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삼국지)
1. 후한 말과 삼국시대 오나라의 무장
후한 말과 삼국시대 오나라 무장. 성품은 베풀기를 좋아하고, 사대부들을 아꼈다고 한다.
1.1. 정사
처음에는 주군의 관리로 있었는데 용모와 계략이 있고 사람들에게 응대를 잘한 것으로 유명했다. 손견이 정벌하는데 따라가, 완(宛)현과 등(鄧)현에서 황건적을 토벌하고, 양인(陽人)현에서 동탁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성을 공격하고 야전을 치루느라 몸에 많은 상처를 입었다.
손견의 전사 후에는 손책을 보좌하는데 손책이 독립하기 위해 원술로부터 군사를 얻어 가는 길에 손책군은 조랑의 공격을 받는다. 이때 정보는 기병 1명과 같이 손책을 가리고 막으며, 말을 몰아 내달리고 빨리 부르면서, 창으로 적들을 돌파하여, 적들이 분산되어 손책은 탈출할 수 있었으나 결국 병사는 모두 잃어 손책은 원술로부터 아버지 손견의 잔여 병력 1천을 얻게 된다.
손책이 강동을 정벌하는 때에도 정보는 여러 공을 세웠다. 단 엄백호가 전투에서 진 후 허소 밑으로 도망간 것을 공격하고자 할 때 손책은 허소와 성헌의 일을 들며 정보를 말린다.
손책이 회계로 입성하고 나서는 정보를 오군 도위로 삼아 전당을 다스리게 하고 후에는 단양도위로 옮기고 석성에 머무르게 했다. 이때 그는 선성, 경현, 안오, 능양, 춘곡의 여러 도적을 다시 토벌하여, 모두 격파시켰다. 후에 탕구 중랑장에 배수되고, 영릉태수를 맡았다. 손책군이 유훈을 공격하는데 참여했고 이어서 황조를 공격하는데도 참여했으며 돌아와 석성을 진무했다.
200년 손책이 죽고 손권이 뒤를 잇자 정보는 여범, 주유와 함께 지휘관으로 임명되고 장소와 함께 3군을 돌아다니며 손권에 불복하는 자들을 토벌한다. 203년의 황조 정벌에도 참가해 돌아오는 길에는 낙안(樂安)을 공격한다. 낙안이 평정된 후에는 태사자를 대신해 해혼을 수비한다. 주유와 함께 좌우독이 되어 각각 1만 명 합계 3만명에다 유비군을 합쳐서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 당시 주유와의 사이는 안 좋았는지 후에 여몽이 이 당시 일을 회상하며 손권에게
라고 말한다. 다만 정보에 대해서 변론을 하자면 이 말은 여몽이 그냥 손교와 함께 군권을 나누기 싫어서 한 말일 수도 있다.정보는 스스로 노장이라고 생각하여 둘 다 모두 대독이 되어 결국 함께 일했지만 화목하지 못하여 국가의 대사를 거의 그르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남군에서의 전투에도 참가하여 조인을 패주시키는 데도 공을 세우고 비장군에 배수되고 강하태수를 맡는다. 주유 사후 남군태수가 되지만 유비와의 형주 분할로 다시 강하태수로 옮겨져 탕구장군으로 승진 후 사망한다.
오서에 따르면 그가 강하태수 겸 탕구장군을 지낼 때 반란군 수백 명을 죽여 모두 불에 던지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날 이후 정보는 열병을 앓다가 100여 일 후에 죽었다고 한다.
연배가 장수 가운데 가장 많아 '정공'이라고 늘 불렸다니 대략 150년대 초반 출생자로 정보를 대신하여 하구를 다스리게 된 것은 손교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210년대에 죽은 것 같다.
손권이 칭제하게 되자, 정보의 공을 추론하여, 아들 정자를 정후에 봉하였다.
여담으로 보즐이 태자 손등의 명으로 행정을 분석한 11명 중에 한자 이름까지 같은 동명이인이 적혀있다.
1.2.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철등사모(철척사모)라는 무기를 사용한다. 그러나 사모가 서진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철등사모는 나관중의 각색이다.
젊은 시절 손견이 큰 뜻을 이루고자 몸을 일으켰을 때부터 따라 다닌 4명의 공신 중 한 사람. 이후 손책, 손권까지 3대를 받든 오나라의 원로가 되었다. 같은 시기에 손견을 모시기 시작한 황개, 한당, 조무와 함께 손견의 사천왕이라 불리는 경우도 있다.
반동탁 연합군에 참가한 손견의 군사로서 동탁군과 싸웠으며, 사수관 전투에서는 호진을 쓰러뜨렸다. 낙양 상경 후 손견과 함께 옥새를 발견하는데 정보, 한당, 황개, 조무 중 가장 학식이 뛰어났던 정보가 옥새를 알아보고 '수명어천 기수영창'이라는 글자를 읽고 "하늘로부터 명을 받았으니, 오래 가고 멀리 뻗으리라."라며 해석한다.
양양전투에선 어린 손책을 지키는 와중에도 손견을 죽음으로 몬 여공을 찔러죽였고 오군평정전에선 태사자와 30합으로 비겼다.
이후 손책, 손권을 보좌해 적벽대전에서는 조조와의 교전을 주장하는 개전파의 중심이 된다. 젊은 주유 밑에 놓여지자 처음에는 불만을 품었으나 주유의 지휘가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감복, 이후 주유를 따라 적벽, 남군을 연전했다.
1.3. 미디어 믹스
- 정보(삼국지)/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
2. 후한 말의 군벌
鄭寶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양주의 군벌로 장다, 허건과 같은 무리들처럼 따로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가장 날쌔고 과감해 재능과 힘이 다른 사람을 능가해서 한 쪽 사람들에게 거리낌을 받았을 정도였다. 이 때 유엽은 노숙과 함께 정보를 섬기려고 하는데, 노숙은 승낙했으나 중간에 주유의 설득으로 인해 돌아서고 유엽만이 정보를 섬기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유엽이 그와 친하게 잘 지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그는 백성들을 내몰고 핍박해 장강을 건너 강남으로 가게 했는데, 유엽은 높은 가문의 명사이기 때문에 유엽을 시켜 이 일을 주도하게 한다. 당시 스무살에 불과한 유엽이었기에 이게 도대체 뭔 짓이냐면서 이유도 모르고 걱정만 했다.
때마침 조조가 사자를 파견해 몇 가지 사정을 물어보았으며, 유엽은 앞으로 나아가 사자를 뵙고 이 주에서 일어난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고 정보의 일을 처리할 계획을 세워 사자에게 며칠간 더 머무르게 한다. 얼마 안되어 정보는 수백명의 백성을 거느리고 쇠고기와 술로 사자를 대접하러 나왔으며, 유엽은 가동과 그 무리들을 좌중의 문 밖에 서있도록 하고 술과 밥을 차려 주고 유엽 자신은 정보와 함께 그의 내당에서 술자리에 참석했다.
유엽은 비밀리에 건장한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그가 술잔을 따라주는 틈을 이용해 정보를 베어버리라고 했다. 하지만 정보는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술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사자를 만났을 때 정신이 매우 멀쩡하였으므로 술잔을 돌리는 틈을 이용해 그를 베는 계획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유엽은 이로 인해 '''직접 정보의 머리를 베어''' 그가 데리고 온 군대에게 호령해 말했다.
그렇게 병사들이 흩어져 달아나자 유엽은 그들이 혼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 남은 무리들의 두목을 도리로 설득해 자신을 두목으로 섬기게 하고 뒤이어 세력을 이끌고 유훈에게 항복한다.조공(조조)의 명령이 있으니 감히 함부로 행동하는 자는 정보와 마찬가지로 다스리겠다!
의아해하는 유훈에게 유엽이 정보에 대해 내린 평가는 다음과 같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짤린 줄로만 알았지만, 성산 전투(1)에서 유엽의 과거 행보를 언급할 때 한 컷 등장한다. 노란 머리의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