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삼국지)

 

1. 후한 말의 인물
1.1. 초기 생애
1.2. 손권에게 임관
1.5. 죽음
1.6. 사후
1.7. 평가
1.8. 기타
1.9. 미디어 믹스
2.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1의 아들)
2.1. 미디어 믹스


1. 후한 말의 인물





'''魯肅
노숙
'''
'''최종직위'''
도독(都督) 겸 분무교위(奮武校尉)
'''성씨'''
(魯)
'''이름'''
(肅)
''''''
자경(子敬)
'''생몰기간'''
(172 ~ 217)
'''고향'''
서주 임회군 동성현(東城縣)

'''노씨네 무서운 아이 계책에 가장 뛰어나고 魯家狂兒策最長''',

이끌고 조화롭게 한 자로는 주랑이 있었네 倡而和者有周郎

─ 공평중(孔平仲), 「자염장군(紫髥將軍)」

후한 말의 인물. 손권 휘하의 장수. 는 자경(子敬). 임회군 동성현 사람.
'''조조에게 순욱이 있고, 유비에게 제갈량이 있다면, 손권에게는 노숙이 있다. 주유와 함께 손오의 창업에 가장 많이 기여한 인물.''' 주군짐승으로 비하한 동맹 세력의 대강경파를 말로써 제압하는 기개와 언변을 갖춘 대전략가. 주적을 그 누구보다 선명히 알고 대세를 꿰뚫었던 통찰력과 동맹국과의 분쟁을 미연에 차단하는 외교적 방침을 설계하는 기획력은 역대 대도독들을 압도했다. 적벽대전의 주유, 번성 공방전의 여몽, 이릉대전의 육손에 비하면 포스가 조금은 떨어져보인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무릇 한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사전에 전쟁이 발발하지 않게 하면서도 전략적으로 국익을 도모하는 것이 최상책이다.[1]
노숙 병사 후 오나라와 촉나라 상호간의 이익을 도모할 완충제가 사라지면서 양국은 돌이킬 수 없는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거국적으로 이 인물이 제갈량만큼만이라도 더 살았다면, 10여년만 더 버텼다면 삼국의 형세는 완전히 뒤바뀌었을 공산이 크다. 노숙은 46세에 죽었는데 제갈량만큼만(54세) 살았더라도 몰년이 225년이다. 한참 손오를 상대로 조비의 파상 공세가 이어지고 촉한이 이릉의 패배를 수습하고 남정을 끝냈던 그 시점인 것이다. 노숙이 살아있었다면 촉이나 오나 이런 국면을 맞이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을 역으로 뒤집으면 이 인물의 퇴장시점부터 안정적인 삼국균형이 깨진 시발점으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다.

1.1. 초기 생애


부유한 호족의 집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사망하여, 할머니와 생활하게 되었다. 집안의 재산이 부유했지만 베푸는 것을 좋아하여, 천하가 난세이니 가업을 그만두고 재산을 정리해 농토를 공개적으로 판매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고 지방의 명사들과 교분을 맺어 고향 사람들의 인망을 얻었다.
노숙전에 주석으로 달린 오서에 따르면 노숙은 체구가 사내답고 훌륭하였으며 젊어서부터 대업을 이루기 위한 뜻을 지니고 기략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다. 난세가 이어지자 격검, 기마술, 궁술을 익혔다. 또한 젊은이들을 구제하여 사병을 모았고 사냥을 하고 무술과 병법을 가르쳐 군사 훈련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행동을 보고 가문의 어른들은 "노씨 가문은 대를 거듭하면서 쇠퇴하여졌는데, 이렇듯 기백이 우리들과는 다른 아이가 태어났구나!"라고 말했다.
그는 고향에서 재산이 많은 유력자였다. 주유가 거소현의 장이었을 때, 일부러 노숙을 방문해 자금과 군량미 지원을 요청하자 노숙은 각각 쌀이 3000곡씩 있는 집의 2개의 창고 중 한쪽 창고를 개방하여 전부 주었다. 한 번에 자신이 갖고 있던 쌀의 50%를 증여한 것으로 이러한 일화는 훗날 '친구에게 분연히 돈을 빌려준다.'라는 뜻을 가진 지균상증(指囷相贈)이라는 사자성어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주유는 노숙의 비범함을 안 뒤 이를 계기로 친한 친구가 되었다.
노숙의 명성이 높아지자, 원술의 요청으로부터 그의 부하가 되어, 동성현의 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노숙은 원술은 기강이 없고 함께 큰 일을 하기엔 마땅치 않다고 여겨 그로부터 도망치기로 한다.
노숙은 중원이 혼란하다며 일족을 설득하여 안전한 강동으로 이사한다. 남녀 삼백 여명이 무리를 이루어 이동하는데 주의 관청에서 기마 무사들이 쫓아오자 노숙이 그들에게 말한다.

경들은 장부이니 천하의 정세를 이해할 수 있을 터이다. 오늘 날, 천하에는 병란이 일어났으니, 공적이 있더라도 이를 포상 받지 못하고, 추적하더라도 처벌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찌 우리를 쫓는 것인가!

노숙이 방패를 세워 놓고 활을 쏘자 화살이 전부 방패를 관통했다. 기마 무사들은 노숙의 언변에 감동도 했고 노숙의 무예를 보자 포기하고 돌아갔다.
노숙은 남쪽 거소현까지 가서 주유에게 의탁했고 이윽고 주유와 함께 장강을 건너 곡아(曲阿)에 머물르며 손책을 만나니 손책도 그를 훌륭한 인물이라 여겼다. 그런데 자신의 할머니가 사망하자, 노숙은 다시 고향인 동성현으로 돌아와 할머니를 안장시켰다.

1.2. 손권에게 임관


유엽 역시 노숙과 친구였는데 거소(소호)에 웅거하여 1만의 병사를 모으고 있다는 정보(鄭寶)라는 사람을 섬기자고 권유한다.[2] 노숙은 유엽에게 동의했고 곡아로 돌아왔다. 마침 주유가 노숙의 어머니를 오군에 이주시켜 놓았는데 당시 손책이 죽어 손권이 뒤를 이은 상황이었다. 노숙은 사정을 주유에게 설명하니, 주유는 복파장군 마원의 말을 인용하여 신하가 주인을 선택할 때라며 손권의 후계자로서의 자질과 강남(江南)의 천운의 존재를 들며 거꾸로 손권을 섬기라고 노숙을 설득하였다.
주유에게 설득당하여 유엽의 요청을 씹은(?) 노숙은 북쪽으로 가는 것을 단념하고 주유의 추천을 받아 손권을 처음 알현한다. 손권은 즉시 노숙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하고 매우 기뻐했다. 다른 손님들이 돌아가자 노숙도 인사하고 나가려고 했는데 손권이 노숙만을 데리고 돌아와 앉아서 술을 마시며 노숙에게 어떻게 나를 보좌할 것이냐고 묻는다. 노숙은 '조조라는 항우가 있기 때문에 손권은 제환공이나 진문공이 될 수 없다.'며 우선은 가만히 정세를 살피다가 북방의 소란을 틈타 황조와 유표를 쳐서 장강 유역(강동과 형주)을 차지해 제왕을 칭하고 천하통일을 꾀하는 한고조의 사업을 하라고 한다. 이것이 노숙의 천하이분지계 초기 구상인데 갓 계승하여 위태로운 손권에게 황제가 되라는 제안을 한 것이다. 손권은 한왕실을 보좌하기만을 원한다면서 이를 합당하지 않다고 물리쳤지만, 내심 기뻐했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중신인 장소는 노숙이 불손하고 나이가 어려 임용할 수 없다며 자주 비난했다. 그러나 손권은 개의치 않고 점점 더 노숙을 존중하고 후대하였기 때문에 노숙의 모친은 손권이 하사한 옷과 휘장, 생필품 덕분에 과거처럼 부유해졌다.

1.3. 적벽대전


노숙은 손권 진영의 대표적인 친유비파였다. 삼국지연의에서도 정사와 같이 그가 먼저 유비 진영에 가서 동맹을 맺자고 제안[3]하고 제갈량이 이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정사에선 더 적극적으로 아예 유표 사후 형세를 여러 가지로 분석하고 조문을 핑계로[4] 유비가 조조에게 격파된 장판까지 가서 동맹을 논했다.[5] 사실상 유표가 죽을 때부터 빠르게 손을 써 유비와 손을 잡은 것도 그의 공로. 연의에선 손권과 주유를 설득해 전쟁을 일으킨 것이 제갈량의 공로로 되어 있지만 실제론 제갈량, 노숙, 주유 이 삼인방이 동시에 손권을 설득했고 어쨌든 결정적으로 모두를 납득시킨 건 오나라의 군권을 가진 주유였다.
형주는 유기, 유종 두 파벌로 나뉘어 있었는데 형주자사 유표가 사망한다. 노숙은 손권에게 앞서 말했던 천하이분지계에 대해서 자세한 전략을 말한다.
  • 강동과 인접한 형주는 강과 산, 견고한 성이 방어에 좋고 평야, 관리, 백성이 풍부해서 제왕의 자본으로 얻어야한다.
  • 유표가 죽은 상황에서 유표의 두 아들에 따라 두 파벌로 갈린 유표군은 대립 중이다. 천하의 영웅 유비가 유표에게 의탁했지만 유표는 유비의 재능을 밉게 봐서 중용하지 않았다.
  • 만약 유비가 유종, 유기와 화합, 협력하면 우리는 그들과 결맹해야하고, 만약 그들의 사이가 나빠지면 새롭게 계획하자.
  • 내가 조문 사절로 가서 형주의 군실권자들을 위로하고 유비로 하여금 유표의 부하들을 설득시켜 모두 결탁해 조조에게 대항하자. 유비는 반드시 기뻐하며 따를 것이다.
노숙은 이 결맹이 만일 성공하면 천하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니 조조가 기회를 잡기 전에 지금 즉시 가야한다고 재촉했다.
손권은 노숙을 사자로 보냈으나, 노숙은 하구(夏口)까지 온 곳에서 이미 조조가 형주를 정벌할 군을 일으킨 것을 알게되자 즉각 남군(南郡)으로 급행했다.[6] 노숙이 남군까지 왔을 때, 유표의 아들 유종이 이미 조조에게 항복했고 유비는 두려워 강하(江夏)로 도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노숙은 당양의 장판파까지 가서 유비와 대면한다.
노숙은 강동이 강대하고 견고하다며 손권의 의향을 전하고 유비와 동맹을 맺어 조조와 대치할 것을 진언했고 유비는 크게 기뻐했다. 또한 유비와 동행한 제갈량에게 자신이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의 친구임을 밝히며 친교를 맺었다. 유비가 하구에 이르자 제갈량은 사자를 자청했고 유비는 제갈량을 사자로 삼아 노숙에게 동행시켜 손권에게 보낸다.
노숙은 제갈량과 동행하여 손권에게 귀환한다. 우선 제갈량이 일부러 손권을 도발해 손권의 마음을 격동시킨 이후 강노지말의 고사를 들어 실은 조조군이 별것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조조를 물리치면 형주와 오의 땅이 정족의 형세를 이루게 된다는 말로 손권의 전의를 돋구었다.[7] 이후 손권은 조조가 강동으로 침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어 장수들과 상의를 했는데 이미 항전으로 결정된 손권의 마음과 달리 모두 조조에게 항복하자고만 한다. 노숙은 혼자 침묵하고 있다가 손권이 옷을 갈아입으러 뒷간으로 가자 처마 아래까지 쫓아 갔다. 노숙의 마음을 눈치챈 손권은 노숙의 손을 잡고 생각을 물었더니, 노숙은 손권은 자신과 달리 조조에게 항복해도 몸 둘 곳이 없다고 말하고 항복론에는 손권에게 이익이 남지 않음을 논하였다. 손권은 사실은 항복론에 실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털어놓고 노숙의 존재를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 칭하게 된다.[8][9]
주유는 사자로 파양에 있었으나, 노숙은 손권에게 진언하여 주유를 불러들이도록 권하였다.[10] 파양에서 귀환한 주유도 항전을 주장했고 마침내 주유의 의견을 통해 오나라의 의중은 전쟁으로 결정난다. 주유가 정사에서 했던 말은 연의에서 쓰인 대사와 거의 동일하다. 어쨌거나 손권은 주유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고 노숙을 찬군교위(贊軍校尉)로 임명하여 보좌하도록 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유가 제갈량을 죽이려 들 때마다 힘써 말리며 왠지 주유와 제갈량의 머리 싸움 사이에 끼인 다소 어리숙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는 연의의 허구로 노숙은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단 본격적인 나관중의 제갈량 원맨쇼가 시작되기 전에는 대부분의 행적이 정사와 부합된다. 즉 노숙의 경우 제갈량이 동오에 오고 적벽대전이 시작되면서 갑자기 캐릭터가 어수룩해지는 셈인데 이걸 교묘하게 은근히 캐릭터성을 조금식 바꿔서 처음엔 정사행적대로 말하는데도 나중가면 원래부터 어리숙한 인물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
이후 적벽의 대승으로 손권은 기뻐하며 장수들에게 노숙을 영접하게 했다. 노숙이 궁전으로 돌아와 손권을 알현하려고 하자 손권은 일어나 그에게 예의를 다하며 "장졸과 군신들 앞에서 그대의 손을 잡고 직접 말에서 내리도록 하면 그대의 공에 보답할 수 있을까?"라고 묻자 "아닙니다. 전하께서 천하를 얻으시고 천자의 신분으로 절 맞이하여 주신다면 그때 만족하겠습니다."라고 알랑방귀를 뀌며(?) 함께 웃는다.
유비는 형주 남부의 4군인 무릉, 장사, 계양, 영릉을 조조로부터 빼앗았고, 공안(公安)도 손에 넣었다. 후에 유비가 경구로 와서 손권을 보고, 형주를 관할하기를 구했을 때 주유와 여범은 손권에게 유비를 묶어두라고 권한다. 그러나 오직 노숙만이 유비에게 땅을 빌려주어 함께 조조에게 대항하도록 손권에게 권유했다. 손권은 노숙의 말을 들어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다. 위나라에도 손권이 유비에게 형주를 빌려줬다는 소식이 들어가는데 이런 엄청난 사실을 들은 조조는 편지를 쓰고 있다가 들고 있던 붓을 떨어트리기까지 했다.[11]
서천의 유장의 기강이 쇠퇴해지자 주유와 감녕은 손권에게 촉을 취하도록 권했다. 손권은 유비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유비는 속으론 자신이 그 땅을 차지하려고 엿보고 있어서 거짓으로 보고하여''' 서천 정벌을 반대한다.

"저와 유장은 똑같이 한종실이며, 선조의 영령에 기대어 한왕조를 보좌하기를 희망했습니다. 지금 유장은 당신들에게 죄를 지었고, 저는 매우 두렵기 때문에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관대하게 용서 해주기를 원할 뿐입니다. 만일 저의 청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저는 관직을 버리고 산림 속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주유는 손유와 함께 서천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지만 병에 걸려 실행하지 못한다.

1.4. 익양대치


병으로 사망한 주유는 유언으로 노숙을 후계자로 지명한다. 손권은 노숙을 분무교위로 임명하고 주유의 병사 4천 명과 영지로 4현을 노숙에게 줬다. 정보(程普)가 남군태수로 임명되는 한편, 노숙은 강릉(江陵)에 주둔했으나 이윽고 육구로 주둔지를 옮겼다.
여몽전에 따르면 노숙이 육구로 진지를 옮기는 도중에 평소 어리석다고 경시하던 여몽을 방문했는데 이전과 다르게 똑똑해진 여몽에게 거꾸로 계략 지도를 받게 되어 감탄했다. 그리곤 여몽의 어머니에게 절하고 우호를 맺었다. 지방에서도 노숙의 훌륭한 정치로 병사는 1만 명 정도로 증강되었고 노숙은 한창태수, 편장군이 되었다. 214년엔 손권을 따라 환성 전투에도 참전했고 횡강장군이 되었다.
이후 유비가 유장의 익주를 침공하고 형주에는 관우를 남겨 지키게 했다. 종친이라서 공격하지 못한다는 이전의 말과 다르니 손권은 빡쳐서 말한다.

교활한 늙은이가 감히 속이다니.

형주에선 노숙과 관우가 경계를 인접하게 되자 경계 지역에서 종종 분쟁이 일어났는데 노숙은 항상 우호적으로 분쟁을 가라 앉혔다.
여대전에 따르면 안성현의 장 오탕과 중랑장 원룡이 관우와 결탁해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손권이 파견한 노숙이 유현의 오탕을 격파하고 여대는 예릉의 원룡을 참수시켜 사건 종료.
유비가 익주를 얻자 손권은 제갈근을 사자로 보내 형주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유비는 거절했다. 그러자 손권은 여몽을 파견하여 무력으로 삼군을 빼앗게 했고 장사와 계양이 함락된다. 유비는 이 소식을 듣자 직접 공안으로 돌아왔고 관우를 익양에 파견한다. 노숙군은 관우군과 대치하는데 감녕전에 따르면 노숙은 감녕의 건의를 받아들여 감녕으로 하여금 관우가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한다.
노숙은 관우와 일대일로 대면을 요구하였다. 관우도 그에 따라 각각의 병마를 100리 떨어지도록 하고 서로 호신용 검 한 자루씩만 지니고 회담에 임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칼 하나만 가지고 회장에 참석한다고 하여 '''단도부회'''라는 대장부의 패기(?)를 나타내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오서에 따르면 노숙의 부하들이 노숙에게 위험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만류했지만 노숙은 유비가 나라의 일을 맡았으면서 시비도 제대로 못가렸는데 어찌 관우가 이 명령을 어기겠냐며, 서로 뱃속의 생각을 드러내야 한다고 말하면서 '''무시한다.''' 노숙의 대범함을 엿볼 수 있는 일화.
관우가 "오림의 전역에서는 좌장군(유비)은 군중에 몸을 두시고, 주무실 때에도 갑주를 풀지 않으셨으며, 협력하여 위를 격파하였던 것이오. 어찌 우리가 고생한 것을 무로 돌려 한 뼘의 땅이라도 빼앗길 수 있겠으며, 족하는 무슨 연유로 토지를 빼앗고자 하는 것이오?"라고 말하자 노숙이 다음과 같은 사항을 말했고 관우는 이에 대답하지 못했다..
  • A: 과거 장판파에서 유비를 봤는데 군사는 적고 전의와 기세도 없고 도망쳐 숨을 생각 밖에 없었으니 형주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 B: 유비를 불쌍히 여긴 손권께서 몸을 둘 곳조차 없는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토지나 휘하의 힘을 보태 주시기를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며, 그가 세력을 돌볼 수 있도록 비호를 더하여 그 곤란을 구제하셨다. 헌데도 예주는 사사로운 마음으로 은의에 등을 돌리고 호의를 저버렸다. 지금 이미 서쪽의 익주를 스스로 몸을 기댈 곳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형주의 땅까지 차지하려 하다니. 이는 범부라 하더라도 참을 수 없는 행위로, 어찌 군주란 자가 할 바이겠소!
  • C: 탐욕에 따라 의를 버리는 것은 재난을 불러오는데 관우 그대는 중임을 맡았음에도 도리와 의로움을 지키지 못하고도 분수도 모른 체로 연약한 군세로 싸우려하니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관우는 이에 답하지 못했다. 노숙은 관우를 여러 차례 질책하며 말했다.
  • D: 우리 군주가 본래 성의껏 그대들에게 토지를 빌려준 것은 그대들이 전쟁에서 패하여 멀리서 왔고, 의지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요. 오늘날, 벌써 익주를 얻었으면서 형주를 봉환하려는 뜻도 없소. 우리들은 단지 그대들이 세군만 반환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도, 명에 따르지 않고 있소.
노숙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나름대로 반박한다고 자리에 앉아있던 한 이름이 없는 장수[12]가 "천하는 덕있는 사람의 땅인데 어찌 영원히 소유하려 하시오!"라고 말했다. 노숙이 절절하게 큰 소리로 질타하니 관우는 "이것은 국가의 일인데, 이 사람이 어찌 알겠소!"라며 눈빛으로 이 사람을 쫓아버린다. 회의가 파탄 난 후 조조가 장로의 한중을 얻자 둘은 어쩔 수 없이 화친하고 상수로 형주를 분할한다. 결국 유비는 강하, 장사, 계양 형주 3군을 오에 할양해주고 남군, 무릉, 영릉을 완전히 소유하에 두었다.
다만 노숙도 결국엔 관우가 처음 말한 논리인 '우리도 형주에서 같이 위군이랑 싸웠는데 형주에 지분이 있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가 피땀 흘려 얻은 땅(특히 유비네가 먹은 형남 4군)은 왜 침범한 것인데?'에 대해서 명쾌하고 조리있는 답변을 하지 않고 '그냥 니들은 처음부터 우리한테 별거 아니었네','니들은 무조건 우리한테 은의를 입었네'','관우 너는 그냥 불의한 인간이네,' '형주는 다 우리 건데 3군 정도 달라고 했는데 니들이 안줬잖아!' 정도로 논점일탈로 일관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연의와 달리 유비군도 동등한 동맹으로 조조랑 싸웠는데 나중가면 노숙의 논리는 관우의 개인 인성까지 공격하는 인신공격 수준에 아무리 그래도 동맹인 유비 측의 공을 너무 심하게 깎아내리는 게 아니냐는 것. 물론 유비군도 남군을 바로 안 돌려준 것이나 익주 관련으로 신의 드립 치면서 막은 건 비판의 대상이지만 여기서 노숙의 논리는 그런 걸 비판하는 게 아니다. 그저 '형주는 전부 오나라 땅'이라는 식으로 유비 측을 고압적으로 몰아세웠다. 애당초 적벽에서 이겼으니 형남 4군을 유비네가 먹은 것이라는 논리에 기반한 것인데 정작 적벽에서 이긴 것의 유비 측 지분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13]
당장 적벽대전, 남군공방전 당시 유비의 관직은 '''영예주목 좌장군'''으로 심지어 오의 군주인 손권은 당시에 기껏해야 잡호장군 수준인 토로장군이었다. 즉, 당시 진격하던 손유연합군에서 유비는 명목상으로는 최고 위치를 차지하는 총사나 다름이 없고 주유를 비롯한 손권측의 어떤 장수들보다 명목상 절대 우위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거느리고 있던 군세도 손권측이 간신히 동원한 군세에 그리 뒤지지 않고 이미 중원에서도 명성이 널리 알려진 관우와 장비 같은 명장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랬으니 유비의 발언권이나 공적 우선권이 결코 작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 까놓고 유비군과 왜 먼저 동맹하자고 장판파에서 나선곳도 오나라 측이고[14] 유비는 유기가 있는 하구로 이동하면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버린 것도 아니었다.[15] 관우 말대로 유비도 적벽대전이랑 남군공방전에서 열심히 싸운거 맞다.[16] 그리고 장판에서 날려먹은 거 관우가 보존한 병력과 패잔병 수습에 추가로 유기가 보충해 줬기에 제갈량은 자신있게 손권에게 유비군은 2만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즉, 유비군은 적벽과 남군 공방전에서 거의 오나라와 비슷한 수준의 병력이 있었고 이걸 오나라가 보충해 준 것도 아니다. 은의를 베풀었다는데 서로 관직 상표해주고 손권이 이 덕에 거기장군 영 서주목 된 것을 생각하면 오나라가 무조건 시혜만 주었다고 말하는 건 의아스럽다. 손부인이 심각한 수준으로 깽판 놓은것 역시 오나라가 무조건 시혜를 줬다고 볼 순 없는 부분이고...그리고 결과적으로 원래 유비 소유였던 곳을 오나라에 주고 대여했던 남군을 유비네가 받아갔는데 말이야 바른 말이지 오나라도 실은 말로만 형주 전체가 우리꺼라고 해놓고 실제로는 자기네가 익양대치 당시 빼앗은 땅이 실제로는 유비네 소유 맞다는 거 인정하고 있다는 소리다.
애당초 손권은 적벽 이전엔 하찮은 지방호족의 우두머리에 불과했으며 유비와 동맹을 맺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좌장군(左將軍) 예주목(豫州牧)이라는 거물급 지위를 가지고 있는 유비는 헌제의 밀서를 명분으로 하여, 조조가 가진 '협천자'의 명분을 일전시켜 조조를 '조정을 장악하고 황제를 농락하는 역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손권은 유비와 동맹하고 명분을 함께하여 적벽대전에서 손오 세력의 구심점을 잡는 데 성공하며 적벽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후 유비가 상표하는 형식으로, 손권은 서주자사(徐州刺史) 행 거기장군(行 車騎将軍)의 지위를 칭함으로서 손오 정권은 이전처럼 동등한 지위의 태수들을 손가의 사적인 인간 관계로 다스리는 모호한 형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런 얘기는 쏙 빼고 유비만 시혜라는 게 거짓이라는 건 노숙 본인이 더 잘 알았을 것이다. 실상 속마음을 다 터놓는 단도부회를 통해 자기 권위로 찍어내릴 속셈에 불과했던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손권의 관솔을 내쫒은 것은 동일하지만 익양대치 사건 자체가 아예 등장하질 않는다. 단도회는 형주를 탈환하고 관우에 이에 응하지 않을 시 관우를 죽이려는 노숙의 책략으로 각색된다. 실제 정사에서도 단도회 자체는 일단 노숙 쪽이 먼저 제의하고 관우가 참여한 게 맞고 나눈 대화 자체도 의외로 연의에서도 비슷하다. 관우가 "오림의 전쟁은 좌장군께서 친히 시석을 무릅쓰시고 협력하여 적병을 깨부수었거늘 어찌 헛수고만 하고 한 척의 땅도 가질 수 없겠소? 이제 족하께서 다시 땅을 찾으러 오신 것이오?"라고 하자 노숙이 그에 대해서 정사와 비슷하게 "우리 주군께서 장판에서 격파된 유황숙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것이 아닙니까? 어찌 그런식으로 말씀하십니까?"이라는 논리로 반박하자 관우가 화답하지 못하는 사이 주창(정사에선 이름없는 장수)이 정사와 같은 논리로 반박하자 관우가 호통을 쳐 물러나게 하는 것까지는 거의 같다.
다만 여기부터 나관중이 관우를 띄워주고 노숙을 안습하게 만드는 각색이 나오는데 원래 노숙이 연회장에 복병을 숨겨두었는데 회담 도중 끼어든 주창을 관우가 참견한다며 쫓아버리자 주창은 기회를 틈 타 연회장을 빠져나와 미리 대기시킨 관평 등에게 연락하여 배를 접응토록 한다. 관우는 술주정을 빙자, 노숙을 붙잡고 인질극[17]으로 빠져나오고 복병들은 노숙이 다칠까봐 감히 움직이지 못하여 계략은 실패하는데 이에 노숙과 여몽은 관우를 칠 것을 결의하고 손권 역시 격노하여 관우를 치려다가 조조의 침공으로 그만둔다. 이후 조조가 장로를 처 한중을 점령하자 유비 측이 이를 두려워해 강하, 장사, 계양을 양도한다는 큰 줄기 자체는 정사와 같다.
연의 한정으로 노숙의 논리가 더 이치에 맞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연의에서 유비군은 적벽, 남군공방전에서 한 거 별로 없고 순전히 날로 먹었기 때문에 연의에서 관우의 논리는 그냥 말도 안 되는 개소리에 가깝다. 당장 연의에선 유비가 오림은커녕 강하 번구에서 제갈량이랑 신선놀음 하고 있었고 실제 오림에 있던 건 조운인데 그냥 관우가 완전 헛소리한 것. 아마도 정사에 있는 말을 그대로 옮기다보니까 이런 오류가 생겨 관우가 하는 말이 이상해진 듯하다, 이러니 연의를 읽는 오나라팬들 입장에선 관우가 말도 안되는 궤변을 늘어놓는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정사에선 주유와 함께 오림에서 싸운건 유비 본인이 맞고 몇몇 사서에선 유비가 주공이라는 묘사도 나오며 남군 공방전 당시에도 유관장 모두가 치열하게 싸웠으니 형주에는 우리한테도 지분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우의 항변이나 조익의 지적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거기다가 애당초 오나라군이 점령한 3군은 유비가 자력으로 먹은 땅이지 오나라가 빌려줬다는 남군이랑 상관이 없는 땅이다.

1.5. 죽음


오서에 따르면 노숙의 사람됨은 근엄하여 겉을 꾸미지 않았고, 공사에 걸쳐서 검약에 힘썼고, 저속한 취미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군세를 통솔하는 때에도 질서있고 금령은 반드시 시행되게 하였고, 진중에서도 서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또한 담론에 뛰어났고, 문장 솜씨도 뛰어났으며, 사려는 원대하여 다른 이의 배나 되는 총명함을 갖고 있었다. 주유 이후의 세대에서는 노숙이 제일가는 인물이었다.
노숙은 217년에 46세로 사망했다. 손권은 애도하고 장례식도 직접 참가하였다. 또 제갈량 역시 그의 죽음을 사흘 동안이나 슬퍼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 한정으로 관로의 예언의 희생양이 되었다 조조좌자에게 농락당해 있을 때 관로가 그의 병을 치료해 주었는데 조조가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동오와 촉한에 대해 점을 쳐 주시오."라고 하자 관로는 점을 치고는 "오나라는 장수 한 명을 잃을 것이며, 촉한에서는 경계를 침범해 올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노숙 사망.''' 물론 이 사망 플래그 이야기는 연의의 허구다.[18]
엄준전에 따르면 손권은 노숙의 후임으로 처음엔 학자인 엄준을 기용할 생각이었으나, 엄준이 학문에 열중한다며 사양해서 여몽을 후임으로 기용했다. 그의 사후 여몽이 군권을 이어받음으로써 과 오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1.6. 사후


손권은 후에 황제가 된 뒤 "옛날 노자경은 일찍이 내가 제위에 오를 것을 말했는데 그는 형세의 변화에 밝았다고 할 수 있소."라고 말하며 노숙은 이 일을 예견하고 있었다고 하며 다시 경의를 표했다.
유명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손권이 어느 날 병에 걸렸는데 무당이 와서 말하길 비단 두건을 쓴 장군 귀신이 나타났기에 물러나라고 소리쳤으나 궁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날 밤 손권은 죽은 노숙의 귀신을 봤는데 무당이 말한 옷차림 그대로였다.
여몽전에 따르면 훗날, 손권은 육손과 대화하던 중에 주유, 노숙, 여몽을 평하며, "주유가 짱임. 근데 주유가 노숙도 보내줬지. 첫째로 제왕 되라고 해서 기뻤어. 둘째로 장소 등이 조조한테 항복하라 하는데 주유 불러서 싸우라 해서 좋았어. 근데 형주 빌려줬잖아? 게다가 관우 이길 방법도 없었으면서 허세부리고. 그렇지만 여몽이가 관우 잡았잖아. 언변은 주유보다 딸려도 형주건은 노숙보다 위임. 그래도 노숙이 행정하거나 애들 다스리는 거 잘 하긴 했어. 군대는 금령이랑 잘 지키고, 백성은 땅에 떨어진 물건도 안 줍고." 정도로 평했다.
여범전에 주석으로 달린 강표전에 따르면 손권이 황제가 된 이후 연회에서 엄준에게 자신이 이전에 노숙을 등우에 비교하고 여범을 오한에 견주었던 것에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엄준이 자리에서 물러나며 말했다.

신(臣)은 아직 그 취지를 이해할 수 없는데, 노숙과 여범이 총애를 받는 것은 두터우며, 실질 이상의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손권은 "등우는 광무제에게 의 대업을 회복시키도록 부하 중에서 처음으로 권해서 제왕의 뜻이 없던 광무제가 황제까지 되었다. 노숙은 능력도 있었던 데다가 노숙이 맨 처음 말했던 나에게 제왕이 되라했던 것이 이루어져 내가 황제까지 되었으니 등우랑 닮은 것이다. 그리고 여범은 비록 사치스러웠지만 충성스럽고 곧고 형(손책) 휘하에서 열심히 일했으니 오한과 견준 것이다. 그들을 편애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변호하자 엄준이 알겠다고 따른다.

1.7. 평가


지방의 유력 호족들의 힘이 강하여 중앙 정부가 힘을 쓰지 못하고 정책의 방향도 수성을 빙자한 현 상태 유지에 전력했던 오나라에서 주유와 함께 국가의 장기적 전략과 비전을 제시한 마지막 인재라 할 수 있다.[19] 노숙 사후 오나라는 촉과의 동맹을 깨고 형주를 탈취하는 승부수를 던졌으나 강대국을 등 뒤에 두고 소국끼리 소모전을 벌이는 자충수로 이어지게 된다. 오나라는 촉한과 관계과 회복된 이후에도 이전과 동일하게 합비도 넘지 못했고 촉한에게 탈취한 형주를 이용해 북상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는 큰 나라를 상대하기 위해선 작은 두 나라가 힘을 합쳐야 한다는 노숙의 생각을 뒷받침한다고 할만하다.[20]
노숙은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었고 유비와 강동의 우호를 주도하여 늘 우위를 점했으며 관우조차 어찌할 수 없는 권위와 강동의 강경파를 제어할 수 있는 깡을 가지고 있었다. 무리수가 많이 따르지만 관우의 번성 공략 당시 노숙이 살아 있어서 공격의 방향을 촉한이 아니라 위로 향했다면 아마도 역사의 흐름도 많이 변했을 거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21]
정사에서 관우가 보였던 행보를 생각해보자면, 이미 노숙 시기에 익양대치처럼 전쟁 직전까지 갔던 일도 있었고 관우는 파견된 손권의 관리를 내쫒을 정도로 오나라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손권의 말마따나 노숙은 관우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 방안은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익양대치 때 노숙과 관우의 문답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노숙은 관우를 눌러 유손동맹이 흔들리지 않게 할 정도의 권위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단도회에서 노숙이 든 명분이 사실관계 따져보면 하나도 안맞는 억지임에도 관우가 별 말 없이 숙이고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건 관우가 모략과 거리가 먼 솔직담백한 무인이었던 탓도 있지만 친유비파이자 유손동맹을 주도했고 그간 양측의 관계를 꾸준히 제어해 온 노숙이 가진 권위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 권위로 사실관계 무시하고 관우에게 우위를 점했고 형주를 전부 얻지는 못했지만(사실 전부 달라는건 억지에 불과하니까) 유비 스스로 얻었지 손오는 기여도 한바 없는 강하, 장사, 계양3군을 얻어냈다. 이 정도면 장차 관우의 북벌에 발맞춰 합비로 북진하는 방법으로 유손동맹 파탄 없이 더 큰 물고기를 낚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전쟁으로 양국 국력을 까먹는 일 없이 이끌어나가는 데는 대오 강경파인 관우마저 포용하고 제어하여 갈 수 있었던 능력과 명분이 있던 노숙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익양대치 이후 양국이 상수를 경계로 땅을 나누어 분쟁을 항구적으로 종결하게 한 것도 촉오가 위를 놔두고 싸워선 안 된다는 노숙의 심모원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노숙이 죽자 손유 동맹은 대놓고 오나라를 경계하여 적대적으로 나가는 관우[22] VS 겉으로는 호의를 닦으며 호시탐탐 형주 병탄을 노리는 여몽의 관계[23]로 전개 되었고 결국 두 세력은 커다란 전쟁을 치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득을 본건 조위 뿐이었다.[24] 그렇기에 촉빠와 오빠, 학자들 가릴것 없이 '노숙이 10여 년만 더 살았다면'이라고 한탄하는 이들도 있다. 그의 친구인 제갈근이 240년대까지 살았고 노숙과 뜻을 같이해 그의 사후 촉-오 동맹을 재건한 제갈량도 234년까지는 살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너무 일찍 세상을 뜬 감이 없지 않아 있다.

1.8. 기타


개그 캐릭터가 된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육전은 노숙이 뛰어나다며 노숙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이나 노숙이 도독이 되어 관우와 대치하는 등의 무관의 모습이 조금 나오긴 하지만, 그가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모습은 없는 반면에 촉나라와의 외교와 관련된 일에서 주로 활약하기 때문에 문사(文士)의 이미지로 오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노숙은 군무와 관련된 관직에 종사했었고, 주유 사후 도독이 되어 전군을 통솔한 장군이다. 자신의 무용을 보여주기 위해 활을 쏘아 방패를 관통시켜 추격군들을 물러나게 한 일화도 있는데 여포의 원문사극이 정확도를 과시한 일화라면 노숙이 방패를 관통시킨 것은 용력을 과시하는 일화라 할 수 있다.[25] 사실 여기나온 몇몇 각주나 내용을 보면 정사의 언행이 연의에 꽤 많이 반영되어 있는걸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런 내용들을 보여주고도 연의에선 어리숙한 인물로 보이게 된 것은 계교와 무력으로 작은 이익을 다투지 않고 손해보듯이 대의를 취하는 것을 존중하였던 중국인들의 덕에 대한 관념이 강하게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현대인들 관점에서는 노숙이 어리숙하게 보이지만 되려 그러한 온화하고 고매한 성품 덕분에 과거부터 오나라의 명사 중에서는 상당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을 수 있었다. 실재로 지금까지도 노숙이 다소 어수룩하다고 평을 할지언정 절대로 사람 됨됨이로 비난 받지 않는다.
즉 부자에다가 성품 좋고 활 잘쏘고 외교도 잘하고 더불어 의 '''융중대'''를 세운 대전략가. 중국에서는 노숙의 진언을 '''탑상책'''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침대 위에서의 계책. 노숙이 손권에게 침대맡에서 진언을 했다는 데에서 유래.
[image]
중국 후난성 웨양현(호남성 악양현)에는 노숙의 묘가 남아있는데[26] 묘 높이가 8m에 전체 면적이 약 800여㎡나 된다고 한다. 광서(光緖) 15년에 묘비와 정자가 정비되었으나, 문화대혁명에 의해 파괴되었다. 1986년에 재건되어, 비양에 「오(吳) 한창태수(漢昌太守) 노숙묘(魯肅墓)」라고 기록되있다. 묘에 있는 패방[27]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扶帝燭曹奸(부제촉조간) : 황제를 도와 조조가 간웅임을 밝혔으니,

所見在荀彧上(소견재순욱상) : 그것을 보면 순욱의 모습이 있으며

侍吳亲漢胄(시오친한주) : 오를 받들어 한의 혈통과 친하게 지내니,

此心與武侯同(차심여무후동) : 이 마음은 무후(제갈량)와 같도다.

아마도 관도전에서 원소와 싸우는 것을 돕던 순욱의 모습과 촉오 간의 동맹을 위해 여러모로 힘쓰던 제갈량의 모습을 노숙에게 비유한 듯. 괜히 노숙이 죽었을 때 촉과 오 모두가 슬퍼하고, 제갈량이 조의를 표한 게 아니다.

1.9. 미디어 믹스




2. 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1의 아들)


魯淑
(217?/218? ~ 274년)
노숙의 아들로 유복자.
아버지와 한글 이름이 같은 데다가 훨씬 능력이 출중한 아버지에 이름이 가려진 케이스로 열전 자체도 아버지인 노자경의 열전에 딸린 형식으로 아주 짧게 남아있다.
노숙이 장성하면서 유수도독 장승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후계자로 주목받았고 장승이 그를 훗날 당연히 이 곳으로 와서 유수독이 될 거라고 했다. 유수독은 아니지만 도독으로 임명되었는데, 영안 연간(258 ~ 264년)에 소무장군 도정후 무창독에 임명되었다.
건형 연간(269 ~ 271년)에는 부절을 받아 하구독으로 승진했으며, 임지에서는 항상 엄정한 통치를 실시했고 지략과 재간이 있었다.
진나라의 공격 때문에 오나라에서 진나라로 투항하는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273년에 설영과 함께 군사 10만이라 칭하고 서진으로 출병했는데, 그때 병사들 다수가 휴가를 나갔기 때문에 왕혼에게는 그 당시에는 일족의 병사들 밖에 없는 상태였지만 오군의 허를 찌르면서 익양 전투에서 왕혼에게 격파되었다.
274년에 죽자 아들 노목이 후사를 잇고 병마를 통솔했다.

2.1. 미디어 믹스


[image]
삼국지 12, 13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역대 시리즈 대대로 등장한다. 아버지의 마이너 버전. 아버지의 무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를 10~15 정도 칼질하면 아들 노숙의 능력치가 된다. 보통 그 유명한 노숙이 등용된 줄 알고 설랬다가 능력치를 보고 실망한다. 하지만 전체 시리즈에서 노숙은 적당히 굴릴 수는 있을 정도의 능력치로 나온다. 삼국지 9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74/52/71/78의 아버지의 마이너 능력치. 무력 제외 능력치가 90대 였던 아버지에 비해 무력 제외 능력치가 70대. 분투, 연사, 누선, 조영, 혼란을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70/55/76/77/73에 명사 특기를 가지고 있다. 전체적으로 특기는 농업, 기술, 보수, 일제, 고무, 저지, 혼란, 명사. 총 8개다. 후기 장수 중에선 그래도 쏠쏠한 편. 그런데 왠지 모르게 208년생이다.
삼국지 11에서는 출생지를 임회군 동성현이라 기록했다. 특기는 조타로 능력치 자체는 무력이 평범한 것을 빼고 대부분의 능력치는 준수한 편이다.
삼국지 12에서는 능력치가 더 올라가 모든 능력치가 꽤나 괜찮고 특기도 꽤나 많이 가지고 있으며, 군사 특기도 있어 비책도 쓸 수 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지 않은 병기나 공성 특기도 가지고 있고, 전법도 전군원사로 쓸만하다. 즉, 아버지의 마이너 버전. 일러스트가 무관복에서 문관복으로 갑자기 등장했고 자세히 보면 오른손에는 붓을 든 채 병서를 쓰고 왼손에는 죽간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나와 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무지정 순으로 73/53/74/76. 특기는 상업 5, 농업 2, 수영 3. 전수특기는 상업이며 전법은 화염계.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70, 무력 53, 지력 74, 정치 77, 매력 71로 전작에 비해 정치력이 1 상승한 대신 통솔력이 3 하락했다. 개성은 수전, 능리, 부호, 주의는 왕도, 정책은 묵수연구 Lv 3, 진형은 안행, 정란, 전법은 업화, 정란, 구축, 친애무장은 장승,[28] 혐오무장은 없다.

[1] 다만 아무래도 그 공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일어나지 않게 만들었음을 주장할 때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정황뿐인데, 이는 일어난 일을 수습한 결과물에 비하면 변동성이 크고 입증하기도 어렵다.[2] 정작 유엽은 훗날 이 정보를 베어 죽인다.[3] 노숙은 다름아닌 조조가 벌였던 대학살 현장인 '''서주'''태생이라 누구보다도 극렬하게 조조에게 대항하자고 했을 가능성이 크다.[4] 애초에 유표 시절에 원술의 부탁 때문에 손견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그 때문에 손책이 요절했을 때도 문상객을 보내지 않았다. 제갈량은 이 점을 지적하며 '대대로 원수관계인데 조문은 무슨, 탐색이 뻔하다'라며 꿰뚫어본다.[5] 의외로 이 대목에서 정사와 연의를 비교하면 노숙이 실제 역사상 장판으로 가는 거 빼곤 정사와 연의가 비슷한 부분이 많다. 노숙이 제갈량에게 형과 친구라고 말하는 부분이나 유비가 오거(연의에선 오신)한테 의탁하려 한다고 말하는 부분도 비슷하다. 왜 오나라와 동맹을 맺어야 하는가에 대해 노숙이 설파하는 논리도 정사 내용과 거의 비슷한편. 물론 제갈량이 손오로 건너간 이후로는 거의 제갈량 원맨쇼.[6] 연의에서는 이미 유비가 패한 이후에 사자로 가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노숙이 연의에서는 강하에서 유비 일행을 만나는 게 그런 연유에서이다.[7] 재미있는 건 제갈량이 이때 이미 천하삼분지계를 손권에게 말했다는 것인데 노숙 역시 오나라가 형주의 인심을 얻지 못해 소유하긴 어럽다고 보고 이후에 유비에게 형주 남군땅을 대여해서 조조와 맞서게 하자는 말을 손권에게 한다. 여러모로 대전략 부분에서 생각이 같았던 노숙과 제갈량 두 사람의 말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셈.[8] 참고로 위서와 구주춘추에는 노숙이 손권에게 일부러 항복을 권하며 도발했고 손권이 자신을 베려고 했다는 것을 갈파했다고 하는 기록도 있지만 배송지는 이를 부정했다. 아마도 제갈량이 손권을 도발한 기록하고 헷갈린 듯.[9] 이것도 정사와 연의랑 거의 비슷한 대목이다. 단 연의에선 노숙이 제갈량보다 먼저 말하는 것으로 설정되었다. 심지어 노숙의 존재를 하늘이 내려준 거라고 손권이 응대하는 부분까지 그대로 따왔다.[10] 삼국지연의에서는 오국태가 언니의 말을 손권에게 상기시켜서 주유를 부르게 한다.[11] 삼국지연의에서 정욱은 유비를 형주에 놓고 조조를 막게 하는 것뿐이지 실제로 유비와 손권 사이가 별로 안 좋다는 것을 간파해내지만 연의의 허구.[12] 삼국지연의에서는 주창이 말한다.[13] 거기에 유비가 그냥 그 땅을 아예 안 상여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오나라도 언제까지 돌려주라고 시일을 정해놓은 것도 아니다.[14] 그것도 그 당시에 유비와의 동맹이 최선의 방책이며 그가 영웅이라고 손권에게 진언했던 자가 바로 노숙이다, 그땐 그래놓고 이제와서는 장판에서 니들은 별거 아니었다고 깍아내리니 모순이 아닌가? 거기다 노숙은 유비와 유기의 지배하에 있는 강하 5현과 하구, 유비가 주둔한 번구에까지 와서 유비군 재건 과정을 실제로 보기까지 했다.[15] 그리고 손권 본인도 적벽 당시 '유예주가 아니면 조조를 당해낼 수 없소.'라고 스스로 인정했었는데 이제와서는 오나라의 시혜가 아니면 유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깎아내리고 있다.[16] 당장 관우부터가 북쪽에서 악진, 서황, 문빙 등 위나라 최고 장수들 상대로 거의 혼자서 두들겨 맞고 몸빵하면서 이들이 유비와 주유의 남군포위망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북쪽의 길을 끊어놓는 역할이었다. 결국 예주 쪽에서 온 여남태수 이통이 포위망으로 진입하긴 했지만 그가 했던 건 조인의 구출이지 남군 전체의 포위망을 풀어 남군을 구원하는 역할이 아니었다.[17] 상황 자체가 일부러 노숙에게 접근해서 술주정을 빙자해 끌고 나오는데 관우가 대놓고 큰 칼의 손잡이를 손에 쥐고 노숙을 해할 거 같으니 여몽과 감녕이 나서지 못했다.[18] 관로는 이 당시 어린아이였다.[19] 후대의 제갈각이 있으나 뛰어난 능력에 비해 그릇이 너무 작아 몰락한다.[20] 결국 노숙이 추구했던 양국의 동시 압박은 석정 전투가 발생한 228년부터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이 있었던 234년 무렵에나 제대로 기능했다. 그러나 여러 방면으로 활발하게 잘 찔러보다가 하필 234년에 오가 도로 합비를 공격하다 막히고 촉은 제갈량이 병사하면서 실패.[21] 한중 공방전에서의 패배로 조조는 군사적 위신과 입지가 꺾여나가 내부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란 때문에 근심했으며, 관우가 번성을 칠 때 구원군으로 보낸 우금과 방덕의 7군이 수몰되고 관우에 호응한 반란이 대대적으로 일어나자 늘그막에 냉철함을 상실한 조조는 서황, 은서, 주개 등도 모자라 굳이 빼올 필요 없었던 합비의 장료까지 빼버렸다.(그리고 조조 본인은 불과 1년 후에 사망할 정도로 나이와 건강 모두 위태로웠다.) 위에 호응한 손권이 거길 칠 마음이 없어서 그렇지 손권 생전에 합비방어선이 맞이한 가장 큰 위기였다. 게다가 손권이 형남을 빼앗고 합비에 미련을 버렸냐면 그것도 아님을 몇 차례 보여줘서 위는 아예 합비신성까지 만들어서 오를 맞이할 준비까지 했다.[22] 우금과 방덕이 이끄는 7군을 수몰시키고 포로를 다수 잡아들이자 양 국의 경계에 있던 상관의 쌀을 마음대로 가져가먹었다.[23] 아예 뒤통수 칠 목적으로 내부 배신자를 만들었다.[24] 조비가 그 이득을 살리지 못할 만큼 군사적 능력이 무능했기에 망정이지 조비가 아버지의 군재 절반만 이어받았으면 거기서 이미 위가 촉과 오를 모조리 집어삼켰을 상황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전쟁의 진정한 승자는 이 사람이었다.[25] 화살로 방패를 꿰뚫는 건 웬만한 장력의 활로는 힘들며 그만큼 장력이 강한 강궁을 당겼다는 말이니 그 정도로 노숙의 용력이 굉장했음을 보여준다. 후임인 여몽과 비견할 수 있겠다.[26] 이 웨양현에는 노숙묘 외에도 태사자묘라든지 여러 삼국지 유적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나 홍위병들의 손에서 살아남았는지는 모른다.[27] 뛰어난 인물을 기리기 위해 묘 앞에 세운 일종의 문짝 없는 문.[28] 장범의 동생인 장승이 아닌 오나라 중신 장소의 아들 장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