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어소
1. 개요
일본에서 천황이 거주하는 장소. 영어명은 〈The Imperial Palace〉다.
황거(皇居)란 황제가 거주하는 장소를 이르는 말로, 일본에서 황거라는 명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보편화되었다. 그 때문에 현재 천황이 머무르는 장소를 고쿄(皇居: 황거)라고 호칭하고 있는 것. 어소(御所)는 천황이 거주하는 장소로 각종 공식행사와 정무를 보는 궁전과 궁내청사 등이 황거에 있다.
교토고쇼는 금리(禁裏), 내리(內裏) 등으로 불렸다 교토에서 도쿄로 천도한 뒤 현재의 교토 어소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영어명은 〈Kyoto Imperial Palace〉. 역사가 긴 곳이라서 헤이안 시대의 양식을 간직한 정전 자신전(紫宸殿)과 일상생활을 하였던 어상어전(御常御殿) 등이 보존되어 있다.
동아시아에서 궁궐을 뜻하는 호칭이 매우 많았듯 일본에서도 천황이 머무르는 장소에 대한 호칭이 많았다. 어소(御所)도 그 중 하나. 내리(內裏), 어소(御所), 대내(大內), 구중(九重), 궁중(宮中), 금중(禁中), 금리(禁裏), 황궁(皇宮), 황성(皇城,) 궁성(宮城)처럼 동아시아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었던 호칭도 있고 대내산(大內山), 백부(百敷), 자지정(紫之庭), 봉동(蓬が洞), 대궁(大宮), 운지상(雲之上), 운거(雲居) 등 일본 고유의 명칭도 있다.
2. 역사
궁(宮)은 신분이 높은 사람의 주거의 의미로 출발하여 황실의 처소라는 의미로 압축되었다.
고대에는 천황의 처소를 궁이라 불렀다. 《고사기》와《일본서기》에는 4세기 ~ 6세기에 걸쳐 궁전의 다수가 나라 분지 동남쪽 대지에 조영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3. 아스카 시대
592년 스이코 덴노가 즉위한 도요우라노 미야에서 694년 지토 덴노가 후지와라쿄로 천도하기까지 약 100년간, 나라의 남쪽 대지 아스카에 다수의 궁전이 조영되어 아스카쿄라고 불리었다. 곳에 있던 궁전은 오하리다노 미야(603년 ~ 630년), 아스카 오카모토노 미야(630년 ~ 636년), 아스카 이타부키노 미야(643년 ~ 655년), 후 아스카 오카모토노 미야(656년 ~ 672년), 아스카 기요미가하라노 미야(672년 ~ 694년) 등이 있다.
이들 궁은 지면에 구멍을 파 기둥의 뿌리를 고정시킨 굴입주 건물들이다. 이들 건물 중 7세기 이후의 건물에서는 남향을 정면에 둔 중심 건물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4. 나라 시대
중국 당나라의 율령제를 들여와 그 형식으로 도읍을 조영하였고, 천황은 도읍 중 내리(內裏)에 터를 잡아 궁으로 삼았다. 국정을 총괄하는 조당원(朝堂院)을 비롯하여 중앙 관아는 내리에 함께 두었고, 이들을 아울러 궁성(宮城)이라고 불렀다.
이 시기 도읍으로는 나니와쿄, 후지와라쿄, 헤이조쿄, 나가오카쿄 등이 있다.
5. 헤이안 시대~에도 시대
794년 간무 덴노는 나가오카쿄에서 헤이안쿄로 천도한다.
960년 궁이 소실되었고, 궁이 재건될 때까지 냉천원(冷泉院)을 임시 궁으로 삼았다.
976년 다시금 궁이 소실되어 후지와라노 가네미치의 저택 굴하전(堀河殿)을 임시 궁을 삼았다.
헤이안쿄의 궁은 자주 소실되었기 때문에 중신과 외척 등의 저택을 임시 궁으로 삼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헤이안 말기부터는 궁과 임시 궁을 별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227년 궁성이 소실되자 궁을 재건하지 않고 중신의 처소를 임시 궁으로 삼아 전전하였다.
남북조 시대인 1331년 북조의 코곤 덴노의 북어문 동동원전(北御門 東洞院殿)에서 즉위식을 갖고 궁으로 삼았다. 이후 궁은 북어문내리(北御門內裏)라고 불리었고 이 장소가 현재의 교토고쇼이다.
6. 메이지 유신 이후
1868년 에도를 도쿄로 개명한 메이지 덴노는 도쿄로 행행하여 에도 성 니노마루에 입성하였고, 에도 성을 도케이 성으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에도 성을 도쿄의 임시 궁으로 삼은 후 교토로 환궁하였다. 1869년 다시금 도쿄로 행행하였고 도케이 성을 황성으로 개명했다. 1873년(메이지 6년) 에도 성 니시노마루의 화재로 소실되자 잠깐 아카사카 이궁을 임시 황거로 삼았다.
1877년 메이지 덴노의 지시로 교토고쇼는 사라지지 않고 보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79년(메이지 12년) 니시노마루에 새로운 궁전의 조영을 결정하였다. 1888년(메이지 21년) 메이지 궁전이 완공되어 이후 황성은 궁성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메이지 궁전은 구루마요세[1] , 히로마[2] , 정전, 호오노마, 도자이노 다마리(대기실), 호메이덴, 지쿠사노마 등 응접·정무의 공간과 천황의 처소에 해당하는 안쪽 궁전까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1945년(쇼와 20년) 5월 공습에 의해 메이지 궁전은 소실되었고 쇼와 덴노와 고준 황후 부부는 후키아게 정원 내의 문고(文庫)를 임시 거처로 삼았고 궁내청사 3층을 임시 궁전으로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인 1948년(쇼와 23년) 궁성(宮城/규조)의 명칭이 폐지되고 황거(皇居/고쿄)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의 고쿄라는 명칭은 이때 적립된 것이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잠시 동안 소실되었던 궁전의 재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히로히토의 측근 이리에 스케마사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폐하는 전쟁 종료 후, “국민이 전쟁의 재난으로 주거할 집도 없이 보내고 있는 이 시기에 새로운 궁전을 조영해서는 안다.”라고 국민 생활 향상을 최우선시하여 소실된 궁전 등의 재건을 기다려달라》라는 취지였다고 적고 있다.
1955년대 들어서 전후 재건이 일단락되자 궁전 재건의 움직임에 활기가 띠기 시작했고, 1959년(쇼와 34년) 황거조영심의회의 회신을 토대로 1960년(쇼와 35년)부터 새로운 궁전 조영이 시작되었다. 신 궁전은 메이지 궁전과 같이 천황의 처소와 연결시키지 않고 어소와 궁전을 따로 조영하였다.
1961년(쇼와 39년) 우선 쇼와 덴노와 고준 황후 부부의 처소로서 황거 안의 후키아게 지구의 후키아게 어소가 완성되었다. 신 궁전은 메이지 궁전 터에 1964년(쇼와 39년) 착공하여, 1968년(쇼와 43년) 10월 완공되었다. 1969년(쇼와 44년) 4월부터 사용되었다.
더불어 후키아게 어소는 쇼와 덴노의 사후 사후 고준 황후의 처소로 사용되어 후키아게오미야 어소로 불리었다.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 부부는 황위를 계승한 후 잠시 동안 아카사카 어소에서 머물면서 황거의 궁전을 왕래했지만, 황거 안 후키아게 지구의 한 귀퉁이에 새로운 어소를 건립하여 1993년(헤이세이 5년) 12월부터 사용하고 있다.
7. 현재 상황
도쿄의 황거인 고쿄는 에도 시대 말기까지 에도 막부 쇼군의 거성인 에도 성 터에 있다. 단 일본 천황의 처소인 어소는 후키아게라고 불리는 에도 성의 부수정원 부분에 건립된 것이다. 옛 에도 성의 니시노마루와 후키아게 정원은 도칸 해자라는 해자에 의해 떨어져 있다.
성곽으로서의 에도 성은 혼마루, 니노마루, 산노마루 및 니시노마루 구역만 말하는 것으로, 도칸 해자의 서쪽에 있는 정원 부분은 엄밀히 말해서 에도 성에 포함되지 않는다. 따라서 황거의 어소는 에도 성에 지어진 것이 아니다. 더불어 에도 성의 내측해자는 황거의 외측에 있고, 후키아게 정원을 포함한 황거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궁전은 에도 성 안 니시노마루에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