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편제
1. 개요
일본군의 편제를 설명하는 항목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국의 방위를 담당하는 자위대의 편제를 알고 싶으면 자위대/편성을 참고하라.
2. 일본 육군
평시에는 사단-연대-대대-중대-내무반 이라는 간략한 편제로 사단 단위로 존재하며 중대 아래 소대와 분대가 없다.
전시에는 총군-방면군-군-사단-여단-연대-대대-중대-소대-분대 순의 편제가 된다.
이중에서 '군'의 존재 때문에 헷갈리게 되는데 이름과 달리 서방의 '군단'과 동급이다.
일본군의 장성 계급이 대장-중장-소장으로 꼴랑 3단계여서 총군사령관(대장)-방면군사령관(대장)-군사령관(중장)-사단장(중장)-여단장(소장)-연대장(대좌)순이다. 가끔 방면군 사령관에 중장, 여단장에 중장이 임명될 때도 있다.
서방에서는 '준장'계급이 있어 여단장이 준장이거나, 독일은 대장 위에 '상급대장', '원수'계급이 즐비하여 상급 사령관을 맡고 있어 계급상 상하관계가 확실하다.
2.1. 총군
2.2. 방면군
일본에서는 '方面軍'으로 표기하나, 서방 기준으로는 '군(Army)'에 불과 하다. 통상 대장 보직이나 부대 규모에 따라 중장이 임명되기도 한다.
조선군(일본제국)의 경우 독립적으로 존재 하다가, 일제 패망직전인 1945년 2월 6일에 조선군관구로 개칭되며 새로 창설된 제17방면군 소속이 되어 한반도 남부 및 제주도를 담당하였다.
2.3. 군
일본에서는 "軍"이라고 표기하나, 서방기준으로는 '군단(corps)'급에 불과하다.
일본군은 평시에는 연대 또는 사단 단위로 존재 하며 전시에만 상급부대를 편제하는 시스템이다. 즉 전시인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때만 일시적으로 '군'이 편제 되어 사단들을 지휘 한다. 최초의 '군'은 청일전쟁 전해인 1894년에 창설 되었다. 이때만 해도 군 사령관은 대장 급이였으나, 이후 통상 중장으로 임명되는 것이 보통이다.
- 청일전쟁 이전
- 제1군, 제2군, 제3군, 제4군 : 청일전쟁을 위해 1894년에 편성 되어 1년 만에 해산 된다. 이후 러일전쟁을 위해 2차로 1904년~1905년까지 존재 하였으며, 중일전쟁을 위해 3차로 1907년에 편성되어 패망까지 싸운다.
- 웨이하이점령군(威海衛占領軍) :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산둥성 북부에 있는 웨이하이시를 점령하기 위해 1895년 4월에 편성한 부대였다. 1898년 5월에 해산 하였으며 산하에 혼성11여단, 혼성2여단 밖에 없는 작은 부대로 군 사령관도 '소장'급 이었다.
- 압록강군(鴨緑江軍) : 러일전쟁을 위해 1905년 1월에 편성되어 되어 제1~4군과 함께 만주군(방면군 급)에 편입되어 한반도에 배치 된다. 이후 봉천 전투에 참가 하였다가 1906년 1월에 해산 된다. 예하에 11사단, 후비 제1사단을 두었다.
- 랴오둥 수비군(遼東守備軍) : 랴오둥 반도를 수비하기 위해 1904년 8월 14일에 편성되어 1905년 4월 27일에 해산하였다. 후비보병제33ㆍ48연대와 후비보병제15ㆍ4여단을 두었다.
- 칭다오 수비군(青島守備軍) : 중국 산둥성 동부 칭다오시를 수비하기 위해 1914년 11월에 편성 되었다가 1922년 12월 해산 된다. 사령관은 중장이나 산하에 칭다오수비대(소장급, 4개 대대) 밖에 없었다.
- 조선군 : 조선주차군이 1904년 3월 11에 조선군으로 개편되었고, 1945년 조선군관구, 제17방면군으로 사실상 개편 되었다가 1945년 9월 9일 해산 되었다. 가장 오랜 시간 존재 하였던 군사령부. 통상 군사령관은 중장이나 가끔 대장에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군 시절에는 산하에 19사단과 20사단을 두었다. 자세한 것은 조선군(일본제국) 문서 참조.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浦塩派遣軍) : 1차세계대전 시베리아 출병을 위해 1918년 8월에 편성 되었다.
-사할린 파견군(サガレン州派遣軍)
- 웨이하이점령군(威海衛占領軍) :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에 따라 산둥성 북부에 있는 웨이하이시를 점령하기 위해 1895년 4월에 편성한 부대였다. 1898년 5월에 해산 하였으며 산하에 혼성11여단, 혼성2여단 밖에 없는 작은 부대로 군 사령관도 '소장'급 이었다.
- 압록강군(鴨緑江軍) : 러일전쟁을 위해 1905년 1월에 편성되어 되어 제1~4군과 함께 만주군(방면군 급)에 편입되어 한반도에 배치 된다. 이후 봉천 전투에 참가 하였다가 1906년 1월에 해산 된다. 예하에 11사단, 후비 제1사단을 두었다.
- 랴오둥 수비군(遼東守備軍) : 랴오둥 반도를 수비하기 위해 1904년 8월 14일에 편성되어 1905년 4월 27일에 해산하였다. 후비보병제33ㆍ48연대와 후비보병제15ㆍ4여단을 두었다.
- 칭다오 수비군(青島守備軍) : 중국 산둥성 동부 칭다오시를 수비하기 위해 1914년 11월에 편성 되었다가 1922년 12월 해산 된다. 사령관은 중장이나 산하에 칭다오수비대(소장급, 4개 대대) 밖에 없었다.
- 조선군 : 조선주차군이 1904년 3월 11에 조선군으로 개편되었고, 1945년 조선군관구, 제17방면군으로 사실상 개편 되었다가 1945년 9월 9일 해산 되었다. 가장 오랜 시간 존재 하였던 군사령부. 통상 군사령관은 중장이나 가끔 대장에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군 시절에는 산하에 19사단과 20사단을 두었다. 자세한 것은 조선군(일본제국) 문서 참조.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浦塩派遣軍) : 1차세계대전 시베리아 출병을 위해 1918년 8월에 편성 되었다.
-사할린 파견군(サガレン州派遣軍)
2.4. 사단 편제
2.4.1. 진대 편제
초창기에는 보병연대 중심으로 편제하였다. 1870년 프랑스군을 본보기로 천황의 군대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71년에는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번에서 번병을 차출시켜 중앙군인 어친병을 만드는 한편, 지방의 치안담당을 위해 번병을 재편성하여 도쿄, 오사카, 친제이(구마모토), 도호쿠(센다이)의 4개 진대를 설치 하였다. 72년에는 어친병을 근위병으로 개칭하고, 73년에는 나고야와 히로시마에 진대가 설치되어 6개 진대 체제를 만들었다. 4월부터 징병제가 시작되어 평민출신이 각 진대에 입대하였고 74년에는 최초의 보병연대 9개가 처음 편성되었고, 각 연대는 천황의 군대를 상징하는 군기(연대기)를 천황으로 부터 수여 받았다.(자세한 것은 일본군/역사 참조)
진대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1873년 1월 도쿄 진대의 예)
보병연대(도쿄 소재, 각 보병대대 2개)
보병연대(사쿠라 소재)
보병연대(니가타 소재)
기병대대 2개
포병소대 2개
공병소대
치중대
예비포병소대 4개
해안포대(시나가와, 요코하마, 니가타 소재)
보병연대의 수는 78년에는 15개였지만, 84년에 3개 증설, 85년에 4개 증설, 86년에 5개 증설, 87년 1개 증설로 총 28개 연대가 된다.
2.4.2. 청일전쟁 당시 사단 편제
사실 진대 편제 중에서도 초창기부터 프랑스 군제를 따라야 하나, 프로이센 군제를 따라야 하나 다소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년~71년)에서 프랑스가 프러시아에게 패하면서 대세는 프로이센 군제를 따르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이에 일본육사의 교관도 최초의 프랑스 교관에서 프로이센 교관이자 일본군사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멕켈 소령으로 교체하였고, 1886년에는 모범병제를 프랑스식에서 독일식으로 바뀌게 된다. 다만 이와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군의 특징인 백병 돌격전과 기병 중시 전술은(프로이센은 신속한 기동으로 화력 집중 전술) 일본군의 스타일이 딱 맞았는지, 일본군 멸망 때 까지 이어지게 된다.(단 러일전쟁시기는 화력주의 채택, 러시아군은 백병주의)
1888년에는 기존에 설치된 6개 진대를 폐지하고 1사단~6사단을 새로 편성하였고, 91년에는 근위병을 근위(고노에)사단으로 편성한다. 이때 단순히 명칭을 사단으로 변경 한 것이 아니라 부대의 군사적 성격이 변화하게 된다. 진대란 일정 담당 지역을 방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사단은 전략 단위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기동성을 갖추었다. 이는 명백히 대륙에서 전투를 염두에 둔 조직이였다.
청일전쟁 한 해 전인 1893년경 사단 편제는 다음과 같다.
사단 총원 18,000명, 말 약 5,500마리
└사단사령부(175명, 95필)
보병여단(5,806명, 752필)-보병연대(2,896명, 188필) 2개-보병대대 3개–보병중대 4개
└여단사령부((14명, 9필)
기병대대(509명, 488필)-기병중대 3개
야포병연대(1,267명, 944필)-야포병대대 2개, 산포병대대 1개–각 2개중대
공병대대(525명, 239필)-공병중대2개
대가교종열(大架橋縱列, 336명, 239필)
소가교종열(120명, 78필)
탄약대대(1,505명, 1,287필)
치중병대대(輜重兵, 1,328명, 1,345필)
위생대(416명, 51필)
야전병원(116명, 44필) 6개
대소가교종열은 이름 그대로 가교(다리) 설치 부대이며, 치중병은 보급부대를 뜻한다. 야포병연대는 70밀리 야포로 무장했으며, 이외에도 경량화 되어 분해 운반이 가능한 산포로 무장한 산포병연대도 존재한다. 중포병 연대는 1차대전기인 1918년에서야 6개 연대가 등장한다.
방면군 사령관에는 대장(또는 중장), 군 사령관은 중장, 사단장은 중장, 여단장은 소장(또는 중장), 연대장은 대좌가 임명된다. 평시에도 보급/행정부대를 간소화 하여[2] 전투부대 비중이 높도록 편제가 되어 있다. 청일·러일 전쟁 시기에는 사단정원중 보병여단 2개가 차지하는 비율이 60%정도였으며, 훗날 중일전쟁 때에는 60~65%를 차지한다. 이런 극단적인 보급/행정/전투지원부대 경시 풍조는 두고두고 일본군의 발목을 잡게 된다.
보병연대는 사단내에서도 핵심이라 천황이 내리는 군기(연대기라고도 함)가 수여되었고, 1896년부터 기병대대가 기병연대로 확장되자 역시 연대기가 수여 되었다. 그런데 기병연대가 말대신 차량을 이용하게 되자, 이건 천황의 군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군기가 반납(...)되었다. 물론 신편되는 기갑연대 같은 곳에도 군기는 수여되지 않았다.
이러한 보병 2개여단, 4개연대로 구성되는 4각편제는 1차대전 당시만 해도 유럽군은 물론 미군의 일반적인 편제였다. 그러나 이후 세계적인 기조가 각종 전투지원부대의 강화와 전투부대 지휘부담을 덜기 위해 3각 편제로 바뀐다. 일본군의 경우는 그보다는 각 사단에서 1개 연대씩 차출하여 신편 사단을 만들기 위해 저절로 3각편제가 되어 중일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나 정통있는 사단들은 가능하면 4각 편제를 유지할려 했기 때문에 3각편제와 4각편제가 혼재되었다.
어느 군대와 마찬가지로 일본군 역시 전시편제와 평시편제가 있었는데, 평시에는 수송∙위생 관계 부대 대부분과 전투부대 일부를 결원으로 남겨 두고, 전시에만 동원령을 발동해 정원에 맞게 보충하는 것이다.
청일 전쟁 중인 94년에 1개 사단이 증설되는데, 연대는 진대시절 편성된 그대로인 28개 체제로 진대가 사단으로 변환된 88년 이후 추가된 연대는 없었다.
2.4.3. 러일전쟁 당시 사단 편제
기존의 8개 사단(근위, 1~7사단)에 더하여, 러일전쟁 직전인 1898년 5개 사단(8사단~12사단) 20개 연대를 추가로 증설한다.[3]
러일전쟁 당시인 1899년 기준으로 사단 편제는 다음과 같다.
사단 총원 18,360명~18,400명, 5020~5490필
└사단사령부(230병, 120필)
보병여단(5,817명, 443필) 2개–보병연대(2919명, 216필) 2개–보병대대 3개–보병중대 4개
└여단사령부(19명, 11필)
갑종 기병연대(724명, 679필)-기병중대 4개
※을종 기병연대(519명, 484필)-기병중대 3개
야포병연대(1,190명, 1,047필)-포병대대 3개-포병중대2개
※산포병연대(1,369명, 782명)
공병대대(788명, 110필)
가교종렬(345명, 216필)
갑종 탄약대대(741명, 562필)
갑종 치중병대대(1,530명, 1,186필)
위생대(487명, 60필)
야전병원(104명, 28필) 6개
기병의 경우 4개 중대 체제인 갑종 연대와 3개 중대 체제인 을종 연대가 있다. 포병은 청일전쟁 당시는 1개 연대 안에 2개 야포병 대대, 1개 산포병 대대가 있었는데, 러일전쟁 편제에서는 야포병 연대와 산포병 연대중 택1 하도록 변경되었다. 탄약대대와 치중병 대대는 갑종과 을종이 있었는지, 또는 일부 갑종 사단에만 편제 되어 있었는지 불명.
1886년에 도입된 프로이센 군제로 화력주의를 채택한 일본군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러일전쟁을 참관한 유럽열강은 기존의 백병주의를 화력주의로 변경하게 되었고, 특히 중기관총과 중포(150밀리 이상의 유탄포 혹은 100밀리 이상의 캐논포)를 개발하여 집중 배치 하였다.
그런데 정작 승리한 일본군은 화력주의 노노! 백병주의 OKOK! 라는 희한한 결론을 내려 다시 프랑스식 백병주의로 회기하게 된다.
러일전쟁이 종료한 1905년에는 4개 사단 16개 보병연대 5개 포병연대, 3개 기병연대가 창설되어 총 17개 사단 68개 연대, 24개 야산포병연대, 20개 기병연대 체제가 되었다.
이후 <제국국방방침>에서 ‘제국궁방에 필요한 병력’으로 1907년에는 평시 25개 사단, 전시 50개 사단을 규정하고, 18년에는 전시 40개 사단, 23년에는 작전초동병력 40개 사단, 36년에는 작전초동 병력 50개 사단에 항공 140개 중대를 목표로 하게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07년에는 2개사단, 1개 포병연대, 대만보병 1,2연대(독립 연대), 08년에는 8개 보병연대가 창설되었다.
16년에는 조선에 7개 보병연대를 창설하고 이를 중심으로 나남(청진)에 주둔하는 19사단을 창설하고, 19년에는 서울 용산에 20사단을 창설한다(부족분 1개 연대는 20년 창설). 앞서 18년에는 1차세계대전에서의 대포병전에 자극을 받아 야전중포병 연대 6개를 창설한다.
2.4.4. 군축과 상설사단 일람
1차세계대전 종결후 채결된 워싱턴조약으로 해군예산이 줄어들었다. 이에 세수대비 재정압박이 심한 육군 예산 역시 삼각하라는 요구가 높아서 1922년 8월 야마나시 한조 육군대신에 의한 군축이 일어난다.
19년 기준으로 육군은 260,753명(해군 77,626명), 21년 기준으로 21개 사단 86개 보병연대, 30개 야산포병연대, 6개 중포병연대, 29개 기병연대로 구성되었다.[4]
야마나시 1차 군축으로 육군 정원을 장교 2,268명, 준사관 이하 5만 7,296명, 말 1만 3천필을 삭감하고, 각종 단위부대에서 대대까지는 건드리지 않고 보병 252개, 기병 29개, 공병 7개, 치중대 9개 등 중대급에 한해서 폐지하여 감축하는등 육군을 크게 자극하지 않는 정도의 온건한 방식이였다. 단 육군 전반에 만연한 포병 경시 풍조 때문인지 야산포병 만은 9개 연대급이 감축되고 대신 독립 야산포병연대 2개, 중포병 연대 2개가 증설되었다.
다음해인 23년 4월의 야마나시 2차 군축에서는 요새·학교·관청을 대상으로한 감축이 있어 1·2차 합계 4,033만 엔의 경비가 절약 되었다.
그러나 25년에는 우가키 가즈시게 육군대신의 주도로 대규모 군축이 이루어졌는데, 우가키 군축은 기존의 야마나시 군축처럼 온건한 방식이 아니라, 4개 사단 16개 연대, 기병/야포병 각 4개연대, 공병/치중병 각 4대대 등, 총 4개 사단을 일거에 삭감하여 병력 총 감축은 3만3,900명, 말 6,000필에 그쳤다.[5] 여기에 27년부터는 기존의 현역 복무기간을 2년 6개월에서 2년으로 단축 시켰다.
이러한 3차에 걸친 군축으로 절약된 인원과 예산 중 일부로 전차부대·항공대·고사포 부대 창설을 포함하여 장비의 근대화에 힘을 썼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26년에 전차 독립 1개중대(10대), 28년에 6개 비행대대를 창설하였다.
군축이 끝난 25년 기준으로 육군 사단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상 17개 사단이 상설 사단이라 하여 명문 대접을 받았고, 향후 전선이 확장되면서 대부분 관동군에 배치된다(상대적으로 중국전선과 남방전선은 대부분 신설사단 배치됨). 폐지된 4개 사단은 25년 5월 1일 우가키 군축으로 일시에 감축되었다. 위의 표에는 없지만 22년에 창설된 대만 1,2 보병 연대도 있어 총 보병 연대는 70개 연대였다.
2.4.5. 관동군과 중일전쟁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관동군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탄생하였다. 이에 만주에 상시로 1개 사단, 33년 이후에는 3개 사단이 교대로 파견되었다. 다만 만주사변이라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사단 단위로 증설은 일어나지 않았고, 33년에야 야전중포병 연대 1개가 창설되고 기존의 2개 전차대대가 2개 전차연대로 증편 되었다. 34년에 이르러야 군축후 처음으로 1개 보병연대 창설, 35년과 36년에 각각 보병 2개 연대가 창설 되었다. 이러한 증편 보병 연대는 사단 소속이 아닌 독립연대들로 그중에서 36년에 창설된 연대는 지나주둔군 소속 지나주둔보병 1,2연대였다. 또한 같은해에 보병연대 외에도 야산포연대 3개, 중포병연대 1개, 고사포연대 2개, 기구연대 1개가 창설된다. 여기에 기존에 사단에 편입되어 있던 공병대대와 치중병대대가 연대급으로 증편되었다. 전반적으로 대소련 작전을 염두해둔 증편이였다. 질적으론 별 쓸모가 없지만 중국 군벌군(친일성향 군벌군 및 장학량에게서 강탈한 동북군 세력)을 끌어들였으므로 수적인 면에선 대대적 증편까진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끌어들인 중국 군벌군은 훗날 만주국 군대인 만주군의 인적 토대가 된다.
그런데 만주사변 당시 6개 사단 뿐이였던 극동 소련군이 자신들의 턱밑까지 진출한 일본군에 자극 받아 37년 기준으로 20개 사단 37만명으로 대폭 증강된다. 이에 일본군 역시 자극 받아 관동군을 두배로 대폭 늘려 6개 사단을 배치 한다. 이후 상호간에 상대방을 보고 점점 병력을 늘리는 병림픽을 벌여 극동 소련군은 1940년에는 30개사단까지 늘렸다가 독일의 기습공격으로 병력을 대폭 전용해 동부전선으로 돌려 2선급 부대들만 남아 있다가, 45년에 45개 사단 150만명으로 일본을 압살할 준비를 한다. 반대로 일본은 만주에 주둔하여 대소전을 목적으로 한 관동군을 40년에 상설사단을 중심으로 12개 사단 40만명까지 편재하여 절정에 달했다가, 중일전쟁 전선이 확장되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 남방전선이 생기면서 일부 병력을 전용함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이 병력 늘려달라는 징징거림에 점점 사단과 병력을 늘리다가 45년에는 24개 사단 66만명으로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주력 부대는 대부분 43년~44년경 남방전선으로 전용되어 소모되었거나 막판에는 본토결전에 대비한답시고 본국에 돌아가서 부실한 2선급 부대만 남았다. 그동안 2선급 부대들을 배치했지만 동부전선이 정리돼 감에 따라 주력 부대들은 동부전선에서 극동전선으로 옮겨온 소련군과 정확히 반대되는 상황.
전반적으로 관동군은 중국전선이 확대 되거나, 태평양 전쟁이 터져 남방전선이 생기면서 대거 사단들이 필요 할 때, 오히려 관동군이 점점 늘어나는 요술을 보여준다. 그때마다 이유는 소련이 공격해 올 것 같아 병력을 증설해야 한다고... 이것만으로 부족했는지 38년에는 신편사단 1개를 중일전선으로 보내주고 대신 지나군에서 상설사단 2개를 관동군으로 받게 된다.
관동군의 징징댐은 심각할 정도여서, 중일전쟁에 의해 중국 전선이 끝도 없이 확장되었지만, 일본 본토내에 있는 정예부대인 상설 사단은 한가하여 할 일이 없는 관동군으로 보내주고, 급조한 특설사단만을 전쟁터인 중일전선으로 보낸다. 특히 38년에는 관동군 8개사단중 무려 7개 사단이 제1,2,4,7,8,11,12사단등 상설 사단으로 구성된 정예였으니 대본영에서 얼마나 관동군을 편애하며 신경썼는지 알만 하다. 특히 38년부터는 비정규전이라 할 수 있는 비적토벌 임무[6] 를 만주국의 군대로 창설된 만주군이 떠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상당수의 사단들은 정규전을 대비하여 소만국경에 전진 배치되었으니 더욱 할 일이 없었다.
반면에 정작 전선이 끝도 없이 늘어나 현기증 나는 중일 전쟁에서는 신편사단 위주였다. 우가키 군축으로 감축된 17개 상설사단 체재에서 37년까지 7개 사단이 신편 되었다. 그런데 37년 기준으로 상설사단 5개와 신설사단 1개가 관동군에 배치되고, 상설사단 10개와 신설사단 나머지 전부가 중국 전선에 배치되었다.[7]
지역별 사단 배치는 다음과 같다.
위의 사단 배치는 다소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본토는 지시마와 가라후토에 배치된 제5방면군을 포함하고, 대만은 오키나와와 오가사하라를 포함한다. 남방은 동남아에 배치된 남방군과 태평양지역의 제8방면군을 포함한다. 물론 조선은 조선군, 만주는 관동군, 중국은 지나군을 뜻한다.
이와 같은 사단 증설에도 불구하고 1938년에는 중일전선을 위해 추가로 10개 사단이 필요 하였다.(도합 34개 사단 131개 연대, 115만명) 이에 새로 창설된 사단중 9개는 중국 전선으로 가고 1개 사단은 관동군으로 갔다.
이런 중일전선의 급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에서는 계속 병력을 늘려달라고 징징대어 관동군에서 중일전선으로 37년에 신설된 26사단을 보내주고, 대신 중일전선에서 정예 부대인 상설 사단 7사단과 11사단을 보내주는 부대 이동이 있었다. 참고로 이때 10개 사단 증설 때문에 본국에서는 기존의 현역인 갑종 외에도 보충역인 제1을종과 제2을종까지 징병된다. 또한 현역이 끝나고 예비역 5년 4개월이 있는데 이들도 징집된다.
1939년에는 중국전선의 제9, 10, 14, 16사단이 일본으로 귀환하고 37년에 임시 편성된 101, 109, 114사단이 폐지되었다. 대신 11개 사단, 32개 보병연대가 편성되어 그중 한 개만 관동군으로 가고 나머지는 전부 중국 전선으로 간다. 이에 육군은 총 42개 사단 124만명이 된다.
이런 급속한 병력 확대로 인해 기존에 보충병역 기간이 총 12년 4개월이였지만(현역+예비역+후비역 기간 합계) 17년 4개월로 5년 연장되고 최고 38세까지 소집가능 하게하는 법 개정이 이루어 진다.
1940년에는 2개 사단이 폐지되고 새로 9개 사단 11개 보병연대가 편성되어 49개사단 135만명이 된다.
1941년에는 2개 사단 10개 보병연대가 편성되어 51개 사단 210만명으로 늘어난다.
세부적으로 보자면 중일전쟁 이전의 17개 사단 체제에서 태평양 전쟁 직전까지 사단의 수가 정확히 3배 늘어 난다. 보병 연대는 75개에서 184개로 2.45배 늘어나고, 야산포병연대는 23개에서 59개로 2.57배, 중포병 연대는 12개에서 47개로 3.92배, 기병(수색) 연대는 25개에서 46개로 1.84배, 전차연대는 2개에서 16개로 8배(...), 공병연대는 18개에서 61개로 3.39배, 치중병연대는 17개에서 69개로 4.06배가 되었다.
그중에서 기병연대는 39년경부터 말이 자동차로 개편된 결과 본래의 연대중 3개가 폐지되고 12개가 수색연대로 개편되었다. 여기에 새로 수색연대 18개가 편성되고 1개가 폐지되었고, 기마로 구성된 기병연대도 새로 7개가 편성되었다.
위의 수치를 보면 사단은 3배로 늘었지만 보병연대는 2.45배 밖에 안늘었는데 이는 1940년 이후 기존의 사단내 4개 연대 체제가 3개 연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편 사단은 거의 3단위 사단이 된다. 또한 차량화가 많이 진행되어 기존의 4단위 사단의 말은 5천필에 차량 40대 정도 였지만, 신편 3단위 사단의 경우 말 2천500필에 차량 500대가 된다. 다만 4단위 사단과 3단위 사단은 섞여서 존재 하였다.
1941년 12월 기준으로 4단위 사단인 제18 사단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사단 총원 21,710명, 말 5550필, 자동차 50대
└사단 사령부(330명, 165필, 4대)
보병여단(7,103명, 874필)
└보병여단 사령부(65명, 16필)
보병연대(3525명,429필) 2개-연대본부, 기관총중대, 보병대대 3개-보병중대 4개, 기관총중대)
산포병연대(2407명,1402필,34대)-연대본부, 연대단열, 산포대대 3개-산포병중대3개, 대대단열
기병대대(451명, 431필)-기병중대 2개, 기관총중대
공병연대(672명, 99필)-공병중대 2개
치중병연대(1898명, 1451필, 2대) - 만마(輓馬)중대 4개, 마창(馬廠)
사단통신대(245명, 45필)
사단병기근무대(121명, 11대)
사단위생대(1095명, 128필)
사단야전병원(236명, 75필) 3개
사단병마창(病馬廠, 48명, 5마리)
위는 한가지 예 일뿐으로 기병대대 대신 기병연대가 소속되어 있다면 사단 총병력이 25,000명 까지 가는 편제도 있다. 단열은 보급대를 뜻하며, ‘만마’는 수레를 끄는 말, ‘병마창’ 병든 말을 치료하는 곳이다. 사단내에 있는 차량은 대부분 산포병 연대에 배속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위와 동년동월의 3단위 사단인 제 16사단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사단 총원 14,640명, 말 2,470필, 차량 490대
└사단 사령부(304명, 40대)
보병단(8732명, 1227필, 41대)-보병연대(2881명, 409필, 11대) 3개
└보병단 사령부(89명, 8대) - └연대본부(107명, 17필, 11대)
-보병대대(810명,98필) 3개, 보병포중대(132명,62필,4문), 속사포중대(72명,13필,4문), 통신중대(133명, 23필)
-대대본부(103명,59필), 보병중대(180명) 3개, 기관총중대(122명, 29필, 중기8정), 보병포소대(25명,10필,대대포2문)
수색연대(439명,35대,경장갑차16대)-연대본부, 승차중대2개, 경장갑차중대 2개, 통신소대 1개
야포병연대(1,766명, 896필, 80대)-연대본부, 대대(75밀리 야포 12문) 2개, 대대(100밀리 유탄포 12문) 1개
-대대본부, 산포병중대 3개, 대대단열
공병연대(875명, 32필, 32대) - 연대본부, 공병중대 3개, 기재(器材)소대 1개
치중병연대(749명, 296필, 89대) - 연대본부, 만마중대, 자동차중대 2개
사단통신대(246명, 45필) - 유선소대, 무선소대 2개
사단병기근무대(123명, 13대)
사단위생대(491명, 36대) - 본부, 담하(擔荷)중대 3개, 차량소대 1개
사단야전병원(242명, 22대) 3개
사단병마창(52명, 10필, 4대)
사단방역급수부(196명, 24대)
사단위생대의 담하중대는 들것중대로 번역 할 수 있다.[8] 포병의 경우 보병과 함께 전진을 중요시 하여 사단 포병의 주력은 경량급의 75밀리 야포였고, 연대포는 분해해서 운송이 가능한 산포였다. 대대포의 경우 기관총좌 제압 역할을 맏는 등 전반적으로 경량포였다. 야전중포병으로 가야 150밀리 유탄포야 100밀리 캐논포, 고정 진지에서 발사하는 공성 중포, 대항공기용 고사포가 있었다. 그러나 역시 사거리 보다는 기동성을 중시 하였다.
2.4.6. 태평양 전쟁
1941년말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영국 등과의 태평양 전쟁이 개전하자 남방작전을 위해 또다시 엄청난 병력이 필요 하였다. 기존의 51개 사단 184개 연대 210만명에 더하고 1942년에는 7개 사단 보병 4개 연대, 43년에는 12개 사단 보병 3개 연대를 증설했다. 보병 연대가 늘지 않는 이유는 이시기에 기존의 4단위 사단(상설/갑종 사단, 특설/을종사단)을 3단위 사단(병종 사단)으로 개편하고 남는 1개 연대를 모아서 신편 사단을 편성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사단은 아예 연대가 없고 독립보병대대 8개만 모아서 사단(정종 사단)을 만들기도 하였다.
여기에 본토방위태세가 조금 정비되어, 1941년부터 일본 각지에 중포병연대 20개가 설치되고, 방공연대와 고사포연대가 26개 편성되었다.
1942년 6월에는 드디어 전차사단 3개와 전차 6개 연대가 편성 되었다. 다만 야전 화력의 핵심인 야전중포병연대의 경우 41년에는 2개, 42년에는 겨우 1개, 43년에는 아예 편성조차 안되어 여전히 화력을 경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 등에서 연합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대패하면서 여전히 백병주의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화력과 기동력보다 보병의 수를 중요시 하는 중일전쟁 적인 마인드로 천조국과 싸우는 패기를 보였던 것이다.
사실 일본은 그동안 연합군과의 일련의 패배는 고립된 섬과 정글에서 패퇴가 보급의 두절과 보병부대의 기동 제한 등 예상치 못한 전장에서의 전투 때문이라고 해석해 왔다. 즉 보병부대와 이를 지원하는 각 부대가 종횡으로 움직일 수 있는 광대한 전장에서 대소작전을 응용해서 싸운다면 육군의 정예가 질 리는 없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1944년 6월 마리아나 제도 전투에서 상당히 넓은 사이판 섬에서의 패배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에 육군 내부에서 항공전력과 포병화력 증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 졌다.
결국 44년에는 육군 29개 사단, 51개 연대를 편성함과 동시에 포병연대 15개, 중포병연대 13개, 전차연대 10개라는 전에 없던 규모의 편성을 하였다.(도합 99개사단 191개 보병연대 420만명) 이를 위해 징병 연한이 20세에서 19세로 낮춰 졌고, 전에는 잘 징집 안하던 20세도 실시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45년에는 본토 결전을 위해 무려 70개 사단 190개 연대가 추가되었고, 최전선에서 싸워야할 정예 상설 사단들은 본토 결전을 대비한답시고 본국으로 이동하고 그 자리를 신편 사단들이 매우게 된다.
2.5. 연대 편제
일본군은 연대가 기본이다. 1874년 1월 근위보병연대가 최초의 연대이며, 보병연대와 기병연대는 덴노가 하사한 군기를 수여 받는다. 다만 기갑부대로 개편되면 군기를 반납한다(...). 일본의 전역은 21개의 병사구로 나뉘어 병사구마다 병력을 모집하여 1개 사단을 편성하며, 각 연대는 '연대구'라는 지역단위에서 모인 같은 동네 사람들이다. 그러나 근위사단의 각 연대만은 위수구역은 도쿄이지만 사병('하사졸' 이라고 함)들은 전국 단위로 징병하였다. 기병연대와 일부 병과는 연대아래 대대 없이 바로 중대로 내려간다.
보병연대는 524연대까지 있으며[9] , 독립보병연대는 13연대까지, 근위보병연대는 10연대, 대만보병연대는 2연대, 지나주둔보병연대는 3연대까지 있다. 기병연대는 약간 듬성등성 있는데 보통 1사단은 제1기병연대를 보유하며, 근위사단은 제1근위기병연대를 보유한다. 상설사단들은 기병연대가 다 있으나 중일전쟁 이후 마구 찍어낸 특설사단은 대부분 기병연대가 없어서 제79사단의 79 기병연대가 유일하게 1945년에 창설 되었다. 다만 100단위 사단 중에서는 유일하게 106사단이 106 기병연대를 보유하였고, 71사단은 특이하게 171기병연대를 갖고 있었다.
연대의 종류에는 군기가 수여되는 보병 연대, 기병연대, 수색연대(수색연대 포함), 포병연대(아포병연대, 산포병연대, 중포병연대, 야전중포병연대, 기마포병연대, 박격포병연대, 기동포병연대, 고사포연대, 대공연대, 포병정보연대, 기구연대), 공병연대(철도연대 포함), 치중병연대(자동차연대 포함), 전차연대, 항공부대(항공병계열연대, 비행연대, 교육비행연대, 항공정보연대, 관측연대, 기상연대), 공수부대(낙하산연대, 활강보병연대), 선박부대(선박포병연대, 선박기관포연대, 선박공병연대, 선박통신연대), 전신연대가 있다.
그외 혼성연대/독립혼성연대라 하여 보병 포병을 더한 전투단화 한 연대가 있고, 패망직전엔 유격전 전문의 기동전연대가 만들어 졌다. 역시 대전말기에는 현지 소집 군인들로 임시연대를 만드는데 이를 특설연대라고 하였다. 각종 훈련부대에는 교도 연대가 설치되는 경우가 있었다.
2.5.1. 보병 연대 편제
1874년~1875년에 14개 보병연대가 군기수여 되었으며, 1984년~1986년에는 15연대~24연대에 군기가 수여 되었다. 1988년에는 기존의 6개 진대(鎮台) 6개 사단으로 개편되며 24개 연대는 각 사단별로 4개 연대씩 소속되게 된다. 또한 연대별로 위수지역(衛戍地)이 생겨 연대들은 해당 '연대구'에서 징병하였다.
1연대와 3연대는 도쿄를 위수지역으로 하며 제 1사단 소속이다. 제8연대가 밀리터리에 관심 있으면 한번쯤 들어본 '''전설의 오사카 연대'''이다. 물론 오사카를 위수지역으로 하고, 4사단의 핵심 부대로 창설 직후 부터 '또 다시 패배한 8연대'라며 조롱 받았다. 수많은 전투에서 불사조 처럼 살아남아 도망 다녔으며 희한할 정도로 전사자 숫자가 적었다. 패전시에도 매우 드믄 사례로 옥쇄 대신 항복하며 태국 람팡에서 전설을 마감 하였다. 후대사람들은 오사카는 장사꾼 기질이 있어 계산에 밝아 전쟁시에도 충용무쌍 보다는 생명보존을 더 중시했기 때문으로 해석 한다. 또한 전국시대가 끝나며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 성을 지어 놓고 오사카를 중시하였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집권하고 오사카 전투로 권력이 완전히 에도로 넘어가고 오사카가 변방이 되자 오사카 사람들은 정부에 대한 반골 기질이 생겼다고 한다. 4사단항목에서 나오듯이 4사단을 오사카 사단이라고 하지만 그중에서 핵심은 한번도 사단이나 위수구를 바꾸지 않고 종전시 까지 오사카를 위수지로 유지한 8연대이다.
8연대가 오사카 4사단의 핵심이라면, 1사단에서는 1연대, 2사단에서는 4연대, 3사단에서는 6연대 등이 한번도 사단과 위수지를 바꾸지 않고 해당 부대의 핵심으로 존재 했었다.
근위보병연대라는 것도 있었는데 다른 부대와 달리 전국 단위로 1874년에 제 1, 2 연대를 모집하여 도쿄 방위를 담당하였다. 다이쇼 덴노와 쇼와 덴노도 황테자 시절 근위1연대 소속이었다. 이어 3연대(1885년), 제4연대(1887년)에게 군기가 수여 되어 1891년에 근위사단이 창설 된다. 이후 근위 5연대~10연대 까지는 1939년부터 순차적으로 생겨 근위2사단, 3사단을 만들게 된다. 근위사단이라고 해서 도쿄 황궁 경비만 선게 아니라 중간에 청일전쟁, 러일전쟁, 중일전쟁 등에도 참전하였다.
1907년에 군기수여된 대만보병 1연대와 2연대는 특이한 케이스인데 사단 소속이 아니라 대만 수비대 소속이었다. 태평양전쟁 때야 처음으로 48사단 소속이 되어 필리핀 공략전에 참전한다.
지나주둔보병연대는 역사가 있는데 의화단의 난(1898년)때 북경의 공관 보호를 위해 열강은 군대를 주둔시킬 권리를 얻었다. 이에 일본은 북평 주둔 보병 부대와 천진 주둔 보병부대를 두었는데, 이를 1936년에 개편하여 북평 주둔 보병부대는 1연대, 천진주둔 보병부대는 2연대가 되었다. 1938년에는 지나주둔 3연대가 창설되었으며 같은해 27사단에 소속된다.
독립보병 연대는 관동군 독립혼성 제11여단에 속해있는 것이 시초이며 이후 에도 계속 생겨 독립보병 13연대까지 생겼다. 그외 '기동 보병 연대'라는 이름으로 전차사단 소속 기계화 보병 부대가 3개 여단이 있으며, 보병대대 규모 밖에 안되지만 활강보병연대라는 이름의 글라이더 부대가 2개 연대 있었다.
1890년 11월 1일 육군정원령에 따르면 연대 평시 정원은 다음과 같다(메이지 23 년 11 월 1 일 칙령 제 267 호).
메이지 23 년 (1890 년) 11 월 1 일 제정시 "육군 정원 령」(메이지 23 년 11 월 1 일 칙령 제 267 호)에 따르면, 당시의 보병 연대의 평화 정원은 다음과 같았다 . 1 개 연대는 3 개 대대 12 중대 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이 장에서 단순히 "상사"라고 한 것은 1 등 중사 ( 판 임관 3 등) 또는 2 등 중사 (판 임관 4 등)의 의미이다. 또한 제 공 장은 1 등 중사 상당 관이며 제 공 아래 길이는 2 등 중사 상당 관이다.
연대 본부는 연대장 이하 41명과 승마용 말 5마리로 구성된다. 연대장(대좌 또는 중좌), 연대부(連隊附, 소좌), 부관(대위), 연대기수(소위), 무기계(군조), 나팔장(군조), 서기 2명(군조), 2등군의정(소좌상당, 예하 3대 대대중 1개의 군의를 겸함), 봉공장(縫工長, 피복계), 또는 봉공하장(縫工下長) 1명, 봉공 20명, 화공장(靴工長, 구두) 또는 화공하장(靴工下長) 1명, 하공 10명이다.
연대에는 3개 보병대대와 12개 보병중대가 있으니 연대 전체 인원은 장교 70명, 준사관 이하 하사 145명, 군졸 1,440명, 각부 66명 등 총원 1,1721명에 군마가 14마리였다. 이중에서 연대용 군마 5마리는 연대장용 2마리에, 연대부, 부관, 군의관용이 각 1마리이다.
박정희/일생의 만주군시절 경력을 보면 소위이면서 연대 기수라고 하여 혹시 오타가 아닌가 싶었지만, 소위가 군기의 기수로 있는 것은 무려 1890년 부터 내려오는 일본군의 정식 편제였다. 이때는 소위가 군기의 기수였는데 대전기로 가면 오히려 중위급으로 격상되어 중위 기수인 경우도 있다. 연대부(連隊附)는 부연대장과는 한자가 다른데 연대의 부사령관이 아니라 연대본부중대장이라는 의미가 있다. 전쟁시기 일본군의 편제를 보면 연대부와 부관이 동격인 대위일 때가 종종 보인다. 또한 이시절의 군의는 정식 군의가 아니라 소좌 상당으로 되어 있지만, 이후 정식 군계급을 받게 되며 군마의 숫자가 늘어남에 따라 수의관이 추가된다.
연대 본부에서는 연대장(대좌 또는 중좌), 연대작전참모(소좌), 연대부관(대위), 병기장교(대위), 정보장교(중위), 병참장교(중위), 회계장교(대위, 소위), 군의장교(대위, 소위), 수의장교(대위, 소위), 기수(소위)가 있다. 또한 본부에는 수송부대, 관리반, 암호 및 정보반, 병기반, 경리반, 대공반, 연대 경비대가 있었다. 아래는 대전 말 편제이다.
- 을종 보병연대
연대본부(176명) + 통신중대(132명) + 보병포중대(122명) + 대전차중대(116명) + 보병대대 3개(1,100명) = 3,846명
소총 2,130정, 경기관총 112정, 척탄통 108문, 중기관총 32정, 37/47mm 대전차포 6문, 70mm 대대포 6문, 75mm 연대포 4문
-통신중대 : 유선소대(4개반), 무선소대(4대반)
-대전차중대 : 대전차소대(2개반 - 37/47mm 대전차포 1문) 3개, 탄약소대
-연대포중대 : 연대포소대(2개반 - 75mm 연대포 1문) 2개, 탄약소대
-보병대대 : 4개 중대, 기관총중대, 대대포소대
└소총중대 : 3개 소대(3개 분대, 1개 척탄통분대)
└기관총중대 : 3개 기관총소대(4개분대 - 중기관총 1정), 탄약소대
└대대포소대 : 2개분대(70mm 대대포 1문), 탄약분대
소총 2,130정, 경기관총 112정, 척탄통 108문, 중기관총 32정, 37/47mm 대전차포 6문, 70mm 대대포 6문, 75mm 연대포 4문
-통신중대 : 유선소대(4개반), 무선소대(4대반)
-대전차중대 : 대전차소대(2개반 - 37/47mm 대전차포 1문) 3개, 탄약소대
-연대포중대 : 연대포소대(2개반 - 75mm 연대포 1문) 2개, 탄약소대
-보병대대 : 4개 중대, 기관총중대, 대대포소대
└소총중대 : 3개 소대(3개 분대, 1개 척탄통분대)
└기관총중대 : 3개 기관총소대(4개분대 - 중기관총 1정), 탄약소대
└대대포소대 : 2개분대(70mm 대대포 1문), 탄약분대
- 갑종 보병연대
연대본부(195명) + 보병포대대(364명) + 통신중대(150명) + 공병대(100명) + 보병대대(1626명) 3개 = 5,687명
소총 2370정, 경기관총 115정, 척탄통 147문, 중기관총 36정, 20mm 대전차소총 24정, 37/47mm 대전차포 12문, 70mm대대포 20문, 75mm 연대포 8문
-보병대대 : 4개 중대, 기관총중대, 대대포중대, 대전차중대
└소총중대 : 3개 소대(3개 분대, 1개 척탄통분대), 중화기소대(중기관총분대2개, 대전차총분대2개), 탄약분대소총 2370정, 경기관총 115정, 척탄통 147문, 중기관총 36정, 20mm 대전차소총 24정, 37/47mm 대전차포 12문, 70mm대대포 20문, 75mm 연대포 8문
-보병대대 : 4개 중대, 기관총중대, 대대포중대, 대전차중대
└기관총중대
└대대포중대
└대전차중대
각 이상 각 보병 연대 편제에 의무대가 배속되며 필요에 따라 노무대가 편제된다.
2.6. 대대 편제
1890년 11월 1일 육군정원령에 따르면 대대 평시 정원은 다음과 같다(메이지 23 년 11 월 1 일 칙령 제 267 호).
대대 본부는 16 명, 말 3마리로 구성되며, 대대장(소좌), 부관(중위), 하부관(군조), 무기계(군조), 나팔장(군조), 서기 2명(군조), 요리계 2명(군조), 각부7명(군의, 총기장, 간호장 약간명, 서기 약간명)이다. 군조는 1등군조와 2등군조로 나뉜다. 총기장은 군조에 상당한다.
일본군의 특징인데 부사단장, 부연대장, 부대대장, 부중대장, 부군수, 부서장, 부형무소장 등 하여튼 '부'자 붙은 것은 없다. 부관이 대대장을 보좌하여 대대본부 일을 하며 하부관은 현대의 대대 주임원사에 해당한다. 한국군/미군의 경우 대대 본부 및 본부중대 병력이 소총중대 1개에 달하여 행정/군수 기능을 하는데 일본군은 별도의 본부중대가 아예 없고 평시에는 예하 소총중대 내에서 상당히 많은 병력이 행정, 군수, 급양등의 근무에 임한다.
군마는 대대장용 2마리에 대대장 부관용 1마리이다.
예하에 4개 중대가 있는데, 각 136명(장교 5명, 하사 10명, 군졸 120명, 각부-간호수 1명)이 있다. 따라서 대대 전체로 보면 장교 22명, 하사 47명, 군졸 47명, 각부 11명으로 총원 560명이다.
이러한 편제는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겪으며 지속적으로 변화 하는데 행정/군수 지원을 위해 대대본부가 120명으로 확 늘어나고, 각 중대 병력은 194명에 달하게 된다. 대전말기 일본군 대대 편제는 다음과 같다.
- 을종 보병대대
본부(147명) + 소총중대(181명) 4개 + 중기관총 중대(174명) + 보병포 소대(55명) = 1100명.
소총 677정, 척탄통 36문, 경기관총 37정, 중기관총 12정(8정), 70mm대대포 2문
소총 677정, 척탄통 36문, 경기관총 37정, 중기관총 12정(8정), 70mm대대포 2문
- 갑종 보병대대
본부(283명) + 소총중대(262) + 기관총중대(73명) + 대대포중대(122명) 대전차중대(100명) = 1626명
소총 730정, 척탄통 49문, 경기관총 37정, 중기관총 4정, 70mm대대포 4문, 20mm대전차소총 8정, 37mm대전차포 4문
소총 730정, 척탄통 49문, 경기관총 37정, 중기관총 4정, 70mm대대포 4문, 20mm대전차소총 8정, 37mm대전차포 4문
비슷하면서 약간 다른 자료인데 갑종기준으로는 4개 보병중대에 기관총 중대가 편성되며, 56명 규모의 대대 보병포 소대를 두기도 하고, 보병포 소대 대신 연대 보병 포 중대를 두는 경우도 있었다. 을종편제에서는 보병 중대가 하나 적어 대대에 3개 보병중대, 1개 기관총중대, 1개 보병포 소대로 구성된다고도 한다.
단대호의 경우 00연대 1대대 1중대, 2중대, 3중대, 4중대, 1기관총중대, 1보병포 소대2대대 5중대, 6중대, 7중대, 8중대, 2기관총중대, 2보병포 소대
3대대 9중대, 10중대, 11중대, 12중대, 3기관총중대, 3보병포 소대 식으로 부여 되었다.
대대장은 소좌가 기본이나 중좌가 하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중대에서는 대위가 원칙이나 중위가 일반적이었다. 반면에 기관총중대는 왠만하면 다 대위 중대장이고, 보병포 소대장은 물론 소위였다.
대대에는 기병마가 수십필 있어 장교들의 승마용이었고, 짐말은 그 이상이었다. 중일전쟁 이후 차량화가 진행되었으나, 대부분의 부대는 패망할 때 까지 말타고 다녔다. 한국전쟁시기에도 김석원 장군등 일본군 출신은 계속 말타고 다니기를 고집 하였다.
야포 대대의 경우 대대본부 아래 3개 중대가 있고, 대대단열(보급부대)이 추가로 있는 경우도 있다.
일본군은 육사를 졸업하면 소좌까지는 연공서열에 의하여 승진하며 그 이상은 발탁승진에 의하는데 육군대학을 안나오면 승진이 거의 어려웠다. 그래도 대부분의 장교들은 소좌에서 정년을 맞아 예편하는데 12년 이상 근무한지라 거액의 은사금을 받아 생계에는 문제 없었다. 또한 예편후 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이나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 도는 고교/대학의 교련교사 자리가 보장 되었다.
2.7. 중대 편제
일본군 편제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평시에는 내무반별로 생활하고, '''전시에만 분대와 소대가 설치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시에는 소대장, 분대장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장교와 하사관들은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병졸들이 없고 각자 주어진 근무를 한다. 입대 1년차를 초년병이라고 하는데 보통의 경우 별도의 훈련소 없이 자대에서 1기 검열 이라는 이름에 약 6개월간 신병 훈련을 받는다. 이때 장교들은 교관, 하사관은 조교, 일부 고참병(최소 상등병 이상)들은 조수가 되어 훈련을 시킨다. 이때 훈련을 잘 이수하면 1기 검열 이후 일등병으로 승진하며 늦어도 2년병이 될때는 승진 가능하다. 신병 훈련이 끝나면 위병근무 등 각자 근무를 서게 된다. 일병 중 우수한 자는 총원에 10%에 한해 상등병에 임명하며, 하사관이 부족하여 이중에서 극히 우수한 자를 '오장 대우 상등병'이 되어 주로 내무반장을 담당한다. 1941년에는 '오장 대우 상등병'이 '병장'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되었다. 2년 근무후 전역하지 않고 계속 복무하는 자는 하사관이 될 기회가 있는데 행정 업무를 담당하거나 조교가 되어 초년병들 훈련을 담당하였다.
초년병들은 '소총반', '척탄통반', '경기관총반'으로 나뉘어 훈련 받는데 하사관들이 각 반의 반장이 된다. 다시 말해서 일본군은 자대가 신병교육대이다. 평시에는 자대에서 연2회에 걸쳐 입소하는 신병들을 각 6개월간 교육시키는 신병교육대 역활을 겸하기 때문에 중대-소대-분대로 이어지는 전투 편제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병들만 따로 모아서 생활하고 교육하는게 아니라, 하늘 같은 고참들과 같은 내무반에 분산하여 배치하여 그들의 시중을 들게 하여 각종 내무부조리의 근원이 되었다.
또한 중대별로 '준위'가 존재하여 선임하사관 같은 역활을 한다. 하지만 일본군의 하사관은 장기근무가 없으며, 30세 후반에 준위로 승진하여 40에 예편한다. 전시에는 30 전에도 준위를 다는 경우가 속출 하였다.
1890년 11월 1일 육군정원령에 따르면 중대 평시 정원은 다음과 같다.
보병 : 136 명, 기병 : 159 명, 야전포병·근위포병 : 111 명, 요새포병 : 134 명, 공병·근위 포병 : 126 명, 치중병 : 290 명 (운전병을 제외하면 110 명), 근위치중병 : 220 명 (운전병을 제외하면 100 명), 둔전보병 : 221 명
동 규정에 의하면 보병 중대 평시 정원은 장교 5명(대위1, 중위2, 소위2), 하사관 10명(조장1, 일등군조5, 이등군조4), 병 120명(상등병16, 일등졸 36, 이등졸68), 간호수 1명, 총 136명이다.
중대장은 물론 대위이며, 그외 장교들은 중대부속장교라고 하여 병사 훈련을 시키거나 당직근무를 서며, 이시기에 육군대학 입학을 준비한다. 장교가 부족할 경우 견습사관으로 소위대행을 시켰다. 견습사관은 육군사관학교 또는 육군예비사관학교에서 실습의 일환으로 부대에 파견되어 오며 계급은 군조 중 선임으로 대우 하지만 준위 보다 위에 있는 것으로 친다.
위관들은 무조건 연공서열로 진급하기 때문에 중대장은 30세를 넘었으나, 전시에는 극심한 장교 부족으로 중위 중대장이 보통이였다.
하사관은 이후 조장 위에 '준위'가 생겼으며, 이등군조는 오장이 된다. 초기에는 조장이 내무계(内務掛, 내무괘) 또는 인사계(人事掛)라고 불렸으나 준위가 생긴 이후, 준위가 내무계를 담당하고 조장은 서무계 또는 회계계, 후방계라고 불려졌다. 이 항목의 글은 고미가와 준페이의 소설인 인간의 조건을 많이 참고하여 작성 하였는데, 해당책의 4권 첫째줄은 '내무계 히노 준위가 말했다.'로 시작하는 등 중대의 준위를 내무계, 군조를 서무계로 부른다. 책을 보면 장교들이 직접적으로 병졸들을 터치하는 일이 거의 없고, 훈련 및 내무생활 관리, 행정은 전적으로 하사관들이 다 하며, 하사관 위에서 통제하는 것이 내무계이다. 장교들은 T/O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며 주로 당직 근무만 선다.
일등군조는 무기계, 피복계, 진영도구(陣営具)계를 각각 담당하였다. 이등군조는 이후 오장(伍長)으로 명칭이 바뀌는데 주로 내무반장(内務班長)을 담당하였다. 내무반은 병사들이 숙식하고 훈련 받는 최소 단위였는데 중대에서 보통 1~5개의 내무반이 있었다. 좌관급 주번사령의 지휘하에 각 중대는 군조 또는 오장급 주번하사관에 의해 통제 된다. 계속하여 각 부대를 전근하는 장교에 비해 하사관들은 이동이 없었다.
중대장은 중대장실이 따로 존재하며, 장교들은 중대장교실, 준위와 하사관은 중대 사무실에서 근무하나 준위는 인사를 담당함으로 면접등을 위해 별실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외 병기계는 중대 무기고, 피복계는 중대 피복창고에서 근무한다. 급여, 피복, 무기, 진영도구, 금전, 물품, 회계, 식사등 중대 사무는 하사관들의 업무인데 각 계는 조수인 상병이 붙으며, 주판에 능한 일병을 사역병으로 근무시키기도 한다. 중대장실과 중대사무실에는 당번병이 붙는다. 이런식으로 장교 할일을 준위/하사관에게 시키고 하사관들은 병졸을 조수와 당번병으로 쓰기 때문에, 현대한국군에 비하면 희한할 정도로 행정 사무인력이 많다. 반면에 현대 한국군은 그냥 갓 들어온 이병이 중대행정병을 담당하기 때문에 누구를 안시키고 자기 혼자 해결하는 시스템이다. 2천년대 초만 해도 중대에 부사관이 2~3명 정도 밖에 없는게 보통이었다.
병졸들은 내무반별로 내무실에서 집단 거주하며, 하사관들도 영내거주한다. 내무반장급 이상 하사관들은 내무실과 이어진 별개의 하사관실에서 거주하며, 그 이하의 하사관들은 병사들과 잡거하는 경우도 있다. 준위 부터 영외거주가 가능하며, 특별한 경우 군조가 영외 거주 하기도 한다.
위에서 설명한 것 처럼 처음 입대하면 6개월간 1기 검열 동안 기초군사 훈련을 받는다. 훈련이 끝난 위병 근무등 근무도 서지만 사적으로는 전원이 당번병이 된다. 장교 개인에게 당번병이 붙지만, 장교들의 개인집에서 파견되어 당번병이 되어 장교 와이프의 속옷 빨래를 하고 불을 때는등 하인으로서의 일을 한다. 준위는 물론 하사관 하나 하나에게도 당번병이 붙고, 심지어 같은 병졸이 고참병들 하나하나에게도 당번병이 붙어 총기를 닦아주고 식사를 타오는 등 하인처럼 산다. 중대에 파견온 간호수에게도 당번병이 붙는다. 그러다 2년병이 되면 반대로 초년병들의 시중을 받으며 왕처럼 산다. 평시에는 일등병, 상등병, 오장 대우 상등병이 다 같은 2년병이기 때문에 2년병만 되면 중대의 왕이다. 다만 2년 근무 후 전역이 안되는 전시의 경우 계급이 좀 꼬여 3년병인데 승진 누락되어 일등병이기도 하고 무려 5년병인데 승진 도 안되고 전역도 안되어 아직도 병장이기도 하다. 반대로 전시인지라 승진이 빠른 병사도 있고.
위관급 장교도 월급이 적어 가난에 시달리지만, 하사관 이하는 월급 문제가 더욱 심한데 영외거주가 안되기 때문에 가족을 꾸릴 수가 없어 직업으로 군인을 하기 어려웠다. 12년 복무 후에는 은사금이라고 하여 꽤 목돈을 주는데 이걸 보고 복무 하는 사람도 있지만, 보통은 기본 2년 복무만 끝내고 전역하여 현역 부사관이 부족하였다. 하지만 일제시대는 수시로 전쟁을 반복하였기 때문에, 전역후 응소되는 경우가 많아 재복무 기간동안 승진 한 후 전역 했다가, 다시 응소되어 승진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전시에는 예비역 장교와 하사관들이 대량으로 들어와 보병 중대 인원이 확충 되는데 갑종과 을종 편제가 있다.
- 소총중대 을종편제
총 181명. 중대본부는 19명이며 각각 54명으로 구성된 소총소대 3개가 있다. 각 소대는 13명으로 구성된 기관총 분대 3개와 척탄통분대 1개씩을 보유 한다.
-중대본부(19명) : 중대장, 준위, 조장, 위생병 4명 등.
-소대본부(2명) : 소대장, 선임하사관(군조)
└기관총분대(13명) : 분대장, 부분대장, 기관총요원 4명(사수, 부사수, 탄약수 2명), 소총수 7명, 96식 경기관총 1정.
└척탄통분대(13명) : 분대장, 척탄통사수 6명, 소총수 6명, 89식 척탄통 3문.
매우 드물게 분대장이 기관단총을 드는 경우도 있었다. 군도는 하사관에게만 지급 되었지만, 병졸들도 개인적으로 구해서 차기도 하였다. 척탄통은 하도 작아서 미군이 '무릎박격포(Knee Mortar)'라고 부르는 특이한 물건인데 총류탄과 박격포의 중간 정도 된다. 보통 3인 1조로 운영되었고(사수, 제1탄약수, 제2탄약수), 수량 부족으로 분대당 2정 만 지급되기도 하였다.
중대는 139정의 소총과 경기관총 9정, 척탄통 9문으로 무장 한다. 갑종편제는 주로 중국전선에 있었고, 태평양 전선에서는 을종편제가 보통이었다.
-중대본부(19명) : 중대장, 준위, 조장, 위생병 4명 등.
-소대본부(2명) : 소대장, 선임하사관(군조)
└기관총분대(13명) : 분대장, 부분대장, 기관총요원 4명(사수, 부사수, 탄약수 2명), 소총수 7명, 96식 경기관총 1정.
└척탄통분대(13명) : 분대장, 척탄통사수 6명, 소총수 6명, 89식 척탄통 3문.
매우 드물게 분대장이 기관단총을 드는 경우도 있었다. 군도는 하사관에게만 지급 되었지만, 병졸들도 개인적으로 구해서 차기도 하였다. 척탄통은 하도 작아서 미군이 '무릎박격포(Knee Mortar)'라고 부르는 특이한 물건인데 총류탄과 박격포의 중간 정도 된다. 보통 3인 1조로 운영되었고(사수, 제1탄약수, 제2탄약수), 수량 부족으로 분대당 2정 만 지급되기도 하였다.
중대는 139정의 소총과 경기관총 9정, 척탄통 9문으로 무장 한다. 갑종편제는 주로 중국전선에 있었고, 태평양 전선에서는 을종편제가 보통이었다.
- 소총중대 갑종편제
총 262명. 중대본부 19명이며 각각 62명으로 구성된 소총 소대가 3개 있다. 여기에 중화기 소대 46명, 11명의 탄약분대 추가 된다. 소대 편제에서는 을종에 비해 경기관총 3정은 동일하나 척탄통이 하나 늘어 4문이 된다. 을종편제 분대장 13명에서 갑종편제는 분대당 15명으로 증가한다. 중화기소대는 중기관총분대 2개과 20밀리 대전차총 분대 2개로 구성 된다.
-중화기소대본부(2명) : 소대장, 선임하사관
└중기관총분대(11명) : 분대장, 사수, 부사수, 탄약수 4명(총 9660발), 부품휴대병 2명[10] , 예비 병력 2명(...), 92식 중기관총 1정.
└대전차총분대(11명) : 97식 자동포 1정(20mm).
-탄약분대(11명) : 분대장, 병 10명, 말 8필.
이러한 어마무시한 규모의 갑종 편제는 주로 중국전선에 배치 되었다. 특히 중기관총분대의 병력이 무려 11명이나 되는 등 무척 방만한데, 참고로 독일군의 MG34의 경우 사수, 부사수, 탄약수 2명으로 구성 되어 소총분대 1개당 1정씩 보유한다. 심지어 MG34는 이걸 경기관총은 물론 중기관충으로 사용하는 요술 방망이였다. 미군의 경우 M1919 브라우닝 경기관총은 분대장 포함 5명이며, M1917 수냉식 중기관총은 분대장, 사수, 부사수, 탄약수 3명에 지프차 운전병 1명하여 총 7명이다. 독일군이든 미군이든 당나라군이든 예비총열은 당연히 1개만 같고 다닌다.
중대 총 장비는 경기관총 9정, 척탄통 12문, 중기관총 2정, 대전차총 2정이다.
-중화기소대본부(2명) : 소대장, 선임하사관
└중기관총분대(11명) : 분대장, 사수, 부사수, 탄약수 4명(총 9660발), 부품휴대병 2명[10] , 예비 병력 2명(...), 92식 중기관총 1정.
└대전차총분대(11명) : 97식 자동포 1정(20mm).
-탄약분대(11명) : 분대장, 병 10명, 말 8필.
이러한 어마무시한 규모의 갑종 편제는 주로 중국전선에 배치 되었다. 특히 중기관총분대의 병력이 무려 11명이나 되는 등 무척 방만한데, 참고로 독일군의 MG34의 경우 사수, 부사수, 탄약수 2명으로 구성 되어 소총분대 1개당 1정씩 보유한다. 심지어 MG34는 이걸 경기관총은 물론 중기관충으로 사용하는 요술 방망이였다. 미군의 경우 M1919 브라우닝 경기관총은 분대장 포함 5명이며, M1917 수냉식 중기관총은 분대장, 사수, 부사수, 탄약수 3명에 지프차 운전병 1명하여 총 7명이다. 독일군이든 미군이든 당나라군이든 예비총열은 당연히 1개만 같고 다닌다.
중대 총 장비는 경기관총 9정, 척탄통 12문, 중기관총 2정, 대전차총 2정이다.
- 기관총 중대
기관총 중대의 경우 92식 중기관총 12대를 운용하는데, 총원 223명이며 46명의 기관총 소대 3개가 있다. 기관총 소대는 전총(戦銃)분대 4개와 탄약 분대 1개로 구성 된다. 전총분대는 전시에 말 2마리가 추가 된다. 또한 전총분대에 말8필로 구성된 탄약분대가 합쳐져서 1개 기관총 소대가 되며 3개 기관총 소대가 1개 기관총 중대가 되어 보병대대에 배속 된다.
- 보병포 중대
122명. 70밀리 보병포 소대 2개에 탄약 소대 1개로 구성된다.
-보병포소대(55명) : 보병포 분대 2개, 탄약분대 1개
└보병포분대(15명) : 70밀리 보병포 1문.
을종편제에는 대대에 보병포 소대 1개 2문, 갑종편제에는 대대에 보병포 중대 1개에 4문에 배치 된다.
-보병포소대(55명) : 보병포 분대 2개, 탄약분대 1개
└보병포분대(15명) : 70밀리 보병포 1문.
을종편제에는 대대에 보병포 소대 1개 2문, 갑종편제에는 대대에 보병포 중대 1개에 4문에 배치 된다.
- 포병중대
포병중대는 야전포병중대, 기병포병중대, 산포병중대로 구분된다. 소대는 포차 1문과 탄약차를 갖는 분대 2개로 이루어져 있고 2개 소대가 전포대를 구성함으로 1개 포병중대는 4문의 포를 보유한다. 각 포병중대는 탄약소대가 있는데 부대에 따라 탄약 차량 2량 또는 4량으로 구성된다.
- 기타 병과 중대
기병중대는 4개 기병소대로 구성되며, 기병기관총중대는 보병기관총 중대의 편성에 준한다. 공병부대는 보병에 준하지만 경기관총분대가 없다. 치중병부대는 차량치중병 부대와 기마치중병부대로 구분된다. 전차 소대 포전차는 3량, 총전차는 2량이 소대를 이룬다.
[1] 잘 알려진 만주군은 관동군의 괴뢰국인 만주국 군대로, 관동군을 보조하는 2선급 전력이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 기입된 만주군은 러일전쟁 시기 만주에서 작전한 일본 야전군을 지칭하는 용어이다.[2] 현대 한국군 사단사령부의 인원보다 사단 병력이 두배 많은 일본군 사단사령부 인원이 한국군의 반의 반도 안된다. 참고로 한국군은 대대급 이하에서는 미군/유럽군에 비해 행정병력이 적은편이다. [3] 포병연대는 두해전인 96년에 5개 연대 추가로 총 12개연대. 1개 사단분의 보병연대와 포병이 없는데 근위 사단으로 추정. 99년에 포병연대 7개 추가, 다음해에 보병연대 4개 추가 되어 완편됨[4] 21개 사단이면 42만명은 되어야 정상이겠지만, 평시는 전시에 비해 정원이 절반 가량이기 때문에 독립 부대를 합쳐도 총병력이 적다.[5] 폐지된 부대의 현역장교 2,000명은 남자 중학교 이상에 배치되어 학교교련을 실시 하였다.[6] 만주에 횡행하던 마적떼는 물론, '''항일 무장세력''' 역시 비적으로 지칭했다. 단, 중화민국 정부의 정규군인 국부군을 비적으로 칭하진 않았다.[7] 총 24개 사단중, 관동군에 6개, 지나군에 16개가 배치되었으면 2개 사단이 남는다. 원래 조선에 19,20사단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용산의 20사단을 관동군이 대본영의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만주사변에 동원하여 데려가버려 조선에는 19 사단만 남았고, 40년 이후에야 충원되어 다시 조선은 2개 사단 체제로 환원된다. 본토에는 근위사단 딱 1개만 남아 있었다.[8] 아직도 일부 부대에서 ‘당가’ 또는 ‘당까’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9] 어느 나라처럼 4자를 빼지 않아 444연대도 있다. 10연대, 18연대는 당연히 있고[10] 예비 부품과 수리 도구, 예비 총열 등 20kg에 달하는 장비이다. 한쪽이 사망하여 장비를 분실할 때를 대비하여 2세트를 2명이서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