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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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작 영화 벤허의 전차경주씬.
1. 개요
2. 역사
3. 룰
4. 인기
5. 픽션의 전차경주


1. 개요


Chariot Racing
고대 시대에 있었던 경주 대회의 일종으로, 사실상 현대 모터 스포츠시작으로 볼 수 있는 스포츠 레이스 종목이다.

2. 역사


원래 전차는 고대에는 승마용구가 없고, 품종 자체가 약해서 타기 쉽지 않았던 관계로, 대신 말을 이용해 끌고다니면서 기동성을 살려서 싸우는 병기의 일종이었다. 초기의 전차경주는 이러한 전차의 기동성(속도)에 주목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흔히 전차경주라고 하면 고대 로마를 떠올리기가 쉽지만, 의외로 전차경주의 시초는 로마 제국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가 먼저였다. 서양의 가장 오래된 기록서사시 일리아스에서도 파트로클로스의 추모 경기에서 그리스 영웅들의 전차경주가 나온다.
고대 올림픽 경기의 일종이었으며, 이후 그리스 문화를 흡수한 로마에 의해 신을 경배하는 축제의 클라이막스 행사로 발전하면서 본격적으로 대중적인 스포츠 레이스로 발전하게 됐다. 또한 의외로 중국에서도 전차 경주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전국시대의 군사 손빈이 슬개골이 파여서 앉은뱅이가 된 후 극적으로 탈출하여 제나라 유력자의 식객으로 있을 때, 이 경주에서 돈을 따게 해 주어 실력을 인정받은 삼사법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로마에서 가장 큰 전차경주 경기장이었던 키르쿠스 막시무스는 여러 차례의 확장 공사를 통해 길이 621m, 너비 118m에 달하는 규모로 커졌으며 최대 25만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것은 콜로세움 수용 인원의 '''3배'''나 된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경기장은 유지되었으며 549년에 열린 최후의 전차경주를 끝으로 경기장은 서서히 황폐화되어 농장으로 쓰였는데, 현재는 농장을 허물고 경기장 터를 공원처럼 남겨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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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의 전차경주장이었던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의 모습 (1978). 오른쪽의 유적은 황궁이 있던 팔라티누스 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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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 황제 재위 시절의 로마를 복원한 모형에 보이는 키르쿠스 막시무스, 보다시피 콜로세움보다도 훨씬 크다.

3. 룰


룰은 현대의 레이싱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길이와 구간을 가진 서킷 내를 전차로 달리고, 가장 먼저 들어오는 전차가 승리한다. 하얀 천을 던져 출발 신호를 보내면 출발대에서 출발해서 시계반대방향으로 도는 것이 룰의 전부. 말 두 마리가 끄는 전차는 비가, 네마리가 끄는 전차는 콰드리가라고 불렸으며 경주마로 훈련받는 말은 특별한 마구간에서 길렀다. 총 4개 팀이 참전하며, 팀은 각각 색(빨간색, 녹색, 파란색, 흰색)으로 구분된다. 레이서들은 자기 팀의 색을 한 셔츠와 헬멧을 써서 팀을 구분했고, 이 4개 팀은 각기 다른 스폰서들이 맡았다고 한다.
고대 로마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벌어진 경주의 경우, 최대 12대의 전차가 약8km, 총 7바퀴를 달려서 먼저 들어오면 승리했다고 한다. 문제는 레이서들이 쓰는 헬멧 이외에 전차 자체가 아무 안전장치가 없었고, 당시 레이서들도 현대와 마찬가지로 속력을 높이기 위해 차체를 최대한 가볍게 했기 때문에 내구력이 떨어져서 경주 중에 전차가 인수분해되거나 말고삐를 잘못 잡으면 팔이 꼬여서 전차에서 떨어진 채 질질 끌려다니다가 목숨을 잃는 사고도 많았다고 한다. 이게 왜 용인되냐 하면 '''기수가 떨어져도 전차만 결승점에 맨 먼저 도착하면 우승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차를 의도적으로 상대에게 충돌시켜서 코스이탈시키거나 파괴하는 게 반칙이 아닌 레이싱 전술의 일종으로 인정을 받았다. 최고 속도로 4두전차를 몰면서 코너를 도는 것은 매우 위험했기에 여기서 수많은 기수들이 넘어졌다. 또한 관중들이 격렬한 레이싱일수록 더 환호했기 때문에 레이서들이 짐짓 위험 상황을 만들기도 해서 어느 영화처럼 목숨을 거는 격렬한 레이싱이 자주 벌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그렇잖아도 위험한 경기에 팬보이들이 위험한 물건[1]을 경기장 안에 투척하기까지 하면서 실전과 맞먹을 만큼 위험했다고 한다. 실제로 많은 기수들이 경기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또 현대 모터스포츠처럼 치프와 정비사들이 중요하진 않았지만, 지원이 필요했다고 한다. 고속 주행으로 격렬한 마찰이 일어나면서 바퀴나 바퀴축이 불타는(!) 상황이 종종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원팀이 물병을 들고 트랙 가까이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들의 전차가 지나갈 때 물을 끼얹어서 불을 껐다고 한다. 어쩐지 포뮬러 원 정비팀의 피트 스탑과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고대에는 전차가 굉장히 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에 전차의 소유주는 대부분 부자들이었다. 보통은 이 부자들이 팀 하나를 맡아 훈련받은 노예들을 레이서로 출전시켰지만, 평민이면서 전속계약을 맺고 경주를 생업으로 삼는 프로 레이서도 존재했다. 승자에게는 승리자의 야자잎과 황금지갑, 상금이 지급되어 영웅으로 받들어졌으며, 챔피언 말은 경주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종마로 썼다. 노예 레이서의 경우 신분해방의 기회도 부여되었다. 영화 벤허에서도 주인공 유다 벤허는 로마 경주에서 5관왕을 달성하고 노예신분에서 해방된다.


4. 인기


예나 지금이나 특정 스포츠의 인기를 가늠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해당 종목 선수들의 수입을 보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돈을 많이 번 스포츠맨은 2세기에 대활약한 스페인 출신 전차 기수인 가이우스 아풀레이우스 디오클레스(Gaius Appuleius Diocles)였다. 디오클레스는 십대에 선수생활을 시작해 중년에 은퇴할 때까지 24년간 35,863,120 세스테르티우스를 벌어들였는데, 환산 기준에 따라 다르지만 순금 아우레우스로 환산하면 약 금 2.6톤, 현대 화폐가치로 수천 억에서 수 조 원에 달하는[2] 거액이다. 이는 타이거 우즈, 리오넬 메시, 플로이드 메이웨더가 일생동안 상금으로 번 돈을 합친 것보다도 많은 것인데, 하물며 저 셋은 인구 수십억의 전세계인을 상대하는 현대인인 반면 디오클레스는 인구도 적고 경제규모도 작으며 원격매체도 없던 시절의 고대인이니 비교를 불허한다. 당시의 경제규모를 감안해 더 와닿게 비교하자면, 디오클레스의 총 수입은 '''당시 로마 시의 1년치 식량 예산, 혹은 로마군 전체의 3개월치 봉급 지출과 맞먹었다.'''[3]
이런 전차경주의 팬들을 "Deme(딤)"이라고 불렀다. 고대 로마시대에는 위 문단에서 상술한 적색, 녹색, 청색, 백색의 네 전차경주 팀을 각각 응원하는 네 딤이 있었는데 마치 오늘날 프로스포츠에서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과 똑같은 유니폼을 맞춰입는 서포터들처럼 이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전차경주 팀의 유니폼과 같은 색의 옷을 입었다.
서로마가 몰락하고 동로마 시대로 바뀌면서 전차 경기의 인기는 더 높아졌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기고 가장 먼저 시작한 사업이 히포드롬의 확장 공사였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의 국교가 크리스트교로 공인된 이후부터 검투사 경기가 금지되면서 볼거리가 전차경주만 남았다. 그래도, 전차경주가 워낙에 위험하고 스피디한 볼거리였던지라 동로마인들은 사실상 모두 다 전차경주의 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로마 시대에는 적녹청백의 네 딤들 중 녹, 청만 남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서민계층은 이 딤을 중심으로 돌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딤끼리는 서로 격렬하게 반목했기 때문에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람들의 정치, 경제 등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심지어 기독교 종파의 노릇까지 하였다. 청색 딤은 백색을 흡수했는데 주로 귀족층의 지지를 얻으며 오늘날 그리스도교 정통으로 여겨지는 그리스도 양성론을 믿었고, 녹색 딤은 적색을 흡수했으며 주로 평민층의 지지를 얻고 단성론을 믿었다.
히포드롬은 당시 10만 명가량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는데, 이 대경기장을 가득 메운 군중들은 모두 청색 아니면 녹색 딤에 속해 있는 팬보이들로, 대단히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무리였다. 6세기에는 이들이 전차경주 결과에 분노해 일으킨 니카의 반란으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죽을 뻔한 적도 있다.[4]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민 총수가 50만 명이 좀 넘었는데 그중 3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분명 부상자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오늘날 축구훌리건 따위는 저리 가라다.
쉽게 말해서 딤은 스포츠 팬덤, 종파 등등의 기능을 모조리 겸비한 일종의 정치 조직 같은 정당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훌리건 세력들이 특정 정당의 당원을 겸했고 교리 및 철학 논쟁을 벌였으며 빡치면 황제 앞에서 폭동도 일으켰다는 것(...)이다. 501년 녹색 딤은 경기장에서 청색 딤을 습격해 3,000명을 학살할 정도로 양측의 경쟁심은 단순한 운동경기 광팬 수준을 초월했다.
그 외에, 이 전차경주는 극장, 검투장과 달리 '''남녀가 합석해서 관람이 가능했다.''' 시인 오비디우스는 그래서 전차경주장이 남녀가 만나기 좋은 장소라고 썼다고 한다.

5. 픽션의 전차경주


[1] 못을 박은 점토판 따위.[2] 이처럼 갭이 큰 이유는 당시와 현재의 물가가 정확히 대응되지 않기 때문이다. 곡물을 기준으로 하느냐, 귀금속을 기준으로 하느냐, 평균적인 농부의 소득이나 군인의 봉급을 기준으로 하느냐 등에 따라 같은 액수라도 그 실제 가치는 수십 배 이상의 차이가 날 수 있다. 게다가 공화정 말기~제정 초기 로마의 경제와 물가 변동이 극심했던 것 또한 정확한 추산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펜실베니아 대학교의 고전학 교수인 피터 스트럭은 디오클레스의 총수입을 로마군의 봉급으로 환산한 후 이를 현대 미군 사병의 급여로 치환하여 최대 150억 달러(약 15조 원) 규모의 구매력이었다고 추산하기도 했다. (출처)[3] 디오클레스의 통산 전적은 4257전 1462승 승률 34%로, 4명이 경주하는 걸 감안하면 물론 높은 승률이지만 의외로 그렇게까지 무적은 아니었다. 그의 막대한 수입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나머지 경기의 대부분을 2등에서 끝마칠 정도로 의도적으로 아슬아슬한 레이스를 만드는 뛰어난 쇼맨십,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오래 살아서 활약한 덕분이다.''' 그의 어마어마한 수입 못지않게 대단한 업적은 이 위험천만한 스포츠에서 활약하면서 24년 동안 이틀에 한번 꼴로 경기를 하는 가혹한 스케쥴을 소화하면서도 죽거나 불구가 되지 않고 무사히 은퇴한 것이다. 실제로는 많은 기수들이 20대도 넘기지 못하고 죽거나 살아남더라도 부상으로 더 이상 전차경주를 할 수 없는 지체장애인이 되어 강제은퇴하는 게 보통이었다.[4] 단 니카의 반란은 두 딤이 서로 싸운 것보다는 두 딤이 모두 황제에게 반발한 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