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원

 

1. 정치인 이해원
2. 대한제국 황손
2.1. 소개
2.2. 같이보기


1. 정치인 이해원




2. 대한제국 황손



2.1. 소개


[image]
皇孫 李海瑗
1919년 2월 24일 ~ 2020년 2월 8일 (향년 100세)
조선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황제의 손녀로 대한제국의 황위요구자였던 인물. 의친왕의 차녀이며, 생모[1]는 수덕당(壽德堂)인 이희춘(李希春)이다.[2] 사망 이전까지 국립고궁박물관의 연구자문위원으로 일했다.
황실명은 이진(李珍), 아명은 이길운(李吉雲)으로, 이해원(李海瑗)이란 이름은 당시 일제에게 의친왕의 정식 자녀로 인정받지 못해[3] 어쩔 수 없이 7촌 재당숙 이기용[4][5][6]의 호적으로 들어갈 때 지은 법적 이름이다.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동궁에서 의친왕의 차녀로 출생하였고, 종로소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운현궁에서 살았다. 1936년 경기여자고등학교졸업하고, 그 해 이승규(李昇圭)와 결혼하였다.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을 졸업하였던 남편은 한국전쟁납북되었다.
1992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2002년 귀국하여 경기도 하남시 단칸방에서 차남 이진왕[7]과 살았다. 서울 연희동의 땅 17만평[8]을 되찾기 위해 소송 중이었다. 장남 진휴는 로스앤젤레스에서 택시 기사를 하고 있으며, 3남 진홍은 미국으로 이주했다. 진주는 미혼으로 강릉시에서 살다 사망했다고. 아이러니하게도 토지를 되찾으려는 오랜 기간의 노력이 아들들이 오랫동안 제대로 경제 활동을 못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단 승소만 하면 부자가 되니까 아들들이 소송이나 민원에만 매달리며 세월을 보냈고, 딸이 가장 역할을 하며 어머니와 오빠들을 부양했다. 그런 딸이 사망하며 살림이 더욱 어려워졌다.
2006년 9월 29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정체 불명의 대한제국황족회[9]라는 단체가 제30대 대한제국 여제옹립했지만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인정 같은 건 없었다.
2012년과 2017년에 걸쳐 땅을 되찾기 위해 건 소송에서 모두 패소했다. 2012년은 양아버지 이기용경기도 하남시 땅 1만 2,700m²가 부당하게 정부로 넘어갔다며 소송을 건 것이고 2017년은 남편 소유였던 서울 연희동 임야 1만여 m², 개별 공시지가 30억 원에 이르는 땅이 1948년 위조된 계약서에 의해 전직 법조인 김모 씨에게 소유권이 불법으로 넘어가 이를 찾겠다는 소송이었다.
말년에는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도시에 있는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차남과 거주했다. 101세 생일이 16일 앞이던 2020년 02월 08일, 자택 근처에 있던 노인요양병원에서 숨졌다.

2.2. 같이보기


[1] 의친왕의 정실 김수덕에게는 자녀가 없고, 의친왕은 여러 들에게서 많은 자녀를 낳았다.[2] 대한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다면, 친왕의 딸이므로 '현주(縣主)'의 작위를 받았을 것이다.[3] 사실 일제가 인정한 의친왕의 자녀는 이건이우#s-2 뿐이다. 그나마도 이우는 운현궁의 이준용 밑으로 입양갔기에 실질적으로 인정한 의친왕 자녀는 이건 한 명 뿐이었다.[4]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큰 형 흥녕군 이창응의 손자로 남연군계의 종가(宗家) 계동궁 주인이었다. 참고로 친일반민족행위자(…) [5] 이해원 뿐 아닌, 호적 상 인정받지 못한 다른 의친왕의 자녀들도 이기용의 호적으로 들어갔다. 일단 호적이 있어야 학교를 가든 할 테니. 단, 일제 말에 태어나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해방을 맞이했던 9남(이갑 : 황사손 이원의 생부), 10남(이석), 11남, 6녀, 7녀, 그리고 해방 이후에 태어난 12남, 8녀, 9녀는 이기용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았다.[6] 예외로 6남 이곤과 8남 이현은 일제 초기에 태어났음에도 이기용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았다. 6남 이곤의 경우, 비록 의친왕의 가계와 직위를 장남 이건이 이었다지만, 이건을 탐탁치 않게 여긴 의친왕이 차선으로 이곤을 생각했기에 양자로 보내지지 않았다. (이건은 결국 2차 대전 이후 일본에 귀화해서 남은 생애를 일본인으로 살다 죽었다.) 차남 이우부터 5남 이광까지는 전부 다른 왕족들의 양자로 갔기 때문. 8남 이현(평생 독신으로 살다 1996년 요양원에서 사망)은 어른의 사정이 들어가 있었다.[7] 2019년 12월, 74세의 나이로 별세[8] 남편이 충청도 지역의 유지 가문 출신이라 유복하게 살았는데, 남편의 납북 후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이해원이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관공서의 수용 조치에 제대로 대응 못 하는 등 재산 대부분을 잃었다.[9] 사족으로, 이 단체의 총리대신을 자칭하던 사람이 바로 2012년에 폐교된 대학교인 선교청대학교의 이사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