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용(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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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의 황족 출신 관료이자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 흥선대원군의 큰형인 흥녕군 이창응의 장손이자, 고종의 사촌형인 완림군 이재원의 아들로[4] , 계동궁의 사손이다.[5]
황실의 후손임에도 작호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족보 상 이기용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6] 이었던 사람은 5대조 장조(사도세자)인데[7] , 법적으로 임금의 4대손까지만 황족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2. 생애
2.1. 조선 · 대한제국 시기
1889년(고종 26년) 11월 1일, 한성부 계동궁에서 이재원과 부인 수원 김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불과 3살 때[8] 인 1891년(고종 28년) 2월에 아버지 이재원이 사망하자 계동궁 사손 자리를 물려받았다.
1902년(광무 2년)에 장조의황제로 추존된 사도세자의 융릉 참봉을 역임하였으나 바로 사임했고, 1904년(광무 8년) 1월에 효정왕후 홍씨의 장례를 시작으로 1926년 5월 순종의 장례 때까지 국상 때마다 종척집사에 임명되어 활동했다.
1905년(광무 9년) 시강원 시종관[9] 에 임명되었다. 1906년(광무 10년) 11월에는 계동궁에 설립된 돈명의숙[10] 정치전문과에서 근대 학문을 배웠다. 1907년에는 수학원[11] 초등과에 입학했고, 1908년(융희 2년)에는 돈명의숙을, 1909년(융희 3년)에는 수학원 초등과를 졸업했다. 이후 수학원의 중등과로 진학하여 1910년(융희 4년)에 졸업했다.# 같은 해 8월 27일 품계가 종6품에서 정3품으로 올라갔다.#[12]
2.2. 일제강점기
한일병탄 이후 1910년 10월 7일에 일본 정부에게서 자작 작위와 은사금 3만원을 받았다. 그리고 조선귀족들로 구성된 ‘조선귀족관광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이토 히로부미 무덤에 참배하고 천장절 관병식에도 참석했다. #
1911년 8월에는 〈매일신보〉에 한일합병 1주년을 기념하는 축사(...)를 게재했다. 1912년에는 일본 정부에게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같은 해 재동공립보통학교 위원으로 활동했고 1914년에는 2번 씩이나 자신의 땅을 도로놓을 부지로 조선총독부에 기부했다.#
1914년과 1915년 10월에는 영조의 생일을 맞아 선원전을 봉심했고 1915년 11월 3일에는 일본 다이쇼 덴노의 즉위식 참석 차 교토에 다녀왔다.
1917년에는 친일 불교단체인 불교옹호회에 고문으로 참여했다. 1920년대에는 도박 등으로 그 많던 재산을 다 날리고 빚을 져 파산신청을 했다. 결국 순종에게 생활비를 타쓰기까지 했다.(...)###
1930년대 조선신궁이 건립된 이후 조선신궁의 여러 행사에 참석했다. 1936년에는 강원도 김화군 임남면에 있는 금광과 은광의 공동광업권을 취득했다. 1937년에는 조선국방협회와 동요회, 그리고 이듬해인 1938년에는 조선보국회 발기에 찬조했다.#
1945년 2월 태평양 전쟁 말기에 조선인도 일본 국회의원이 될 수 있게 법이 바뀌면서, 그해 4월 일본 제국의회의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4개월 뒤 조선은 해방되었다.
2.3. 8.15 광복 이후
저런 친일 행각들로 인해 해방 이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만들어진 후 당연히 체포되었다. 3차례에 걸친 공판 끝에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재산의 절반을 몰수당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와해되면서 풀려났다.
1961년 3월 4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71세.[13]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3. 여담
4. 매체에서
5. 가족과 후손
1살 많은 연안 김씨와 혼인하였으나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그래서 의친왕의 7남 이광을 양자로 들였다. 이후 이광은 항렬에 맞춰 호적 이름을 이해청(李海淸)으로 올렸다. 이해청은 1952년에 양아버지, 친아버지보다도 먼저 죽었고 그의 후손에 대해선 전해진 게 없다.
그리고 의친왕의 1녀부터 5녀까지 양녀로 들였다. 단, 이해청을 입양할 때와는 이유가 약간 다르다. 이해청의 경우는 대를 잇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으나 양녀들의 경우는 학교를 가야 하는데 일제가 황실 호적을 인정하지 않아서 이기용 본인의 호적에 입적시킨 것이다.
[1] 원래 이기용의 뒤를 이어 계동궁 종주가 되어야 했으나 이기용보다 일찍 죽었다. 그리고 계동궁의 주인은 이기용이 마지막이며 이해청 이후의 계대는 알려져있지 않다.[2] 남연군의 증손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흙 토(土)'변이나 '흙 토'가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고종황제의 아들들의 이름도 각각 선(墡), 척(坧), 강(堈), 은(垠), 육(堉), 우(堣)이다. 흥녕군의 손자인 이기용(李'''埼'''鎔)도 마찬가지이다. 이외에도 흥완군의 손자 이달용(李'''達'''鎔)과 이규용(李'''逵'''鎔), 그리고 흥인군의 손자 이지용(李'''址'''鎔),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李'''埈'''鎔)과 이문용(李'''𪣢(土 + 汶)'''鎔), 그리고 이관용(李'''土+灌'''鎔)의 이름까지 이 규칙이 적용된다.[3] 후술하겠지만 전부 의친왕의 자녀들을 입양했다.[4] 그러니 고종에게는 5촌 당조카이다.[5] 숙종의 3남 연령군의 종가로, 연령군과 은신군, 남연군의 제사를 모시던 곳이었다.[6] 추존 왕 포함.[7] 이기용의 집안은 영조의 동생인 연령군의 후손인데 어떻게 사도세자의 후손이 되냐고 할 수 있다. 정확히는 이기용의 법적 고조부이자 사도세자의 4남 은신군이 연령군의 봉사손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게 은신군 사후에 지정된 것인데다 명확하게 연령군가에 입적시킨게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은신군의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의 후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후 20세기 중반에 들어서야 확실하게 자신들을 연령군의 법적 후손으로 인식하였다. 자세한 것은 은신군 항목 참조.[8] 만 1세[9] 시강원은 황태자궁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고 시종관은 관리직이다.[10] 敦明─塾. 1906년 11월에 정치학을 메인으로 하여 근대 학문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3년제의 고등교육기관이다.[11] 修學院. 황족 및 귀족의 자녀들을 교육하는 기관.[12] 그리고 2일 뒤 나라가 망했다.[13] 세는나이 73세.[14] 드라마 《제1공화국》, 《제2공화국》에서 이기붕 역을, 《연개소문》에서 당 고조 이연을 맡았다.[15] 2006년 대한제국 황족회에서 여황제로 옹립한(...) 그 분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