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공기념가
蔣公紀念歌(장공기념가) / Jiǎng gōng jìniàngē (장궁 지녠거) / Chiang Kai-shek Memorial Song
總統蔣公紀念歌(총통장공기념가) / Zǒngtǒng Jiǎng gōng jìniàngē (쭝퉁 장궁 지녠거) / President Chiang Kai-shek Memorial Song
1. 개요
1975년, 대만의 장제스 총통이 사망하자,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곡이다. 악보
옌자간, 장징궈 집권기때와 리덩후이 집권 초기까지는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암기해야 했으며, 학교 대항 합창 경연이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는 잘 불리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대부분의 대만 사람들이 이 곡을 알고 있으며, 간혹[1] 선거 운동에 이 곡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국립중정기념당(國立中正紀念堂)에서 매일 아침마다 연주되고 있다. 그런데 2017년부터는 연주를 중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차이잉원 총통의 민진당이 재집권한 후, 개인숭배 배격이라는 명분으로 탈중국화 움직임을 반영한 것이라는 평이다. 간혹 기념당 내부에서 틀기도 하는데 계엄령 시기 장제스 정권을 비꼬는 영상에 배경음악으로 삽입되어 있다.(...)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
2. 버전 1
이 버전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데, 대만 국방부 사이트에 올라온 것도 있고, 왕푸(旺福)라는 대만밴드가 부르기도 했다.# 또 1980년대에는 정부 행사에서도 연주되었는데, 군악대의 연주에 따라 행사 참가자가 부르는 것이 나온다.[2][3]
3. 버전 2
한편 이런 버전도 있는데 오히려 이 버전이 장제스를 더욱 아부하는 버전이다. 그도 그럴 게 무언가 공화국의 국가원수보다는 임금을 기리는 황실가 같은 느낌이다. 장제스가 사망한 직후에 추모곡으로 만들어져서 더욱 그렇다. 참고로 작곡자는 광둥성에 거주하였고 중국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생겨나자 홍콩으로 도망쳐서 살다가 70대 노년에 가오슝에 와서 정착한 사람이다. 90대 후반까지 장수하는 바람에 가오슝에서 말년 잠시가 아니라 20년 이상 보낸 것이다.
아무래도 가사가 시궁창이지만 찬찬히 보면 의외로 (흑역사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장제스의 생애와 업적을 제대로 묘사하고 있다.
한국어 번역
4. 기타
장공기념가 외에도 장징궈기념가와 국부기념가도 있다.(관련 영문 위키피디아)
2020총통선거를 앞에 두고 국민당 한궈위 후보를 비꼬는 내용으로 개사한 한총기념가가 유튜브에 올라오기도 했다. #
[1] 주로 국민당 계열이다.[2] 5분 57초부터 6분 42초까지 이 곡이 나온다.[3] 다만 이 링크를 따라가면 알겠지만 이 행사는 1987년에 열린 장제스 탄신 100주년 기념대회라서 장제스를 추모하는 이 곡을 부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4] 장제스의 고향.[5] 왕양명은 학자였지만 도적 퇴치에 힘쓴 전과도 있다.[6] 황포군관학교. 장제스가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7] 검은 상복.[8] 白梃(백정) = 흰 막대기(단순한 몽둥이)를 의역함[9] 견갑이병, 강한 군대[10] 청 말기부터 중국은 많은 나라들과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使는 시키다는 뜻이고 刀俎는 칼과 도마, 즉 탄압자를 말한다. 사기 항우본기의 홍문연을 다룬 부분에서 번쾌의 말 중에 "如今人方爲刀俎,我爲魚肉,何辭爲(지금 남은 칼과 도마가 되려 하고, 나는 어육이 되려 하는데, 어찌 (하직)인사를 하겠소?)"라는 구절에서 따온 듯하다. 刀俎를 열강, 魚肉을 중국이라 보면 가사가 말하려는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장공기념가 버전2에서는 이렇게 고전에서 따온 구절들이 많다.[11] 1943년 연합국은 조계지를 위시한 모든 불평등 조약을 취소했다. 장제스는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을 이때로 뽑았다.[12] 이덕보원(원한을 덕으로 갚는다)의 정신으로 대만 정부는 전후 일본에 대한 모든 배상 청구를 포기하고 무조건으로 일본군과 민간인을 본토로 귀환시켰다.[13] 난징 국민정부시기부터 발생한 유교 원리에 기초한 윤리 교육. 대륙 시기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4] 1948년 1월 1일 중화민국 정부는 헌법을 반포하였다. 물론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으로 실제 헌법정치는 2년도 채 시행되지 못했고, 장제스는 죽을때까지 재야인사를 탄압하는 철권통치를 펼쳤으며 1980년대 중반까지 대만은 중국과 싱가포르와 마찬가지로 1당 독재 국가였고 언론자유화가 이루워 진것은 1988년, 관제 야당을 제외한 나머지 야당이 허용된 것은 비공식적으로 1986년, 공식적으로 1989년이 되어서였다.[15] 국부천대 이후로는 국공내전에서의 패배에 대한 반성 및 재출발의 의미로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성장정책을 추진했는데 이것이 대 성공을 거두면서 2000년까지 대만은 연 평균 8%대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타이완의 기적(혹은 타이완의 경험)이라고 한다.[16] 1964년 대만 정부는 초등학교,중학교를 의무교육으로 지정하고 이를 무상화하였다.[17] 삼민주의를 의미한다 논리로 외세의 억압을 받지 않는 민족주의를 확보하며, 민주주의로 민권(주의)를 채택하며, 과학으로 민생(주의)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쑨원은 혁명은 철저한 지식에 입각해 실천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18] 饑溺(기닉)은 '절박한 민생고'를 굶주림과 물에 빠짐에 비유한 표현이다[19] 臥火抱冰(와화포빙)은 오월춘추에 나온 표현의 변형이다. 와신상담이 보통 유명한데, 여기서는 이를 구천의 冬常抱冰,夏还握火(겨울에는 얼음을 끌어안고, 여름에는 불꽃을 움켜쥠) 일화와 합쳐 와화(臥火), '불꽃 위에 눕는다'고 표현함으로써 저 둘보다 더한 각오임을 강조하고 있다[20] 悔禍(회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화를 다시 받지 않도록 뉘우침' 혹은 '내린 재앙을 거두다'의 의미로 쓰임.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21] 임금을 잃은 신하와 어버이를 잃은 자식.[22] 나무(木)가 여기서는 관(棺)의 의미로 쓰임[23] 남경의 자금산(紫金山, 448m)을 가리킨다. 원래 종산(鐘山)이었으나 오나라 손권이 할아버지 손종(孫鐘)의 이름자를 피해 종산을 '''장산(蔣山)'''으로 바꾸고 자신의 무덤을 장릉이라 했다. 명 태조(明太祖) 주원장의 능인 효릉(孝陵), 손문의 중산릉, 중국 최초의 천문대라는 자금산천문대도 이 산에 있다. 장개석의 성씨인 장(蔣)을 뜻하는 중의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