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일생
1. 초년 시절
일제강점기인 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에서 하급 군관인 효력부위[1] 를 지낸 농민 박성빈과 백남의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정희 본인은 4남 2녀 중 막내다. 백남의는 박정희를 임신할 당시 나이가 45살이었고,[2] 하도 가난한 살림에 입이 늘어난다는 것 때문에[3] 배 속의 아이를 떼어내기 위해 간장을 끓여 한 사발 원샷한다던가 언덕에서 일부러 굴러떨어지는 등 여러 방법을 시도해봤지만 실패하고 박정희는 그대로 태어났다.
태중에서 워낙 고생한 탓인지 박정희는 당시로선 훤칠한 장신인 아버지나 형들과 비교해 성인이 되어서도 왜소한 체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도 어렸을 때부터 공부머리는 있었는지 어려운 사정에서도 박정희를 보통학교로 내보냈기에 집안에서 박성희와 같이 근대식 교육을 받은 2명 중 1명이었으며,[4] 1932년 3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5] 에 응시하기도 했다.[6] 어머니 백남의는 박정희가 "합격하고 진학을 못 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지만 1932년 4월 박정희는 정원 100명 중 51등으로 합격했고, 대구사범학교에 제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대구사범 시절에는 대구 시내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고, 품행 평가에서 '양(良)'이 4번, '가(可)'가 1번이었지만 '군사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고 한다.[7] 1937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4월 문경공립보통학교 훈도)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이렇게 학교 선생 일을 하고 있던 박정희는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의 간청으로, 19세이던 1936년에 16세의 김호남과 결혼을 했고, 이듬해에 딸 박재옥이 태어났다. 그러나 자유연애로 결혼한 것이 아닌 정략결혼인 데다가 박정희가 김호남에게 성적인 호감을 느낀 것도 아니었기에 김호남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2. 만주군 장교 시절
교사로 재직하던 중, 어린 시절부터 군인에 대한 동경과 한국인 교사 차별 문제, 가족 문제[8] 등의 이유로 1938년 11월, 만주국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1기[9][10] 에 1차로 지원했다. 처음엔 나이 제한[11] 으로 거절당했지만, 동료 유증선 선생의 권유로 탈락을 재고시키기 위해 면도칼로 새끼손가락에 피를 내 '혈서'를 학생시험 용지에 써서 보낸다.(동료 선생 유증선의 증언)[12] 이 혈서는 1939년 3월 만주신문에 게재되었고, 이후 고향 선배이자 당시 시험관이었던 조선인 출신 만주군 간도특설대 대위 강재호가 신문을 보고 후원자가 되었다. 이러한 도움을 얻은 박정희는 드디어 10월 군관 선발 시험을 보았으며,[13] 결국에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에, 합격자 240명 중 15등으로 입학하였다.
그 후 1942년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때 사용한 이름이 창씨개명한 이름인 다카키 마사오. 수석 졸업생으로 "대동아 공영권 이룩하기 위한 성전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선서하며, 만주국 황제 푸이에게 은사품으로 금장시계를 받고 일본육사 유학생대 편입 특전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만주국육군군관학교 예과 상위 성적자에게 베풀어지는 관행에 따라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2년)에 진학해 졸업하였다. 봉천군관학교를 거쳐 신경군관학교(만주국육군군관학교) 제4기까지는 성적우수자에게 일본육사 편입학 기회가 주어졌다. 다만, 신경군관학교 제5기부터 조선인이 일본계로 간주하여 전원 일본육사 본과로 편입한다. 박정희는 신경군관학교 제2기이므로 성적우수자로서 편입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만주국육군군관학교 문서를 참조. 1944년 4월 일본육사 57기를 3등으로 졸업해 견습군관으로 관동군 635부대에 배치된다. 그해 7월 황군 육군 소위 '만주군 제6군관구 소속 보병 제8단' '[15][16] 배장(소대장)으로 근무한다.
이 시기에 대해선 같은 해 7월 말 8월 초까지 제8단의 2개 대대가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을 공격할 때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여했다는 주장[17] 과 실제로 놀고 술 먹을 기회가 많아 비교적 편히 지냈고 전투에 참여한 경험은 없었다는 주장[18] 이 공존한다. 박정희는 부대에서 인정받는 엘리트로, 1944년 12월 23일 보병 8단 단장의 부관실에 부임해 작전참모 역할을 하는 을종 부관 겸 부대의 단기(團旗)를 책임 관리하게 된다.
1945년 7월 중위로 진급한다. 1945년 8월 보병 8단 예하 각 부대는 둬룬(多倫)으로 진출해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8월 10일에 출발하여 17일 집결했으나 일본이 패망 소식을 접하고, 8단의 중국인 군인들에 의해 신현준 등과 함께 직위에서 해임되고 무장해제당했다. 9월 팔로군의 지휘를 받는 6단과 함께 미윤으로 이동한 후, 9월 21일 도망치기 위해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신현준, 이주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일본군과 만주군에 소속되어 있던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가 지휘하는 제1대대(평진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였으나, 4월 평진대(제1대대)가 해산한 후, 5월 8일 미군정의 방침에 의해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19] 일설에서는 소설 <광복군>과 이를 근거로 '비밀 광복군'설을 주장하나 근거가 미약하다. 그렇게 빈털터리로 고향 구미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른 가족도 '안정된 교사직을 버리고 출세한다고 만주로 갔다가 거지꼴로 돌아온 박정희에게 눈치를 주었다'고 한다.
3. 국군 장교 시절
1946년 9월 귀국한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해 3개월 단기 과정을 마치고 12월 14일 2기로 졸업하고, 남조선국방경비대에 들어가서 포병 소위 계급을 부여받는다.
복무 도중에 셋째 형이자 공산주의자였던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으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였던 이재복은 박상희가 죽자 그의 가족을 돌봐주는 등 박정희 집안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러던 중 우익에게 피살된 형 박상희에 대한 복수심과 이재복의 권유로 남조선로동당에 들어가서 대한민국 국군 내 남로당 프락치들의 군사총책으로 활동하였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들어갈 때,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 황태성이 신원 보증을 서줬다.[20] 남로당 활동 당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에서 감행했던 작전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사건(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지도했다.
1947년 12월 경리장교였던 박경원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이화여자대학교 아동교육학과 1학년이었던 이현란(당시 24살)과 처음 만난다. 이현란은 함경남도 원산시 출신으로, 혈혈단신으로 월남한 처지였다. 박정희는 이현란과 약혼한 후 서울 용산 관사로 데리고 와 동거를 시작했다.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3년 정도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 1948년 11월 중순~12월 말 사이 이현란은 광화문 산부인과에서 아들을 출산했다. 그러나 약 6개월 뒤 아들은 병명도 모른 채 사망했고, 이현란이 남긴 편지에 따르면, 이현란은 저녁에 황 장군 부인하고 같이 용산 관사의 뒷산에다가 아이의 시신을 붉은 상자에 입관하여 암매장하였다고 한다. 당시 박정희는 여순사건과 연루되면서 감옥에 있어 얼굴조차 보지 못했고 아들은 작명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1948년 11월 11일, 제1연대 정보주임장교이자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작업 도중에 여수·순천 반란사건과 연루돼 박정희가 체포되는데, 우선 남로당 군총책 이재복이 '거동수상자'로 잡혔다. 이재복에 이어 비서 겸 군사연락책 김영식이 체포되면서 숙군 수사가 급진되는데, 수사팀은 연락책 김영식을 통해 명단을 얻게 된다. 이 명단에 '박정희 소령'이 포함되어있었다. 결국 11월 11일 박정희는 체포된다. 같은 만주국 출신이자 당시 육본정보국장으로 김창룡의 직속상관 백선엽 대령[21] 과 정일권, 김정렬, 장도영, 원용덕, 채병덕, 강문봉, 송요찬 등의 육군군관학교 출신 군인들의 구명으로, 처벌을 면하고 예편되었으며 전향하게 된다. 수사 과정에서 사실을 순순히 시인하면서 군내 남로당 조직원 약 300명의 명단을 제공하고 그 공로로 숙군사업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점을 인정받아 1949년 2월 13일 1심에서 사형을 면하고 “파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되었다.김창룡 소령이 차트를 펼쳐 보였다. 남로당 군사조직표가 그려져 있었다.(중략)박원석 대위는 맨 끝에 이름이 올라 있었는데, 바로 그위에 박정희 소령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116p)
박원석이 공산주의자라는 것도 당혹스러운데, 그 위가 바로 박정희 소령이라 하니 더욱 더 황당한 일이었다.(중략)그래서 김창룡에게 물었다. "박원석 대위가 박정희 소령의 세포라고 하는데, 박정희 소령도 내가 보기엔 빨갱이와 아무 관련 없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는 빨갱이인 것이 확실합니다." 김창룡은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118p)
(중략)김창룡이 간 뒤 채병덕 육군참모 총장이 내게 “김창룡이가 말하기를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인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풀어줄 길은 있다고 하는구만...” 한 가닥 실마리가 풀려가는 소리였다.(중략)방첩대에서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갈 때 10번만 박정희를 앞세우고 얼굴을 내비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첫째, 박정희 소령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기에 협력하여 누명을 벗을 것이요, 둘째, 설사 그가 공산주의자라 하더라도 10번이나 그들에게 반역을 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되고, 그 결과 확실하게 전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121p)
동거녀(약혼녀) 이현란은 공산주의가 싫어서 월남한 사람이었고 아들마저 죽자 박정희에게 실망했다. 게다가 박정희가 아내와 딸내미까지 둔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이현란에게 들통났다. 3남 박상희가 경찰에게 총살당하고, 막내아들 박정희마저 무기징역 선고를 받자, 그 충격으로 어머니 백남의는 세상을 떠났다.
다만, 박정희만 특별 대우를 받아 사면된 것은 아니고,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응준이 혐의자들과 일일이 개별 면담한 뒤 상당수를 군문을 나가는 조건으로 훈방 조치했다고 한다. 당시 김창룡의 숙군작업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무고한 피해자가 매우 많았다. 이 때문에 군대 고위층이 최대한 구제하는 방침을 세우면서, 진짜 남로당 비밀당원이었던 박정희도 같이 살아났다.
이후 박정희의 능력을 아깝게 여긴 백선엽의 추천으로, 박정희는 민간인 신분인 군속(군무원)으로 육군 전투정보과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곳에서 박정희는 훗날 자신의 쿠데타 주축 세력이 되는 육군 8기들과 접촉하게 된다. 그중에서 8기 우등 졸업으로 정보과에 배속된 김종필과 각별한 인연을 맺는다. 또한 훗날 자신의 독재를 공고히 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이후락 역시 이곳에서 만나게 된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포병 소령으로 복귀하였고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9월 15일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연루되고 아들이 죽은 이후, 약혼녀 이현란은 여러 차례의 가출과 방황을 했고, 박정희는 그때마다 찾으러 다니고는 했다. 1950년 2월, 결국 이현란과 헤어졌다. 6.25 전쟁 발발 이후였던, 8월 하순 부산 피난처에서 송재천 소위의 소개로 맞선을 보았다. 같은 해 11월, 아내 김호남과 협의 이혼으로 갈라섰다. 12월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허억 시장(당시 대구시장)의 주례로 육영수 여사와 재혼한다. 당시 박정희는 친족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김호남과의 이혼을 주저하고 있었는데 6.25 전쟁이 발발하자 엄청나게 혼란한 틈을 타서 아주 잽싸게 이혼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육영수와 바로 결혼했다.
1952년 5월 이용문의 주도로 계획된 군부의 이승만 축출 시도에서, 이용문의 보좌관이었던 박정희 역시 정변 계획에 참여하였으나 계획은 미수로 끝나게 되었다. 1953년 11월 25일에는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됐고 1955년 7월 14일에는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1957년 3월에는 소장 진급자 명단에 올랐을 때 과거 남로당 경력을 문제 삼은 진급 담당자들[22] 이 백선엽에게 항의하였지만, 그는 "박 장군에 대해선 내가 보장한다."며 박정희가 진급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덕분에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 백선엽을 "백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와 가까워졌다.
소장 계급으로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는 1957년 제7사단 사단장, 1959년 7월 1일 육군 제6군관구사령관이 되었으며 1960년 1월 21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으며 군내 요직을 거쳤다. 4.19 혁명으로 같은 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민주당이 집권하자,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했고 이종찬은 장면 국무총리에게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면서 출세가도가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장면 총리가 이 문제를 미 육군 제8군사령관 겸 UN군총사령관 육군대장 '카터 매그루더'(Carter B. Magruder)와 논의하면서, 박정희의 신원을 육본을 통해 조회했고 김형일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라고 답변했다. 이를 통해 박정희의 남로당 활동 전력이 알려지면서 매그루터는 장면 총리를 찾아가 항의했다. 결국 1960년 12월 15일 김형일은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좌천당한다. 이 일로 당시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한 김형일[23] 은 박정희와 원수 사이가 됐고, 이후 5.16 군정에도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됐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박정희는 이전 상관이었던 이용문처럼 정변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61년 4월 1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박정희는 4.19 혁명 1주년을 기념으로 학생들이 대규모 집회를 할 것으로 예상하였고, 이때 혼란을 틈타 집회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을 탈취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공황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3.1. 5.16 군사정변
박정희는 나이 만 43세에 군사정변 세력의 지도자가 되었다. 군은 1961년 5월 16일 해병대 병력 일부를 시작으로 대한민국 제2야전군 상당수와 제1야전군의 일부가 유엔군사령부에서 이탈하여 대한민국 정부 주요 기관 및 시설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실체를 드러냈다. 이는 박정희를 구심점으로 하는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장교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 육군 중장 장도영 관할 밖의 제1해병여단과 공수단을 비롯해서 서울 인근으로는 서울 동부의 제6군단 포병단, 서울 서부의 제30사단, 서울 남부의 제33사단, 서울 북부의 5사단 그리고 춘천, 대구, 광주, 부산에 주둔 중이던 군대들이 궐기하여 이른바 5.16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이때 박정희는 자신의 이름을 걸지 않고 장도영을 내세워 장도영의 이름으로 일으켰다. 박정희는 머릿속으로 치밀하게 계산을 했는데 성공하면 자기가 먹을 생각이었고 실패하면 장도영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어찌 흘러가든 매는 결국 장도영이 다 맞을 것이므로 박정희에게 일절 손해가 없는 장사였던 셈이다. 그랬기에 이렇게 대담하게 쿠데타를 일으키는 게 가능했다.
KBS라디오방송국, 육군본부, 국방부, 제6군관구사령부(제 1지휘소로 사용), 서울지방경찰청, 파출소, 중앙전화국, 시청, 도청, 발전소 등이 표적이 되었다. 정부 수반이 머물렀던 반도호텔(현 롯데호텔)[24] 에는 육군 특수부대(GDT)의 기습이 가해졌다. 그러나 장면 총리가 호텔 맞은편의 주한미국대사관, 안국동 미국대사관 숙소를 거쳐 혜화동 가르멜 봉쇄수녀원[25] 으로 피신하고, 여러 각료 또한 은신함으로써 작전이 실패하고 계엄령 승인을 얻지 못하게 된다. 이에 박정희는 오전 9시 경, 장면 총리에게 피신을 권한 후 체포당한 현석호 국방장관과 연금당한 장도영을 데리고 해군참모총장 해군중장 이성호 제독,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 공군중장 김신 장군, 해병대사령관 해병중장 김성은 장군과 함께 청와대로 향해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계엄령 추인 및 혁명 지지를 요구한다. 하지만 대통령 또한 이를 완강하게 거절하며 오히려 사퇴 의사를 밝혔고, 오전 10시경 국회해산 및 비상계엄을 알리자 곧 북한군이 휴전선에 결집, 10시 18분경에는 매그루더와 주한 미 대리대사 마셜 그린이 장면내각 지지를 선언하는 한편, 국민들이 군사봉기를 딱히 반겨주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다.[26]
이에 정권이 군부에 넘어갔구나 하고 국민이나 미국이 믿게 하기 위해 그날 장도영 등을 앞세워 여러 포고문을 쏟아내는데[27] , 전국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불법으로 하고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정치인과의 협상을 배격할 것임을 밝히며, 국무위원, 정무위원을 모조리 체포하고, 대의원 헌법기관을 정지시키는 한편, 오후 7시부터 장면 정권의 모든 권력을 군사혁명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인수함에 따라 국가 기구의 전권을 행사할 것이고, 오후 8시를 기해 민의원, 참의원, 지방의원 등 의회는 모조리 해산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후 오후 10시 30분에 윤보선 대통령으로 하여금 민주당원들의 신병을 전부 보장한다는 대가를 주고 대국민 특별담화 방송을 하게 하여 장면과 각료들에게 투항을 권고하였고 17일 내부 불만을 잠재우면서 장면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다가 그날 저녁부터 18일 아침까지 매그루더로부터 출동명령을 받은 야전사령본부청을 점령하고 대한민국 육군 제1군사령관 이한림의 체포를 단행한다.
그리고 서울대학교 학군단 훈육장교인 전두환 대위가 이 쿠데타에 가담했는데 전두환은 졸업선배 신분으로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을 불러다가 "박정희 지지 퍼레이드를 벌이라"고 지시했다. 이에 육군사관학교 교장인 강영훈이 막았고 전두환은 이를 박정희에게 일러바쳤는데, 박정희는 강영훈을 구속 수감시키고 전두환이 하려고 했던 퍼레이드를 진행시켰다.
한편, 장면 총리는 16일 외부에서의 접촉을 차단하고선 유엔군에 대한 개입을 요구하는 편지를 미 대사관에 보냈다. 17일 오후에는 가까운 사이였던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와, 18일 오전 총리 고문 도널드 위태커와 비밀리에 접촉을 가지며 동향을 파악하였다. 이후 18일 장도영이 찾아와 설득한 끝에 대동하여 18일 12시 30분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소집한 69차 임시 국무회의에 참여하게 되는데 윤보선 대통령은 국무회의가 아니라 투항식에 참여한 것이었다고 회고하였다.5월 18일 아침, 매그루터 사령관이 상세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지금 서울에 진입한 쿠데타 군은 2,700 명 가량인데, 박정희 소장이 영도하고 있소. 그는 우리가 갖고 있는 정보로는 공산주의자요! 현재로서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내색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본색을 드러낼 것이오. 그래서 우리는 쿠데타의 성격과 장래를 의심하고 있소.(중략)우리는 이점에 대하여 깊이 우려하고 있소. 따라서 우리는 공산주의가 싹트기 전에 미리부터 잘라 나간다는 견지에서 불행한 일이지만 쿠데타군을 무력 진압하기로 결정하였소!"
김정렬 국방장관의 '김정렬 회고록' 1993년, 박정희 매그루더 회담 주선 289p~294p의 일부 (원문)
장면 총리는 퇴장하며 윤보선 대통령을 만나 "남미의 여러 나라처럼 군부 변란이 상습적으로 되어버린다면 이 나라의 앞날이 무척 염려스럽소"하고 윤보선 대통령과 생전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
이로써 박정희는 내각 총사퇴를 결의하고, 총리 및 국무회의에서 계엄령 승인을 얻어 1시간 뒤 윤보선 대통령이 이를 추인하도록 함으로써, 봉기 60여 시간 만에 마침내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부, 국회, 대법원의 역할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전권을 군사혁명위원회로 가져왔다.
이에 따라 박정희는 이튿날 아침 군사혁명위원회를, 장도영을 의장으로 하고, 자신을 부의장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하고 1962년 12월 31일까지 전국의 모든 정치인 활동을 일체 금지시키며 미국과 비공식적인 면담을 가진 뒤 5월 23일 박-매그루더 협상을 타결함과 동시에 포고령을 내려 정기 간행물 1,200여 종을 모두 폐간, 6월에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공포, 육군 보병중령 김종필을 위시한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켜 세력을 견고히 한 다음, 7월 3일 인신 구속 등에 관한 임시 특례법(인신 구속 특례법)을 통과시킴에 따라 법관의 영장도 필요없고 형사소송법을 따를 필요없이 반혁명으로 의심되면 어떤 국민도 마음대로 구속, 압수, 수색할 수 있게 되어 의장 장도영과 43명의 인사들을 숙청하고[28] , 의장직에 올라, 1961년 11월 11일 미국 초정에 따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민정이양에 관한 회담을 나눈다.
동시에 민생 안정책으로 농가 부채 탕감, 농산물 가격 안정 정책을 실시해 농민들의 호응을 얻고 제2공화국에서 처벌 중이던 혁명재판을 통해 3.15 부정선거 관련 책임자를 소탕, 이정재 등 정치깡패들을 일거에 체포 후 조리돌림하며 국민과 지식인들에게도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조용수같이 민간인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사형당한 일도 있다.[29]
1961년 6월 3일에는 윤보선 대통령이 조속히 민간에 정권을 넘겨야 하며 특히 이 문제에 대해서는 9월에 열리는 유엔 총회를 고려해야 한다고 한 것을 동아일보가 "조속한 정권 이양 필요"라는 제목으로 1면에 보도한 적이 있는데, 검열을 안 받고 이게 신문에 실려 동아일보 편집국장, 정치부 차장, 기사를 쓴 이만섭 기자를 비롯한 정치부 기자 등이 연행되고, 이만섭이 구속되었으며 윤보선 대통령의 비서관 유동준까지 최고회의에 끌려갔다고 한다.
한편 중앙정보부에서는 정치학, 법학, 경제학, 교육학 등 학자들과 중앙정보부 간부를 포함한 21명으로 구성된 대외문제연구소를 설립하는데 여기서 1961년 10월에 1963년 8월 15일 민정을 이양한다는 전제 하에 군인들이 예편해 대선과 총선에서 승리함으로서 민정에서도 정권을 잡아야 하며, 선거 승리를 위해 군인이 참여할 정당을 만들어야 하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새 헌법과 선거 제도를 고안해야 한다는 계획서를 작성한다.
이에 중앙정보부 행정차장 이영근이 총괄해 1962년 1월 말부터 비밀리에 법조계, 언론계 등 각계 인사 52명으로 재건동지회를 결성, 1962년 4월 훈련원을 설치하고 1962년 말까지 1,000여 명의 요원을 교육했으며,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일본 6개 재벌로부터 정치자금 총 6,600만 달러를 받아왔고, 대내적으로는 1962년 겨울 김상돈, 조중서 등 민주당 41인을 반혁명으로 몰아 체포하기도 한다.
또한 징벌적, 적극적 부쟁처리법으로서 재계를 강제 동원하거나 압박하는데 일례로 1962년 5월 25일에는 부정축재법 위반으로 김지태를 체포해 그의 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부산일보 경영권을 중앙정보위원회로 압수, 결국 5.16장학회, 정수장학회로 넘겨주게 되는데 자금을 제공해달라는 요구에 김지태가 응하지 않은 것이 원인으로 알려졌었다.
또 다른 사례로는 1962년 6월 10일에는 중공업화를 통한 내포적 공업화 재원을 확보하기위해 미국 몰래 화폐개혁을 실시하고 잇따라 동결 조치를 발표하여 장롱 속에 있는 돈들을 끌어내고 재산에 따라 차등적으로 정부 출연기관 주식을 강매하게 하며 삼화제철 등을 동원하려 한 것이 있다. 동시에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 등으로 인해 현금 위주로 재산을 축적하고 있던 국내 화교 상권을 타격하기도 했다. 덕분에 아시아 경제를 주름잡던 화교들이 한국에서만큼은 영향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지하경제가 없었고 사업 자금 동결에 따라 중소기업 가동률이 50% 밑으로 떨어지는 등 역효과만 나타나자 뒤늦게 이를 안 미국의 요구대로 실패를 인정, 이후 차츰 미국의 주장을 수용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박정희는 중공업화 계획 연기, 재정 안정화, 금리 현실화, 환율 정상화, 한일수교 등 미국의 여러 요구에 대한 승낙을 발판으로 원조, 차관 등의 인센티브를 더 따내는 전략으로 선회하게 된다. 그렇게 1962년 12월 17일이 되자, 박정희는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시키고[30] 26일 단원제 국회와 대통령 중심제릉 핵심으로 하는 새 헌법을 공포하고, 이튿날 대통령 선거 출마 의사를 밝히기에 이른다.
민정이양이 다가오자,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 국회를 뼈대로 하는 제5차 개헌을 공포하고, 증권파동을 통한 정치자금, 일본 재벌의 로비 자금 등으로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세를 불린다. 그리고 혁명공약에 따라 민간인 신분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정변 당시 자신이 끌어내렸던 윤보선과 국민 선거로 맞붙는다.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윤보선 측은 박정희의 '여순사건 관련됨(남로당 군책임자)', '간첩 황태성', 「국가와 혁명과 나」의 저서에서 '서구의 민주주의가 한국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 것, 나세르를 찬양하고 히틀러를 쓸만한 사람이라고 추켜올린 것' 등의 내용을 근거로 박의장(박정희)의 민주주의 신봉 여부가 더욱 의심스럽다고 '사상 논란'을 제기했다.이에 박정희는 1963년 10월 5일 동아일보 1면 반단 광고로 다음과 같은 광고를 내면서 매카시즘으로 모욕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이후 반공을 국시로 내걸면서 소위 빨갱이 논란으로 정권을 공고히 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4. 제3공화국
4.1. 5대 대통령
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만 3년 195일).
1963년 10월 15일, 박정희는 윤보선보다 0.97% 많은 표를 받음으로써, 5대 대선에서 승리했다.[31] 윤보선을 후보로 내세운 야권 세력은 허정과 송요찬의 사퇴로 표 결집을 시도했으나, 결국 박정희에게 15만 투표 차로 패배했다.정부의 시책을 이해하고 또한 협조하는 건실한 태도와 함께 근면한 생활인의 자세를 살려나가는 한 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우리의 노력과 분발은 반드시 그리고 하루 속히 결실될 날이 올 것을 나는 확신해 마지않습니다.
- 1964년 신년 연설 中
박정희가 내세운 젊고 과단성 있는 이미지로 혁신계 세력의 지지를 얻었고, 군정 시기에 거둔 적극적인 중농정책의 성과를 내세워 농민층으로부터 많은 표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 후보의 남로당 시절 일을 거론하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종북몰이를 시도했는데 이에 당시 상대적으로 이념관계로 인하여 피해를 많이 본 영남과 호남 지역에서 역풍이 불어서 재미를 보지 못했다. 오히려 당시 영남 지방은 진보적인 성향이 강하다 보니 이념 공세에 시달리던 박정희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12월 12일 박정희는 김현철의 후임으로 최두선을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김유택을 부총리, 정일권을 외무부장관으로 하는 제3공화국 초대내각을 구성하여, 12월 17일 5대 대통령에 취임함과 동시에 이를 출범시킨다.[32] 12월 20일에는 5.16에 참여했었던 제1해병여단[33] 을 김성은 국방장관,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등과 함께 방문해 시찰하고 21일 서민 필수품을 중심으로 하는 물가안정을 지시, 24일에는 점차적인 물가통제의 해제, 안정을 기조로 하는 장기경제개발계획의 합리적 추진, 내핍생활 장려, 수출 진흥을 골자로 하는 경제시책 4원칙을 발표하는 한편, 정일권 외무장관과 함께 한일국교 정상화에 대한 논의를 검토한다.
12월 30일에는 김현철을 대통령 전권특사로서 2개월간 우방 40여 개국에 친선 방문 시키고 이듬해 1월 6일 한일협상과 관련하여 김용식을 수석대표로 하는 전권교섭단을 일본에 파견, 한미일 상호협력 등을 어젠다로 미국과의 수뇌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공화당 총재로서 대선에서 승리한 뒤, 총선에서도 크게 승리하여 공화당이 의석의 62% 이상을 확보하였으나, 비(非) 공화당 인사를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함에 따라 내적으로 개각 논란 등 잡음이 생기기 시작했고 외적으로는 겨울 쌀을 비롯한 생필품의 가격이 무섭게 올라 민심이 술렁이는 한편, 1964년 3월 9일 유진오, 윤보선, 장준하, 장택상 등을 비롯한 200여 명의 야권 인사들을 주축으로 불리한 한일회담 백지화를 요구한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정위원회 결성 및 3월 24일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 학생들을 필두로한 1차 6.3 운동을 분수령으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최두선이 사퇴, 5월 11일 새 국무총리로 임명한 정일권이 제청한 내각으로 교체되고, 공화당은 내분에 빠지면서 6월 5일에는 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사퇴, 6월 3일부터 56일간 서울에 비상계엄이 떨어지기도 하였다.
이승만 정부 시기부터 진행되던 한일국교정상화에 참여하였다. 이승만 시절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대통령 이승만 그 자신이 그래도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던 지라 일본에 대한 반감이 어마어마했던 것도 있고, 결정적으로 재산 청구권 문제와 평화선 문제가 있어 합의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정권을 인정받아야 하는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미국 대사관의 긴밀한 협력 아래 요청된 대일정상회담, 방미 등을 수용적으로 받아들이며 세력 기반으로 다지는 데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박정희는 CIA의 비밀스러운 관여 속 1962년부터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보내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와 비밀교섭을 진행했다. 하지만, 독립 축하금(대일 청구권 자금) 형식으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 상업 차관 1억 달러 제공이 결정되자 반대 여론이 들끓었는데, 식민지 시절에 관한 일본의 통렬한 반성이 누락된 굴욕적인 회담이었기 때문이었다. 독도 영유권 문제도 어물쩍 넘어가서 지금까지 영토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64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시위(6.3 항쟁)가 일어났다[34] . 박정희는 비상계엄과 휴교령을 선포해 학생 운동을 진압하고 65년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한다.
1964년 7월 10일 정부는 공산 게릴라에게 고통받고 있는 베트남 공화국에 파병하기로 제안하고, 21일 국무회의를 거쳐 30일 만장일치로 국회 동의를 얻음으로써 양국 간의 유대와 경제적 협력을 강화했다.[35]
연말 12월 6일부터는 서독을 직접 방문해 8일 하인리히 뤼프케 서독 대통령과 약 1시간 동안 정치, 경제 등에 관한 한독정상회담을 가지고, 이튿날 에르하르트 서독 수상과 회담을 가져 양국의 유대를 증진 및 경제협력의 구체적인 방법을 합의하였으며, 8일간 독일에서 머물다가 15일 귀국, 일본에서 미일경제회담을 마치고 방한해 청와대로 온 러스크 미 국무장관 일행과 29일 한미, 한일 전반을 협의한다.
이어 이듬해 1월 26일에는 정부 내 논의 끝에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한민국 비전투부대 2,000여 명을 추가적으로 파병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4월 29일 말레이시아와 정삼회담, 5월 19일 미국 대통령의 초청에 따른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자유진영의 결속을 다지고 통해 베트남 수호 재천명과 한국에 대한 미국 차관 1억 5천만 달러 추가 등의 공동성명을 내고 5월 26일 귀국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에 조인함으로써 한일국교 정상화를 도모하고 7월 2일 국무회의에서 베트남에 전투부대 1개사단 파병을 결의, 8월 2일 대규모 군사 파병 계획을 공식화한다.
이 기간 동안 주로 경제정책을 추진했는데,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었던 것도 이 시점이었다. 그러나 경제정책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으며 그것은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 등을 파견해서 나온 수익금과 중동특수, 경제원조와 투자단 유치,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맺고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 등으로 충당했다. 또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전쟁 파병을 받아들여 1964년엔 태권도 교관단과 같은 비전투인력이, 1965년부터는 전투병 파병이 본격화되었다. 이 당시 박정희는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방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파병을 결정했다'라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국회 내에 파병 반대 세력을 계획적으로 조직하여 미국의 지원을 늘릴 수 있게 하는 영리한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실제로 브라운 각서에서 한국군 장비의 현대화, 경제 개발을 위한 차관, 베트남 현지 건설 사업 참여권 등을 보장받았는데, 이로 인해 벌어들인 외화획득은 베트남 특수라 불리며 경제자금으로 쓰였다. 그러나 이중배상금지법을 도입하여 문제가 된다. 군인, 군무원, 경찰공무원이 훈련이나 전투 시 상해를 입을 경우 다른 법률을 통해 보상을 받을 수 있다면 국가배상 청구권을 제한하는 법률이다. 군인에 대한 배상액이 부담이 되어 제정했으나 대법원에 의해 위헌판결을 받자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헌법규정' 으로 도입한다.
이게 현행 헌법까지 유지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악법으로 꼽힌다. 내곡동 예비군 총기난사 사건 피해자들이 국가배상 소송을 못 거는 이유도 바로 이 조항 때문. 헌법 조항에 대한 위헌시비가 나오는 이례적인 경우의 조항이다.
4.2. 6대 대통령
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만 4년).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경제발전의 성과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얻어, 또 다시 구태의연한 윤보선을 후보로 내세운 신민당을 큰 득표 차로 따돌리며 재선에 성공했다. 한편 김신조 사건과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이 연이어 터지자, 박정희 정부의 본격적인 공안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주민등록증 제도 또한 이 시기에 나왔는데, 제도의 목적도 불온 분자 색출에 용이하게끔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인민혁명당 사건과 동백림 사건 등 현재 모두 무죄 판결난 간첩 조작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져 훗날까지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동시에 박정희의 초법적 권력 행사 역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국가 안보 강화와 경제 발전을 구실로 '''3선 개헌'''을 단행, 야당인 신민당과 민주화 운동세력의 격렬한 반대 투쟁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별관에서 3선 개헌안 국민 투표 법안을 변칙적으로 통과시켰다.
3선 개헌은 공화당 내에서도 반발이 많았는데, 이미 그 시점에서는 "각하께서 2번 하셨으니 후계자로는 누굴 정하지?"라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1967년 대선 당시 김형욱은 "박정희가 술자리에서 3선 욕심을 공공연히 피력하자, 솔직히 무서웠다"고 훗날 회고록에서 밝혔다. 박정희는 당시, 후계자로 내정되다시피 한 김종필을 2인자 자리에서 몰아내기 위해 김형욱을 시켜 도청과 가택수색을 병행해가며 그를 옥죄였다. 또한 JP 계열 인사로 이루어진 국민복지회 소속 의원들을 줄줄이 잡아들여 중앙정보부[36] 에서 고문하기에 이르는데 최영두 의원은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미 3선 개헌이 확정된 시점에서부터 차기 집권이 확실시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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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개발 정책 또한 많이 이루어졌다. 해외 차관, 기술 협력을 통해 국가차원의 시멘트 공장, 비료공장을 꾸준히 세우며 수입대체산업화에 박차를 가했고, 농수산개발, 철도와 경인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등의 도로 건설, 발전소 및 송전 시절 건설, 댐 건설, 소비재 생산 장려 등 필리핀, 미얀마, 베트남, 인도네시아와 같은 정책을 펼쳤다. 특히 1970년대 건설된 경부고속도로는 오늘날 경제 개발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으며, 1970년부터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 포항제철 설립에 착수했다. 그 결과 수출액이 신장하고 수출주도산업화도 병행되었으며, 기간산업과 노동집약, 조립가공형 중화학공업또한 발전하였고, 농촌생활 진흥운동인 새마을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양극화와 정경유착, 노동자 처우문제, 환경오염 문제 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전태일이 분신한 사건도 바로 이 시기부터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대표되는 노동계의 인권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성장에도 1969년을 정점으로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외부적으로 닉슨쇼크때문이었다면 내부적으로는 금융인프라의 낙후성때문이었는데 이는 아래항목에서 후술한다.
4.3. 7대 대통령
1971년 7월 1일 ~ 1972년 12월 26일(만 1년 178일).
3선 개헌을 단행한 뒤 2년 만에 치러진 선거에서 박정희는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를 53.2%의 득표율로 따돌리며 3번째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전의 선거와는 달리 막걸리, 고무신 선거라 불리는 부정선거 의혹과 지역감정 유포 때문에 야당의 비판이 일었다. 김종필이 이미 "이 선거에 당시 국가예산의 15%를 썼다"고 증언한 바 있었고, 김대중에 대해서는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유행처럼 돌았다. 또한 박정희도 예상보다 신승을 거둔것에 대해 실망감을 느꼈다. 당연히 박정희는 정권의 위기감을 느꼈고, 대선 직후 치러진 8대 총선에서 여당인 공화당이 과반을 획득하는 데 성공을 거두기는 했어도 28명의 의원이 무더기로 낙선하고 대도시 지역에서 참패를 면치 못하여 개헌선에 훨씬 못 미치는 의석을 확보한 데 그친 반면, 야당인 신민당이 진산 파동과 중앙정보부의 은밀한 공작에도 개헌저지선을 훌쩍 넘기는 의석을 획득하고 득표율에서도 공화당과 고작 4.4%의 차이밖에 나지 않음으로써 이 우려는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선거부진과 함께 1969년을 정점으로 경제성장률 또한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1969년에는 13.8%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나 70년에는 7.6%, 71년에는 8.8%, 72년에는 5.7%을 기록했는데 당시 금융인프라의 열악함 때문으로 은행에 돈이 없던상태라 기업들이 대출받기 힘든데다가 1962년 증권파동으로 주식시장에 대한 투자자들의 불신감이 높아서 주요기업들 조차도 자금조달을 사채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국외에서는 닉슨 독트린으로 공산권과 자유주의 진영 사이에 평화 무드가 흐르자, 박정희도 이에 발맞춰 1971년부터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을 시작했고 전두환 정권 때 이산가족 상봉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 72년에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파견해 김일성과 만나게 한 뒤, 이에 대한 답례로 북한에서 보낸 박성철을 만나 비밀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그 해 남북은 평화통일의 3대 원칙(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에 합의한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고 남북한 공식 대화기구로 남북 조절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 평화무드는 이후 벌어질 10월 유신에 대비해 국민여론을 완화시키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 시기의 경제정책 중 하나는 1972년 8월 3일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긴급명령 15호'로 기업사채를 동결한 것이다. 이 긴급명령은 경제악순환의 근절과 기업이 고리사채에 허덕이는 것을 구제하기 위하여 기업사채를 월리 1.35%,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하도록 한 것이다.
5. 제4공화국(유신정권)
5.1. 8대 대통령
1972년 12월 27일 ~ 1978년 12월 26일(만 6년).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킨다. 그리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모든 출판, 언론활동을 검열하였고, 단체활동도 제한하였다. 이런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 박정희는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대통령에게 초법적인 권한을 주는 유신헌법을 통과시켜 저 유명한 체육관 선거를 통해 8대 임기를 시작한다.
1973년 새마을운동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고, 중화학 공업 육성을 선언한다. 공업진흥청을 신설하고, 기능공 양성정책과 공업단지 조성계획을 수립한다. 비슷한 시기에 1차 오일쇼크가 터지며 물가가 폭등하고, 경제성장률이 추락했지만 이를 재빠르게 중동에 건설회사와 노동자들을 송출하면서 매년 수십억 달러의 외화가 한국에 들어오면서 경제발전을 유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오른 물가상승률은 1980년대 초반까지도 한자릿수대로 떨어지지 않아 물가는 고공행진하여 한국 경제에 큰 부담을 지우게 된다. 1974년 8월, 1년 전 사건의 여파에 의한 것이라 평가받는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일어난다. 박정희는 무사했으나 그만 부인 육영수가 살해당한다. 차녀 박근혜가 박정희 사망 때까지 영부인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이 사건으로 아내를 잃은 박정희는 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10.26 사건을 일으킨 김재규는 "육 여사가 사망한 이후 박정희가 자식들을 애지중지하고 철저히 감싸고 돌았으며, 여성편력이 두드러졌다"고 증언했다. 그 때문에 주변에서 박정희를 재혼시키려 애를 썼다고. 측근들이 궁중가에 대통령을 위해 젊은 여성들을 불러 술자리를 주선해주는 일이 빈번해졌다. 당시 사건의 변호사 안동일 씨가 전한 바에 의하면, 10.26 사건의 간접적인 동기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가족, 즉 자식들 문제 때문이었다고 하니, 육영수 여사의 사망은 적지 않은 파동을 일으킨 셈. 안동일 변호사와의 인터뷰 링크
이 해 8월에 바로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어났고, 미국과 일본에 강력한 항의를 받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이 물러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1977년 부가가치세가 도입되었는데, 부마민주항쟁이 발생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될 정도로 국민들의 반발이 심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 해 2차 오일 쇼크가 터져서 물가가 폭등하고, 서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된다.
5.2. 9대 대통령
1978년 12월 27일 ~ 1979년 10월 26일(303일)
1969년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리처드 닉슨이 닉슨 독트린을 발표해, 데탕트 등 동아시아에 화해분위기를 조성하여, 군사적으로 동아시아에 군사적인 개입을 줄이는 모습을 보였다. 72년 중국[37] 을 방문하고, 73년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하여 75년에 남베트남이 망하고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박정희는 미국을 불신하기 시작하고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1974년 인도가 핵실험을 하여, 충격 받은 적이 있는 미국은 당연히 이를 눈치 채고 끊임없는 압박과 위협을 한다. 결국 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미국이 보여준 강력한 대북 응징의지와 확고한 안보공약 이행을 높이 사 핵개발을 중지한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와 박동선이 미국 의회에 전방위 로비를 벌이다 발각된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발생한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이후 77년 인권을 외치며,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운 지미 카터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다시 한미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한다. 그 후 미국의 청와대 도청이 발각되는 등, 주한미군과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한미관계는 역대 최악의 상태로 변한다. 얼마나 최악이었냐면, 정부가 학생들까지 강제동원하여 반미시위를 열었다. 언제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핵 개발도 다시 추진하기 시작하고, 미군철수에 대항하는 협상카드로 쓰였다. 결국 79년 2월 주한미군 철수 보류결정이 발표되었고, 카터와 한미정상회담 후 7월 철수 중지를 발표하면서 한미관계는 어느 정도 진정되는 듯했다.
5.2.1. 피살
1979년 YH 사건과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이 터지자, 안 그래도 부가가치세, 오일쇼크로 불만이 극에 달한 시민들이 드디어 폭발하여,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다.
항쟁이 절정을 이루던 때, 박정희는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석상에서 술자리 중에 10.26 사건으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권총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장례는 1979년 11월 3일 국장으로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