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골단

 


2. 1980~90년대 경찰 시위 진압 부대의 별칭
2.1. 개요
2.2. 역사
2.2.1. 소멸
2.3. 복장
2.4. 활동
2.5. 만행
2.6. 기타
2.7. 관련 도서
2.8. 관련 자료


1. 제1공화국 시대 자유당백색테러 정치깡패 집단


제1공화국 시절 자유당에 의해 원외에서 조직된 정치깡패 집단.
제 2대 국회 총선에서 전체 의원 중 3분의 2인 126명이 무소속일 정도로 신진 정치세력 중심으로 물갈이가 이뤄지자 간선제로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승만 대통령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반대하는 관제데모를 일으키고 이 과정에서 동원한 정치깡패 집단 중 하나가 백골단이었다. 당시 이 깡패집단들은 백골단 말고도 '땃벌떼'[1] 나 '민중자결단(民衆自決團)'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백골단을 비롯한 폭력단체들이 국회해산을 요구하며 국회를 포위하기도 하는 등 폭력이 난무하자 이를 빌미로 이승만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일부 국회의원들이 강제로 의사당에 연행되는 등의 황당한 일이 일어난 끝에 1952년 7월 4일 심야국회에서 직선제 개헌안이 의결되었다(이른바 발췌 개헌안).
그러나 백골단 등의 명칭은 제1공화국 이후 더이상 쓰이지 않아 노태우 정권 이후로는 보통 2의 의미로 많이 기억한다.

2. 1980~90년대 경찰 시위 진압 부대의 별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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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서울특별시 경찰국(약칭 서울시경, 현재 서울지방경찰청) 소속 5150제대. 이 사진은 소드마스터 시리즈에서도 쓴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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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방(타지)과 편곤[2]으로 무장한 사진. 사진 속 중대는 전남특수기동3중대로 의경들로 이루어진 중대였다. 인터넷에 흘러다니는 백골단 사진들은 대부분 전의경 중대들로 그중에서도 서울, 전남 쪽 중대들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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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시위에 참여한 인원이 많아지면 백골단이고 나발이고 어쩔 수 없다. 사진은 1991년 '백골단 해체의 날' 시위 때 시위대에게 둘러싸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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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튜브 대한뉴스) 백골단의 출동 장면, 여기 사용된 버스는 기아 콤비(아시아자동차)

2.1. 개요


청카바와 청바지를 입고 흰색 하이바를 쓴 전의경, 직원 기동대원을 통틀어서 일컫는 별칭.
80,90년대에 방석복을 입고 열을 맞추어 진압하는 일반적인 전의경들과는 다르게 가벼운 복장으로 시위대에게 달려들어 대오를 헤집고 시위자를 검거하던 것으로 악명 높았다.
이들은 일반 전의경, 사업장 구사대와 함께 권위의 상징이자 시민들에게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존재''다.
사실 널리 알려진 백골단과 같은 조직은 있었던 적이 없다. 이 문서에서 묘사하는 사복체포조, 사복중대가 백골단의 이미지에 가장 부합하지만 시위대가 생각하던 백골단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시위대가 믿던 백골단은 경찰의 무법적 특수진압 부대인데, 이 문서에서 백골단으로 설명된 체포조는 똑같은 전의경, 경찰이 경무장한 것이다. 백골단에 대한 전설은 실제의 경찰 부대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여러 진압부대에 대한 풍문이 퍼지면서 과장됐다.
풍문상의 백골단의 명칭은 청와대 경비대인 백일단101경비단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 경찰 정예 부대라는 점에서 풍문상의 백골단과 현실의 백일단은 유사점이 있다.

2.2. 역사


1985년 8월 1일 서울시장 명의로 모집된 사복체포조는 대부분 무술 유단자 및 특전사해병대 출신들이 특채되어 주류를 이루었으며, 시위자들을 진압하는 모습이 흰색 헬멧에 일반 전투경찰들과 구분되는 청색자켓 복장 때문에 백골단이란 별칭이 붙게 되었다고 알려져있다.
85년부터 80년대 후반까지는 81,87같이 80단위 중대가 사복중대였다. 이 80단위 중대들 중에는 직업경찰들로 이루어진 중대들도 존재했고 전투경찰대원들로 이루어진 중대들도 존재하였다.
이후 80년대 후반에 91~98중대의 전경사복중대[3]와 81~90중대의 직원(직업경찰관)사복중대[4]로 개편되어 1992년경까지 운영되었다.
이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일반진압중대 내에서도 따로 한 개 소 혹은 분대 정도나 소대 내 고참급들이 청바지 청자켓 등 사복을 입고 사복체포조 역할을 하거나 일부 경찰서에서는 순수 의경들로 이루어진 경찰서 직속의 사복제대를 운영하기도 했다.[5]
그러다 1991년 강경대 치사사건이 일어나면서 사복중대는 여론의 질타를 받게 되고 1992년쯤에 전경사복중대들은 직원중대로 교체되거나 해체된다.[6]이후 1994년 말까지는 직원사복중대만 운영되었다.[7]단, 중대단위로 운용하지는 않았지만 상기 사건 이후에도 몇몇 정복중대 내에서는 분대급 인원으로 사복조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1994년 11월경, 의경진압중대중에서 각 기동대당 2, 3개 정도의 중대를 사복중대로 전환시키게 된다.[8]
94년에 전환된 사복중대는 처음에는 모두 "진사복중대"라고 하여[9] 경우에 따라서 '''진'''압복과 '''사'''복차림을 번갈아 입히며 운영하다가 24[10], 37중대를 제외하고 모두 사복중대로 개편되었다.
연세대 사태 이후 1997년에는 무술 유단 경찰관으로 70,71,72,73,74중대를 신규 편성 및 기존 제1,2,3,4 기동대에서 의경 사복중대들을 차출해[11] 특수기동대[12]를 창설하게 되고 이후 2008년 촛불집회등을 거치면서 현재의 경찰기동대가 운영되고 있다.
서울외에 지방에도 사복중대들이 존재했었다. 각각 지역별로 형사기동대와 같은 직원중대 및 경남80중대, 부산80중대, 경기 80중대등 80단위 중대가 사복중대로 운용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서울과 마찬가지로 91년을 전후로 하여 전경에서 의경으로 인원교체된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도 정복중대 속 사복조 역시 자주 운영되었고 이후 90년대를 거치면서 80중대 외에도 많은 중대들이 사복중대로 창설되거나 해체등의 과정을 겪게 된다.
지방중에서도 전남지역 사복중대들이 전국적으로 유명했다. 당시 광주, 전남지역의 시위가 격렬하기로 유명했던만큼 전남지역의 정복, 사복중대들도 명성을 떨쳤다. 그 중에서 유명했던 전남지역 사복중대들은 82,83,84중대와 3중대[13][14]가 있는데 이외에도 정복중대내에서 사복을 입는 대원들도 많았었고 방범순찰대 중에서도 사복을 입고 진압을 하는 중대들도 있었다.[15]

2.2.1. 소멸


백골단은 어느 특정한 시간에 해체돼서 소멸한게 아니라 환경의 변화로 일반진압 중대와 외형적, 역할적 차이점이 사라지면서 서서히 없어졌다.[16]그렇기 때문에 사복중대가 따로 해체되거나 하지는 않고 일반 진압중대로 계속 남아있었다.
먼저 1996년 연세대 사태 이후 이듬해에 개선된 진남색에 어깨 보호대를 더한 방탄조끼 형상을 띈 신형 방석복이 지급되기 시작하면서 정복중대와 사복중대 모두 이 신형 방석복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X밴드 형태를 띈 구형 간이진압복을 착용하는 사복중대는 두껍고 무거운 구형 방석복(속칭 완진)으로 인해서 기동성이 부족한 정복중대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모두 보다 가벼워진 신형 방석복을 착용하게 되면서 사복중대의 의미가 다소 퇴색되었다.
시위환경이 변하면서 시위진압방식 및 착용하는 방석복의 차이가 없어지면서 점차 정복중대는 예전보다 유연하고 가벼워지고 사복중대는 예전보다 무거워지는 식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85년 창설부터 90년대까지 점진적으로 있어왔고 1999년 무최루탄 선언 이후에는 정복, 사복중대의 역할이 거의 비슷해졌다[17]
진압방식의 변화 외에도 외형의 차이 또한 사라졌다. 2000년경을 지나면서 기존의 사복중대들이 청자켓과 청바지를 입지 않게되고 특유의 오토바이 헬멧도 검은색으로 칠해버리면서 언뜻봐서는 일반적인 방석모랑 구별이 힘들게 되었다.[18] 아마도 사복중대가 더 이상 백골단으로 불리지 않은 건 외형적 이유가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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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으로 칠해진 헬멧 #
2005년경 1기동대 2중대 대원 #
이렇게 사복중대가 그 특징을 잃으면서 백골단의 악명은 1기동대 1,2,3중대 즉, 단셋에게 넘어가게 된다.
2006년에 단셋이 해체되고 난 뒤[19] 2008년 촛불시위부터 경찰관 기동대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자원자인 직업경찰 1700여 명 규모로 창설되어 감축 및 해체 수순을 밟아가던 전의경 진압중대들을 대신하여 시위진압을 전담하게 된다.
하지만 그 직원중대들은 의경중대보다 시위진압능력이 떨어진다는 게 중론이다. 실제로 2009년 촛불 1주기 시위 당시 경찰관 기동대가 투입되었는데 '''상부의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바로 옆에서 전의경 대원들이 시위대에게 고립되어서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었음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뉴스를 찾아보면 전의경중대 중대장들이 직원중대 대원들에게 '''"좀 도와주라고요 좀!!!"'''이라며 간절하게 부탁하는 장면이 포착되었다.해당영상
사실 이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 명령과 지휘계통이 다르면 통제할 권리가 없어서다. 타 지휘관이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줬다가 일이 꼬였을 때 직속상관에게 깨지는 건 본인들이다.
일단 문화개선 이전의 전의경 중대는 내무생활도 내무생활이지만 훈련량도 어마어마 했다. 직업 경찰관들을 실신할 때까지 굴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당시엔 경험치 면에서 의경 대원 쪽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20] 현재는 직원중대 1선 우선배치 정책으로 간극이 많이 줄어든 상태다.

2.3. 복장


백골단의 복장은 하얀색 또는 약간 누런색 오토바이 헬멧(백골단이란 별칭이 붙은 이유)과 청바지(화염병과 유리조각 등으로부터 보호가능), 작은 방패 , 단봉 그리고 운동화 복장으로 대표된다.
하지만 꼭 복장이 이렇게 일관되지는 않았다. 시기별로 지역별로 또 사복중대인지 정복중대 내 사복조인지 직원인지 대원인지에 따라서 여러가지 다양한 복장들이 존재했다.
헬멧은 흰색 헬멧 외에도 2가지 색으로 된 헬멧도 쓰였다.
색이 있는 헬멧의 경우 초기에는 다양한 색상이 있었는데 그 중 은색과 파란색으로 된 것만 끝까지 쓰이게된다. 헬멧의 모양새는 창설초기에는 챙이 달린 싸이카 헬멧이었지만 1989년경 챙이 제거되고 플라스틱 바이저가 달린 형태의 헬멧으로 교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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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색깔의 헬멧들
가장 흔한 바이저가 달린 모델, 89년~00년대 초반까지 계속 쓰였다.
96년 이후에는 지방청 차원에서 위의 플라스틱 바이저를 철망으로 교체하기도 했다고 한다.[21]
또 시기에 따라서 헬멧에 페인트칠을 한다던가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22]이 때문에 녹색으로 칠했던 시기에는 녹골단으로 불리기도 했다.
흰색 헬멧의 경우도 주로 문서 상단의 5150제대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챙이 달린 싸이카 헬멧이었다. 그 밖에 하키헬멧같은 헬멧도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때 쓰였다#1, #2 사진이 꽤나 잔인할 수 있으니 유의하길 바람 [23]
또 전남에서도 약간 누런 흰색 헬멧이 오랫동안 쓰였는데 특히 90년대 중후반에 이름을 날리던 82중대를 대표하는 헬멧으로 유명하다#
그 밖에 자체적으로 다른 모델의 헬멧을 쓰거나#, 락카칠등을 해서 꾸미거나 사제 오토바이 헬멧을 구해서 쓰기도 했고 위의 싸이카 헬멧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바이저 형태가 약간 다른 모습의 헬멧을 쓰기도 하는 등#1,#2 중대, 지방 별로 다양한 종류의 헬멧이 있었다.
다만 89년 이후에는 플라스틱 바이저가 달린 은색, 파란색 투톤 헬멧이 가장 보편적이었다.[24]
복장의 경우는 초기에는 굳이 청자켓, 청바지가 아니라 완전한 사복을 입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로 위의 4장의 사진을 합쳐놓은 사진을 보면 다양한 옷을 입고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청자켓과 청바지, 일명 청카바 또한 초창기부터 쓰여왔다. 청카바는 보급으로 나오기도 하였지만 고참들의 경우나 지방에 따라서는 그냥 추리닝 상의나 바람막이에 사제 청바지 같은 개인 복장을 입기도 했다.
서울 기준으로 청카바의 디자인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중반 사이에 한 차례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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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도 사진, 윗부분이 비대칭인 형태의 상의에서...
90년도 사진, 야전상의와 흡사한 형태로 변하였다.
86년도 사진에서 보이는 청자켓은 1990년대 초까지도 사용됐지만 비슷한 시기에 사복을 입는 경우도 많아서 대대적으로 쓰이진 않았다. 그러나 89년도쯤부터 등장한 두번째 사진의 청자켓은 전경사복중대 해체 이전까지 거의 모든 서울 내 전경사복중대에서 쓰였다. 다만 일반적인 짧은 점퍼 형태의 청자켓또한 사용이 됐었고 의경사복제대나 정복중대 내 사복조들은 다른 형태의 옷을 입는 경우도 많았다.
분신정국시기에는 사복중대에 대한 이미지가 극도로 나빠져서 청카바 대신 일반 기동복을 입고 다닌적도 있었다.예시1예시2
전경사복중대 해체 이후 직원사복중대들은 전경사복중대처럼 모든 중대가 청카바로 통일되지는 않았지만 각 중대원들끼리는 통일적이었던 것 같다. 주로 사파리 자켓이나 위의 두번째 사진처럼 야전상의 형태에 색만 다른 상의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94년 11월경 사복중대로 변경된 의경중대들은 위와 같은 야전상의 형태가 아닌 일반적인 형태의 청자켓을 착용했다. 그리고 자켓류 말고도 하늘색 계통 반팔과 긴팔 남방을 보급받아 여름철에 사용하였다.[25] 또 이때의 특징이라면 청카바 외에 일명 흑카바[26]라고 불리는 흑색 데님 소재의 옷이 지급되었다는 점이다.# 옷의 모양새는 89년~92년도에 쓰인 청자켓과 거의 같았고 청카바 폐지 이전까지는 사복중대들은 여름에는 청카바, 겨울에는 흑카바를 착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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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반팔남방도 많이 쓰였다.
겨울, 흑카바.
이후 청카바는 2000년경부터 더이상 쓰이지 않았고 그 빈자리는 흑카바가 대신하게 된다. 흑카바는 몇번의 변화를 거쳐서 2000년대까지 진사복등으로 불리며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입지않게 된지 오래다.
지방중대의 경우에도 창설초기에는 사복을 입는 경우가 많았고 서울과 동일하게 90년대에 들어 흑카바가 보급되어 사용되었던 것 같다. 또 앞서 말했듯이 2000년대 중반까지도 청카바를 입는 중대들이 존재했다.
무장의 경우 초기에는 헬멧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거나 방탄조끼처럼 생긴 방석복 정도를 걸쳤다. 무릎아래 정강이를 보호해주는 각반도 있었지만 초기에는 잘 쓰지 않다가 88년경부터 많이 사용하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릎부분도 따로 보호장비를 사용하기도 했다.
왼쪽에서 3번째와 오른쪽 맨 끝 인물의 무릎에 주목
그러다 89~90년경에는 새로운 형태의 진압복이 보급된다.일명 간이진압복, 간진
처음에는 국방색 모델이 보급되다가 이후에 회색으로 바뀌게 된다.[27]
또, 사진상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각반도 기존의 정강이만 덮는 형태에서 무릎과 발목 까지 덮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28]
간이진압복은 97년 진압복 개선이전까지 전국의 사복중대에서 애용했다.
여담으로 간이진압복은 사복중대에만 보급되었지만 정복중대에도 나중에 보급된다.[29] 하지만 대부분의 정복중대에서는 그 수가 많지 않아서 주로 지휘관들이나 분대장, 전령같은 몇몇 짬되는 고참들이 차지했다.[30] 간이진압복이란 이름처럼 비교적 가볍고 활동하기 편했는데 그 때문에 당시 대나무가 들어간 두꺼운 진압복을 입어야 했던 일반 정복중대 대원들에게는 사복중대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 외의 복장적 특징으로는 크로스 백 처럼 생긴 방독면 가방이 있다. 일반적인 방독면 가방보다 더 단순하게 생겼는데 85~92년까지 전경사복중대와 직원사복중대에서 주로 사용하였고 94년 이후 의경사복중대들은 이 가방을 사용하지 않았다.빨간색 가방이 해당 방독면 가방[31]
창설초기에는 진압 시 단봉이나 맨손에 사과탄이라고 부르는 작은 최루탄을 주로 사용했다. 실제로 86,87년도 영상등을 보면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시위자들을 붙잡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당시에는 깨방, 사복방패등으로 불리는 거북이 모양 방패는 없었고 일부 대원들이 일반적인 진압방패를 지참하였다.
그러다 80년대 후반 이후 사수대들이 조직화 되고 쇠파이프등이 시위 현장에서 심심찮게[32] 등장하자 경찰측에서는 기존의 사용하던 경찰봉을 대신하여 죽도를 사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에 대응한다.[33]
사복중대는 더 나아가 죽도에 철근을 박거나 아예 쇠파이프를 진압에 동원하기도 했다. 또 유명한 거북이 방패가 이 시기에 도입되었고 이후 90년대 중반에는 근접분사기가 도입되었다.
94년 전환된 의경중대들도 기본적인 무장은 비슷했다. 진압복도 색만 다르고 동일했으며 진압방패나 거북이 방패, 봉, 근접분사기등 장비도 유사했다. 다만 진압방패의 길이가 길어졌다는 점이 특기할만하다.[34] 전체적으로 후기로 가면서 무장이 더 충실해진다고 볼 수 있다.

2.4. 활동


시사저널 1991년 5월 16일자 기사에 언급된 백골단의 일상.
백골단의 역할은 정복중대를 보조하여 기동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시위대를 밀어버리거나 검거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일반 전경부대가 1선에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다가 상황이 고조되면 명령에 의해서 양 옆쪽에서 백골단이 체포나 추격을 시도했고(이것은 전형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에서 '기병대'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시위대는 도망가거나 혹은 다시 뭉쳐서 공격대형을 이루었는데 백골단이 시위대 중 앞에서 지휘하던 주동자들을 뛰어가 붙잡고 무자비한 구타를 시도하니 다들 주춤거리게 되고 더이상 다가서지 못했다 할 정도였다. 이렇게 되면 시위대들은 공포감에 몰입되어 패닉상태에 빠졌다.
또 특정건물 등을 목표로 100m 간격을 두고 시위대를 붙잡고 밀어붙이는 무지막지한 진압을 시도하고 붙잡혔을 시 시위대를 반 죽음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공포의 부대였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간이 사다리 위에 올라간 기자를 날아차기해서 떨어뜨리기 , 집안에 도망간 학생을 문 부수고 들어가 머리잡고 끌고 나오기(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출발하려는 지하철을 유리창을 깨고 난입해서 모조리 체포하기(이때 기관사도 두들겨팼다.),학교 안에 들어가서 도서관에서 멀쩡히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을 머리잡고 끌고 나오기 등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폭력성을 보였다. 이러한 폭력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에게도 무자비했기에, 1990년 KBS 파업 때 백골단 300명이 여의도 본사로 투입돼 조합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해 117명을 연행한 바 있었다. 물론 군사정권 시기 정부와 언론의 묵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진압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로 상황시 방독면을 쓰고[35] 서울역에서 명동까지 구보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허세가 조금 있기는 하겠지만 목격담이 있고 출신대원들의 주장도 있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허황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80,90년대 최루탄이 기본적으로 사용될때는 진압에 참여하는 거의 모든 중대가 방독면을 쓰고 구보를 하며 훈련하였고 2000년대 초반까지도 수도권 진압 선봉중대, 지방 선봉중대들은 훈련명목 또는 체벌로써 정화통까지 끼운 상태에서 방독면 구보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물론 떡실신했다. 서울역에서 명동역까지는 거리는 네이버 지도 기준으로 2.4㎞ 정도라고 한다. 대략 도보 30분 정도 거리다. 그런데 1998년 만도기계(현 대유위니아) 파업 이후 시위진압에서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게 됨에 따라 막바지 백골단들은 방독면 착용을 하지 않았다.
물론 백골단이라고 해서 무적은 아니었다. 특히 초창기로 갈수록 백골단의 무장은 가벼웠었고 그 만큼 무장한 시위대와 정면으로 붙게된다면 크게 다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백골단이 활약하기 위해선 정복중대가 확실하게 뒤를 받혀줘야만 했다.
다만 후기로 갈수록 사복중대도 무장이 꽤 튼실해지긴 한다.
사실 정부의 지원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초창기 장비는 무전기 하나만 쥐어줬으며 한번 출동을 나가면 3, 4일은 기본으로 길에서 노숙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노숙자라고 생각해 먹을 것도 줬다고... 장비도 부족하여 죽도[36], 쇠파이프, 돌 같은 것을 스스로 구했다고 하나 실상은 시위현장에서 시위대가 버리고 간 것을 주워 썼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에서 김영삼 정권으로 바뀌면서 장비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고 상기 서술한 무기들은 불법진압도구라고 하여 쓰지는 않게 되었다.[37]
전의경 기동대와는 다르게 명령에 복종하는 군대식 특성으로 자율성 있는 진압은 없었다고 한다. 직원 기동대 구성원은 지원자를 모았는데 대부분 장신, 유단자 위주로 경쟁률이 높았고 군필자가 대다수였다. 특히 특전사해병대 출신들이 많이 특채됐다.
그리고 김영삼 정권 시절엔 전의경 신병들을 체력 테스트해서 성적 좋은 대원들을 모두 사복중대로 보냈다고 하니 체력 하나는 끝내주는 셈이었다.
또한 백골단은 일부러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대학이건 사업장이건 마구잡이 연행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이런 폭력적 강경 진압에 대항해 큰 역할을 하던 것은 녹두대나 오월대 같은 대항조직이다.[38] 이전에도 60~70년대 캠퍼스 내에 사복경찰이 학내 지도부를 검거하는 시대에서 자구적으로 형성되었던 사수대가 있었다. 하지만 80~90년 이후, 유신정권과 신군부와의 투쟁에서 더욱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검거하려는 백골단과 시위자를 지키려는 사수대의 규모는 경쟁적으로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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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단(사진 속 중대는 전남82중대)에 맞서는 녹두대의 패기. 뒤에 일반 시위대가 보인다. 장소는 광주광역시 조선대학교 정문 앞이다.

2.5. 만행


백골단은 여러모로 악명을 떨쳤는데 시위진압 중 1991년 4월 당시 명지대생이던 강경대를 이들이 진압하면서 철근이 든 죽도와 쇠파이프로 때려죽이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악명을 떨쳤다. 강경대는 연락조로 가장 늦게 학교담을 넘어서 도주하던 중(사실상 시위대 본대에서 낙오된 상황이었다) 백골단 5~7명에게 끌어내려져 철근이 들어간 죽도와 쇠파이프로 두부를 집중가격당하고 길거리에 버려졌으며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곧 사망하였다. 강경대를 살해한 백골단 대원들은 공판에서 반성하는 모습은커녕 오히려 죽은 강경대에게 있지도 않은 화염병 혐의를 뒤집어씌웠고, 이에 분노한 사람들이 공판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사건까지 있었다. (‘강경대 치사사건’ 첫 공판서 유가협 울분 폭발, 자식을 가슴에 품은... 강경대 열사 아버지)
강경대 사망사건에 항의하는 시위 와중에 5월 성균관대생 김귀정 또한 경찰에게 집단구타당해 사망한다. 그래서 성균관대 명륜캠퍼스엔 "김귀정 생활도서관"이라는 동아리가 지금까지 내려온다.
그 외에도 1996년 3월 연세대 노수석도 일명 토끼몰이 진압와중에 사망했다는 시위대 측의 주장이 있다.[39]
백골단에 의해서 사람이 죽는 일도 존재하기에 중경상을 입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1980~90년대 당시 전교조 주도의 소위 '참교육 운동'을 전후해 발생한 '고등학생운동(이하 고운)' 활동[40]을 했던 고등학교 시위대도 있었는데 백골단에 의해서 진압된 고등학생 시위자의 어지간한 뼈마디가 모두 골절된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언론에는 안 나왔다고 한다.
1991년 5월 7일에 백골단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41]의 빈소로 쳐들어가 영안실 벽을 깨부수고 박창수의 시신을 탈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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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에 안양병원 영안실로 난입한 백골단들. 이들은 영안실 벽을 뚫어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시신을 탈취해갔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요새는 안 그런다. 만약 했다가는... 현재와 같은 민주사회에서 백골단이 1980년대와 같은 일을 벌인다면 과연 사회가 가만히 있을지도 의문이다.

2.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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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년 10월 10일 공개된 서태지 버전의 소격동 뮤직비디오에도 이 백골단이 등장했다.
  • 영화 1987에서도 등장한다.
  • 홍콩에도 이들과 비슷한 기동 체포조인 랩터 소대가 있는데 시위와 아무 상관 없는 시민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등 사실상 21세기 백골단이다.

2.7. 관련 도서


  • <실록 백골단> - 유인철 저. 영재출판사. 1991. 백골단 1기였던 저자가 자신의 경험담을 토대로 저술한 수기이다.

2.8. 관련 자료



3. 라쳇 & 클랭크 시리즈의 등장 무기


자세한 사항은 라쳇 & 클랭크: 공구전사 리로디드/무기 및 도구 일람 항목 참조.

[1] 땃벌은 함북 방언으로 땅벌을 의미한다. 즉, 서북청년단처럼 이북계 우익 청년단임을 암시하는 이름이다. 백골단보다 더 전투적이고 드센 어감 때문인지 60년이 넘게 지난 오늘날에도 한국판 돌격대, 우국기사단 류의 단체를 비판할 때 가끔 불려나오는 이름이기도 하다.[2] 중봉(중형 진압봉)에 단봉을 엮은 것이다.[3] 1~4기동대에 각각 2개 중대씩 존재했다[4] 다만 직업경찰관들보다는 전경사복중대가 훨씬 자주 진압작전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경찰관 중대들은 정말 큰 상황이 아니면 나서지 않았다고...[5] 의경사복제대들은 일반 기동대와는 달리 중대번호가 5000단위였고 위에 나오는 5150제대가 대표적인 의경사복제대로 동대문경찰서(현 혜화경찰서) 직속부대였다.[6] 뿐만 아니라 80년대 후반부터 대간첩 작전을 목적으로 하는 작전전투경찰을 시위진압에 동원하는 것에 대하여 관련법 해석을 두고 문제제기가 많았는데, 이 문제가 경경대 치사사건으로 다시 불거지면서 각 기동중대들은 전경에서 의경으로 대대적으로 교체된다. 법개정등을 거쳐 "치안업무보조"라는 항목을 명시해 작전전투경찰(전경) 및 의무전투경찰(의경) 모두 시위진압 투입에 문제 소지를 없앰.[7] 80~88중대까지 9개 중대로 운영되었는데 앞서 말한 80단위 직원중대와의 관계는 불명이다.[8] 1994년 서울대에서 열린 5차범민족대회 당시 진압을 시도했다가 크게 실패한 이후 서울청에서는 대대적인 기동대 개혁을 실시 하였는데 그 개혁의 일환으로 의경사복중대가 창설되었다. 직원사복중대의 경우 아무래도 직업경찰관들로 이루어져 있다보니 진압시에 소극적으로 임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9] 반사복중대라고도 했다.[10] 연세대 사태 이후 사복중대로 전환되었다고 한다.#[11] 각 기동대당 1개 중대정도씩 이동되었다.(8,24,37,54중대 -> 75,76,77,78중대) 또 사복중대 말고도 정복중대중에서 13중대가 유일하게 이동되었다.(79중대)[12] 이후 현재의 제5기동단으로 바뀐다.[13] 90년대 중후반부터 유명했던 중대들로 94년을 전후로 창설된 중대들이다. 각각 2중대가 82중대로, 5중대가 83중대로, 8중대가 84중대로 전환되었고 2중대를 제외하고는 정복중대들이었다. 3중대도 96년도 중순까지 정복중대였다.[14] 특히 3중대는 중대전체가 언제나 흑카바를 입고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15] 119중대나 149중대가 그러했다고 한다.[16] 실제로 사복중대 혹은 진사복중대라는 말과 개념은 2000년대 초중반까지 남아있었고, 화염병전담타격대와 같은 형식으로 운영되었다.[17] 다만 이후에도 거북이 방패를 들고 흑카바에 흰운동화를 착용하는 등의 등 차이는 있었다.[18] 서울 기준으로 지방별로 차이는 존재한다. 부산, 전남 등 일부 지방의 경우에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청바지, 청자켓을 입거나 특유의 헬멧을 착용하였다. 전남 84중대[19] 2005년 농민대회에서 농민 2명이 사망하게 되면서 그 이전처럼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20] 창설 초기에는 진압검열 때 직원중대가 자꾸 삽질을 하자 옆에서 구경하던 전의경중대가 '''대놓고 놀려대서''' 시비가 붙은 일화도 있다.[21] 그 이전에도 개인적으로 혹은 중대 자체적으로 바이저를 없애고 다니거나 방석모용 철망을 붙이는 경우가 있었다[22] 주로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이었다. 백골단을 상징하는 것은 특유의 오토바이 헬멧이다 보니 헬멧자체에도 안 좋은 이미지가 붙게되었다.[23] 머리에 부상을 당한 경찰이 피를 흘리며 부축받는 장면이다.[24] 서울로 한정한다면 사복중대들은 전부 이 헬멧을 썼다고 봐도 무방하다[25] 여름철의 경우 일명 중대티라고 해서 중대 자체적으로 반팔 남방이나 티 종류를 맞춰 입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사복중대 뿐 아니라 모든 중대들이 그러하였으며 오늘날 각 기동대, 기동중대들도 마찬가지이다.[26] 2000년대 이후로는 진사복이라고 불리기도 했다.[27] 이건 일반 진압복(일명 완전진압복, 완진)도 마찬가지이다.[28] 무릎 부분과 발목부분은 접어버리고 착용하는 일도 많았다[29] 나중에 1기동대 내에 몇몇 정복중대들은 아예 전원 간이진압복을 착용하기도 했다.(1997년 상반기 한때 3중대는 정복 중대이면서도 전원 간진+사복 헬멧 착용)[30] 비슷하게 사복헬멧도 정복중대 고참이나 직원들이 쓰고 다니기도 했다. 또 아예 앞서 말한 1기동대 내에 정복중대에서는 봉조는 사복헬멧을 방패조는 일반 방석모를 착용하기도 했다.[31] 사진속 경찰들은 1기동대 직원사복중대원들이다. 이 시기에는 서울에선 직원사복중대만 운영하였다[32] 백골단의 강압적 진압에 대한 자구책으로 생긴 현상이라는 말도 있다.[33] 이 시기부터 진압봉이 점점 길어진다.[34] 90년경에 좀 더 길어진 진압방패가 사용되었다. 94년 전환된 의경중대들은 원래 정복중대였기 때문에 기존에 쓰던 것을 사용한 것이다.[35] 정화통을 빼고 달리지 않았다. 최루가스가 만개해 정화통을 끼고 뛰었다.[36] 안에다 철심을 박아넣어서 보강하는 경우가 많았다.[37] 물론 문서 상단의 편곤처럼 사제무기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38] 비슷한 사례로, 노조 역시 구사대에 대항키 위해 '파업자위대'를 두었다.[39] 그러나 노수석의 경우는 부검결과 선천성 심장이상이 그 사인인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후 유족이 노수석의 머리에 부상의 흔적이 있다고 과잉진압에 의한 사망임을 주장했지만 1999년의 민·형사소송에서도 경찰의 과잉진압과 노수석의 사망간에는 인과관계가 없으므로 유족 측이 패소하였다.[40]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오름> 2006년 제10호, 2016년 7월 시사in 기사도 참고할 것.[41] 1981년부터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하여 줄곧 한진중공업에서 일하다가 1987년부터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에 가입하여 3년간 노조 내 회계감사로 일하다가 1990년에 노조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이듬해에 부산노련 부의장 겸 전노협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며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처우 개선이라는 명분하에 1991년 2월 대우조선 투쟁지원 연대회의에 참석하다 경찰에 의해 '제3자 개입금지 위반'으로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고, 그해 4월에 있었던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벌이다 의문의 부상을 당해 안양병원에 입원하였다가 5월 6일에 안양병원 마당에서 사체로 발견되었다. 당시 사인은 단순 비관자살로 판명났으나 유족들은 반발했었고, 13년 뒤인 2004년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를 하여 안기부가 개입했다는 설이 있으나 자료 및 증거불충분으로 진상규명 불능'으로 결론나게 되었다. 그나마 당국의 노조탄압 속에 의문사를 당한 점을 인정하여 2014년에는 '민주화운동 관련 사망자'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