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공산당(마르크스주의)
1. 개요
인도 공화국의 공산주의 정당.
기존 인도 공산당에서 계파 갈등 끝에 갈라져 나온 다른 정당이고, 정치성향도 좀 더 좌경화되어 있지만, 중앙 의회에선 단일한 좌파 전선[2] 을 형성하며, 케랄라주의회에서도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등 자매정당처럼 기능하고 있긴 하다. 현 인도 공산당을 밀어내고 케랄라주의 현 주총리도 배출하고 있어, 지지층을 점차 흡수해 나가는 추세이다.
2. 역사
인도 공산당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인도가 막 독립할 때까지도 인도 전역을 봉건적 사회로 규정하고, 계급투쟁과 무력혁명을 통해 공산국가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현재의 케랄라주, 트리푸라주, 텔랑가나주 일대에서 독자적인 군사조직을 편성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도 공화국 수립 이후 자와할랄 네루가 이끄는 인도국민회의 정부가 제3세계 노선으로 소련에도 우호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하며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소련은 인도공산당이 무장투쟁을 그만두고, 우익 세력과 합작하면서 의회에 진출하기를 바랐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수의 당원들은 인도는 봉건국가이며 따라서 계급투쟁을 지속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하지만 이에 인도 중앙정부는 1959년 연방법률에 따라 주의회를 설치하지 않고 버티던 공산당의 근거지 케랄라주의 자치정부를 대통령령으로 해산시켜버린다.
이 당의 창당은 중소결렬, 중국-인도 국경분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인도 공산당내 온건파들은 중인국경분쟁의 영향으로 소련의 노선을 따르면서 중국을 배격하고 인도국민회의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현재 CPI(M)의 주류세력과 낙살라이트의 뿌리가 되는 무력혁명파 마오주의자들은 이들을 우파, 수정주의자라고 공격하면서 당내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에 1962년, 당내의 혼란을 수습하고자 해산된 케랄라 자치정부의 수반이었던 당내 급진파 E.M.S. 남부디리파드가 서기장에, 당 중진이자 온건타협파였던 슈리파다 암르타 단게가 신설된 당 주석직에 앉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미봉책에 불과했고 1964년 치러진 인도공산당 전국 대의원대회에서 급진파 세력 대의원들이 단게가 반동분자라며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고 이들은 당 대회에서 마오쩌둥의 초상화까지 내거는 행각을 벌였다. 이후 급진파는 인도 동부 서벵골 콜카타에서 독자적인 당대회를 열고 온건파는 인도 서부 뭄바이에서 당대회를 따로 열면서 완전히 분열되었다.
그러나 분열은 끝이 아니었다. 1967년 서벵골 북부 낙살바리라는 마을에서 대규모 농민봉기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친중노선을 걷던 CPI(M)은 이 봉기를 기점으로 중국 공산당과 모든 교류를 중단한뒤 합법적으로 의회에 참가하자는 온건한 노선으로 전환했고, 이에 반발한 차루 마줌다르는 낙살라이트 운동을 이끌면서 카스트를 완전히 뿌리뽑고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세상을 만드는 방법은 무력을 사용하는 혁명밖에 없다고 역설했다. 그리하여 마줌다르는 CPI(M)와 결별하고 1972년 체포된뒤 의문사 할때까지 무력투쟁파인 낙살라이트 운동을 이끌었다. 현재까지도 인도정부는 낙살라이트 인민해방유격대과 길고 지루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CPI(M)은 점차 세를 넓혀가며 기존 인도 공산당의 자리를 슬금슬금 빼앗기 시작했고 현재에 이른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와서는 마마타 바네르지가 이끄는 전인도 풀뿌리회의(AITC)에 밀려 인도 공산당 계열 정당이 초강세였던 서벵골 지방에서도 둘 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사실상 케랄라주 지방정당으로 몰락한 상황이다.
3. 당 지도부
당 대회에서 95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하며, 또다시 이들이 17명의 정치국 위원을 선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