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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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澤東思想'''[1]''', Maoism'''
1. 개요
2. 특징
2.1. 인식론
2.1.1. 모순론
2.1.2. 실천론
2.1.3. 의지
2.2. 사학이론
2.2.1. 신식민지와 반봉건사회
2.2.2. 신민주주의
2.3. 농촌 중심
2.4. 당군 중심
2.5. 반엘리트주의
2.6. 군사 이론
2.6.1. 지구전
3. 평가
4. 현대 중국의 마오주의
5. 세계의 마오주의
6. 참고 자료


1. 개요


마오쩌둥을 따르는 공산주의의 분파. 따라서 모택동주의, 마오쩌둥주의라고도 한다. 《마오쩌둥 어록 선집》에 이 사상의 핵심이 담겨 있다.[2]

2. 특징


마오주의는 유교를 명시적으로 부정했지만, 구조적 측면에서 볼 때 마오주의는 그 고대의 이념적 원칙과 동일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다시 말해서 마오주의는 다수를 하나로 통합하는 상호 연계성을 구현했다. 그리고 과거의 중국 황제들처럼 마오쩌둥도 학자 겸 관료들을 동원하여 이념적 원칙을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지만, 마오쩌둥 시절의 학자 겸 관료들은 유교 경전을 공부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마오주의의 주요 저작에 관한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시황제와 수 문제, 수 양제와 마찬가지로 마오쩌둥도 지나치게 잔인한 방식으로 웅대한 목표를 추구했기 때문에 그가 서거하자마자 역풍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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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 / 타밈 안사리

마오이즘은 중국 공산당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 전략에서 모델을 따왔다. 주로 도시 노동자, 혁명가들로 이루어진 정당(政黨) 중심 혁명을 주장했던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노동자 외에도 농민과 소수민족을 포섭하려 했던 레닌주의를 넘어 아예 농촌농민을 혁명의 중심으로 삼았다. 마오이즘의 대표적 경향을 따진다면 바로 이 부분이다.
1920년대 혁명 투쟁 과정에서 형성되어 '''정강산 투쟁''', 중화소비에트공화국, '''대장정''', 국공 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3] 등을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2.1. 인식론


마오쩌둥의 인식론은 1931년 그때까지 공산권에서 정설로 취급되던 데보린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해석이 스탈린에 의해 비판받고 밀려나면서 탈 데보린 운동이 일어나는 기조 속에서 탄생하였다. 스탈린이 저술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1938)은 기존 데보린 학파의 학설을 비판하고 있고, 모순에 대한 입장이 마오쩌둥의 이론과 지엽적인 차이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오쩌둥 사상의 인식론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사실상 다르지 않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2.1.1. 모순론


모택동 인식론의 주요 개념중 하나인 모순과 실천 중, 모택동은 모순에 대해 우선 데보린과 비슷하게 적대적 모순(敵對的矛盾)과 비적대적 모순(非敵對的矛盾)으로 나눈 다음, 전자의 모순은 처음부터 끝의 과정까지 모순의 과정을 관통하며,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모순, 즉 본질적 모순에 해당하고, 후자는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모순이라고 정의한다. 모택동의 모순론에 따르면, 전자의 경우는 계급 전쟁에서 최일선에 해당하는 모순인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모순이므로, 서로의 계급 전쟁에서 나름대로의 전략을 구사하는 과정에서 상당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며 또한 갖가지 양태를 갖고 있는 모순으로 변화하게 된다. 예를 들면, 그것은 백인과 유색인종, 제국주의자와 반제국주의자, 남성 권위주의자들과 여성 사이의 투쟁, 심지어 노동자와 농민 및 빈곤노동자 사이의 투쟁으로도 양태화될 수 있다. 마오쩌둥은 이것들이 본질적인 모순에 해당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구분하기 위해서는 결국 매개 모순의 특수성, 즉, 모순의 진행도를 인식하고 그것을 정합(整合)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모순의 진행도가 제각각인 것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자연변증법』(Dialektik der Natur)에서 논한 자연물 사이에서의 모순을 포함하여 모든 본질적인 모순이 가진 보편적인 것(보편성)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그러한 모순의 정합을 따지는 것은 당과 인민이다. 그러하기에 자본주의 국가와 물리적으로 어느 정도 분리가 된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에 대항하고 있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라는 대립 공간에 속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모순은 갑자기 일거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인 정합, 과정을 거쳐서 감소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로서, 완숙한 공산주의로 나아가고 있으며 그러한 나아감은 모순에 따른 투쟁의 원리에 기초하여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1 한 사회구성체에 적대적 모순으로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계급투쟁’이 존재할 수 있는 객관적 토대가 최소의 수준에서라도 마련이 되어있는가?
-아니오 → 1-1 적대적 모순으로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계급투쟁’이 존재할 수 있는 객관적 토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의미로서의 계급투쟁은 불가능하다.
-예 → 1-2 그렇다면, 그것이 직접적인 의미에서 충분히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대결로 표상될 수 있는가?
--아니오 → 1-2-1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직접적인 대결이 표상되지 않다는 것은 해당 사회구성체의 모순은 다양한 의식성(意識性)의 중첩으로 인해 그 양태(様態)가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계층 사이에서 매개 정합(整合)에 기초한 변증 투쟁을 이어나가야 한다.
--예 → 1-2-2 이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직접적인 대결이 표상된 것이므로 전적으로 노동계급에 의거하여 변증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이것이 그의 사상의 논리적 구조인데, 마오쩌둥은 당시 중국의 상황이 1-2-1(자본주의가 최후의 단계에서 제국주의로 나아가고, 제국주의 국가는 초과착취를 위해 세계 재분할을 감행함으로써 도래한 상황)의 경로로 인해 조성된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1-2-1에 따라 중국은 민족 해방 세력과 매판 지주·자본가 세력 사이의 대립이 진행되며, 주요 모순은 공산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적 상황이라고 규정한 상황 외부에 존재하는 수많은 요소들에 따라 변할 수도 있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에 따르면, 주요 모순은 모순성의 특수성을 정합성에 따라 인식한 후에 판단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다시 유동적으로 변한다. 이러한 입장은 혁명에 현실성을 부여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데보린의 정식을 받아들인 기존의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양태를 갖고 있는 모든 본질적 문제를 단적인 경제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투쟁으로 환원시키고 그것들의 속성을 근시안적으로 바라보는 경험주의적 단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수많은 본질적 분쟁인 사건을 비본질적 분쟁으로 취급하는 결정적 오류를 범했다. 실제로 마오쩌둥의 비판 대상인 교조적인 공산주의자들은 농민은 소부르주아이기에 본질적인 혁명 동력이 없다고 봤으며, 사회 곳곳에서 나타나는 양분적 대립 등을 비본질적 모순으로 보아 그것들의 중요성을 무시했다.
마오쩌둥의 해법의 예로는 블라디미르 레닌이 '혁명의 제2단계'(1917년 4월 ~ 1917년 11월) 시기에도 산업프롤레타리아만이 아닌, 영세농 및 소농, 그리고 소영업자들과의 동맹을 추구한 것으로도 들 수 있다. 레닌은 당시의 주요 모순이 단순히 프롤레타리아와 모든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전면적 대결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게 아닌, 제국주의의 세계 재분할 과정에서 드러나는 약한 고리에 강한 연관을 갖는 사건들에 있다고 봤다. 그리고 스탈린 집권 시기에는 사회주의 대건설이라는 것이 주요 모순으로 되었기에 모든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를 위한 농업집산화, 그리고 급진적인 국유화 단행이 진행된 것이다.
마오쩌둥은 당시 교조주의 기조가 본래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취지에 어긋나며, 교조주의자들의 입장을 '혁명에서의 소극주의 경향'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계급 투쟁 관계를 단순히 무산자-임금노동자와 유산자-사업가의 싸움으로 표시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으며, 그것의 본질은 사실 무산자와 유산자 사이라는 간극보다는 혁명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세력과, 반동으로 나가는 세력 사이의 간극이라고 본 것이다. 마오쩌둥이 혁명의 시기인 1920년대에서 1940년대 사이에 농촌에 기반한 농민운동에 중점을 둔 것도 바로 위와 같은 철학적 지론에서 나온 것이다.
결국 마오쩌둥의 모순론의 정식대로라면 반봉건사회 또는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격화된 양분의 대립은 계급 투쟁의 성격을 갖는 것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대립은 모순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사회주의국가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사회주의국가 운영의 핵심은 이러한 모순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달렸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마오주의자들이 더더욱 현실 문제에 깊숙히 관여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마오쩌둥 사상은 제3세계 운동, 여성주의와 흑인해방운동을 포함하여 갖가지 해방운동에 기반 이론을 제공한 것이다.

2.1.2. 실천론


그의 주요 저서 이름이 모순론, 실천론인 것에서 알수 있듯 마오이즘에서 실천 또한 꽤 중요하다. 데보린 학파는 변증 투쟁에서 계급 의식을 대표하는 것은 혁명적 의식이고, 혁명적 의식은 감각적인 인지와 구별되는 이성(理性)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실천은 혁명적 의식에 기초하지만, 그 자체로는 현상계 내에서 벌어지는 투쟁이기에 완전한 이성과는 구분된다. 이러한 점에서 실천은 혁명적 의식에로의 접근에 근거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부단한 노력과 오류가 항상 뒤따르게 된다. 따라서 순수한 의미에서의 계급 의식과, 그 계급 의식을 표상하는 계급 투쟁은 다른 층위를 점하고 있으며, 계급 투쟁은 계급 의식의 현상적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데보린은 계급 투쟁이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계급 의식이 필요한데, 계급 의식은 실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혁명 사상에 의한 외부의 주입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는 점이다. 한편, 러시아 혁명 시기 레닌은 『철학 노트』를 통해 데보린의 학설을 받아들여서 계급 의식의 외부 주입설을 주장하였다.[10]
하지만, 마오쩌둥은 실천을 통한 감각적 인식, 계급 의식을 갖는 것으로 대표되는 이성적 인식은 일체(一體)이며, 계급 투쟁에서 드러나는 실천에 참여하고 고민하는 것을 통해, 다시 그것이 계급 의식으로 화하여 순환의 과정을 거친다고 보았다. 마오쩌둥에게 실천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정치 투쟁이 아닌 사고와 사고 사이의 전쟁도 포함한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실천론은 주로 전자의 논리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그는 혁명가가 군중 속에 들어가서 군중의 삶을 직접 겪으며, 군중의 지식을 배워야 한다고 보았다. 이것은 그의 게릴라 이론 저서인 『지구전론』(持久戰論)[4]에서도 일관적으로 나오는 입장이다. 또한 군중 속에 들어가는 주체는 개인 한 사람이 아니라 공산당과 같은 혁명적 당도 포함된다. 혁명적 당의 최고 적은 군중과 괴리되는 것이며, 이러한 군중과의 괴리, 즉, 관료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당이 군중에 의거해야 하며,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군중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의 실천론은 주요 모순과, 그렇지 않은 모순을 유동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끔 하는 원동력이 된다. 즉, 군중 속에 들어가는 실천은 사회구성체가 어떠한 향방으로 흘러가는지, 그리고 투쟁에서 어떠한 모순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등,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파악해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만약 군중 속에 들어가지 않는 자가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안다고 자부한다면 그것은 거짓일 것이란 게 마오쩌둥 실천론의 핵심이다. 1929년 12월 소비에트 지구에서 마오쩌둥이 행한 『당내의 그릇된 사상을 시정하는 문제에 대하여』라는 당내 문제에 관한 언급에서 드러난다. 그는 “조사 없이는 발언권이 없다.”라는 항목에서 일부 교조적 공산주의자들이 서책주의에 빠져서 구체적인 조사, 군중 속에서의 실천이 없이 당과 소비에트 지구 내 문제를 처리하였다고 비판했다. 매개 정합이 존재하지 않는 혁명 투쟁은 공허한 것이 되며 그것은 오류의 점철로 될 수밖에 없다.
실천이 중시된다면 자연스럽게 중국 내 문화·역사·정치·철학적 실정에 대해 깊게 알아야 한다. 그러나 당시 교조주의자들은 중국 내 문화사 및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 없었다. 일부는 그리스 역사 일부과 서구 근대사에 밝긴 했으나 중국사와 이와 연결되는 문화 투쟁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았다. 이에 관한 문제의식은 1941년 5월 옌안 정부 시기에 쓰여진 『우리 학습의 개조』라는 마오쩌둥의 문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리 자신 역사에 대해 전혀, 또는 조금밖에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외국에서 돌아온 많은 유학생들 사이에 이러한 병이 퍼지고 있다. 유럽, 미국이나 일본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가 살았던 외국의 것을 앵무새처럼 말할 줄만 알았지 새로운 사물을 이해하고 참신한 것을 창조해야 하는 스스로의 책임을 잊었다. 녹음기처럼 작동되는 이러한 질병이 또한 공산당 안에서도 번지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다시 반복하여 설명하기 위해 나는 상호대립적 태도를 대비시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주관주의적 태도이다. 이러한 태도는 주위환경에 대하여 계통적이고 치밀한 연구를 하지 않고 그저 주관과 열정에 의해 공작하게 되므로 현재 중국의 진면목에 관해 흐릿한 영상만을 가지게 된다. 그러한 태도는 역사를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즉 고대 그리스에 관해서는 알아도 중국의 과거와 현재의 진면목에 관해서는 알지 못 하는 것이다.

마오쩌둥, 『우리 학습의 개조』

이는 단순히 자기 민족의 것을 알아야 한다는 감정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위의 실천의 논리에 따라 혁명가는 자신이 혁명을 목표로 하는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깊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이러한 지식을 혁명가가 습득하지 못 한 상태라면 모순의 원리에 따라 시시각각 유동적으로 변하는 주요 모순을 빠르게 파악할 수 없으며, 이는 혁명 투쟁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남발하는 원인으로 된다.

2.1.3. 의지


결국 혁명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이며, 그러한 실천을 할 수 있게 하는 혁명가의 의지(意志)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의지를 강조하였다고 해서 그가 주의주의(主意主義) 철학을 전개하였다고 오해하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마오쩌둥이 언급한 의지는 어디까지나 변증투쟁 및 그 구체적 실천에서만 제한적으로 드러나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반면 주의주의는 의지에 이러한 제한성을 일체 두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언급된 마오쩌둥 사상의 관점은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관점으로, 결국 유물론과 관념론 사이를 적절히 배합하는 작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변증투쟁 내 발생하는 의식 일반으로부터 도출되는 의지에 대한 긍정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부터 견지되는 입장이나, 마오쩌둥은 그러한 의지를 상당히 강조한다.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 계속혁명론이다. 당이 관료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공산주의 도달까지 끝이 없는 정치투쟁을 내부로부터 감행해야 한다. 그것은 혁명적 군중에 의한 대규모 켐페인 등과 같은 정치운동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으며, 이것이 극단화되어 나온 것이 문화대혁명이 있다.

2.2. 사학이론


1928년 12월 코민테른은 중국, 조선, 인도 등의 혁명 문제에 관해 언급하였다. 여기서 여러 아시아의 식민지 국가는 지주에 의한 봉건적 소생산이 지배하는 국가로, 당면 혁명의 목표는 사회주의 혁명이 아닌, 민주주의 혁명 단계라고 결정했지만, 실제 이러한 결정과는 무관하게 중국과 조선의 여러 공산주의자들은 당대 혁명에 관해 입장이 서로 달랐다. 중국 공산당의 초기 지도자 및 간부들은 당시 중국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판단하기도 하였고, 몇몇은 코민테른의 결정을 파악하고, 이를 수용하되, 이러한 결정은 봉건적 지배가 강한 농촌에 한정된 문제이며, 도시에서는 부분적으로 사회주의를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마오쩌둥은 위와 같은 주관주의에 반대하였고, 중국 혁명 전체가 민주주의 혁명이며, 이에 따라 혁명의 행렬을 프롤레타리아만이 아니라, 소농, 중농, 민족자본가까지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선은 중국 공산당 내에서 매우 소수의 의견이었다. 이후 대장정을 거치면서 마오쩌둥의 입장이 주된 것으로 되었고 1942년 정풍운동을 통해 민주주의 혁명, 민족 해방 혁명 노선이 중국 공산당의 공식 노선으로 되었다.

2.2.1. 신식민지와 반봉건사회


마오쩌둥은 태평천국의 난을 중국 자유주의 혁명의 시초라고 평한적 있으며, 이를 시작으로 하여 신해혁명까지 이어졌다고 보았다. 그러나,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이루려는 열망은 여러 해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 및 이에 협조한 내부 매판 자본, 관료지주로 인해 실패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해석에서 등장하는 개념은 신식민지(新植民地)와 반봉건사회(半封建社會)라는 개념이다.
신식민지는 구(舊)식민지와 구별되는 용어로, 직접적인 지배가 존재하지 않는 식민지 사회라는 뜻이다. 즉, 제국주의는 세계 질서의 재편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하는데, 몇 가지 이유로 인해 지배의 대상이 되는 국가를 직접적으로 통치할 수도, 또는 대상이 되는 국가 내의 매판 세력을 이용해서 간접적인 지배 양식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태 중에서 후자를 신식민지라고 한다. 신식민지 사회에서 정부는 외형적으로 독립 국가의 형태를 보이며, 자체적인 정부로서 기능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외부 제국주의 세력이 세워놓은 괴뢰 정부로 피착취 민족을 기만하는 정권이다.
반봉건사회라는 개념은 본래 마르크스주의에 존재하지 않았던 개념이므로, 마오쩌둥이 독자적으로 창시한 개념이다. 반봉건-반자본주의(半封建半資本主義) 상태는 신식민지성으로 인해 완전한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진행되지 못 하는 사회 구성체를 의미한다. 단, 반봉건사회는 완전한 봉건사회와도 구분된다. 반봉건사회는 일반적인 토지 관계에서 지주와 소작농 사이의 봉건적 관계로 대표되지만, 일부 도시에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도사리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반봉건사회는 타락한 매판 세력과 제국주의 침략 세력의 동맹에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 구성체에서 도시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제국주의의 초과 착취를 위한 최소한의 투자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반봉건사회는 전체 생산양식의 진보를 막는 신식민지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마오쩌둥은 자유주의자의 봉기와 신식민지성이 공존하는 상황에서 중국은 반봉건-반자본주의의 정체성(政體性)을 확보하였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마오쩌둥은 확고한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신삼민주의(新三民主義)라 칭하였고, 앞서 서술한 반봉건-반자본주의 정체성이 확보되기까지의 민주주의 운동을 구삼민주의(舊三民主義)라고 규정하였다.

2.2.2. 신민주주의


부르주아의 힘으로 독립적인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던 삼민주의자들의 염원은 열강 세력의 침탈로 인해 이루기 요원한 것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형태의 인민정권을 구상하여 민족자본가와 노동자, 그리고 농민 세력이 연합된 신민주주의정부를 건설하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운동의 흐름을 '반제반봉건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라 칭하며, 마오쩌둥은 이것의 최초 격발을 5·4 운동으로 규정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신민주주의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과 다르다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1949년에 성립된 중국인민정부는 사회주의 혁명의 산물이 아닌, 신민주주의 혁명(이것은 보편적으로 인민민주주의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단계론 해석은 이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던 단계론과 상당히 다른 것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그는 바로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극좌모험주의적 경향과 당시의 권위주의적 군벌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반동적 의견을 모두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노선은 1930년대 김일성이 이끌던 빨치산파에 의해 수용되었으며,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인 호치민도 또한 이 노선을 받아들인다. 대한민국의 경우는 1980년대 NL계열이 한국 사회의 성격을 이 노선에 기반하여 해석했으며, 민중 민주 계파의 사회구성체론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신민주주의론은 인구의 대다수가 농민인 것과 동시에, 반공주의적 정서가 강했던 당시 중국 현실을 반영한 특수한 형태의 단계론인 것이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도 해당 시점의 단계를 신민주주의 단계라고 규정하였다. 따라서 그는 당시 중국 내 정파였던 민주연맹과 같은 자유주의자들과도 연합한다. 그리고 1958년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생산력을 산출하기 위한 대약진운동이 시작됐는데, 이도 역시 신민주주의론에 기초하여 시작된,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생산력 증강 정책이기도 하였다. 국유화, 국가 주도의 산업 자본 투자, 외세의 개입 차단, 민족자본가들과의 통일전선 등을 통한 자력 발전 요소는 종속 이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마오쩌둥 사상은 자본주의 발전 정도가 높은 국가에 한해서는 신민주주의노선이 아닌 사회주의혁명노선을 취해야 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마오쩌둥 사상은 신식민지 상태하에서 반봉건-반자본주의를 강요받는 국가에 적합한 것이며, 마오쩌둥 사상 자체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

2.3. 농촌 중심


얼핏 보면 그냥 노동자를 농민으로 바꾼 것 뿐 아니냐 싶지만, 사실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농민이 본질적으로 소부르주아지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혁명의 근간이 되기 어렵다'''고 본다. 근대 이후의 공업이 생산하는 제품들은 기존의 수공업품들에 비해 더 많은 양과 더 많은 작업양을 요구했기에 대규모 공장을 통한 협업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데 비해 농업은 개인이나 가족단위로 이루어질 수 있고, 이 때문에 농민은 자신과 가족이 경작할 땅을 나눠주는 토지개혁은 지지하지만 그 이상의 사회적 소유관계 재설정은 원하지 않고, 특히 '''농토를 공유화하려는 시도는 자기 땅을 빼앗아가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공장이나 기업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본가들과 똑같은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이유.[5] 이는 19세기 당시 선거에서도 프랑스를 비롯한 주요국가에서는 농촌이 보수적이고 도시가 진보적인 성향을 띄는 선거결과가 나왔던것에 기인한 것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이러한 선거결과나 농촌지역에서의 왕당파나 가톨릭 등의 세력이 큰 세를 얻는 현상을 보고 분석하면서 나온 결론이다.[6]
이 점이 유럽과는 달리 산업 발전이 늦어지고 도시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아시아, 아프리카제3세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변변히 근대적인 거대 도시라고 할 만한 지역이 없기 때문.
단, 마오주의가 집단농장에 강한 애착을 보이는 것이 꼭 산업화 기반이 늦게 형성된 중국의 역사적 상황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고 이론적인 이유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본격적인 혁명 이전의 마르크스주의가 이론적으로 “잉여생산물이 발생하는 사회에서 사유재산의 개념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연구했다면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고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공산주의 이론가들 사이에서도 현실세계에서 사유재산이 없어지기 위해서는 '''잉여생산물 자체가 없어지는 거 외에 방법이 없다'''는 사고방식이 퍼지기 시작했고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는 양측 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받아들인 형태로 봐야 한다.
그나마도 유럽 각국에게 적성국으로 인식된 소련의 경우는 적어도 국방력을 위한 잉여생산물의 필요성은 인정하는 입장이었으나[7] 비슷한 종류의 지정학적 위협이 적었던 중국의 경우는 모든 형태의 잉여생산물에 부정적이었고 이로 인해 스탈린주의의 5개년 계획마저도 비판하게 된다. 결국 잉여생산물의 존재에 대해 극단적으로 비판적인 마오주의의 입장에서 집단농장에 대한 긍정은 필연적인 수순이었던 것이다.

2.4. 당군 중심


정당이나 정치조직보다 게릴라 중심의 당군을 더 중요시하는 특징 역시 이런 농민 중심 혁명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복잡한 도시 내에서 노동조합, 정치조직이나 지하조직, 언론등을 기반으로 하여 세력을 넓힌 서구 마르크스주의에 비해 마오주의자들은 인구밀도가 낮은 농촌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다수의 농민을 세력기반에 포섭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넓은 활동영역이 필요했다. 이 점에서, 게릴라 및 군대의 형태로 광범위한 영역을 차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
즉, 서구 마르크스주의 정파들의 목표가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장하여 정부를 장악하는 것이었던 반면 '''마오주의자들의 목표는 군사력을 통하여 영역을 직접 지배함으로써''' 정부를 만드는 것에 가까웠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기존의 정부를 그대로 접수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자신들의 정부가 기존의 정부를 '대체'해야 한다고 생각했던데 비해 마오주의자들의 경우는 기존 정부로부터 영역을 빼앗아서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에 가까웠다'''.
이런 특징은 중국사에서 연이어 벌어졌던 태평천국 운동같은 농민반란과 밀접적인 관계가 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농민반란의 전통이 아주 강한 나라이고, 특히 한족 왕조로써 중국사와 중국의 정체성 확립에 큰 영향을 남긴 전한명나라의 경우 초대 황제가 농민 반란 주동자였던(즉, 농민이 주축이 된 반란으로 성립된) 왕조인 점이나 한/명의 전대 왕조였던 진/원이나 심지어 한나라 자체도 농민반란으로 쇠약해져서 멸망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중국의 역사에서는 농민 반란의 영향력이 아주 강했고, 마오이즘 역시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이상으로 중국의 농민반란 전통에 기반한 부분이 크다는 것. 게다가 오랜 역사동안 세계 최강대국이자 최선진국 중 하나였던 중국이 근대 이후 세계의 환자로 전락하면서,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중국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서구의 사상적 요소를 흡수하여 기반으로 삼은 태평천국 운동과 마오이즘 사이에 공통적인 특징이 상당하다는 점 역시 알 수 있다.

2.5. 반엘리트주의


마오주의는 스탈린주의와 달리 반엘리트주의이다. 스탈린주의(또는 레닌주의)는 전위당을 이끌어가는 소수의 직업적 혁명가의 역할을 중요시했고,[8] 이 점은 나중에 러시아에서 공산체제 성립후에 특유의 관료주의로 변화하지만, 마오주의는 이런 소수의 엘리트주의보다는 대중의 집단적 행동이나 각성을 중시한다. 그리하여 마오쩌둥의 군사사상은 군에서도 장교라는 엘리트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 계급이 없다가 국방부장 펑더화이의 주도로 도입되었으나, 이렇게 어렵게 도입된 계급제도는 후에 다시 실권을 찾은 마오쩌둥이 다시 폐지했다. 마오주의에서 이런 반엘리트주의가 극단적으로 강조되면서 반지성주의로까지 변질돼 벌어진 참극이 바로 문화대혁명이다.

2.6. 군사 이론



2.6.1. 지구전


『지구전론』은 마오쩌둥옌안에서 1938년 5월 26일 ~ 1938년 6월 3일까지 논의한 『항일전쟁전략』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공산당 내 존재했던 중일전쟁 성격 논증 이론인 중국필망론(中國必亡論)과 중국속승론(中國速勝論)을 모두 비판하였다. 그는 중일전쟁이 장기화가 될 것이라 예측했으며, 이러한 장기화 된 전쟁에 걸맞는 게릴라전을 구상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군사력이 열악한 홍군의 특성과, 도시 점령을 위주로 활동하는 일본군과 당시 중국 군벌의 속성을 고려했으며, 대부분의 중국 인민이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여, 전쟁에서 자원이 되는 것은 가시적으로 보이는 군수물자와 식량만이 아닌, 인심(人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인심(人心)은 유동적이며 물과 같기 때문에 홍군의 주력도 유동적이어야 한며, 이러한 인심의 유동성은 곧 대중의 요구에 부여된 유동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전쟁 속에서도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켜서 지지를 얻어야 하지만, 도시에 속한 인민은 군벌의 손아귀에 있으며 군벌의 지배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인민은 농촌 지역에 있는 농민이기 때문에 이들의 인심을 얻어 그것을 힘으로 사용하는 '고도로 정치화 된 군대'를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아울러 도시를 점(点), 도로를 선(線), 농촌을 면(面)으로 구분한 다음, 일정하게 뭉쳐져 있는 면의 집단을 구(區)라고 칭하였으며, 공산당의 영향력이 확고한 구(區)를 해방구(解放區)라고 칭했다. 여기서 그는 해방구의 단위를 이루는 면(面)의 유동성과 신축성을 조명하며, 해방구는 유동적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면이 유동적인 이유는 적군의 감시가 이뤄지기 힘들며, 넓은 면적을 갖고 있기에 이동 범위가 넓기 때문이다. 또한 신축성이 높은 이유는, 면의 대부분이 농촌이고, 농촌은 식량을 담당하는 식량기지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는 공산당에 대적하는 적이 설사 해당 지역이 해방구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고 쉽사리 그곳 지역을 탈환하기 어려우며, 농촌은 대가족 사회이므로 인민이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작은 탄압도 커다란 반발을 불러올 수 있고, 만약 다른 곳의 해방구가 무너진다면 즉각적으로 해방구가 아닌 곳을 해방구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들 외에도 주도성, 계획성 등의 개념이 나오며, 전투 방식으로는 유격전, 진지전, 기동전, 소모전, 섬멸전 등을 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구전론에서 마오쩌둥은 병사 개개의 역량 강화를 강조하고 있다. 혁명에 나선 병사는 단순히 전투와 수동적 복종을 위한 병사가 아닌, 매사 스스로 다양한 지식을 학습하고 인민으로부터 배우는 동시에 그들의 혁명 역량을 고취시킬 수 있는 이념의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즉, 마오쩌둥 사상에서 병사 개개의 정예주의는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승리는 "인심을 얼마나 얻느냐", 그리고 "유격전을 어떻게 지휘하느냐", 마지막으로 "병사의 지적 역량을 얼마나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달렸다고 보았고, 바로 이 능력 전반을 지구력(持久力)이라고 하였기에 『지구전론』(持久戰論)이라 한 것이다.
『지구전론』의 특이할 점은, 군사 행위는 단순한 무력 충돌이 아닌 고도의 정치라는 점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지구전론은 단순히 무력이 총동원되는 전쟁 상황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논리가 아니다. 이는 문화투쟁과 정당투쟁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 논리이다.

3. 평가


한국에 흔히 스탈린이 정립한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지배했고 마오주의는 기껏해야 공산주의에서의 아류, 별종 정도인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사실 고전적인 스탈린식 마르크스-레닌주의로 혁명을 이룬 예는 러시아밖에 없다. 동유럽과 북한은 혁명이라기보다는 소련군 진주로 공산화된 것이고, 실제로 냉전 이후 제3세계의 공산 반군들은 대부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마오주의를 이용해 혁명 운동을 벌였다.[9]
20세기 이후 대부분의 산업화된 선진국에서는 사회복지제도의 구축, 국가의 개입을 긍정하는 수정자본주의 개념의 도입등으로 인하여 공산주의 혁명 운동의 위세가 크게 위축되고, 제도권 정치 내에서의 개혁을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 계열 정당들이 혁명적 공산당의 자리를 대체하였다. 즉, 고도로 산업화되고 도시화율이 높은 국가들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시도될 가능성이 크게 낮아진 것. 따라서 공산주의 혁명이 시도되던 국가는 주로 농업비중이 높고 도시화율이 낮은 국가들이었고, 이런 환경에 더 적절한 노선은 마오주의였던 것.
세계적으로 보면 의외로 이 사상을 표방하는 반군이 많다. 이미 쿠바베트남은 마오쩌둥이 정립한 게릴라 전술로 공산화된 대표적 나라고, 베트남 공산당은 중월전쟁 직전까지 마오주의를 호찌민주의와 함께 당의 정강으로 삼았다. 중국과의 사이가 악화되자 마오주의는 삭제(…). 마찬가지로 체 게바라도 마오쩌둥에 심취해 있었고, 이 때문에 소련은 쿠바를 벗어나 제3세계에서 혁명 운동을 하는 게바라에게 매우 냉담하게 대했다. 심지어 체 게바라의 포코 이론 자체가 마오주의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이어 캄보디아, 라오스도 마찬가지다. 네팔의 왕정 폐지에도 마오주의자들이 큰 역할을 했다. 남미와 아프리카에서도 마오주의를 표방하는 반군이나 혁명 조직이 상당수 있었다.
대체로 공업화 정도가 높은 국가에서는 유러코뮤니즘과 트로츠키주의[10], 낮은 국가에서는 마오주의가 영향력이 큰 편. 이는 빈부 격차가 크며, 농업 비중이 높은 국가들에서는 아무래도 마오쩌둥 당시에 중국화한 마오주의가 실정상 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
예를 들어 마오주의자들이 무척이나 혐오하는 화폐 경제 체제를 보더라도 사실 전 세계적으로 은행 통장이든, 집에 숨겨둔 비상금이든 양수의 화폐 자산을 가진 사람의 비율은 10%가 채 되지 않는다. 또 더욱 놀라운 사실은 자산보다 빚이 더 많은 사람, 즉 음수의 화폐 자산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은행을 중심으로 한 화폐 유통 체계에 편입된 사람의 비율조차 40%가 채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11] 그 외의 사람들은 설령 화폐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단순히 노동의 대가로 받아 다른 상품과 교환하는 수단으로 이용할 뿐, 축적의 수단으로 사용할 여지는 갖지 못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설령 화폐가 당장 폐지된다고 하더라도 당장 통장에 돈을 넣어놓은 사람들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동구권 붕괴 이후에도 여기저기에서 마오주의를 표방하는 반군들이 사라지지는 않는 데에는 이런 배경도 있는 것.
그런고로 21세기에 마오이즘을 표방한 단체는 대부분 저개발 국가나 산간 오지(...)에 있다는 태생적 한계가 있기도 하다. 마오이즘을 넘기 위해 도시 게릴라 전술이 잠시 개발된 적이 있으나, 이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4. 현대 중국의 마오주의


중국은 대외적으로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는 나라이며, 마오주의는 중국 공산당의 당령이기도 한데다 중국인마오쩌둥쑨원 이상의 국부로 여기도록 교육받고, 애초에 마오주의의 시작이 소련의 사회주의를 중국 풍토에 맞게 적용하면서 탄생한 이념이지만, '''정작 오늘날 중국에서 마오주의를 따르는 것은 불법이다.'''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인 베이징대학의 한 독서 그룹 소속 학생이 마오주의를 보급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체포, 구속되기도 했으며, 마오쩌둥 체제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중국 마오쩌둥주의 공산당도 있으나 중국 내에서의 활동이 금지되었고 관련 인물들은 수배중에 있다.
덩샤오핑 집권 이후 소위 덩샤오핑 사상으로 대표되는 중국 정부에서 도입한 시장경제체제 또한 마오주의 박해의 이유 중 하나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중국 공산당에서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인사들의 대다수는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 당시에 정계에 진출한 인사들이며, 정통 마오주의 노선을 고수하는 파벌은 아니다. 오늘날 중국은 마오쩌둥 집권기 후반부에 일어난 문화대혁명 같은 흑역사에 대해서는 중국 공산당에서 해당 사건에 대한 언급 자체를 금지하고 있는데, 마오주의와 마오쩌둥을 추종하는 무리가 다시 생겨날 경우 좋든 싫든 이들이 문화대혁명의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게 되고, 사회적으로 마오쩌둥의 부정적인 행적이 공공연하게 유포될 위험이 있다. 이는 곧 중국의 역사적 치부, 정치적 안정성과 직결되는 문제다.

5. 세계의 마오주의


의외로 흔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우선 종교가 아닌 이념을 따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종교, 이념, 사회적 집단에 속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쉽고 사고방식이 유연하기에 그만큼 게릴라전을 잘 한다. 현지 주민과의 관계도 종교에 기반을 둔 자들보다 양호한 편이다. 특히 네팔이나 한창 내전 시절 페루, 인도의 붉은 회랑 같이 여전히 세계 자본주의 체제 편입이 더디고, 영농 사회구조가 여전히 강력하며, 자본주의적 모순 뿐만 아니라 카스트 제도 같은 봉건주의적 악습으로 '''고통받는 사회일 경우 마오이즘은 미친 듯이 퍼져나가게 된다.'''
제3세계 각국에서 마오이즘을 추종하는 혁명조직이 형성되었으며 중국은 이러한 세력들을 전략적으로 지원하였는데, 중소 분쟁의 영향으로 마오이즘을 따르는 공산당들은 소련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공산당들과 대립하는 일이 많았다.
팔레스타인의 무장단체 중 팔레스타인 인민 해방 전선은 마오이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후에 마오이즘을 표방하는 팔레스타인 해방 민주 전선이 갈려져 나갔다. 두 단체 모두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에 참여하고 있다. 현재 파타 역시 여기에 해당된다.
네팔에서는 게릴라전을 통해 왕정을 전복하는데 1등공신이었다. 2008년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자 2008년 선거로 집권했다. 하지만 당내 내분으로 2013년 선거에서 레닌주의 공산당에 의석 반수를 잃으며 참패했다. 그래도 참패해도 여당에서 1야당이 되는 정도였으며 2018년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당과 합당하였다. 현재 반다리 대통령도 전에 이 정당 소속이었다.(현재는 무소속) 자세한 건 네팔 문서를 참고할 것.
그 밖에도 인도 동부 차티스가르 주 및 서벵골 주 등 여러 주에도 마오이즘 반군 낙살라이트(Naxalite)[12]가 있는데 이들도 장난이 아니다. 뻑하면 경찰이 전투하다가 몇 명이 전사했다는 기사가 날 정도. 2009년만 해도 이들 테러에 민, 경 합쳐 인도에서 906명이 죽었다. 참고로 파키스탄과 으르렁거리고 미국이나 유럽도 끼어들지 못하는 화약고인 잠무 카슈미르에서 그 해 사망자가 민, 군 합쳐서 132명이라는 걸 생각하면 카슈미르보다 더한 내전급이다. 2011년 통계로 20년동안 1만 6천명이 넘게 죽은 걸로 나올 정도이며 인도 정부에서는 아예 이스라엘에서 UAV를 구입해 반군들을 감시하며 군대와 경찰, 특수부대까지 동원해서 반군을 토벌하고 있다.
낙살라이트 반군은 인도 공산당 CPI/CPM 합법투쟁파와도 사이가 좋지 않다. 의회민주주의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이들이 낙살라이트에게 공격당하기도 하고 역으로 공격하기도 한다.
이들이 활동하는 차티스가르 주에 상당수 사는 소수민족들은 인도에서 가장 가난하며 이들의 재산인 땅도 억지로 빼앗기는 판국이라 낙살라이트들 지지가 장난아니다. 게다가 이 곳은 석탄이나 광물자원, 심지어 다이아몬드까지 있는 곳이기에 바로 낙살라이트가 군비를 얻을 겸 활동을 자리잡은 곳이다. 물론 인도 정부로서도 이 막대한 자원을 그냥 놔둘리 없지만, 힘없는 이들 땅을 헐값으로 빼앗아가는 게 문제. 2014년 인도 진보계열 야당 의원들이 낙살라이트를 스스로 만드는 게 정부라며 부조리한 보상 정책을 전면 수정할 것을 결의해 이 지역 사람들이 기뻐하나 했지만 막대한 로비를 휘두르는 대기업들, 현지 부유층의 반발에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결의안을 머뭇거리고 있고 낙살라이트는 테러로 저항하고 있다. 그래도 2007년과 2013년 낙살라이트 활동 권역을 비교하면 테러 활동이 줄어들긴 했다. 위키백과 낙살라이트 항목
인도 측 고민이라면 저 광물자원 판매수익이 꽤 좋아서 나날이 낙살라이트가 무장 수준이 높아지는 점이다. 이젠 IED까지 마구 만들어 인도군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다. 그나마 카스트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없애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심하게 망가진 편은 아니다.
또 페루에서도 마오이스트 반군이 활동하던 때가 있었고, 필리핀에서도 NPA라는 이름으로 마오이스트 반군이 활동하고 있다.
미국에도 60년대에 마오이즘에 영향을 받아 흑인 급진주의 무장단체가 출현하였다. 흑표당 항목 참조.
60년대에 콩고 내전 당시 친공세력은 마오주의식 게릴라 전술을 채택했다.

6. 참고 자료


  • 마오쩌둥 어록 - 정식 이름은 "마오 주석 어록"이다. 국제적으로 성경과 더불어 가장 많이 팔린 책.(...) 해당 문서 참고.
  • 중국 여인(La Chinoise) - 장 뤽 고다르의 영화. 지금 보면 다소 아스트랄한 작품이다.#
  • 신민주주의

[1] 마오쩌둥 사상[2] 마오쩌둥 어록과 선집을 혼동하는데, 이 둘은 전혀 다르다. 어록은 마오쩌둥의 여러 저작과 연설문에서 간지나는 구절만을 뽑아놓은 일종의 잠언집에 불과하지만, 선집은 마오쩌둥 사상의 핵심이 담겨있다. 마오쩌둥 선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글 3편을 노삼편(老三編)이라고 하며, "위인민복무(인민을 위해 일하자)", "우공이산", "기념백구은(닥터 베쑨을 추모하며)"이다.[3] 중공에서도 실정이라 인정하는 문혁이 어째 중국의 국가체제를 이루는 핵심 사상에 크게 반영 되는 가 의아한 위키러도 있을 텐데, 중공은 4인방모택동에게 잘못된 선동을 저질러 모택동이 그만 실정을 하고 말았다는 논리를 주장한다. [4] 인민전쟁론이라고도 부름 [5] 이에 비하면 공장 노동자들은 생산 시설의 공유화에 별다른 저항감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공장이 국가 소유가 되건, 조합 소유가 되건 애초에 자기 것이 아니었고 혼자나 가족끼리 운영할 수 있는것도 아니니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는 셈.[6] 한국에서는 이를 여촌야도라고 불러졌다.[7] 사실 마오쩌둥과 달리 스탈린의 경우는 실제로 스탈린 본인이 위와 같은 이론적 견해를 가지고 집산화를 추진했는지 여부는 전혀 명확하지 않다. 현대의 사회주의 연구가들도 중국이 아닌 스탈린 치하 소련에서의 집산화는 스탈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러시아의 시대적 한계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즉 당시의 러시아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사회가 농노제 없이 운영될 수도 있다는 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진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트로츠키가 축출 당한 사건을 폭정의 시작으로 보기도 하나, 정작 그 트로츠키야말로 농업을 반드시 집산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밀어붙였던 인물이며 이 부분에선 스탈린보다도 더 적극적이었다.[8] 현대 노동운동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의 사상적 위치가 예상 외로 그다지 절대적이지 않은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 레닌 시기에 성립한 엘리트주의로 인해 노동조합의 역할이 부록 수준으로 밀려났다는 비판이 있기 때문이다.[9] 자력으로 집권한 유고슬라비아요시프 티토알바니아엔베르 호자조차도 항독 게릴라전으로 집권했으니, 고전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무관하게 집권한 것이나 다름 없다.[10] 이는 남한도 마찬가지이다. 남한 운동판에서 레닌주의를 표방하는 단위들은 전국 노동자 정치 협회(노정협)이나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 정도를 제외하면 어떠한 형태로든 범(凡)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노동자 연대(이쪽은 그냥 마르크스주의로 정체화하고, 정통 트로츠키주의와는 거리가 있다.), 볼셰비키 그룹,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 현장 투쟁 위원회(노건투), 사회변혁노동자당(변혁당) 일부에 이르기까지. 변혁당은 트로츠키주의 + 유러코뮤니즘 + 스탈린과 트로츠키 모두 반대하는 레닌주의가 어지럽게 혼재하고 있다. 사회진보연대와 전국학생행진이 루이 알튀세르의 입장을 따른다는 점에서 범마오주의로 분류할 수도 있지만, 이쪽은 정통 마오이즘과는 거리가 멀다.[11]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을 해서 받는 임금이 통장으로 입금되고, (신용 카드를 사용하던 현금을 인출해서 들고 다니건) 소비를 위한 지출 역시 은행을 통해 하는 식으로 모든 수입과 지출이 은행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화폐 유통 체계에 편입된 사람의 수가 세계 인구 중 절반이 조금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체계에 편입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수입과 소비가 세계 규모의 화폐 유통 체계의 일부가 되고, 수입과 지출, 자산과 신용이 모두 은행을 중심으로 한 표준적 화폐 체계로 계량되고 측정될 수 있다. 이에 비해 다른 60%의 사람들은 이 체계에 편입되어 있지 않으므로, 화폐를 사용하더라도 다른 재화와 자유롭게 교환 가능한 일종의 만능 교환 재화로써 사용하는 것이지 화폐 유통 체제의 일부는 아니라는 것.[12] 인도에서는 마오이스트를 부르는 용어로 마오이스트하고 낙살라이트를 혼용해서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