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준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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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와 덴노의 황후. 아키히토 덴노의 어머니'''. 방계 황족 출신으로 결혼 전의 이름은 구니노미야 나가코(久邇宮良子) 여왕.[2] '''이방자 여사의 사촌동생'''이기도 하다.
큰며느리 미치코 상황후에게 '''악독한 시집살이'''를 시킨 것으로 '''악명이 높다.''' 정말 죽기 직전까지 미치코 황후를 괴롭혔고, 그 때문에 미치코 황후는 실어증까지 걸렸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시어머니계의 끝판왕.'''
한편 이와 별개로, 일본의 황후 및 태후로선 사실상 마지막 황족 출신이라고 볼 수 있다. 미치코 황후부터는 순수한 황족이 아닌 평민 출신이기 때문. 또한 생전에 손주 세대가 결혼한 것을 지켜본 사실상 마지막 직계 황족이기도 하다.
2. 친정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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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방계 황족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왕[3][4] 이다. 구니요시 왕은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과 이즈미 마키코(泉萬喜子)의 3남이다.
이방자 비의 친정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 왕(4남), 난징대학살의 총지휘관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8남),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9남)은 구니요시 왕의 이복 남동생들이다. 야스히코 친왕과 나루히코 왕은 메이지 덴노의 사위, 즉 쇼와 덴노의 고모부이다. 또한 고준황후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내친왕은 나루히코 왕의 장남 모리히로(盛厚) 왕에게 시집갔다.
즉 고준황후에게 있어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은 작은아버지이자 시고모부가 되며,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은 작은아버지이자 시고모부이자 사돈이 되는 셈이다.
어머니 치카코(俔子) 왕비는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義)와 측실 야마자키 스마코(山崎壽滿子)의 8녀이다. 타다요시는 사쓰마 번의 제12대 영주이며, 폐번치현과 화족 제도의 실시 후 공작의 작위를 받았다.
3. 어린 시절
나가코 여왕은 1903년 3월 6일 '''구니요시 왕과 치카코 왕비의 3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나, 1907년 가쿠슈인 여학부(女學部) 유치원에 입학했다. 가쿠슈인은 황족과 화족을 위한 관립학교[5] 였는데, 그중에서도 황족의 자녀들은 따로 마련된 별실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나가코 여왕은 두 여동생 외에도, 훗날 남편이 된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친왕과 그의 바로 아래 남동생인 아츠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도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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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코 여왕은 상냥하고 확실한 성격이어서, 두 여동생 노부코 여왕과 사토코 여왕[6] 은 큰언니의 행동을 보고 본받으려 했다고 한다. '''사촌 언니 이방자 비'''는 1984년 경향신문에 연재한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서 어린 시절의 나가코 여왕을 가리켜 "'''여성으로서 우아하고, 마음씨가 곱고, 총명하며, 노래를 잘 불렀다'''" 고 회고했다. 《세월이여 왕조여》 제4회(1984.5.18)
한편 나가코 여왕이 어린 시절을 보낸 구니노미야 저택 터에는 훗날 성심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가톨릭 미션스쿨인 세이신 여학원이 들어섰고, 이 학교 출신인 쇼다 미치코가 나가코 황후의 큰며느리가 되었다.
4. 황태자 히로히토의 비(妃)로 내정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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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황실은 오랫동안 이치죠(一條) 가문과 쿠죠(九條) 가문에서 번갈아가며 국모를 맞이했다. 고메이 덴노의 정실 에이쇼 황후(아사코)는 쿠죠 가문, 메이지 덴노의 정실 쇼켄 황후(하루코)는 이치죠 가문, 다이쇼 덴노의 아내 데이메이 황후(사다코)는 쿠죠 가문 출신이다. 그러니 이제까지의 관례를 보면 다음 차례는 이치죠 가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황태자비 자리를 놓고 권력투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다이쇼 덴노는 심신이 허약하여 나랏일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신하들은 황실과 천황을 만만히 여기고 더욱 날뛰었다. '''육군을 장악하고 있던 조슈 번은 화족 이치죠 사네테루(一條實輝) 공작의 3녀 이치죠 도키코(一條朝子)를, 해군을 장악하고 있던 사쓰마 번은 사쓰마 번주의 외손녀이자 방계 황족의 딸인 나가코 여왕을 지지'''했다.[7] 또한 조슈 번의 원로이자 당시 일본 정치계의 거물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도키코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도키코에게 유리했다.
그러나 사다코 황후는 자신의 남편 다이쇼 덴노에게 함부로 굴던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미워하고 있었기에, 그가 지지하는 후보를 황태자비로 삼고 싶지 않았다. 사쓰마 번은 그 점을 알고 은밀하게 사다코 황후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1918년 2월 4일,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내정되었다는 공식 발표'''를 일제히 언론에 내보냈다. 언론 등에 공개된 것에 따르면 표면적인 이유는 나가코 여왕 본인의 성품이나 소질 뿐 아니라, 황족들 중에서는 비교적 가난한 편이었던 구니노미야 가문의 형편을 예전에 메이지 덴노가 걱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나가코 여왕은 가쿠슈인 여학부 중등과를 중퇴하고, 장래의 황태자비와 황후로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구니노미야 저택 내에는 나가코 여왕의 교육을 위한 오하나고덴(お花御殿)이라는 건물이 세워졌고, 나가코 여왕의 여동생들과 친구들은 방과 후면 오하나고덴에 종종 들렀다고 한다. 오하나고덴은 훗날 도쿄도립 코마바(駒場) 고등학교에 하사되었다.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내정되자, 조슈 번과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분노하였다. 1920년, 한 의학 잡지에 "'''나가코 여왕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에 색맹의 형질이 유전되고 있다!!'''" 는 기사가 실렸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사이온지 긴모치, 하라 타카시 등과 연합하여 구니노미야 가문에 "황통의 안정을 위하여 황태자비 자리에서 사퇴하라!!" 고 요구했다.
그러나 구니노미야 가문 또한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고, 소란은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번져갔다. 당사자인 히로히토 황태자는 "나가코 여왕으로 좋다" 고 했으며, 시아버지 다이쇼 덴노도 "'''과학에도 틀리는 것이 있는 줄 안다'''" 고 말했다. 특히 사다코 황후는 남편을 무시하며 막장으로 굴었던 야마가타를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그가 찬성하는 며느리라면 덮어놓고 반대했다. 이 치열한 싸움의 끝은 황실의 뜻, 국민들의 여론, 일본도로 무장한 협객들의 응원까지 등에 업은 사쓰마 번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이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런데 정계에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그가 죽고 난 뒤인 '''1924년 1월 26일에야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여담으로 도키코는 방계 황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요시(伏見宮博義) 왕에게 시집갔다고 한다.[8]
이렇게 황태자비가 된 나가코 여왕이었지만, 그 이후에 구니노미야 가문이 외척임을 믿고 방약무인하게 군 것이 사다코 황후가 그녀를 싫어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적용된다.
5. 황태자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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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1923년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지만, 히로히토 황태자는 '''관동 대지진의 참상을 보고서 결혼식을 미루었다'''. 나가코 여왕은 대지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위로하는 와카를 짓기도 했다. 1924년 1월 26일 결혼식을 올린 후, 나가코 황태자비는 아카사카(赤坂)의 토구고쇼에 거처하기 시작했다. 1925년 12월 6일에는 첫 아이인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내친왕을 낳았다.
6. 황후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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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2월 25일 히로히토 황태자가 새 천황으로 즉위하자, 나가코 황태자비도 황후가 되었다.
1927년 9월 10일 차녀 히사노미야 사치코 내친왕을 낳았으나 불과 생후 6개월 만인 1928년 3월 8일에 병으로 죽고 말았고, 2개월 후인 5월 14일에는 타이완에서 한국인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의 의거로 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를 잃었다.[9] 일본 제국 역사상 최초로 천황의 장인이 암살당한 사건은 황실뿐 아니라 전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10]
1928년 11월 10일 교토에서 황후로 정식 즉위했다.
6.1.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일본 황실은 끝내 피난하지 않았는데''', 이는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인 사다코 태후가 피난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가코 황후도 남편 쇼와 덴노와 함께 도쿄에 머무르며, 걱정이 많은 남편을 내조했다. 전쟁으로 식량 사정이 좋지 않던 시절,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는 식사할 때면 서로 의논하여 요리 한두 접시를 남겨 시종들에게 하사했다고 한다.[11] 전쟁 말기에 나가코 황후는 채소 재배와 양계를 했고, 패전 후에는 철수하는 일본군들을 위해 이부자리와 옷가지를 만들었다.
한편 맏이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는 전쟁 중이던 1943년에 방계 황족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의 장남인 모리히로(盛厚) 왕에게 시집갔고, 도쿄 대공습이 한창이던 1945년 3월에 방공호 안에서 첫째(장남) 노부히코(信彦) 왕을 낳았다. 이로서 나가코 황후는 외할머니가 되었다. 시게코 공주는 방계 황족에게 시집갔기 때문에 결혼 후로도 황족 신분을 유지했지만, 1947년의 신적강하로 인해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신격화되어 왔던 일본 황실은 패전 후 '''인간선언'''을 하였고, 적극적으로 국민들을 가까이 하며 '''각종 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나가코 황후도 1947년 일본 적십자 명예 총재 취임을 시작으로 1952년 이후의 전국 전몰자 추도식, 1964 도쿄 올림픽 개회식, 1970년 일본만국박람회 개회식, 1972 삿포로 동계올림픽 개회식 및 오키나와 복귀 기념식전 등에 출석했다. 야스쿠니 신사와 고코쿠 신사 등에도 참배하였다.[12]
6.2. 평민 출신 큰며느리를 반대하다
1957년, 아키히토 황태자는 가루이자와(軽井沢)에서 열린 테니스 시합에서 1살 연하의 평민 쇼다 미치코를 만났다. 약 2년의 연애 끝에, 두 사람은 1959년 4월 10일 결혼식을 올렸다. 이 과정에는 엄청난 반대와 진통이 따랐다.
사실 말이 '평민'이지, 미치코의 친가 쇼다(正田) 가문은 닛신(日清) 제분[13] 이라는 대기업을 운영하는 굴지의 재벌가였다. 미치코의 아버지 쇼다 히데사부로(正田英三郎)는 독일에 유학을 다녀왔고, 쇼다 일족은 1930~50년대에 벽난로와 피아노가 갖추어진 서양식 대저택에 살며 서구식 생활을 했고, 홈비디오를 찍었으며, 골프와 스키 등을 즐기며 미국과 유럽 등지로 해외여행을 다녔다. (재벌이라는 위상에 걸맞게, 미치코를 시집보낼 때는 6t 트럭 3대를 혼수로 꽉꽉 채워 보냈다.) 더군다나 미치코의 외가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은 옛 화족(백작)가문 이었다.
집안 뿐 아니라, 미치코 본인의 재능도 우수했다. 미치코는 빼어난 미모에 당시 일본 여성치고는 키도 매우 컸고(161cm), 명문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공부 외에도 음악, 미술, 스포츠 등등 못 하는 게 없었고, 대학 시절에는 학생회장을 맡을 정도로 리더십과 친화력도 뛰어났으며, 대학 졸업식 때는 졸업생 대표로 연설도 했다. 그야말로 무엇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완벽에 가까운 훌륭한 재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훌륭한 쇼다 미치코가, 황족들과 화족들에게는 못마땅한 신붓감이었다. 본래 황실의 신붓감은 황족이나 화족 중에서 뽑는 것이 오랜 전통이었고, 특히 그중에서도 장래의 국모가 될 황태자비는 황족 내지는 고셋케 출신만 뽑았다. 이 오랜 전통이 깨진 것이다.
또한 쇼다 미치코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황태자비 후보로 거론되던 규수가 있었다. 기타시라카와 하츠코라는 규수인데, 그녀는 1939년 출생한 직후부터 장래의 황태자비로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기타시라카와 가문은 옛 방계 황족으로, 하츠코의 할머니 기타시라카와 후사코(北白川房子)는 메이지 덴노와 측실 소노 사치코의 7녀이며, 어머니 기타시라카와 사치코(北白川祥子)는 화족 도쿠가와 가문 출신이다. 하츠코는 그야말로, 전통적인 황실 신붓감에 딱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평민 출신의 황태자비 후보 쇼다 미치코에 대한 옛 황족들과 화족들의 반발은 대단했다. 하긴 자신들은 신적강하로 인해 수백년간 이어내려져 오던 높디높은 신분을 잃고 하루아침에 평민으로 전락했는데, 반대로 자신들의 아래로 여기던 평민이 황족, 그것도 장래의 국모가 된다니, 당연한 반응이었을지도 모른다.[14]
시아버지 쇼와 덴노는 '''"이제 황실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며 평민 출신의 큰며느리를 감쌌지만,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는 미치코를 몹시 미워하여''', 두 아랫동서 지치부노미야 세츠코 비,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 비와 함께 반대운동을 펼쳤다. 또한 다이쇼 덴노의 외사촌 여동생 야나기하라 뱌쿠렌[15] ,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16] , 이츠코의 여동생이며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인 마츠다이라 노부코(松平信子)[17] 등등, '''옛 황족들과 화족들이 똘똘 뭉쳐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미치코는 황실로 시집을 왔지만, 그 후로도 그들은 미치코 황태자비에게 '''집요한 학대'''를 가하였다. 기타시라카와 하츠코는 황태자비에서 탈락한 후 나가코 황후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으로 시집갔지만, 나가코 황후는 하츠코의 고모할머니인 호시나 다케코(保科武子)[18] 를 자신의 시녀장(侍女長)으로 두었으며, 다케코가 퇴임한 후로는 하츠코의 어머니인 사치코를 시녀장으로 두었다. 나가코 황후가 누구를 자신의 큰며느리로 삼고 싶었는지 속이 보이는 부분이다. 또한 미치코 황태자비의 시녀장은 마키노 스미코(牧野純子)였는데, 그녀는 미치코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던 노부코가 손수 추천한 인물이다. 그러니 스미코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뻔하다.
그나마 첫째 시누이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남동생 부부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를 신문에 게재하기도 하고, 미치코 황태자비를 친정 가족들과 함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파티를 열어주는 등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게코는 미치코 황태자비가 황실로 시집온 지 2년 뒤인 1961년 병으로 죽고 말았다.[19]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는 2번째로 자식을 먼저 앞세우고 큰 충격을 받았으나, 1년 전 태어난 장손 히로노미야 나루히토 친왕을 보며 위안을 삼았다고 한다.
6.3. 그 이후
'''1971년에는 쇼와 덴노와 함께 유럽을 순방'''했는데, 영국과 네덜란드에서 천황 부부는 엄청난 적대를 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일본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던 퇴역 군인들이, 천황 부부에게 엄청난 분노를 퍼부은 것이다. 특히 네덜란드에 갔을 때는 욕설과 날달걀과 보온병에 벽돌(!) 등까지 날아왔고, 나가코 황후는 피골이 상접해서 귀국할 정도였다고 한다.
1977년 여름, 늙은 나가코 황후는 나스(那須)의 저택에서 넘어져 허리뼈가 골절되었다. 그러나 측근들이 사고를 숨기는 바람에 치료가 늦어져, 완전한 회복은 불가능해졌다. 나가코 황후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로 '''노화가 더욱 현저'''해졌다. 공무에 출석할 때도 기타시라카와 사치코 등 시녀들이 부축했다. 1987년 12월 11일, 나가코 황후는 가족사진[20] 을 촬영한 후 가벼운 심장 발작을 일으켰다. 다음해부터 그녀는 공무에 참가하지 못했다.
7. 태후 시절
1989년 1월 7일, 장남 아키히토 황태자가 새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나가코 황후는 태후가 되었다. 이 해에는 남편 쇼와 덴노뿐 아니라 사촌 언니 이방자 비, 여동생 오오타니 사토코(大谷智子), 3녀 다카쓰카사 가즈코가 줄줄이 사망했다.
1990년 6월 29일에는 가와시마 키코가 후미히토 친왕에게, 1993년 6월 9일에는 오와다 마사코가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시집왔다. 이로써 나가코 태후는 '''시할머니'''가 되었다. 손자며느리 키코 비가 1991년에 마코 공주, 1994년에 카코 공주를 낳아, 나가코 태후는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1994년, 나가코 태후는 '''역대 최장수 황후'''로 등극했다. 말년에는 '''치매''' 증상까지 있었다고 하지만, 언론에서는 "노인 특유의 증상" 이라고만 보도했다.
그러나 그렇게 몸이 불편한데도 나가코 태후는 꼬장꼬장 정정하게 살아서 계속 미치코 황후를 괴롭혔고, 나가코 태후와 함께 하는 세력들은 그 후로도 언론 등을 동원하여 미치코 황후를 향해 '''갖가지 말도 안 되는 비난들'''을 퍼부었다.
"미치코 황후 때문에 쇼와 덴노가 생전에 아끼던 궁성의 숲이 파괴되었다." "연회 등 각종 행사도 미치코 황후의 승낙이 없으면 진행되지 못한다." "한밤중에도 과일을 깎으라거나 라면을 끓이라는 주문을 하기 때문에, 시종들이 쉴 틈이 없다."는 등등. 결국 미치코 황후는 만 59세 생일인 1993년 10월 20일에 쓰러져 '''실어증'''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이듬해인 1994년에야 회복. '''2000년 6월 16일'''에 나가코 태후가 죽은 후에야 미치코 황후의 지옥 같은 40여년(!) 시집살이는 끝났다.
8. 자녀들
아키히토 덴노를 포함하여 2남 5녀를 낳았다. 쇼와 덴노와 고준 황후의 자녀들은 대부분 일찍 죽거나, 건강이 나쁘거나, 과부가 되거나,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등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거나, 자녀를 낳지 못하는 등 '''불행한 삶'''을 살았다.
-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照宮成子) 내친왕(1925.12.6-1961.7.23): 방계 황족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의 장남인 모리히로(盛厚) 왕과 결혼, 3남 2녀를 낳았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차녀 히사노미야 사치코(久宮祐子) 내친왕(1927.9.10-1928.3.8): 병으로 요절. 나가코 황후는 직접 밤을 새워가며 사치코 공주를 간병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생후 6개월의 아기였던 사치코 공주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고, 슬픔에 잠긴 나가코 황후는 한동안 아기와 같은 크기의 인형을 안고 지냈다고 한다.
- 3녀 다카노미야 카즈코(孝宮和子) 내친왕(1929.9.30-1989.5.26): 다카쓰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와 결혼. 자녀는 없다.
- 4녀 요리노미야 아츠코(順宮厚子) 내친왕(1931.3.7-): 이케다 다카마사(池田隆政)와 결혼. 자녀는 없다.
- 장남 츠구노미야 아키히토(繼宮明仁) 친왕(1933.12.23-):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 차남 요시노미야 마사히토(義宮正仁) 친왕(1935.11.28-): 츠가루 하나코와 결혼한 후 히타치노미야(常陸宮)라는 궁호를 받았다.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은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기도 하다. 자녀는 없다.
- 5녀 스가노미야 타카코(淸宮貴子) 내친왕(1939.3.2-): 나가코 황후의 외사촌 남동생인 시마즈 히사나가(島津久永)와 결혼하여 1남을 낳았다. 5명의 딸들 중 유일하게 행복하게 살아간 인물로, 바로 위의 언니 이케다 아츠코와 정반대로 활달하고 떠들썩하며 나서기 좋아하는 성품이라고.
8.1. 어렵게 아들을 낳다
나가코 황후는 결혼 후 '''공주만 내리 4명을 낳는 바람에''' 온나바라(女腹-딸만 낳는 여자)라며 무수한 비난을 당했고, '''측실(후궁) 제도의 부활까지도 거론'''될 지경이었다.[21] 그러나 쇼와 덴노는 측실 제도에 대해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라며 거부했고, 측실 후보로 선정된 화족 규수 3명의 사진이 제출되기까지 했으나 "훌륭한 숙녀들이니, 어울리는 곳에 시집가기를 바란다."며 신하들에게 도로 돌려주었다고 한다. 드디어 1933년 12월 23일 나가코 황후는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아들, 장남 츠구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을 낳았다. 1935년 11월 28일에는 차남 요시노미야 마사히토 친왕을 낳았다.
8.2. 육아
본래 황실의 자녀들은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의 곁에서 떨어져 신하들의 손에 자라는 것이 전통이었으나,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는 '''전통을 깨고 자녀들을 곁에 두고 키웠다'''. 유모를 두긴 하였으나, 수유도 가능한 나가코 황후가 직접 하였다.[22]
그러나 자녀들을 직접 돌본 것은 자녀들이 아주 어렸을 때의 잠깐 뿐으로, 자녀들은 조금 자란 후에는 부모와 떨어져 시종들에게 맡겨졌다. 이것은 양육계가 시중 들기 어렵다는 문제와 버릇이 없어진다는 문제 외에도, 공주들의 경우는 장래 시집갈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온 가족이 모이는 때는 주말뿐이었다. 쇼와 덴노는 직접 공주들의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고, 나가코 황후는 아키히토 황태자가 좋아하는 두부 요리를 손수 준비하기도 했지만 아키히토 황태자가 이 요리를 직접 먹은 일은 없다고 한다.
8.3. 자녀들의 결혼
첫째 공주는 맞선 한 번 없이 어른들이 정한 상대와 결혼하여, 한동안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다. 때문에 나머지 공주들은 중매결혼이지만 어느 정도 형식적으로나마 맞선, 데이트, 교제 등을 거쳤다. 나가코 황후는 딸들의 이런 과정을 적극 지지해 줄 정도로 깨인 모습을 보였으나[23] '''큰아들 아키히토 황태자와 평민 여성 쇼다 미치코의 연애결혼에 대해서는 대단히 반대했다'''. 사실 딸 4명은 이미 결혼이 정해진 사람들과 친해지도록 자리를 마련해준 거지, 좋아한다고 격에 맞지 않는 여자와 결혼하겠다 하니까 반대한 것이다. 작은아들 마사히토 친왕이 결혼할 때가 되자, 나가코 황후는 옛 화족 가문의 딸 츠가루 하나코를 직접 작은며느리로 골랐다.
9. 금슬
쇼와 덴노와의 '''금슬은 참으로 좋았다'''고 전해진다. 결혼 전부터 히로히토 황태자는 약혼녀 나가코 여왕과 처제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으며, 결혼 후에도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면 늘 아내를 위해 선물을 가져왔다고 한다.
1920년대인 결혼 초부터 당시의 남녀로서는 드물게 손을 잡고 산책하였고, 노후에도 나가코 황후가 거동이 불편해지자 쇼와 덴노가 부축하였다. 아침식사 때는 NHK 아침드라마를 함께 시청하고, 궁성이나 황실의 별저를 함께 산책했다고. 식물을 좋아하는 쇼와 덴노는 늘 나가코 황후에게 설명하면서 걸었고, 갈림길에서 쇼와 덴노가 "나가미야(良宮)[24] , 어느 쪽으로 갈까??" 라고 물으면 나가코 황후는 "오카미(お上)가 좋아하는 쪽으로요." 라며 대답했다고 한다.
나가코 황후의 여러 취미 중 하나는 장미꽃을 심고 기르는 것이었는데, 손수 가지를 치고 잡초를 뽑으며 장미 정원을 가꾸었다고 한다. 쇼와 덴노는 "잡초라는 이름의 풀은 없다"며 황궁 정원의 이름 없는 풀들조차 함부로 뽑거나 솎지 못하게 했지만, 나가코 황후의 장미꽃 정원만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10. 악독한 시어머니
위에 언급하였듯이 큰아들 아키히토 황태자가 평민 여성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나가코 황후는 대노하였다.
이유는 여럿 있는데, 고준 황후는 신분제도가 당연했던 시절인 20세기초 태생에다 황족 출신의 황후다.[25]
또 후궁 논란 중일 때 남편이 버티기는 했지만 처지가 대단히 곤란하다 못해 눈치를 보고 비난까지 당했던 시절에 자신의 귀한 큰아들을 정말 힘들게 낳았기에 정말 간절히 키웠다. 신적강하 이후 결혼한 자신의 딸들은 출가해서 필연적으로 평민이 될 수밖에 없었기에 전 황족이나 화족 출신 신랑감을 정해 결혼시켰지만, 대신 딸들이 결혼 전에 남편이 될 사람과 사이좋게 되도록 손을 써 준 것이다.
반면 황태자비는 장래에 나라의 국모가 되어야 할 몸인데, 정통적인 입장에서 보면 다른 자들도 아닌 황후가 되어야 하는 자는 높은 집안에서 뽑고 싶어하는 게 자연스럽다. 실제로 초기에는 옛 황족 가문의 딸인 기타시라카와 하츠코를 이미 황태자비로 정해 두었는데, 도중에 "새로운 시대의 이미지"라는 이유 때문에 개혁파들이 뒷수작을 부려 아키히토와 쇼다 미치코가 가까워지게 하고 결혼한다 하니, 고준 황후의 입장에서는 열받았을 것이다.
나가코 황후는 아랫동서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 세츠코 비의 친정어머니 노부코와 노부코의 언니 이츠코 비, 야나기하라 뱌쿠렌 등과 똘똘 뭉쳐 반대운동을 펼쳤다. 심지어 우익 측과 연합, 쇼다 가문에 혼약 사퇴를 강요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황실의 최고 결정권자인 남편 쇼와 덴노가 승낙하면서, 결국 아키히토 황태자는 쇼다 미치코와 혼인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미치코가 맏며느리로 시집오자, 나가코 황후는 그녀를 몹시 미워하여 '''호된 시집살이를 시켰다.''' 세츠코 비와 키쿠코 비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감정이 누그러져 조카며느리 미치코 황태자비와 친하게 지냈고, 특히 자녀를 낳지 못한 그녀들은 미치코 황태자비의 아이들을 친손주처럼 귀여워했다. 키쿠코 비는 어린 시절 친정어머니 미에코(實枝子)로부터 배운 '아리스가와 류 서도'를 미치코 황태자비의 자녀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나가코 황후의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친정어머니와 달리, 평민 출신의 큰올케 미치코 황태자비를 지지해 주었다. 하지만 나가코 황후는 '''죽는 순간까지도 큰며느리를 그렇게 미워했다고 한다.''' 그리 금슬 좋던 남편이 죽은 그 해에 사촌언니 이방자에 여동생 오오타니 사토코(大谷智子), 3녀 다카쓰카사 가즈코까지 죽어서 충격이 컸다고 하는데, 그걸 죄다 미치코 황태자비에게 화풀이한 걸지도.[26]
자세한 시집살이 이야기들은 미치코 상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문서를 참조.
이유야 어쨌든 자신의 귀한 손주들을 셋이나 낳은 며느리를 약 40여년 동안, 무려 2000년도(?!)까지 괴롭히다 죽었다 하니 참으로 대단하기는 하다. 덕분에 미치코 황후는 실어증까지 시달려야 했다고.
여담으로 마사코 황태자비가 나루히토 황태자와 결혼했을 당시가 1993년인데, 미치코 황후와 달리 완전 평민 출신이었던[27] 마사코가 초기 그리 고생한 데에는 시할머니의 영향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가코 태후의 악독한 시집살이가 둘째 손자 후미히토를 올바르게 자라지 못하게 망쳤고[28] 이것은 현재 일본 황실을 강타하는 거대한 정치적 문제는 물론이고 키코 비, 마코 공주, 카코 공주와 후미히토의 가정 불화등등 아주 거대한 문제로 번져 황실을 뒤 흔들고 있다. 자세한건 후미히토, 키코 비, 마코 공주, 카코 공주 문서를 보자. 저 세상에서 작금의 사태에 얼마나 기가 막힐지는 모르겠으나 이 또한 이 사람의 자업자득이다. 남편 쇼와 덴노가 어떻게든 지키고자 한 황실을 위해 실행한 방안[29] 을 이해, 수용하지 못하고 오로지 개인적 감정과 선민사상에 눈이 멀어 벌인 행동들이 현재 일본 황실이 뒤집어지는 나비 효과를 가져왔으니 어째보면 현 황실을 다시 풍전등화로 만들어버린 원흉이다. 본인이 황태자비 후보였을 시절 견제받으며 들었던 유언비어가 사실이 되버린 샘.
11. 가해자가 된 피해자
사실 '''나가코 황후도 며느리로서 호된 시집살이를 당했다'''. 그녀의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는 화족인 쿠죠 가문의 딸이지만 서녀(庶女)였다. 이 때문에 황족 가문의 적녀(嫡女)인 맏며느리 나가코 황후에게 열등감을 느꼈다는 말도 있다.
아마 아들만 4명을 낳은 사다코 태후 자신과 달리, 나가코 황후가 결혼 후 줄줄이 공주만 4명을 낳았던 것도 시집살이의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나가코 황후의 친정 구니노미야 가문이 외척임을 믿고 방약무인하게 굴어 사다코 태후의 미움을 샀던 이유도 있다. 또한 농촌에서 뛰어놀며 '쿠죠 가문의 쿠로히메(黑姬)'라고 불릴 정도로 활달하고 씩씩한 성격의 사다코 태후와, 다소 차분한 성격인 나가코 황후와의 성장환경이나 성격의 차이 등으로 인한 갈등도 있었다고 한다.
사다코 태후의 시녀 다케야 츠네코(竹屋津根子)와 나가코 황후의 시녀 다케야 시게코(竹屋志計子)는 친자매였지만, 상전들의 고부 갈등으로 인해 서로 대화조차 나누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사다코 태후는 맏며느리를 꾸짖을 일이 있으면, 직접 꾸짖는 대신 시녀를 통하여 전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종들이 고부 간의 갈등을 직접 목격한 일도 있었다. 다이쇼 덴노가 아직 살아있을 때였다. 히로히토 황태자와 나가코 황태자비는 하야마(葉山)에서 요양 중인 다이쇼 덴노를 문병했다. 나가코 황태자비는 시어머니의 앞에서 긴장하여, 장갑을 낀 채로 물수건을 짜는 실수를 저질렀다. 사다코 황후는 '''"너는 무엇을 시켜도 못나게 구는구나!!"'''라며 시종들도 있는 자리에서 나가코 황태자비를 꾸짖었고, 나가코 황태자비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어 잠자코 있었다. 이는 시종들에게 고부의 사이가 나쁘다고 광고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가코 황후의 '''아랫동서 3명은 시어머니로부터 귀여움을 받았다'''. 사다코 태후는 둘째 며느리 지치부노미야 세츠코 비, 셋째 며느리 다카마츠노미야 키쿠코 비, 막내 며느리 미카사노미야 유리코 비를 귀여워하여, 그녀들을 자주 초대해서 식사와 다과를 함께 했다. 특히 세츠코 비를 귀여워했는데, 세츠코 비는 매년 히나마츠리 때마다 시집올 적에 친정에서 가져온 히나 인형들을 장식해놓고 사다코 태후와 함께 감상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한다.
사다코 태후가 1951년 5월 17일 협심증으로 급서하자, 나가코 황후의 '''30년 가까운 시집살이'''도 비로소 끝이 났다. 그리고 그 시집살이는 후에 고준황후 본인이 며느리에게 '''더 심하게 구는 것'''으로 고부갈등은 이어지게 된다. 작은며느리인 하나코 비와는 친했다는 것도 똑같다.
미치코 황후 또한 마사코 황태자비와 상당한 고부갈등이 있었지만, 히사히토가 탄생해 아들 문제가 일단락되고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막장행각이 드러난 이후에는 마사코 황태자비와 화해하고 힘을 실어주는 등 개인적인 감정문제는 아니었다. 현재 마사코 황태자비와는 사실상 해결된 상태이며, 현재는 오히려 작은며느리인 키코 비와 자식들의 교육 문제 때문에 고부갈등을 빚고 있다. 미치코 황후의 고부갈등은 개인적인 감정 문제가 아니라 황실의 어른으로서 판단에서 기인된 일이었기 때문이기 때문에, 데이메이 황후나 고준 황후와는 사정이 다르다.[30]
12.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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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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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쿄 조와덴(長和殿) 외부에 걸린 영정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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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할머니 나가코 태후의 장례식에 참석한, 가쿠슈인 초등과 3학년생 마코 공주와 가쿠슈인 유치원생 카코 공주.
2000년 6월 16일, 나가코 태후는 노환에 의한 호흡부진으로 사망했다. 향년 97세. 신화시대를 제외하면 '''역대의 황후들 중 최장 재위이며 최장수''' 기록이다. 시호는 고준황후이며, 나라 시대에 편찬된 한시집 <가이후소(懐風藻)>에 실린 시구에서 시호를 정했다.
이 장례식 때 미치코 상황후와 마사코 황후 사이에 고부 갈등이 있었다. 미치코 상황후는 상복이며 베일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했는데, 당시 유산 후유증이 남아 있던 마사코 황후는 이에 대해 '시어머니가 황족들과 시종들의 앞에서 나를 질책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주치의와 상담할 때, 이 일로 몹시 상처받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마사코 황후는 유산 후유증 때문에 시할머니 나가코 태후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고부갈등 탓도 있지 않느냐는 추측이 있다.
[1] 현 롯폰기 일대[2] 일본 황실에서 천황의 딸과 손녀까지는 내친왕(內親王),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한다. 현행 황실전범이 제정된 1947년 이전에는, 4대손까지를 내친왕이라 하고 5대손부터 여왕이라 했다고. 남자는 친왕/왕.[3] 구니요시 왕의 죽음에 관해서는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 항목을 참조. 조명하 의사에 관한 네이버캐스트 게시물이다.[4] 참고로 邦彦이란 이름을 쓰는 사람들은 보통 '쿠니히코'라고 읽는다. 대표적인 경우가 료 쿠니히코.[5] 패전 후 사립학교로 전환되었고 평민에게도 개방되었으나, 여전히 금수저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라고 한다.[6] 특히 오오타니 사토코는 패전 후 전일본불교부인연맹 회장으로서 이방자 비와 함께 활동했고, 이후에도 이방자 비의 자서전에 서문을 쓰는 등 이방자 비와 여러 차례 교류를 했다. 한편 사토코의 아들 오오타니 고쇼(大谷光紹)와 나가코 황후의 3녀 다카노미야 가즈코 공주는 훗날 약혼을 했지만 이는 곧 파기되었고, 가즈코 공주는 다카쓰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에게 시집갔다.[7] 황태자비 선정 문제 외에도, 여러 방면에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은 아주 심했다. 자세한 것은 항목을 참조.[8] 1947년, 다이쇼 덴노의 직계들을 제외한 모든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평민으로 전락했다. (이를 신적강하라 한다.) 후시미노미야 도키코 비도 이때 황족 신분을 잃고 평민 후시미 도키코가 되었다.[9] 실제로 사망한 건 1929년 1월이었다.[10] 조명하는 역사상 유일하게 일본 황족 암살에 성공한 독립운동가로, 구니요시는 천황의 장인이라는 상징성뿐 아니라 육군 내에서 상당한 지위를 갖추고 침략 전쟁에 앞장선 장교이기도 했다. 이래저래 업적에 비해 저평가된 인물이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정규 한국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등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다.[11] 여담으로 음식이 귀했던 전근대 시절에도 이런 전통이 있었다. 예를 들어 조선의 경우 왕은 아무리 대식가라도 완식하기 어려운 양의 9첩 반상을 매 끼니마다 먹었지만 다 먹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개 조금만 먹은 뒤 상을 물렸다. 그리고 남은 음식은 궁녀나 환관 등 아랫사람들이 나눠서 먹는 일이 일반적이었다.[12] 단, 이때는 '''A급 전범'''들이 합사되기 전이라, 지금 정도로 뜨거운 감자가 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나중에 A급 전범들이 합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쇼와 덴노는 격노하여, 다시는 야스쿠니 신사를 찾지 않았다. 당시엔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일본은 여전히 전범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미국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헌데 그 미국을 공격하고 아시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A급 전범들을 옹호했다가는, 유엔 헌장 53조와 107조에 의거하여 미국이 일본을 재차 공격하여 없애버렸을지도 모른다. A급 전범 합사 이후 처음으로 참배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는 1985년 패전 40주년 기념으로 아무 생각 없이(…) 야스쿠니 신사에 갔다가, 아시아 전체가 격노하는 상황에 매우 기겁하였다. 그 후로 그는 다시는 야스쿠니 신사에 가지 않았고, 각료들에게도 "야스쿠니 신사에 가려거든 반드시 개인 자격으로만 가라."고 엄명을 내릴 정도였다.[13] 대선제분 영등포공장이 일제강점기 이 회사 소유였다.[14] 사실 이렇듯 왕의 사랑을 받던 여성들이 출신 때문에 반감을 산 경우는, 굳이 일본이 아니라도 다른 왕조 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유명한 희빈 장씨만 하더라도 양반가의 규수는 아니라도 역관 출신 거부의 딸이었는데, 이 당시 대재벌의 딸인데다가 어디서도 빠지지 않는 규수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황족 혹은 화족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배척받은 미치코 황후의 출신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심지어 미치코 황후는 어머니 쇼다 후미코(正田富美子)가 화족(백작) 소에지마 가문 출신이라, 친가는 평민이지만 외가로부터 화족의 피도 이어받고 있었다. 다만 쇼다 미치코는 아키히토 황태자가 끝까지 지켜내었지만, 희빈 장씨는 숙종에게 버림받았다는 차이도 있다.[15] 야나기하라 뱌쿠렌의 언니 이리에 노부코(入江信子)의 아들 이리에 스게마사(入江相政)는 쇼와 덴노의 시종장을 지냈는데, 이때 스게마사가 궁중에서 보고 들은 일들을 적은 궁정일기가 유명하다. 한편 스게마사는 미카사노미야 유리코 비의 외삼촌이기도 하다.[16] 이츠코는 거의 평생에 걸쳐 일기를 썼는데, 당시 일기에 '''"이제 일본도 다 끝났구나!!"'''라고 썼을 정도였다. [17] 즉 이방자 비에게는 이모가 된다. 노부코는 황실의 사돈이라는 배경으로 궁정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가쿠슈인 동창회장을 지내며 옛 황족들과 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했으며, 반대운동의 선봉에 섰다. 진짜 이유는 평민이 황후가 된다는 위기감도 물론 있었겠지만, 쇼다 미치코의 외가인 소에지마 가문이 무진전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18] 메이지 덴노의 사위인 다케다노미야 츠네히사(竹田宮恒久) 왕의 여동생이다.[19] 히가시쿠니 시게코가 만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을 두고도, "여자가 잘못 들어와서 그렇다!!"라며 미치코 황태자비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20] 일본 황실에서는 매년 12월에 직계 가족들끼리 모여 가족사진을 찍는다.[21] 일본 황실에서 일부일처제가 확립되기 시작한 것은 다이쇼 덴노 때이다. 데이메이 황후에게서 아들만 4명이 태어나 모두 건강하게 성장했기 때문에, 측실(후궁)을 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이전까지는 황후가 아들을 낳지 못해, 측실 소생의 아들로 천황직이 계승되고 있었다.) 일부일처제가 법제화된 건 쇼와 덴노 때다. 그러니까 이 말이 나왔을 때는, 아직 일부일처제가 확고하지는 않았을 때다.[22] 큰며느리 미치코 황태자비는 더 나아가, 직접 수유하다가 모유가 부족하면 분유를 먹였다.[23] 그러나 그렇게 결혼한 여동생들은, 오히려 맏언니 히가시쿠니 시게코보다 더 불행한 결혼생활을 했다(막내 시마즈 타카코 제외).[24] 황족 가문의 딸로 태어난 여성을 부르는 이름. 이름 뒤에 "미야(宮)"을 붙이며, 높여 부를 때는 그 뒤에 "사마(樣)"를 붙인다. 예를 들어, 나가코 황후의 사촌 언니 이방자(李方子) 비는 "마사미야(方宮)", "마사미야사마(方宮樣)"라고 불렸다. 반면 화족 가문의 딸로 태어난 여성에게는 "기미(君)"를 붙인다.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 나시모토 이츠코(梨本伊都子)는 "이츠기미(伊都君)", "이츠기미사마(伊都君樣)"라고 불렸다.[25] 다른 대부분의 황후들은 후지와라의 후예인 고셋케에서 나왔다. 그런데 황족이니 그보다도 출신 신분이 훨씬 높은 셈.[26] 이방자의 아들 이구의 아내인 줄리아 멀록이 외국인이라는 것과 자식을 못 낳았다는 이유로 구황실 종친들에게 엄청 쪼이고 오만 욕을 먹었던 것과 비슷하지만, 나가코 황후와는 반대로 이방자 여사는 동병상련이라도 느낀 건지 며느리를 안타까워했었다.[27] 아버지가 국제사법재판소장을 했던 외교관 출신에 어머니는 유학파, 오와다 마사코 본인은 외국에서 오래 지내며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외무고시에 합격해 외교관이 된 초일류 엘리트지만, 신분상으로 보면 친가는 재벌에 외가는 화족이었던 미치코 황후보다는 더 아래다.[28] 미치코 황태자비는 시집살이를 당하는 과정에서 온 정신을 3남매에게 다 쏟을 수 없었다. 맏이이자 후계자였던 나루히토는 아버지 아키히토의 제왕학으로 어떻게든 커버가 되었지만, 후미히토는 중요한 시기인 4살 때 여동생인 사야코 공주가 태어나버리면서 후미히토에 대한 천황 부부의 관심이 흩어져버렸다. 거기다 상당한 말썽꾸러기였던 후미히토를 부모로써 야단치려하면 "미천한 평민 주제에 감히 귀한 황자에게 손을 대다니!!"라며 미치코 황태자비를 꾸짖었다. 정작 장손인 나루히토가 시녀들에게 상당히 엄격한 훈육을 받을땐 내버려 두었으면서. 후계자와 고명딸 사이에 끼인 차남이라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한데다 할머니는 손주라고 무조건 오냐오냐하고 궁내청 사람들은 "(후미히토)전하 마음대로 하십시오." 라고 떠받드니 제대로 된 가치관을 교육받지 못하고 그렇게 장기화되면서 지금의 아버지+남편으로써는 최악인 인품으로 고착화된 것이다.[29] 쇼다 미치코를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키히토의 비로 맞아들인 것. 사실상 일본 황실의 입지는 쇼다 미치코로 인해 다시 굳건해졌었다.[30] 그래도 데이메이 황후는 나가코 황후처럼 유치하고 품위없이 시집살이를 시키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