이 중요"
조선일보 "대통령 맞아?" 겸손함에 놀라고 솔직함에 더 놀랐다
중앙일보 “어느 분야든 좋으니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딪혀라”
KBS ‘목수 아들’ 인니 대통령…청년에 희망 메시지
2016년 5월 17일 국빈 방문 중인 조코 위도도 (Joko Widodo)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아주대학교를 방문하여 김동연 총장과 함께 '청년들과 함께하는 유쾌한 반란' 콘서트를 열었다. 한 나라의 국가수반이 아주대학교를 직접 방문했다는 점에서 가지는 의의가 매우 크며, 가난한 시절을 극복하고 꿈을 이룬 아주대학교의 김동연 총장과 그가 추진하는 파란학기제 프로젝트에 공감해서 아주대학교를 선택했다고. 조코 위도도는 인도네시아의 첫 직선 대통령이자 첫 서민 대통령이기도 하다. 토크 콘서트는 아주대학교와 아시아기자협회(Asia Journalist Association, AJA), 아시아엔(AsiaN)이 공동으로 주최했다. 덕분에 학교 곳곳은 물론 학교 앞 도로까지도 경찰이 배치되는 풍경이 그려졌다. 이 자리에는 아주대학교 학생과 인도네시아 유학생, 수원 지역 고교생 등 500여 명과 남경필 경기도지사, 염태영 수원시장을 비롯한 지역 인사와 경제인도 함께 자리했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김 총장과 아주대가 추진 중인 ‘유쾌한 반란’에 대해 공감하면서 양국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이번 토크 콘서트를 진행하게 됐다.
중앙일보 “어느 분야든 좋으니 치열하게 고민하고 부딪혀라”
KBS ‘목수 아들’ 인니 대통령…청년에 희망 메시지
2016년 5월 17일 국빈 방문 중인 조코 위도도 (Joko Widodo)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아주대학교를 방문하여 김동연 총장과 함께 '청년들과 함께하는 유쾌한 반란' 콘서트를 열었다. 한 나라의 국가수반이 아주대학교를 직접 방문했다는 점에서 가지는 의의가 매우 크며, 가난한 시절을 극복하고 꿈을 이룬 아주대학교의 김동연 총장과 그가 추진하는 파란학기제 프로젝트에 공감해서 아주대학교를 선택했다고. 조코 위도도는 인도네시아의 첫 직선 대통령이자 첫 서민 대통령이기도 하다. 토크 콘서트는 아주대학교와 아시아기자협회(Asia Journalist Association, AJA), 아시아엔(AsiaN)이 공동으로 주최했다. 덕분에 학교 곳곳은 물론 학교 앞 도로까지도 경찰이 배치되는 풍경이 그려졌다. 이 자리에는 아주대학교 학생과 인도네시아 유학생, 수원 지역 고교생 등 500여 명과 남경필 경기도지사, 염태영 수원시장을 비롯한 지역 인사와 경제인도 함께 자리했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김 총장과 아주대가 추진 중인 ‘유쾌한 반란’에 대해 공감하면서 양국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이번 토크 콘서트를 진행하게 됐다.
아주대에서 열린 2016 차세대 모국방문 글로벌 창업 무역스쿨 행사에 참석해 ‘청년들의 도전’에 대한 강사로 공교롭게도 두 의원이 특강을 하고 다산관에서 조우하게 되었다. 각각 국민의당 전 대표, 새누리당 전 대표직을 지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으나 훈훈한 분위기에서 인사를 나누는 풍경. 김무성 전 대표는 개헌을 통한 권력 구조 개편에 대해서, 안철수 전 대표는 창업과 기업가 정신에 대해서 강연을 하였다.
19. 방송 촬영
20. 출신 인물
[1]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5대 수학자이다.[2] 석박사 통합 과정 포함[3] 아주대의 초대 이사장은 교하학원 김의준이다.[4]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한 자유의 여신상이 들고 있는 횃불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고 한다. 아주대학교와 횃불은 밀접한 관계성이 있는데 선구자가 들고 있는 횃불과 교표의 횃불 모양도 아시아의 횃불이라는 같은 맥락에서 의미를 가져와 사용된 것이다.[5] 한불기술초급대학 설립에 관한 협정문 제 22조에는 학교 명칭으로 법인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어 유신학원이 유신을 대학명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또 제 24조에 의해 대학 운영현황과 발전에 관한 사항을 2년마다 열리는 국가 간 협의 체계인 한불 혼성위원회 때 정기보고를 하게 되어있고 한불 혼성위원회 회기때가 아닌때의 학교 운영에 관한 중요한 사항은 한국과 프랑스 간 대사관에서 협의하게 되어 있어 사실상 국립법인처럼 대학을 운영케 했다. [6] 아시아=Asie=Asia=亞細亞=亞細亞州=亞洲 다 같은 의미다. 구글번역기로도 亞洲를 영어로 번역하면 Asia로 번역된다. 사실 亞洲의 정확한 번역은 '아시아 대륙'이다. 덕분에 아주대의 약어인 아대는 2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할 수 있었다. 첫째는 말 그대로 '아'주'대'학교의 약어이고, 둘째는 '아'시아'대'륙의 약어이다. 아시아주립대학교가 아니다.[7] 대만의 아주대학(亞州大學)과 일본의 아시아대학(亞細亞大學) 모두 영문 대학명을 Asia University로 표기 하지만, 아주대학교는 다른 영문 표기인 Ajou University를 사용한다. Ajou는 한글 아주를 프랑스어 그대로 읽은 표기다. 아주를 영문으로 읽으면 Aju가 되나 불어식으로 표기하면 Ajou가 된다. 프랑스어에서 u는 독일어의 ü(움라우트)에 가까운 '위' 발음이 나고, ou는 '우' 발음이 되기 때문이다.[8] 담화문에 아주대학과 아주공업초급대학 2개의 대학명이 있는 이유는 대학 설립 당시 문교부와 한 협의에서 2년제의 초급대학을 4년제로 바꾸는 조건으로 박창원 사장이 대학법인을 인수했기 때문이다. 학교법인은 대학 초기 초급대학으로 학생을 모집하며 후에 4년제 대학으로 전환이라는 광고를 신문에 기재하면서 학생을 모집했다.[9] 개교 전에는 프랑스어 Ajou가 아닌 프랑스어 Asie를 대학명으로 사용했다. 1973년 개교 전 신문에 게재한 아주공업초급대학의 학생모집 홍보문구는 亞細亞(아시아)지역에서 유일한 솔본느대학(지금의 소르본 대학)이기도 했다.[10] 18개 조약 중 문화협정은 한불문화협정, 한중문화협정, 한이 문화협정 총 3개가 있었는데 모두 협정 서명은 했으나 실질적으로 진행된 건 한불문화협정 하나다.[11] 조약이 공포되며 서울에는 주한 프랑스문화원이 세워졌고 12년 뒤엔 파리에 주불 한국문화원이 설립된다.[12] 1973년 4월 12일의 개교식에도 국토의 대동맥 경부고속로를 한쪽 팔에 안은 여기 원천동 산기슭으로 축시 하기도 했다.[13] 원래는 71년 학생모집을 계획으로 학교법인 교하학원이 당시 1억5천만 원, 프랑스 정부가 1억5천만 원, 대한민국 정부가 1억을 각각 투자해 수원시 우만, 원천동 지구에 11만 평의 규모로 1967년 6월 12일 날 착공해서 1970년 8월 30일 준공하기로 계획했었다.[14] 대학부지로 수원을 결정한 쪽은 프랑스 정부였다. 대학이 수원에 설립되기로 확정됐기 때문에 수원 근교에서 기업활동을 하는 사람을 찾았다.[15] 1973년 2월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신문광고엔 아주공업초급대학으로 학생을 모집했지만, 광고 아래에 금년 중 4년제 대학 전환이라 쓰고 아주대학(건설중)을 별도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4년제 전환을 개교 처음부터 염두에 뒀음을 알 수 있다. 박창원 이사장의 담화문에도 아주대학과 아주공업초급대학은 별개로 적혀있다.[16] 당시 프랑스 정부로부터 미화 50만 달러 상당의 과학용 실험기재와 6명의 프랑스인 교수를 지원받았다. 2명은 프랑스어 교육을 담당하고 4명은 전공 분야 전문교육을 담당했다.[17] Asie였다 Ajou로 바꿨다.[18] 4년제로 승격된 이후 프랑스 정부의 아주대학 투자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는데 1976년까지 미화 150만 달러를 추가 지원하고 프랑스인 교수 17명을 추가 파견하여 대학의 규모가 매우 확장되었다. 프랑스의 지원은 대한민국 국내 투자에만 국한되지 않았는데, 한국에서 유능한 인재가 있다면 프랑스로 데려가 박사학위 취득까지 도울 정도로 열성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전 KAIST 교수이자 아주대학교 1대 총동문회장이며 전 재산을 대학에 기부하고 시신은 아주대병원에 기증까지 한 황필상 박사.[19] 아주대학교의 초기 입학정원이 적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주대학은 학생을 모집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학생을 모집하면 프랑스 정부가 지원해주는 방식이라 프랑스 입장에선 학생을 많이 모집할수록 손해였다. 지금보다 대학 정원이 훨씬 적은 시대기도 했고, 뭣보다 당시엔 아주대가 종합대학이 아니었다.[20] 혹은 박창원 이사장과 박정희 대통령의 불화 때문에 학교가 넘어갔다는 말이 있는데, 1976년 3월 11일 경기도청에서 개최된 박정희 대통령과 경기도 기관장들의 오찬장에 참석했던 박창원 이사장은, 이 자리에서 경기도 학생들이 서울로 다 간다고 푸념만 했다. 대학 경영의 어려움을 그렇게 돌려서 말한 것이지 않을까 싶다. 즉 불화설은 뜬소문일 가능성이 높다.[21] 77년은 대우그룹 창립 10주년이 되는 해로 회사 창립을 기념하는 행사 겸 문화행사의 자리에서 대학설립을 논의하다 아주공대를 인수하기로 했다.[22] 이때 Institut Superieur de Technologie Franco-Coreen Ajou이었던 대학명도 Ajou University로 바꿨다.[23] 원래 계획은 한국에 IUT체계의 대학을 세우는 것이었으나 초급대학이던 대학이 공과대학이 되더니 어느새 종합대학이 되면서 소요되는 경비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24] 프랑스어를 보급하기 위해 대학을 설립했는데 영어교육을 강화한다고 하니 단단히 삐졌다.[25] 왜 대학 총장에 의사가 있나 생각할 수 있는데 이분이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을 설립하셨던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의대 설립에 큰 힘이 될 거로 생각했다.[26] Engineering, Medicine, Business, International Studies[27] 아주대학교 AIMS가 이때 만들어졌다.[28] 이게 사실 대우그룹이 고꾸라지지만 않았다면 허위 과장 광고가 아닌데 아주대학교에 개설된 학과들을 꾸려보면 졸업 후 진로가 대우 계열사들과 충분히 연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우자동차, 대우중공업, 대우조선은 기계공학과에서, 대우건설은 토목공학과와 건축공학과에서, 대우전자는 전자공학과와 화학공학과에서, 대우증권과 대우인터내셔널은 경영학과에서 사원들을 수급받는다고 본다면 이해할 수 있다.[29] 99년부터 2012년 동안 무려 7번이나 총장이 바뀌었다. 총장의 잦은 교체와 권한 약화로 리더십이 부재하면서 광교신도시 조성 전, 신도시 개발계획이 대학에도 도움이 되게끔 만드는 대학 여론을 조성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광교중앙역과 아주대 사이의 교통로 조성에 힘을 집중하지 못했다. 또한, 광교신도시 방향의 대학 경계도 조정하지 못해 광교 주민들과 갈등이 불거지게 된 원인이 되었다.[30] 대우그룹과 대우학원은 재정이 분리된 상태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31] 산학협력원, 원천정보관, 홍재관, 연암관 등[32] 아주대학교의 약점은 홍보 부족과 인지도 약화에 관한 것인데, 총장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다양한 외부활동을 진행하고 권위 주위를 타파한 여러 미팅을 주최하면서 덩달아 아주대학의 인지도 상승에서 큰 성과를 얻었다.[33] 2년 동안 장학금 등으로 1억4000만 원을 기부했었고 2년 동안 연봉 3억5000만 원을 받았는데, 이중 40.6% 가량을 여건의 문제로 학업에 소외된 취약 계층 학생들을 위해 기부했었다.[34] 교환학생+파란사다리+복수학위+단기파견+인턴십+global leaders belt+global leadership+ABIZ Global Supporters+영어 트랙+해외현장연구[35] 전국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곳이다. 타 지역은 인구가 정체되거나 감소세에 들어섰다. 2020년 5월 기준 국내 시가총액 상위 10개 기업중 6개가 경기도에 있을 정도로 대학교의 위상이 높아졌다. 본래 2010년만 해도 상위 10개 기업중 9개 기업이 서울에 있었으나 우수한인재, 대기업, 해외자본의 투자가 경기도(특히 남부)로 집중되면서 변화하고 있다.[36] 서울에 본교를 두고 경기도에 위치한 이원화캠퍼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37] 465,850㎡이다. 하지만, 선구자상을 중심으로 주요 건물들이 배열되어 있어 캠퍼스 동선이 매우 짧아 재학생들은 캠퍼스가 크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한다.[38] 비슷한 규모의 학교로는 서강대학교와 서울시립대학교가 있다[39] 고시보단 취업 학풍에 가깝고 문과도 이공계 전공을 이수하는 추세이긴 하다.[40] 한편 아주대학이 이런 학생들을 많이 모집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한불협력에 따른 조약으로 프랑스가 아주대 학생에 장학금을 많이 지급해줬기 때문.[41] 세월호 참사가 있을 당시에는 당시의 분위기를 고려하여 축제가 2학기로 미루어졌다[42] 율곡관 앞 잔디밭. 교내 공지에서도 텔레토비 동산이라고 병기하는 경우가 있다.[43] 이 기간의 백미는 매년 있는 랜덤소개팅 이벤트이다. 솔로들은 꼭 참석해서 벚꽃축제의 위너가 되어보자.[44] 물론 1학년 1학기엔 개나소나 4점대다. 4년 누적이 4점대면 굉장한 거다.[45] 장덕철 - 그날처럼이며 학교 캠퍼스 내부와 학교앞 상가까지 등장한다.[46] 대우 김우중 회장 시절부터 서울건축은 대다수 대우와 관련된 건물 설계를 맡아왔다. 서울건축이 아주대의 건물 설계를 지금도 할 수 있는 이유는 대우의 잔재가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 아주대의 캠퍼스마스터플랜도 서울건축이 만들었었다.[47] 다만 1층에 대대적인 리모델링으로 카페가 입점해 외관상으로 아주 좋아졌다[48] 물론 병원 건물은 유리궁전으로 짓는 경우는 많지 않다.[49] 교환학생이 많이 오는 이유가 외국인 학생들이 학교 고르기 귀찮아서 그냥 리스트 가장 위에 있는 아주대를 고른다는 하더라는 것이 있지만 웃자고 하는 말이니 넘기자. 그럴듯하긴 하지만.[50] 아주대에서 찍은 드라마 중 가장 유명한 드라마. 방영됐던 저 시기에 아주대의 인지도가 급상승하는 효과를 누렸다. 거기에 대우그룹의 버프까지... 지금도 학교 내에서 회자하고 있는 리즈시절이다.[51] 극 중 장준혁이 근무하는 명인대병원이 아주대병원이다.[52] 팔달관 건물이 태평대학교 한의예과로 출연했다.[53] 주말 드라마인만큼 주기적으로 등장한다. 배우 이초희의 대학교 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