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

 



'''呂蒙
여몽
'''
'''작위'''
잔릉후(孱陵侯)
'''최종직위'''
도독(都督) 겸 남군태수(南郡太守)
'''성씨'''
(呂)
'''이름'''
(蒙)
''''''
자명(子明)
'''생몰기간'''
(178년 ~ 219년)
'''고향'''
예주 여남군 부피현(富陂縣)
1. 개요
2. 생애
2.2. 남군 공방전
2.4. 동오의 명장
2.6. 능력 위주의 인사 기용
2.8. 죽음
2.9. 사후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3.2. 부정적 평가
4.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손책, 손권 휘하의 무장. 는 자명(子明). 여남군 부판현 사람.

2. 생애



2.1. 오하아몽


어린 시절 남쪽으로 강을 건너 자형인 등당에게 의지했다. 등당은 손책의 부하 장수가 되어 수차례 산적을 토벌했다. 여몽이 15~16세에 등당을 몰래 따라가 도적을 공격하니 여몽의 존재를 알아챈 등당은 꾸짖었으나 여몽은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등당은 집에 돌아가서 여몽의 어머니에게 그것을 알렸다. 여몽의 어머니는 화를 내며 여몽을 벌주려고 했는데 여몽이 말했다.

가난하고 천한 것에는 머물 수 없고, 잘못을 벗겨내 공을 세우면 부귀가 오게 될 것입니다. 또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호랑이 새끼를 잡겠습니까?

여몽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공적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반론한 것인데, 여몽의 어머니는 애달프게 여겨 용서해주었다.
이때 등당의 관리가 여몽의 나이가 어리다고 얕보며 말했다.

저 아이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고기를 호랑이에게 먹여주려는 것일 뿐입니다.

다른 날, 이 사람이 여몽과 만났는데 또 모욕을 주니 화난 여몽은 칼로 그를 죽이고 달아나 동향인 정장(鄭長)의 집으로 도망쳤다. 후에 교위 원웅에게 자수했는데 원웅이 여몽을 위해 변론해주었다. 이 사건을 들은 손책은 여몽을 불러 보고 그의 비범함을 기이하게 여겨 측근으로 삼았다.
몇 년 뒤에 등당이 죽자 장소의 천거로 여몽이 등당을 대신하게 하여 별부사마에 임명되었다.
200년, 손책이 죽고 그의 동생인 손권이 뒤를 이었다. 곧 손권은 군단의 통폐합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여몽은 외상까지 써가면서까지 자신의 병사들에게 진홍색 옷과 행전을 구비해주고 열병식에 임했다. 손권은 여몽 군단의 훌륭함과 잘 훈련된 것에 기뻐해 여몽 군단의 병사를 늘리게 했다. 이후 단양을 토벌하는데 종군하여 가는 곳마다 공적을 세워 평북도위가 되었고 광덕현의 장(長)에 취임했다.
208년, 황조와 벌이는 전투에서 여몽은 선봉을 맡았는데, 황조가 수군을 이끌라고 출진시킨 도독 진취를 직접 목을 베었다. 장수와 병사들이 승세를 타고 그 성을 진공해 들어갔고 황조는 진취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으나 병사들이 추격해 사로잡았다. 손권은 이번 일의 승리는 여몽이 진취를 죽인 공적 덕분이라고 하며 여몽을 횡야중랑장으로 삼고 돈 천만을 내렸다.
이렇게 크고 적은 공을 많이 세웠으나 16살 때부터 싸움질 밖에 한 게 없는지라 학식이 부족하여 상소를 할 때 글이 아닌 말로 할 정도로 지식이 부족했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권은 여몽과 장흠에게 그대들은 큰 임무로 새 임지로 떠나니 공부 좀 해서 견식을 넓히라고 말했다. 여몽은 '문관이나 공부하지 싸우는 무관인 내가 왜 공부함?'이라고 생각하여 부대의 일이 바빠 공부할 여유가 없다고 답했다. 손권은 "내가 자네들 보고 박사가 되라는 것이겠냐? 단지 과거의 것을 많이 알고 지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나는 형님의 위업을 이어 군주가 돼서 너보다 바쁘지만, 어렸을 때 주역 제외하고 다 읽어봤고 군주가 된 에도 삼사와 병서를 정독한다." 하면서 나도 하는 공부를 왜 하지 않느냐고 덧붙였다.
손권이 "여몽과 장흠 자네들은 군사들을 이끌거나 무예를 익힐 때 순발력과 판단력과 재치가 좋으니, 공부만 한다면 금방 늘 것이다."라고 의욕을 붙돋아주었다. 그리고 손수 옛 위인들의 독서 습관까지 알려줬다. 여몽은 여기에 설득되어 주위 사람들 중 누구도 여몽에게 학문으로 이길 수 없는 수준까지 공부에 힘썼다.

2.2. 남군 공방전


적벽대전 이후 주유군과 유비군은 남군(강릉)에서 조조군의 조인을 포위했다. 이때 익주의 습숙이라고 하는 인물이 병사를 이끌고 투항해 왔다. 주유는 표를 올려 습숙의 병사를 여몽에게 더해주려고 했으나 여몽은 습숙이 담력이 있어 쓸만하다고 칭찬하고 오나라를 사모해 먼 나라에서 귀화해 온 것을 평가해 의리상 오히려 병사를 늘렸으면 늘렸지 빼앗으면 안된다고 했다. 손권은 이를 칭찬하며 습숙에게 병사를 돌려 주었다.
주유는 감녕에게 명령해 따로 이릉을 점거하게 했는데 조인이 군을 나눠 이릉에 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감녕은 위급한 상황에 놓이고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한다. 모두 병사가 적어 군대를 둘로 나누어 구원하기엔 어렵다고 주장하나 여몽만은 주유와 정보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한다.
  • 감녕을 구원하여 포위를 푸는데는 얼마 걸리지 않으니 당연히 가야합니다.
  • 하지만 얼마 걸리지 않는다 하여도 본진의 방어는 해야하나 능통이 본진을 지킨다면 능히 10일은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의 승리는 확실해지니 3백의 군사를 또 나누어 땔나무로 험한 길을 끊어버리면 적이 패주할 때 적의 군마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유는 이 진언을 받아들여 이릉으로 향해 그 날 전투로 적의 절반 이상을 죽이니 적이 밤에 도망쳤다. 도주하던 적은 땔나무에 막힌 길과 조우하자 말을 버리고 걸어서 달아났고 아군은 말 300필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아군은 기세를 얻어 강을 건너 둔영을 세우고 적과 싸워 조인을 남군에서 퇴각하게 만들었다. 손권군이 남군을 점거하자 여몽은 편장군과 심양현령에 임명되었다.

2.3. 괄목상대


주유가 죽고 노숙이 주유를 대신하게 되어 육구로 가던 길에 여몽의 군영 아래을 지나가게 되었다. 노숙은 평소 여몽을 얕보고 있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여몽이 대단한 사람이 되었으니 만나보라고 하여 만나서 술을 마셨다. 노숙은 여몽과 이야기를 하다가 달라진 여몽의 식견에 '옛날 오나라에 있을 무렵의 어린 여몽이 아니다.(非復吳下阿蒙)'라며 놀라워했고 여몽은 '선비와 헤어지고 3일이 지나면(士別三日) 곧 마땅히 눈을 비비고 상대해야 한다.(卽當刮目相待)'라고 답했다. 이것이 고사성어의 유래로 오하아몽(吳下阿蒙)은 학식의 진보가 없음을 뜻하게 되고 괄목상대(刮目相待)는 크게 학식이 진보함을 뜻하게 되었다.
술에 취하자 여몽이 노숙에게 노숙이 인접하게 된 관우에 대해 이야기했다.

관우는 워낙 출중하고 학문을 좋아해 춘추좌씨전을 읽어 거의 전부를 입으로 줄줄 외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강직하고 웅대한 기백이 있습니다만, 한편으로 자부심이 매우 강한 성격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서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는 관우를 상대할 대책을 묻는다. 노숙은 때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답한다. 여몽이 말했다.

지금 동서(유비와 손권)가 비록이 한 집안이 되었으나, 관우는 실로 곰과 범 같은 장수인데 어찌 계획을 미리 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노숙을 위해 서너 가지 계책을 짜 주었다. 그것을 경청한 노숙은 비밀로 하고 발설하지 않았다. 그의 발전한 식견에 감탄한 노숙은 여몽의 모친에게 절하고[1] 우의를 맺은 다음 헤어진다.
손권은 항상 학문에 힘쓴 무장으로서 여몽과 장흠을 예로 들었다.

인간이라는 것은 어차피 성장하는 것과 동시에 향상해 가는 것이지만, 여몽, 장흠 정도로는 미치지 않을 것이다.



2.4. 동오의 명장


여몽은 성당, 송정, 서고라고 하는 자들과 주둔지가 가까웠는데 이 세 사람이 죽고 그들의 자제가 유약해서 손권은 그들의 병사를 여몽의 군단에 편입하려고 했다. 여몽은 손권에게 세 번이나 편지를 보내 서고 등이 모두 나랏일을 부지런히 애썼는데, 자제들이 어리다고 폐할 수 없다고 하자 손권은 여몽의 말을 들어주었고 세 사람의 자제에게 스승을 붙여주었다.
조조는 여강의 사기(謝奇)를 기춘의 전농(典農)에 임명했고 환현(환성)의 들판에서 둔전을 행하려고 했다. 그 둔전병이 손권의 영토에서 수차례 약탈을 행하자 여몽은 그들에게 귀순을 권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틈을 노려 습격했다. 적군은 사기가 떨어져 퇴각하니 그 부하인 손자재(孫子才), 송호(宋豪)는 노약자를 업고 여몽에게 가서 항복했다.
그 후 212년~213년 유수구 전투에서 조조와 손권이 장강을 끼고 싸우자 여몽은 수차례 뛰어난 계책을 내었다. 오록에 따르면 손권이 보루를 만들려고 하자 부장들이 말했다.

해안 위로 올라가 적을 공격하고 나서 물을 건너 배로 들어오면 되는데, 보루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여몽은 손권에게 강물 입구를 끼고 둑을 세우라고 권했다.

같은 병기에도 날카로운 것과 둔탁한 것이 있으며, 싸움에 있어서도 백 번 이기지는 못합니다. 만일 만에 하나 적의 보병과 기병이 육박하여 와서 물가까지 퇴각할 틈이 없게 될 경우에는 어떻게 배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손권이 그렇다고 그것을 만드니 이 보루가 바로 유수오다. 방비가 철저하니 조조는 퇴각했다.
조조가 여강태수 주광을 보내 환성에 주둔하며 농지를 개간하고 첩차를 시켜 파양의 도적 무리를 회유하여 내통하게 하려고 했다. 여몽은 환성의 토지가 비옥해 몇 년 정도 지나면 군세도 증강되어 손을 쓰지 못할 것을 걱정해 지금 멸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손권은 이것을 받아들여 214년 5월에 환을 공격하기 위하여 출진했다. 손권은 제장을 모아 계략을 묻자 여몽은 감녕을 승성독으로 추천해 감녕을 선봉으로 삼고 여몽은 정예병을 이끌고 그의 뒤를 따라 공격한다고 하는 작전을 세웠다.
오서에 따르면 이때 다른 제장들[2]에게서 공성을 위해 토산을 만들고 병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하는 신중론이 나왔다. 여몽은 그러면 시간이 흘러 적이 성의 방비를 갖추고 외부에서 원군이 올 것이라며 적이 준비가 부족할 때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것을 물리쳤다. 또한 빗물을 이용해 들어가도 만약 지체되어 시간이 지나면 물이 말라서 귀환하는 길에서 고생하리라고 보았다.
새벽에 진군하는데 여몽이 스스로 큰 북을 쳐 병졸들을 고무했고 감녕전에 따르면 감녕도 직접 줄을 잡고 성벽을 기어 올라가 솔선수범하니 사병들이 모두 펄펄 뛰었고 밥 먹을 때 쯤 적을 격파했다. 여몽 건은 애초에 성 하나를 목적으로 새벽에 적군이 방심하는 사이 기습적으로 침공해 성을 딴 것이라고 봐야겠다. 원래 손자병법에도 공성전에는 성을 공격하려면 최소한 3개월이 필요하고 공성전에선 공자 측이 3배 병력이 필요하다고 하기도 하니까.
이때 조조의 원군으로 장료가 협석(夾石)까지 왔는데 성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퇴각했다. 오주전에 따르면 태수인 주광을 사로잡았고 수만 명의 남녀를 포로로 잡은 전과를 올렸다. 여몽은 이 공적에 의해 여강태수에 임명되었고 노획한 인마, 심양의 둔전민 6백 명과 관속 3백 명이 내려졌다.
여몽은 심양으로 돌아왔는데 1년 후에 여릉에서 반란이 발발했다. 여러 장수들이 공격했으나 누구도 토벌하지 못하자 손권이 말했다.

사나운 새 수백 마리가 물수리 한 마리만 못하구나.

손권이 여몽에게 토벌을 명하자 반란을 진압한 여몽은 우두머리만을 주살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해방해 평민으로 돌아가게 했다.

2.5. 익양대치


215년, 유장의 익주까지 얻은 유비가 손권의 형주 삼군 반납 요청을 거절하자 화가 난 손권은 여몽에게 선우단, 손규, 서충과 병사 2만 명을 주어 장사, 영릉, 계양 3군을 빼앗으라고 명하며 여대, 손무(孫茂) 등 장수 10명도 추가적으로 더 보낸다. 여몽이 병사들을 이끌고 이 세 군에 귀부하라고 편지를 보내니 장사와 계양은 냅따 항복한다(...). 단 영릉태수 학보만은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 장사태수 요립은 도망치고 안성현, 유현, 영신현, 다릉현의 관리가 음산성으로 들어가서 저항했으나 이들은 여대에게 즉시 격파되고 여대는 남아서 장사를 지켰다.
처음 여몽이 장사를 평정하고 마침 영릉으로 가는 길에 영현을 지나면서 학보의 옛 친구 등현지를 수레에 태워 주었는데 여몽은 그를 이용해 학보를 회유하려고 했다.
그러나 유비가 공안까지 와서 관우를 지원하려는 듯 보이자, 손권은 여몽에게 영릉을 포기하고 귀환하여 익양에서 관우와 대치하고 있는 노숙을 도우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몽은 손권에게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받자 일단 이것을 비밀로 하면서 밤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계책을 일러주었다. 새벽이 되자 성을 공격하는데 여몽은 등현지에게 거짓말을 전하게 했다.
  • 유비는 한중에서 하후연에게 포위당했다.
  • 관우는 번성에서는 손규에게 격파되고 남군에서 손권에게 발이 묶인 상태다.
  • 내 정예병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며 우리 원군도 끊임없이 오고 있다.
  • 성이 함락될 것은 빼박캔트이니 너의 노모 죽이기 싫으면 항복해라.
등현지가 이 거짓말을 학보에게 전하자 겁을 먹은 학보는 여몽에게 항복할 뜻을 전했다. 등현지가 먼저 나와 여몽에게 보고하자 여몽은 곧바로 네 장수에게 병사 백 명을 주고 학보가 나오면 성문을 점거하도록 명령했다.
잠시 후 학보가 나오자 여몽은 환영하며 그의 손을 잡고서는 그와 같이 배에서 내렸다. 말이 끝나자 여몽은 지금 유비와 관우가 쳐들어오니 영릉의 학보는 내버려두고 빨리 되돌아와 익양에 있는 노숙을 도우라는 손권의 편지를 꺼내 보여주고선 손을 치며 크게 웃었다. 학보는 그 편지를 보고 여몽이 전한 말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자 부끄러워 땅 속에 숨고 싶어 했다. 여몽은 손교를 남겨 영릉을 맡기고 그날로 군대를 이끌고 익양으로 갔다.
관우와 노숙의 회담 이후 장로의 한중을 조조가 점령하자, 급박해진 유비와 손권은 결국 형주를 분할하고 화친을 맺었다. 유비가 동맹을 청하니 손권이 학보도 영릉과 함께 다시 유비에게 돌아가게 했다. 여몽은 이 공으로 심양과 양신을 봉읍으로 획득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학보 관련 일화는 아예 사라져서 그냥 관리를 보냈는데 관우에 의해 거부당하자 손권은 발만 동동 구르다가 조조가 한중을 공격하니 제갈량이 "저들이 합비를 공격하는 대신에 세 현을 주죠." 하여 넘겨졌다고 바뀌었다.

2.6. 능력 위주의 인사 기용


같은 해인 215년 손권은 십만의 군대를 이끌고 합비를 공격하여 2차 합비 공방전이 일어나게 되나 결과는 참패. 퇴각 때 장료 등에게 추격을 받았으나 여몽과 능통이 죽을 힘으로 막아냈다.
216~217년 유수구 전투에서 조조는 대군을 이끌고 유슈로 진출해 장료를 선봉으로서 손권군을 공격했다. 손권은 여몽을 독에 임명해 이전에 건설해둔 제방 유수오를 먼저 점거하고 그 위에 강노 1만 대를 배치해 대항했다. 조조군의 선봉 부대가 진채를 세우기도 전에 여몽이 이를 공격해 격파했고 조조는 퇴각했다. 여몽은 호위장군, 좌호군이 되었다.
감녕전에 주석으로 달린 오서에 따르면 자신의 집에서 연회를 열었을 때 아버지 능조의 원수를 갚겠다고 칼춤을 추는 능통과 그에 대항하여 쌍극무를 추는 감녕의 사이에서 칼과 방패를 들고 둘의 싸움을 말린 일도 있었다.
항상 부곡(部曲)에 대해서 강하태수 채유는 여몽의 잘못을 고자질했는데 여몽은 그를 원망하지 않았다. 후에 예장태수 고소가 죽자 손권이 후임으로 쓸 만한 자를 물었더니 여몽이 직무에 열심히라는 것을 이유로 채유를 추천했다. 그의 인성에 감탄한 손권은 웃으며 여몽을 기해(祁奚)[3]에 비유하고서 채유를 등용한다.
감녕은 난폭하고 살생을 좋아해서 여몽의 신임을 잃고, 때때로 손권의 명령을 어기기도 해서 손권이 분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몽은 번번이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아 감녕같은 얻기 힘든 장수는 마땅히 용서해야 한다고 청하여 손권이 감녕을 후히 대하도록 했다.

2.7. 번성 공방전


노숙은 조조가 살아있으니 촉과 오는 서로 도우며 원수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촉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몽은 노숙과 다르게 촉에게는 강경한 입장으로 형주에서 땅을 나눠 접한 관우가 매섭고 빼어난 데다 오를 공격할 것 같고 나라의 상류에 있어서 형세가 오래가기 어렵다고 예상했다. 그래서 여몽은 양주 북부와 서주를 둘러싸고 조조와 싸우고 있는 중인 손권에게 몰래 계책을 말했다.

정로장군(손교)에게 남군을 지키게 하고, 반장은 백제(白帝)에 주둔하며[4]

, 장흠은 유격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장강을 아래위로 순행하며 적이 있는 곳에 따라 대응하고, 저는 나라를 위해 양양을 먼저 점거하면 됩니다.

손권은 여몽의 계책을 받아들였지만 얼마 후 여몽과 또 서주를 공격할 것을 의논했다. (...) 여몽은 조조는 원가를 격파해 북방에 있어서[5] 동오를 신경쓸 겨를이 없고 서주가 수비병이 부족해 일단 공격하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합비를 넘어 서주로 진출해도 이 지역은 여러면에서 공격을 받기 쉬운 평지이며 기병의 땅이라 7-8만을 주둔시켜도 근심하게 될 것이라며 남쪽 병사에겐 익숙한 곳이 아니니 포기하고 차라리 유비의 형주를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권은 여몽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6]
엄준전에 따르면 217년에 노숙이 죽자 처음에 후임 예정이었던 엄준이 사퇴해서 여몽은 노숙의 후임으로서 그의 뒤를 이어 육구에 주둔한다. 노숙의 군대 인마 1만여 명이 모두 여몽에게 속하게 되었고 한창태수가 되고 하준(下雋), 유양(劉陽), 한창(漢昌), 주릉(州陵)이 식읍으로 주어졌다.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이 4현은 원래 주유의 봉읍으로, 주유가 죽은 후 노숙에게 속했고, 노숙이 죽은 후 여몽에게 속하게 된 것이다. 여몽은 처음으로 육구에 갔을 때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만 관우와 우호를 맺었다.
오록에 따르면 남군성 내에 실수로 불이 나 많은 군사기물을 태우고 관우가 미방을 질책했던 적이 있었다. 미방은 내심 두려움을 품었다. 219년에 관우조인이 지키는 번성을 공격했다. 관우는 번성을 공격하면서 동오를 경계하여 공안과 남군에 병사를 남겨 수비하도록 했다. 손권은 위나라로 사자를 보내 비밀동맹을 맺었다.
관우전에 따르면 남군태수 미방이 강릉에 있고 장군 사인이 공안(公安)에 주둔했는데 그들 모두는 관우가 자신들을 업신여기는 것에 평소 원한을 품었었다. 관우가 출군한 후 미방,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관우를 돕는데 전력을 다하지 않자 관우가 '돌아가면 마땅히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했다. 손권이 이 일을 듣고 그들을 꾀어내자 미방은 몰래 사람을 시켜 손권과 내통했다.
여몽은 상소를 올려 관우가 수비병을 많이 남긴 것은 자신의 뒤통수 치기를 경계하는 것이니 늘 병이 있는 자신이 병 치료를 핑계로 건업으로 돌아가겠다고 청했다. 그리하여 관우가 이를 들으면 수비병을 양양으로 철수시킬 것이라 예상했다. 손권은 여몽을 소환한다는 격문을 공개하고 몰래 같이 계획을 도모했다. 관우는 여몽의 계책에 속아 점차 병사를 철수시켜 번성으로 가게 했다.
오범전에 따르면 손권은 여몽과 함께 관우를 습격할 일을 미리 모의하고, 신임하는 가까운 신하들과 상의하였는데, 대부분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손권은 이 일에 관해 오범에게 질문을 하였다. 오범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관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시의전에 따르면 여몽이 관우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손권은 시의에게 의견을 물었다. 시의는 여몽의 계획을 칭찬하고 손권에게 그 의견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했다.
전종전에 따르면 219년, 유비의 장수 관우가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자, 전종은 상소를 올려 관우를 토벌할 수 있는 계획을 진술했다. 손권은 당시 벌써 여몽과 관우를 습격할 일을 은밀히 의논하고 있었으므로 일이 누설될 것을 걱정하였기 때문에 전종의 표를 받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육손전에 따르면 여몽은 병이라 칭하고 건업으로 돌아온다. 방문한 육손이 관우와 국경을 접하고서 걱정해야 하는데 왜 내려왔냐고 따지자 여몽은 육손의 말이 옳지만 자신의 병이 심해서 돌아왔다고 답한다. 육손은 갑자기 관우를 까댄다.

관우는 자신의 용기에 기대어 다른 사람을 능멸합니다. 관우는 시작하자마자 큰 공을 세워 마음은 교만해지고 의지는 안일해졌으며 오직 북진에만 힘쓰고 우리에게는 경계의 마음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손은 여몽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하면 관우는 더욱 방비를 게을리하리라고 계책을 내었다. 여몽이 답했다.

관우는 평소 용맹하여 그를 적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게다가 그는 벌써 형주를 점거하고 은혜와 신의를 대대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아울러 원래 공로가 있으며 담력과 기세가 성대하여 도모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여몽이 손권에게 도착하자 손권이 누가 여몽 그대를 대신할 수 있냐고 묻자 여몽은 육손이 뛰어난 인재지만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으니 관우가 방심할 것이라며 육손을 추천한다. 손권은 곧 육손을 불러 편장군 우부독으로 임명하고 여몽을 대신하도록 했다. 육손이 육구에 도착하여 관우에게 그를 치켜 세우는 편지를 보내자, 관우는 우쭐해져서 오를 경계하고 방비하기를 게을리하였다.
조조는 우금, 방덕 등으로 하여금 번성의 조인을 구원하게 했으나 마침 내린 비 때문에 관우에게 패하여 방덕은 참수되고 우금은 항복했다. 관우는 3만에 이르는 우금의 포로 병사와 말 때문에 군량이 부족해져 손권군의 영역권 안에 있는 상관 지역의 곡식을 맘대로 강탈했다. 이를 듣고 명분이 생긴 손권은 마침내 형주 공격을 실행하기로 하고 여몽을 파견해 선봉에 서도록 했다.
손교전에 따르면 여몽이 남군을 습격하려고 할 때 손권은 손교를 여몽과 함께 좌우독으로 삼으려고 했으나, 여몽이 강릉을 공격할 때 주유와 정보가 서로 좌우독으로 임명되어 생겼던 어려움을 생각해보라고 하자, 손교는 후속 부대로 임명되어 종군하게 된다. 군의 전권을 맡은 여몽은 육손, 장흠과 함께 형주를 공격했다. 우번전에 따르면 이 때 여몽은 우번이 의술에도 두루 정통하다는 이유로서 우번도 자신을 따르도록 할 것을 요청했는데, 사실 이를 핑계로 좌천된 우번을 풀어주려 한 것이다.
여몽은 심양까지 왔을 때 관우가 설치한 관측소의 감시를 경계하여 장병들은 배 안에 숨기고, 백성들에게 상인의 모습을 하게 하고 노를 젓게 했다. 관우가 강변에 세워둔 둔영의 관측소에 도착하자 모두 잡아 포박해 버리니 관우 등은 여몽의 진군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서에 따르면 공안(公安)의 장군 사인이 막아 지키니 여몽이 우번에게 명하여 그를 설득하게 했다. 우번이 성문에 도착하고 수비병에게 "나는 너희 장군과 대화를 나누고자 한다."라고 했으나 사인이 서로 만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우번은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 적이 공격하는데도 척후가 행해지지 않고 봉화가 오르지 않으니 분명 관우군 내부에서 내응이 있는 것이다.
  • 여몽 장군이 곧 남군을 향해서 육로를 끊을테니 살아날 길이 모두 막히고 이곳의 지형은 달아나기 힘들다.
  • 장군 그대는 죽도록 싸워봤자 일족이 멸해져 천하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니 현명하게 항복하라.
서신을 읽어본 사인이 눈물을 흘리며 항복했다. 우번이 여몽에게 이는 기만일 수도 있으니 사인을 데리고 가도록 하며 군사를 남겨 공안성을 수비하라고 말했다.
여몽은 우번의 말에 따라 사인을 데리고 남군으로 갔는데 남군태수 미방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여몽이 사인을 그에게 보여주자 미방은 쇠고기와 술을 지니고 성을 나와 항복했다. 우번전에 따르면 여몽은 아직 군의 성을 점령하지는 않았지만 성 밖의 광장에서 축하연을 열었다. 우번이 여몽에게 말했다.

현재 충실한 마음으로 투항한 자는 미방 뿐입니다. 성 안의 사람들을 어찌 전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하여 신속하게 성으로 들어가 그 성의 권력을 잡지 않습니까?

진짜 성 내부에서 어떤 자가 몰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여몽이 우번의 진언을 듣고 관악을 장악한 탓에 그의 계획은 실패했다.
여몽이 점령지에서 관우군의 장수와 병사들의 가족들을 다 잡았으나 그들 모두를 보호하고 군중에 명령을 내려 민가에 들어가거나 약탈하지 못하도록 약속했다. 심지어 자신과 동향인 휘하 병사가 관품인 갑옷을 덮기 위해 백성의 삿갓을 빼앗았는데 여몽은 군령을 어겼으니 동향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며 눈물을 흘리며 참수했다. 이 엄격함에 군사들은 무서워서 길에서 흘린 것이라도 줍지 않았다.
거기다가 여몽은 아침저녁으로 측근들에게 노인들을 구휼하고 부족한 것이 있느냐고 묻고 병에 걸린 자에게는 의약품을, 춥고 배고픈 자에게는 옷과 양식을 내어주면서도 관우의 관부의 재물과 보화는 봉쇄하고 손권이 올 때까지 사용하지 않았다.
오주전에 따르면 여몽은 강릉을 차지해 그곳의 노약자를 위로하였으며, 우금 등의 죄수를 풀어 주었다. 육손은 별도로 의도를 손에 넣고, 자귀, 지강, 이도를 수복하고 이릉으로 돌아와 주둔하고, 협구를 지켜 촉의 침공에 대비했다.
번성에서 서황에게 격파된 관우는 돌아오는 길에 확인차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여몽에게 보내 서로 묻게 했는데, 여몽은 번번이 그 사자를 후하게 대우하고 성 안을 다니며 다른 장수와 병사들의 가족과 만나보게 하고 편지까지 받아가게 한다. 관우군의 관리와 병사들은 자기네 가정이 무탈하면서 옛날보다 더 대우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미방과 사인의 항복으로 근거지를 잃은 관우는 맥성에서 농성하는 처지에 이른다. 오주전에 따르면 손권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유했다.
오범전에 따르면 관우는 맥성에 있으면서 사자를 보내 항복을 요청하였다. 손권은 오범에게 질문했다.

그는 결국 본심으로 투항하려는 것이오?

오범이 말했다.

그에게는 달아나려는 징후가 있습니다. 투항한다는 말은 거짓일 뿐입니다.

관우는 거짓으로 항복하고, 성 꼭대기에 깃발을 꽂아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는 이 틈을 타서 서쪽으로 달아났다. 병사들은 모두 흩어지고 오직 10여 명의 기병만이 관우를 따랐다. 여몽은 반장, 주연에게 그 지름길을 끊게 했다.
우번전에 따르면 관우가 패하자 손권은 우번으로 하여금 관우의 종말에 대하여 점치도록 했다. 우번이 말했다.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반드시 머리가 끊어질 것입니다.

과연 우번의 말같이 되었다.
오범전에 따르면 정찰하는 자가 돌아와 관우가 이미 떠났다고 보고했다. 오범이 말했다.

비록 떠났을지라도 모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손권이 관우를 체포하게 될 시간을 묻자, 오범은 이렇게 말했다.

내일 정오입니다.

손권은 해시계와 물시계를 장치하고 그 시간을 기다렸다. 정오가 되었는데도 관우가 붙잡혀 오지 않자, 손권이 그 까닭을 물었다. 오범이 이에 대답하였다.

시간은 아직 정오가 안되었습니다.

잠시 후 바람이 불어 휘장을 움직이자, 오범은 손을 치며 말했다.

관우가 붙잡혀 왔습니다.

짧은 시간 내에 밖에서는 만세 소리가 들려왔고 관우를 붙잡았다는 말이 전해졌다.
반장전과 오주전에 따르면 반장의 사마 마충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를 붙잡았다.
관우전에 주석으로 달린 촉기에 따르면 손권이 관우를 살려주어 유비와 함께 조조에게 대적하려고 했으나 좌우에서 반대하며 말했다.

이리 새끼는 기를 수 없는 법이니 훗날 반드시 해가 될 것입니다. 조조가 즉시 그를 제거하지 않아 스스로 큰 우환을 불러들여 도읍을 옮길 의논을 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어찌 그를 살려준단 말입니까!

손권은 좌우의 말을 듣고 결국 죽이기로 마음을 굳혀 이에 관우와 관평을 참수했다. 배송지는 여몽과 손권이 각각 위치해있던 임저에서 강릉까지 200~300리 거리나 떨어져 있었다며 이 일화의 사실성에 의문을 표했다. 그렇기에 관우는 현장에서 지휘하던 여몽이나 관우를 사로잡은 반장 등의 최종적인 판단으로 인해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외로 관우의 후손 관중진의 족보에 따르면 관평의 아들 관월을 성을 문(門)씨로 개명시켜 보호해줬고, 서진에 의해 오가 멸망한 뒤 다시 관(關)씨로 관우 집안의 성이 복귀됐다고 한다. 족보의 특성상 조작일 수도 있지만 내용이 매우 자세하게 되어 있어 중국 당국에서는 조작은 아니라고 단정내린 상태다.
손권은 여몽을 남군태수로 삼고 잔릉후로 봉하였고, 1억 전과 황금 5백 근을 하사했다. 강표전에 따르면 손권이 공안에서 성대한 잔치를 열었는데 여몽은 질병으로 사양하였다. 손권이 웃으며 말했다.

관우를 사로잡은 공은, 자명의 모책이었는데, 지금 대공이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경사스러운 상이 아직 행해지지 않았으니, 어찌하여 즐겁지 못한 모양이란 말인가?

이에 여몽에게 크게 수여하고 여몽이 군영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악단이 눈부셨다. 손권은 여몽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금전을 하사했다.

2.8. 죽음


삼국지연의에서는 77회에서 관우와의 대결에서 이긴 다음 형주를 차지한 기념으로 연 연회 자리에서 1등 공신이라면서 가장 먼저 을 받은 뒤 마시려다가 관우의 귀신이 들려 갑자기 술잔을 내던지며 손권을 향하여 욕을 하다가 칠공분혈을 하면서 호러스러운 장면으로 최후를 맞지만, 이는 당연히 픽션이다.
정사에선 그런 각색이 있을 정도로 봉작이 채 내려지기 전에 지병이 도지면서 빠르게 앓아눕게 된다. 공안에 있던 손권은 여몽을 내전에 두고 여몽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자에게 천금을 내린다고 모집하였다. 여몽에게 을 쓰면 손권이 아파했고, 여몽의 안색을 보고 싶어도 여몽이 불편할까봐 벽을 뚫어 들여다보았다. 여몽이 조금이라도 음식을 넘기면 기뻐하여 주위를 돌아보며 웃으며 말하고, 그러지 못하면 탄식하며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병이 좀 낫자 손권은 그를 위해 사면령을 내리고 신하들은 하례를 올렸다. 하지만 다시 병이 심해져 손권이 직접 가서 살폈다. 주연전에 따르면 호위장군 여몽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손권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대가 만일 일어나지 못한다면, 누가 대신할 수 있소?

여몽은 병상에서 대답한다.

주연은 대담함과 지조에 있어서 남음이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를 임용할 만합니다.

또한 손권은 도사들에게 명을 내려 성신 아래서 여몽을 위해 천명을 청하도록 했다.
그러나 온갖 노력이 부질없게도 219년 말, 여몽은 41세 나이로 내전에서 죽으면서 역시 오나라의 요절징크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관우가 죽은 것과 같은 해였다. 여몽은 죽기 전에 하사 받은 여러 금과 보물을 모두 관부의 창고에 넣어 자신이 죽는 날 모두 상부에 돌려주고 초상은 검약하게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손권은 매우 애통해하며 그를 위해 먹는 반찬 수를 줄였고, 여몽의 유언을 듣고 더욱 비통해했다.

2.9. 사후


여몽의 사후에는 어째서인지 장남이 아니라 여몽의 차남인 여패가 잔릉후를 계승했다. 그에게 식읍 3백여 호를 주고 전지 50경(頃)의 조부를 면제시켜 주었다. 여패가 죽자 직계가 잇지 않고 여패의 형이자 여몽의 장남인 여종(呂琮)이 후작을 이었다. 여종이 죽자 또 직계가 잇지 않고 여몽의 삼남인 여목(呂睦)이 후계를 이었다.
여몽은 죽기 전에 후임으로 주연을 추천했지만 사실상 형주에서의 전투에서 활약한 육손이 이후 오의 군사상 책임자가 되었다.
782년, 당나라안진경이 뽑아 무성왕과 함께 배향한 역대 명장 64명에 뽑혔다.
1123년, 송나라에서 배향을 지낼 때 뽑은 역대 명장 72명 중에도 이름을 올렸다.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 관우가 신으로 모셔지자 관우를 죽음으로 몰고 간 여몽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단, 이것은 주로 민간에서 그런 것이었다. 다만 명, 청 시대 학자들이 '여몽의 계책이 과연 옳았나?' 하고 의문을 품기 시작함은 사실이다. 이는 현대에까지 이어져 일본의 동양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 역시 여몽의 전략 자체엔 비판적인 평가를 내렸다.
중일전쟁 중 일본군이 난징(건업) 인근을 점령했을 때 삼국지연의의 관우를 매우 존경하고 흠모했던 한 일본군 장교가 명하여 여몽의 무덤은 파헤쳐져 부관참시되고 완전히 폭파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일설에는~''' 이라는 전제를 달고 2013년 무렵까지 이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었으며, 그리고 다시 엔하위키리그베다 위키에도 실리면서 인터넷상에 널리 퍼진 것 같지만, 사실과는 전혀 관계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실제 여몽의 묘는 난징이 아니라 1978년 장시성 난창시에서 최초로 발굴됐고, 바이두 백과 등을 비롯해 중국 쪽 자료 어디에도 일본군이 훼묘했다는 말은 전혀 없다.

3. 평가


여몽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약간씩 갈린다.
여몽이 촉한정통론과 관우신앙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은데 사실 송, 명 시대에도 무성왕묘에 배향되거나 십칠사명장전과 광명장전 등에 포함되는 등 여전히 명장으로서는 인정받았다. 촉한정통론이 본격적으로 퍼진 남송-원 시기에도 나쁜 평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7]

3.1. 긍정적 평가


손권이 주유나 노숙과 같은 급으로 두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여몽의 이른 병사는 손오에게 있어선 참으로 안타까운 손실이었다. 여몽이 군권을 잡았을 때 손오에는 두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번째 선택지는 촉과 함께 지속적인 북벌로 위를 흔들리게 해 1강 2약의 구도를 깨뜨려버리는 것, 두번째 선택지는 촉이 점거한 형주를 먹고 양번까지 노려 장강의 방어선을 굳건히 하는 것. 전자 노선이었던 전임 노숙과는 달리 여몽은 후자를 선택했다.
여몽은 일찌감치 손권이 죽어라 꼬라박던 합비 대신 형주 방면으로 진출을 꾀했는데, 이는 장강 상류 지역인 형주 없이는 결과적으로 손오의 근거지인 양주를 방어할 수 없다는 전략적 식견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여몽 말따라 설령 얻는다해도 8만 대군으로도 수비가 어려운 합비보단 남군을 비롯한 형주 나머지를 차지하는 것이 이득이었다는 것. 결국 이를 바탕으로 이릉대전에서의 승리와 조위의 파상 공세를 막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매우 타당한 대국적 시각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을 통해 보면 여몽은 주유와는 비슷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천하이분지계를 완성시키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여몽이 죽은 이후 손오는 적극적 진출을 꾀하기보단 이전같이 실익이 없는 합비전에 병력을 계속 꼬라박았고 여몽의 요절은 대국적인 전략의 불완전한 종결을 의미했다.#
이를 두고 여몽이 대국적인 판단을 못한 장수로 부정적 평가에 올렸으나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어디까지나 손오의 후임들이 적극적으로 안한거지 여몽이 잘못한건 없기 때문. 이런식으로 판단한다면 김춘추진회정도 밖에 안되는 인물로 보일수 밖에 없다. 지나친 억측일뿐.
약자 두 명과 강자 하나가 있을 때, 약자 둘은 한 명의 강자를 주적으로 삼고 공동 전선을 펴야함은 의심할 여지없는 정론이다. 하지만 그런 동맹 체제가 유지되는 건 1등인 강자가 1등으로 유지하고 있는 딱 그 지점까지다. 즉 1등을 잡기 위해 2, 3등이 연합하는 건 당연하고, 타당한 작전이다. 하지만 2등이 1등을 따라잡는 그 순간이 되면 3등은 더 이상 2등과의 동맹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 그때 3등은 과연 내가 2등에게 따라잡힐 위기에 처한 1등을 돕는 게 더 도움이 될지, 아니면 1등을 따라잡으려는 2등을 돕는 게 더 도움이 될지를 따져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그 시점에선 더 이상 1위와 2위의 구분이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관우의 진격 직전, 조조의 상황은 한중에서 개국공신인 하후연이 사망하면서 1패를 당했고, 내부에선 위풍의 난이 일어나며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거기에 관우의 북진이 시작되자 조조는 천도를 고려할 만큼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관우에게 형주 방어선이 돌파당하는 순간 허도까지는 한달음이었다. 게다가 허도의 남부 방어를 담당하는 군대들까지 몽땅 끌고갔던 우금이 패하면서 예주의 방어선은 이미 구멍이 뚫린 상태였다. 게다가 당시 사방에서 반조조 운동과 관우에게 호응하는 반란까지 들끓는 상황에서 더 이상 촉과 위의 국력 차이는 무의미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관우가 형주 방어선을 뚫고 허도로 밀고 간다면 조조에게 감정이 많은 서량의 강족들도 촉과 결탁할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 이후로도 서량의 반란은 거의 위의 연례 행사급으로 잦았고, 강족과 촉이 커넥션을 갖고 동시 움직임을 갖는 일도 꽤나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관우가 형주 방어선을 돌파하는 순간, 북형주, 예주, 서량까지도 겨냥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반란이 들끓는 상황에서 조조가 그렇게 밀려버린다면 패권의 유지가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린다. 오는 이른바 캐스팅 보트를 쥐게 된 것이고, 1, 2위가 캐스팅 보트를 쥔 3위에게 잘 보여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때 당연히 촉은 오와의 외교를 재점검했어야 했다.
즉 당시는 1위 교체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더 이상 위를 주적으로 한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오는 결국 위가 패권을 유지하는 상황과, 촉이 패권을 강탈하는 상황 중에서 무엇이 더 자신에게 큰 떡고물이 떨어질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위에서는 결국에는 오는 멸망할 때까지 합비를 못 넘었다고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생각이다. 만약 그렇게 훗날의 결과만을 놓고보자면, 조조의 사망이 220년 1월이다. 만약 주적을 유지한답시고, 오가 합비와 서주를 공략했다면 관우는 위의 견제에서 조금이라도 널널해졌을 것이고 형주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관우가 형주에서의 전선을 유지하고만 있어도 220년에 조조가 사망해버리는 것이다.
남부에선 관우가, 동부에선 손권이, 내부에선 반란이 흔들고 있는 상황에서 구심점이 될 조조까지 죽어버리면, 위가 풍비박살이 나버릴지도 모르는 일이 된다. 조비가 세자로 책봉되어 확고한 후계자가 있으니 문제될 것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확고한 후계자의 유무고 뭐고 간에 수장이 사망하는 것은 분명히 그 집단의 리스크가 된다. 게다가 조조처럼 창업군주가 죽었다면 그 여파는 절대 작을 수 없다. 하물며 안과 밖이 혼란스럽다면 더더욱...
게다가 조비가 확고부동한 후계자라고 하기도 힘들다. 세자 책봉도 자신의 형제들과 경쟁하며 간신히 성공시켰다고 할 만하고, 실제 조조가 죽은 직후에 조창이 옥새의 위치를 물은 일화 등 내부불안요소 역시 분명히 존재했다.
만약 조조가 죽고 혼란에 빠진 위를 촉이 밀어내며 패권을 장악한다면, 오 입장에선 그 뒤가 없다. 이미 촉이 형주에서 북진한 뒤이니, 오 입장에선 그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 수익이라고 해봐야 합비, 수춘, 서주를 먹고 극동루트를 타고 북상해 청주를 차지하는 것 정도가 최대 이익이다. 문제는 그런 최상의 시나리오가 맞아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야말로 비상식적으로 긴 방어선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 당장 지도를 펴고 동오부터 서주, 청주 라인을 먹을 경우의 서부 전선이 어느 정도 길이인지를 본다면 지키기기가 막막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처럼 장강의 도움도 없이 그냥 저 방어선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시나리오로 진행된다면 새로이 패권자가 된 촉의 손쉬운 먹이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위를 돕는다면 촉이 차지하고 있는 형주의 절반을 먹을 수 있을 것이고, 촉을 돕는다면 합비, 더 나아가 서주 정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서주는 여몽의 계산대로 설사 얻는다고 해도 지킬 수가 없는 땅인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형주를 차지하는 것이 실익이 있는 선택지일 것이다.
여몽 입장에선 결국 후일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면 서주보단 형주가 우선순위였을 것이다. 여몽의 역할은 오에게 훗날을 도모할 기반을 닦아주는 것까지였다. 까지는 여몽이 알 수도, 어찌할 수도 없는 일들이었다.
그나마 저것 중에서 여몽이 예측 비슷하게라도 할 수 있는 일은 이릉대전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설마 유비가 오를 공격할까를 놓고 위에서도 유엽을 제외한 이들은 전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을 정도고, 촉 내부의 중신들도 반대했던 일이었다. 여몽은 이릉대전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보복전쟁의 가능성은 촉을 도와 위를 공격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존재한다. 촉을 공격했을 때, 유비의 보복은 예상했어야 했다고 말하면서, 왜 위를 공격했을 때, 조비가 핏발 선 눈으로 하북의 병력을 끌어다가 보복전쟁을 가했을 가능성은 예상하지 않는가.
사실 관우 사후에도 승기는 촉오에게 있었다. 관우가 죽었지만 위의 조조 역시 사망하며 후계자 문제로 위는 혼란스러웠고 이 때를 노려 침공했어도 성공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유비가 사사로운 원한은 잊고 조운의 말을 들어 오나라와는 화친을 맺으며 유비 스스로 황제에 올라, 한실부흥을 외치면서 관중으로 친정하여 촉-오 양국이 함께 북쪽을 쳤더라면 촉한은 관중을 얻을 수 있을것이요, 오나라는 형주를 방어선으로 구축하고 합비를 칠 수 있었을 것이다.[다만]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날려먹은 병력은 최대 8만에서 10만 명에 가깝고[8] 비록 곽준, 관우, 법정, 황충, 마초가 연달아 죽은 상황이더라도 유비가 친정하고 관중-농서의 호족들이 유비에게 호응하면 이릉에서 잃은 수백명의 이름없는 2세대 장수들이나 장비, 조운 같은 1세대 맹장들, 황권, 마량같은 초특급 참모가 참여한 북벌은[9] 원역사에서 마속이 참여했던 제갈량의 북벌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3.2. 부정적 평가


여몽의 노선에 의문을 제기하는 논자들이 꽤 있다. 당장 미야자키 이치사다나 왕무횡 같은 사학자들이 쓴소리를 한 적이 있다. 왕무횡의 경우 남군을 유비에게 빌려줬으니, 정보는 남군을 지킬 수 없다고 근심했고 조조가 오직 유비만을 꺼리는 것은 천하가 모두 아는 바였기에 그의 힘을 빌려 조조를 막고자 한 것이라며 여몽의 형주 공격은 공이 아니고, 강동의 패업을 무너지게 할 뻔한 짓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오나라는 힘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훗날 멸망당했으니 여몽의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당시 대외 정치 상황을 고려해보면 위를 압박하는 게 가장 맞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위는 오를 침략했던 전과가 있기도 하고 강대국이 약소국을 항상 공격하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러니 주적으로는 언제나 위를 우선순위로 두었어야 했다. 그런 위를 당시 수도 앞까지 공격할 정도로 기세가 좋던 유비 세력을 친 건 아무리 생각해도 패착이라는 의견이 역사학자들 사이에 많은 것이다.[10][11]
천하삼분지계는 사실상 한중을 먹고 서량, 장안으로 진격하는 유비제갈량은 바깥에서 시간을 끄는 역할이였고 관우가 그 사이에 빈 중원을 먹는다는 전략이었다. 실제로 관우는 번성을 포위한 상태에서 가능하다면 진격을 할 수 있었고 허도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 정도면 천하삼분지계는 완전히 성공한 계획이였지만, 여몽이 하필 빈 형주를 먹어버리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지게 된다. 유비가 대단한 기세로 진격할 수 있었던 이유도 노숙유비와 친선관계를 유지했고 노숙 사후에도 계속 그럴 것이라고 믿었기에 진격을 할 수 있던 것이었다. 노숙은 혼자서 위를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다. 여몽은 반대로 촉을 배제하고 위와 정면대결을 원한 사람이고 결과를 말하면 여몽이 말하던 오나라만의 정면대결은 씨알도 안먹히는 소리인 것이다.
또한 위의 1위, 2위, 3위의 설명도 타당치 못한 이유는, 한중공방전을 기점으로 1위인 위나라, 촉나라가 2등으로 들어선 시점일지라도 1위라고 할 수 있는 위나라와 2위, 3위의 격차는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순위로 치면 1위가 위나라라면 촉과 오나라는 거의 8위, 9위 정도라고 해야 할정도. 그 차이는 중국 역사에 길이남을 인재인 제갈량 조차도 극복하지 못할 정도로 심했다. 한중공방전의 승리와 관우의 북진은 2위에서 3위로 밀려난 오나라에게 있어서는 부담이였을지 모르지만, 그 부담 때문에 3등인 오나라가 2등인 촉나라를 배신한 것은 아주 근시안적인 행동이였다. 왜냐면 분명히 한중공방전에서 승리를 했고 관우가 북진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촉나라가 위나라로 승기를 잡은 시점도 아니였기 때문. 단순히 국지전에서 승리를 거둔 승리를 가지고 3위가 2위의 뒤통수를 친 것은 자멸하자는 소리 밖엔 안됐다.
한모려(韓慕廬)가 말하길 '노숙은 장강을 나눠 이를 지키고자 했겠는가? 일각이라도 조조를 잊지 않아서이다. 여몽이 엿보던 바는 협소한 것으로, 먼 근심을 걱정하지 않고, 가까운 이익을 달게 여겨, 오, 촉의 전쟁이 벌어지게 된 실마리를 시작되게 했고, 조씨의 찬탈을 이루어지게 한데다, 손권 또한 신하를 칭하고 남에게 굽히며, 해마다 전쟁이 일어났다. 슬프구나! 공을 탐내다 어둠을 불러들여, 나라를 그르치게 함이 적지 않구나.'라고 했는데 여몽 전략의 기본문제를 잘 꼬집은 것이라고 하겠다. 애초에, 노숙 등은 강대한 조조가 아직 존재해, 재앙과 환난이 비로소 이루어져, 의당 서로 돕고 협력하며, 그들과 더불어 공동의 원수로 삼아야지, 틀어져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노숙이 촉과 어떻게든 동맹을 유지하려고 한 것은 노숙이 바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심지어 오는 이렇게 차지한 '''형주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애초에 오의 전력은 수군에 집중되어 있었다. 형주도 수군이 어느 정도 중요시되었지만, 그것은 '''강릉과 강하 같은 장강 일대에 한정되어 있었다.''' 관우와 같이 형주를 위나라 토벌에 쓰기 위해서는 수군이 아니라 육상에서 잘 활용할 수 있는 보병이 필요했다. 이랬기에 오나라는 기껏 형주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주를 활용하지 못한 채 합비에 힘을 쏟았고 모두 실패했다.
형주와 함께 곧바로 한중까지 집어먹었으면 모를까.[12] 주유의 서촉공략 구상이나 여몽의 번성-영안 먹는 구상이야 구상 자체는 좋지만, 유비도 내부 호응을 받아가면서 3년이나 지체했는데 주유가 서촉을 먹는 것이 쉬웠겠으며, 멀쩡히 위와 촉이 버티는데 여몽이 번성과 영안까지 아우를 수 있겠는가? 약한 두 나라와 강한 한 나라가 있었는데 이러한 정세를 바꿀 수 있는 상황에서 손권의 통수 결과 여전히 약한 두 나라와 강한 한 나라만 남았다. 대외 정세상 무슨 의미가 있는 짓이었나?
위 항목에서는 여몽이 죽어서 그 대국적인 전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 당시에 오나라에는 여몽 말고도 뛰어난 군재를 가진 사령관은 많았다. 당장 이릉대전의 구국의 영웅 육손이 20년 넘게 건재했으며, 조비의 1차 남정 때 악조건 속에서도 강릉을 지켜낸 구국 영웅 주연 역시 여몽 사후 30년 동안 활약한 명장이였다. 게다가 그 아들들이랑 다음 세대인 육항, 주적, 제갈각, 정봉 등도 있는데 이런 인재들이 결국 매번 회남과 형북 양쪽에 꼴아박으면서 새로운 영토를 더 얻지 못했을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답은 나온다.
어떻게 보면 위에서 촉의 한중 공략하는 것보다도 오에서 촉의 영안 공략하는 게 훨씬 힘들다. 왜냐면 지형상 삼협의 거센 물살을 헤쳐가야 하기 때문이며 영안에 지키고 있는 장수가 기본만 하면 뚫기 어렵다. 나헌육항을 막은 것이 이러한 이치이다. 육손이릉대전에서 그렇게 대박이 터지고도 바로 영안으로 진군 안 한 것도 이유가 있던 것이다. 물론 복합적인 보급 문제나 위나라 침략 대비로 있었겠지만.[13] 이런 상황에서 여몽이 영안으로 바로 진군해서 함락시킨다는 생각은 허상에 불과하다. 오나라에 또다른 명장인 육항[14]이 '''당시 촉한이 유선과 황호가 5년 동안 말아먹고 종회의 난으로 권력에 공백이 생기는 막장 상황이였음에도''' 실패한 일이다. 여몽이 영안을 진짜로 공략해야 했다면 반드시 뚫어야 할 상대들은 이릉대전 이전의 유비, 제갈량이 최고조로 키워놓은 한나라인데 성공할수 있었을까?
장강 방위선 구축은 촉이 계속 형주를 차지하고 있으면 저절로 되는 것으로, 여몽은 장강 방위선을 구축하기는커녕 오히려 붕괴시킬 뻔하고, 형주를 오에 귀속시키는 것에 대한 리스크는 너무 컸다. 거기다가 황당하게도 오나라는 요충지인 양양을 다시 조인에게 빼앗겨서 그 장강 방위선조차도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장강 방위선 구축을 하긴 위해선 강릉보다 양양이 훨씬 중요하다. 남송이 그 매서웠던 몽골의 침략을 방어하던 곳이 바로 양양성이다.
당시 조조의 위왕 즉위 때문에 조조가 협천자를 한다는 대의명분이 무너진 상황이라 순욱, 최염, 모개 등 위의 인재들이 숙청되었고 이로 인해 조조는 위왕 즉위 이후 각지의 반란으로 죽을때까지 걱정해야 했다. 당시 조조의 수하들 중에서는 순욱처럼 조조를 따르면서도 유씨가 다스리는 한나라는 유지하기를 바란 자들도 있었다. 또 몇몇은 이런 행동이 조조의 대의명분이 무너질 것을 걱정해 반대하기도 하였다.
당시 조조가 숙청할 때의 모습은 마치 2차 세계대전 직전 스탈린대숙청과 비슷하며, 독소전쟁 초기 소련스탈린의 대숙청 폐해로 독일에게 탈탈 털리다 간신히 사태를 수습해서 전황을 역전시킬 수 있었다. 조조의 위왕 즉위는 자신의 주요 세력들을 깎아먹는 자충수가 되어버렸다. 조조손권의 찬탈 권유에 자신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 바로 '자신을 화로 불에 앉게 한다는 말'로 정말로 당시 상황이 그랬다.
또한 한중 공방전의 패배로 인해 조조의 군사적 기세도 확실히 줄어들어서 수세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관우가 번성으로 진공하자 전역에서 이에 호응해 반란이 일어나고 관우군에 의해 수도 허도까지 위협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무렵의 조조관우를 막겠답시고 오나라가 합비를 노리는 줄 알면서도 합비를 방어하던 하후돈장료까지 뺐고, 조조는 당시 60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다음 해에 접어들자마자 사망하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이 시기는 위나라가 삼국 정립 이후로 가장 약했던 시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관우의 전사 후 한창 기세를 올리던 촉과 오의 관계가 무너지자 위는 조조 사후 문제들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고 찬탈을 가시화시킬 수 있었다. 더군다나 관우가 오군에 의해 사실상 전사한 이후, 유비이릉대전을 일으켜 패배할 때까지 4년 동안 위는 병력도 빠르게 보충했다.
애시당초 1강 2약 구도 자체가 형주 공방전이릉대전이 발발하면서 생긴 것이다. 그나마 국운이 상승 중이던 촉이 1강인 위에게 공세를 취하는 구도로 갔으면 상대적으로 호족 연합체인 오도 합비 등을 노리며 한나라가 옹주-양주와 형주를 점령하고 위나라를 몰아넣는 동안위의 약점을 노릴 수 있었는데 오가 촉을 통수치고 나니까 그 다음 오가 공략할 대상이 없어져버린 셈이다.
여몽은 합비를 넘은 서주 공략을 부정적으로 봤으나 후대 왕조가 그랬듯 적어도 양주 북부~예주~서주를 거처서 흐르는 회수를 먹으면 그 자체가 방어라인이 되고 촉과 오 양쪽에서 치고 나간다면 그만큼 위나라의 대오나라 상대 기병전력 역시 분산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오가 진공하는 서주-청주 지역은 옛 제나라의 강역인데 이곳에서 제나라가 대체 몇 년 동안 나라를 유지하며 기업을 이어갔는가? 제나라는 이 방면을 사수했기 때문에 춘추전국시대부터 전국칠웅 시대까지 강국 중 하나로 버틸 수 있었다.
당장 유비- 관우의 진공 때 손권의 내응 때문이라도 당장 1~2년 전까지 적대하던 손권이 무슨 짓을 할 지 알고 그를 무조건 신뢰해서 합비 라인 병력을 뺐겠는가? 조조가 합비 쪽 하후돈, 장료를 유사시 예비대로 투입할 작정이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 상황에서 관우의 기세를 어떻게든 꺾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권이 말년까지 합비에 꼴아박다 모두 실패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손권 본인부터 형주 따위보다 회수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 관우가 계속 위나라와 싸우게 놔두고, 하후돈장료관우와 싸우기 위해 합비를 빠져나갔을 때 합비를 공격했으면 회수+서주를 정말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차버린 거지.
그렇기에 촉과 오 양쪽에서 공동전선을 펼쳐서 조조의 위왕 즉위 이후 내외로 흔들리고 있던 위나라 자체의 국력을 갉아먹어 위나라와의 국력차를 최소화하는 방책도 생각해 볼 만했다. 후대 남조 왕조들이 합비를 소유하고 그 위로 진출한 적이 있다는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촉과의 명목뿐인 동맹이라도 일단 공공의 적이 눈앞에 있는데 장강 방어선에 집착한 것이 과연 합리적이기만 했느냐는 점은 논쟁의 대상이 될 법도 하다. 또한 여몽은 단순히 형주를 먹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촉의 영안과 위의 양번까지 노리고 있었는데 형주의 관우조차 함부로 치지 못하여 기습을 가할 수밖에 없던 전력으로 어떻게 이 둘을 성공적으로 공략해 소유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일 수밖에 없다.
결국 형주의 핵심인 양번을 얻는 데에는 실패했고, 그나마 형성된 장강의 방어선도 훗날 한나라가 멸망한 이후 익주와 양양을 통해 쳐들어온 진나라에게 가볍게 뚫리고 말았다. 애초에 양양을 점령 실패한 시점에서 방어선 구축은 실패나 다름없었다.
오는 형주를 점령한 이후,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촉에게 적대적인 스탠스를 유지하게 된다. 형주가 넘어갈 때 유장과 그의 아들 유천도 오로 덩달아 넘어갔는데 이 유천을 익주자사로 임명하는 한편, 사섭을 통해 옹개 등의 남중의 호족을 포섭하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남중에서의 반란이 일어나게 된 건 말할 것도 없다. 또 주태는 촉땅인 한중태수에 임명되기도 했다. 안 그래도 관우가 죽어서 열받아 있는데 이 짓거리까지 하자 화가 폭발한 유비는 위를 놔두고 이릉대전을 벌이게 된다.
거기에 여몽이 주장한 대로 오가 이후 서주를 포기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애당초 손책 때부터 서주는 오가 차지하기를 염원한 지역이었으며 손권은 적벽 이후 영서주목을 칭하며 서주를 먹겠다는 의지를 천명했었다. 오히려 여몽 이후에도 손권은 지속적으로 합비를 쳤고 결국 위나라가 합비신성을 새로 지을 정도였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엔 여몽의 계책은 시어서 못 먹는 포도를 보는 여우 꼴이 되지 않았는가.
손권이 형주를 치는 과정에서 위를 뒤흔든 관우를 치고 조조조비에게 무릎을 꿇어, 내외로 흔들리고 있던 위를 안정시켜 조씨의 제위 찬탈에 도움을 준 셈이 되었으며 이후 촉과의 동맹이 끊어진 오를 위가 황제국으로서 압박해 오나라의 신하들 가운데 분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후일 합비를 치고 그 뜻을 이루지 못함도 안정된 위를 상대로 했기 때문이 아니던가.
결국 조비남정 관련으로 온갖 삽질을 한 뒤, 촉과의 동맹이 재개되고 나서야 오는 황제를 칭할 수 있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오가 손권 이후 가장 위에 심대한 위협을 가한 때가 바로 동흥제 전투 이후 촉과 오의 동맹으로 연계한 제갈각의 20만 합비 북벌이었다. 이것도 기실 따지고 보면 실제적인 권력기반이 취약한 사마사 집권 이후 위나라 조정이 불안정한 상태를 노린 것이었다.
가뜩이나 호족 체계로 불안정했던 오의 군사력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동맹인 촉과의 연계가 절실히 필요했던 셈이다. 노숙익양대치 이후 형주 분할로 양국의 분쟁을 종결시킨 것이 괜한 이유없이 그런 게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오나라는 형주를 바탕으로 국력을 키우기는커녕 양주의 군대로 무릉만이나 교주의 반란 진압에 오히려 더 힘을 쏟아야 했다.
결국 오에게 형주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고 합비만을 계속 공격할 수밖에 없었는데, 합비군이 죄다 형주로 몰려있던 상황은 이미 물 건너가 적기를 놓친 뒤였고 점령은커녕 신축된 합비성(합비신성)에서 대패를 당했다. 합비신성이 만들어진 것 자체가 어차피 오가 위를 친다면 합비 말고는 확실하게 올 수 있는 공격로가 없으니 아예 올 테면 오라는 받아치기었다.
오랫동안 여몽은 긍정적인 평가만 받아왔지만 근래에 들어서는 여몽의 근시안적인 행동이 부정적인 나비효과를 대다수 일으켰다는 것이 드러나자 부정적인 평가가 매우 많아졌다. 여몽의 형주 진수와 관우의 죽음에 지속적인 촉을 향한 도발은 그나마 명목상이라도 동맹이었던 촉을 완전히 적으로 돌려버렸고 아무리 촉이 신의없이 굴었다고 해도 오는 그것을 대놓고 뒤통수로 갚았다. 형주 영유권 문제는 한쪽이 가해자와 피해자인 게 아니라 쌍방과실로 인한 사태였기 때문.
또 위에서 언급한 3위가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상황은 어디까지나 1위와 2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안전을 보장받을 때에 한한다. 오나라는 이 선택으로 위와 촉을 동시에 적으로 돌리고 말았다. 3위가 1위와 손을 잡고 2위를 견제한 수준이 아니라, 손잡고 있던 2위를 적으로 돌려 1위와 2위를 동시에 상대하게 된 것이다. 만약 3위가 2위를 공격해서 서로를 소모시키는 상황이 된다면 그 결과는 사이좋게 1위의 먹잇감이 되는 것뿐이다. 애초에 형주 관련 문제도 한나라의 일방적인 과실이 아니었고 결국 오나라는 동맹 하나를 잃고 위나라는 위대로 계속 오나라와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 후에 두 나라가 다시 화친을 맺은 이후 제갈량이 북벌을 할 때도 제갈량오나라를 계속 신경쓰며 병력을 배치했고, 결국 위나라에게 좋은 일만 시켜주게 되었다.
또한 위에서는 마치 촉한이 위나라를 역전할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국력을 가진 것처럼 서술했으나 이는 전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촉은 인구도 영토도 위나라에 크게 밀렸다. 파촉 땅이 지형상 국토 방어에 어마어마한 이점을 주고 지형 또한 비옥해 생산력이 뛰어났지만 그렇다 한들 절대적인 수량 면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촉의 인구는 위는커녕 오의 인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15]이었으며, 인구가 경제력과 군사력에 직결되었던 시대 상황으로 보았을 때 촉은 위보다 절대 열세였다.
애초에 왜 대부분의 중국 왕조가 중원 부근에 있으며, 파촉 땅에서 중원을 넘볼 만큼 큰 세력이 없었겠는가? 제갈량이 국가의 동원력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리긴 했지만, 장강황하를 끼고 있는 중원 땅과는 비교할 수 없다.[16] 결과적으로도 제갈량이 한계까지 짜내어 동원한 북벌에서도 위에 몇 번 큰 타격을 주긴 했지만 결국 물량면에서 압도적인 위나라에 번번히 막히지 않았는가. 조비가 그렇게 삽질을 했는데도 위나라는 그냥 그 자체로 강대했다. 삼국시대 말을 기준으로 위나라의 인구는 촉의 5배[17]에 달했고 오보다도 2배 이상 많았다. 전선에서 싸움은 어떻게 될지 모르나 국가적으로 총력전을 벌인다면 당연히 게임이 안 된다.
방어선이 넓어진다고는 하나 촉의 파상공세에 대비하고 있어야 하는 위 입장에서 촉의 공세를 막기에 급급한데 이후 발생할 오의 공세까지 성공적으로 막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실제로 오는 합비와 서주를 결코 포기한 적이 없으며 회남 일대에서 끊임없이 군사활동을 벌였고 결국 모두 망했다.
적어도 회남 일대를 점거하여 회수를 방어선으로 삼고 넓게는 회수와 황하 사이인 서주, 청주, 예주, 연주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를 놔두고 형주에서 관우의 기세를 꺾어버린 결과 1위인 위의 세력만 공고하게 되어 버렸다. 이렇게 그동안 군사 활동을 해놓고 지킬 자신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관우가 양양에서 정체하고 있는 사이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 적어도 회수, 넓게는 황하를 경계로 삼았더라면 북방의 기병을 막는 천혜의 장벽이 될 수 있고, 서남쪽으로는 상수-장강-원수, 서북쪽으로는 여수-회수 일대인 여남군을 차지해 경계로 삼아 오나라가 재빨리 면수 동쪽을 차지하면 혹시라도 관우가 번성을 차지해 촉의 세력이 그에 미쳤더라도 형주의 완성까지만 넘볼 수 있고 그 이상은 오나라의 견제가 가능하다.
조비가 위왕에 오른다고 하면 핏발 선 눈으로 저지해야 할 것은 관우였고 당시 상황은 관우가 필사적으로 위나라 세력과 투닥이면서 번성-양양 방어선을 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회남 방면의 하후돈장료가 본격적으로 번성전선에 투입되기 이전 서황의 선에서 관우의 진격은 정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관우의 진격은 양양선에서 정체되고 있었지만, 상용에서 도움이 없어 병력 부족으로[18] 번성에서 서황에게 격파되어 물러난 대신 관우는 양양을 완전히 포위해 연락을 끊는 데 성공했다. 즉, 면수를 사이에 두고 양양의 관우와 번성의 조조군이 서로 맞대고 장기전이 갈 공산이 컸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 틈을 노려 과거 손책이 노렸듯이 오나라가 합비, 수춘 라인을 타고 관우의 파상공세로 공백이 되어버린 예주로 먼저 진출해 오나라헌제를 손에 넣었다면 위나라의 협천자 이념 붕괴와 함께 오나라 스스로 협천자를 함으로써 촉의 한실 부흥 이념까지 견제할 수 있게 된다. 한실 부흥을 외치는 촉을 제어할 캐스팅 보트로서 이만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런 큰 그림에 오나라가 무작정 형주 쪽으로 진출해 실제 방어선에 맞지 않은 바보짓을 하는 것보다 양주를 온전히 아우르고, 서주와 예주를 차지해서 회남 방어선을 굳건히 한다라는 매력적인 옵션은 여몽의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손권은 합비에 그렇게 꼴아박았지만 타이밍 단 한 번을 놓친 대가로 결국 모두 망했다.
'결국에는 오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합비를 못 넘었다고 하지만, 이는 지나치게 결과론적인 생각'이라는 서술이 있는데, 이 항목에서 계속 설명하듯 절대 단순히 결과론적인 의견이 아니다. 후대의 많은 학자들조차 의문을 제기할 만큼 이 행동으로 오나라가 잃은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를 조조의 죽음과 비교를 하였는데 이는 절대 동일선상에 놓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여몽의 행동으로 오나라는 동맹을 잃고, 국력을 까먹었고, 위나라의 견제 장치를 꺾어버렸으며, 그렇게 얻은 형주는 제대로 활용조차 하지 못했다. 여몽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한다. 여몽이 죽더라도 오나라는 계속 존속하고 있다. 위왕에 오른 조조에 대한 반발은 많았으며 손권은 젊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장차 여몽이 죽더라도 오나라가 위나라에 반격할 기회는 충분했다.
거기에 조조가 갑작스레 병을 얻은 시점은 관우가 죽은 뒤다. 긍정적 평가에서는 마치 여몽이 조조의 죽음을 예측이라도 해서 촉의 독주를 막기 위해 행한 일인 것처럼 서술했는데 여몽이 조조의 죽음을 알았겠는가. 본인이 더 빨리 죽었는데 말이다. 조조의 죽음은 여몽에 대한 비판 요소가 되면 됐지 옹호 요인이 되긴 힘들다.[19] 상술한 말대로 창업 군주가 죽어서 나라가 흔들리고, 후계자 조비의 권력 기반이 튼튼하지 않고, 그 조비는 오만가지 삽질로 위나라의 국력을 계속 까먹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나라가 압도적으로 강했다. 이는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군주의 죽음으로 나라가 흔들리는 와중에도 위나라는 두 나라보다 훨씬 강했는데 조조가 죽지 않았다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겠는가? 도대체 여몽은 무슨 자신감으로 이러한 위나라한나라 없이 상대할 수 있다고 여겼는가?
여몽의 행동은 당대 국력의 핵심인 중원 땅을 차지한 위나라의 세력 공고화를 가져왔고, 위나라를 견제할 촉을 제 손으로 보내버리면서 패착을 가져왔다. 게다가 사학자들은 단순히 결과만을 보고 역사를 논하는 사람들이 아니며, 여몽, 그리고 오나라의 행동은 단순히 결과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도 충분한 의문을 가져온다. 결정적으로 1위인 위, 2위라는 촉을 동시에 상대하며 번성과 영안을 집어삼킬 수 있다던 여몽의 근자감은 둘째치고, 그 일을 벌이고 얻어낸 번성과 영안을 오는 갖다버리고 끝없이 합비에 '''또''' 꼴아박았다.
위나라를 공격했을 시 위나라의 보복 전쟁의 위험이 있다며 여몽을 옹호하는 의견도 있으나, 누누이 말하지만 이 또한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이미 관우의 양번 침공을 막기 위해 서황까지 지원을 보낸 시점에서 위가 오에 대해 총력전을 펼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20] 오히려 위나라가 병력을 끌어모아 보복전쟁을 가하는 게 문제가 된다면 더더욱 촉과의 동맹을 유지했어야 한다. 촉과 동맹을 해서 상대를 해도 강대한 적인데, 적국과의 전쟁이 무섭다고 동맹국을 치는 건 적을 돕는 꼴밖에 더 되겠는가? 더군다나 이미 조조를 상대로 유비손권의 연합군이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을 패퇴시킨 전례가 있었고, 형주 공방전 당시에는 삼국이 꽤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정리하면 여몽의 형주 병탈은 오나라가 망할 때까지 쓰지도 않을 땅을 얻기 위해 오나라의 마지막 부흥의 기회를 날려먹고는 아예 오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간 오나라 최악의 악수였다.[21] 실제 그 후유증으로 벌어진 이릉대전조비의 남정으로 오나라는 멸망 직전까지 몰렸고, 조비의 무능함 덕분에 오나라의 승리로 끝나서 다행인 거지 만약 패배했으면 여몽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는 여포조조원술의 대립에서 취한 스탠스와도 같은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포 또한 사실상 3위권이었던 세력이었고 2위였던 원술과 연합하면 1위인 조조를 몰아낼만한 힘이 생겼는데 여포가 개인의 감정을 앞세워 원술보다는 조조쪽을 선택해서 2위인 원술과 3위인 여포가 같이 몰락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다만, 여포는 모사인 진궁이 원술과 화친해야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무시한 것이지만 여몽의 경우에는 하술하겠지만 대전략을 제시할만한 여력이 안되었고 그런 묘수를 알려줄 사람이 없었다.
분명한 것은 여몽은 무능력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여몽은 밑바닥 출신에서 단물 쓴물 다 먹어가며 자기 실력으로 밀고 올라온 사람으로, 최종적으로 형주공방전 승리로 그 능력을 증명했다. 그럼에도 여몽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분석해볼 필요가 있는데, 그에게 있어 주유나 노숙 같은 고상한 귀족들이 천하 운운하며 내세운 대전략은 허황되게 느꼈을 것이고, 그 결과 본인이 전술적으로 땅을 빼앗는 입장에서는 당장의 손익 측면에서 효율적이었던 형주 공략이 가장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나라에 닥친 위기를 발판삼아 도약했어야 할 당시의 오나라에 필요한 인재는 주유, 노숙을 이을 대전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했다.[22] 하지만, 여몽은 신분의 차이도 있었고 군략에 늦게 심취한 이유도 있어서 전술적으로 능숙한 명장이 되었지만 큰 그림을 봐야 하는 전략에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후대의 평가다.

4. 미디어 믹스




[1] 친구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로 모신다는 뜻으로 '우리는 진짜 친구!'라는 셈이다.[2] 삼국지연의에서는 서성이 말한다.[3] 춘추시대 진(晉)나라 중군위를 역임했던 인물. 고령으로 중군위를 사임하려하자 진도공이 기해에게 후임자를 물었는데, 기해는 평소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던 해호를 추천했다. 그러자 진도공이 "해호는 그대의 원수가 아니오? 어찌 해호를 추천하는 것이오?"라고 묻자 기해는 "주공께서는 저에게 후임자를 물으셨지, 저의 원수가 누구인지 물으신 게 아닙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해호가 취임도 못하고 사망하자 진도공이 다시 후임자를 물었는데, 이번에는 자신의 아들을 꽂아넣었다. (...) [4] 하작이 말하길 양양을 점거하거나, 형주를 취한 후 다시 양襄, 번樊 으로 향한다고 해도, 만약 백제성이 촉에 있다면, 반장은 무엇에 근거하여 곧 가서 머물 수 있겠느냐며 이 계획에 의문을 품었다.[5] 하작은 조조가 원상, 원담을 격파한지가 10년인데 원씨를 새로이 격파하고, 유, 기를 위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조조 또한 멀리 하북에 있을 수는 없으니, 사서가 잘못되었다고 했고 주수창도 같은 의견을 냈다.[6] 이 당시 형주를 치는데 손권군 내에서 동조하는 기록은 있는 반면, 반대하는 기록은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손권군의 형주 공격은 이미 분위기상 확정된 듯하다.[7] 자치통감에 주를 단 송말원초 학자 호삼성 평론만 해도 여몽이 간사한 계책을 썼다고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육손과 함께 영웅의 뜻이었다고 하기도 한다.[다만] 이미 형주를 공격하고 관우를 죽인 시점에서 유비가 동오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오가 촉한을 공격하려 했을 가능성이 높다.[8] 물론 10만은 사마가를 비롯한 이민족들도 함께 계산했을 때지만.[9] 제갈량은 이릉에서처럼 본진을 지키며 물자를 지원해야 한다.[10] 여몽은 관우가 동쪽으로 가지 않은건 오로지 손권과 여몽 자신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했지만 실제로 관우는 오나라를 병탄하려 하기보단 북진하는걸 택했다. 즉 관우의 1순위는 양양, 번성이지 오나라가 아니라는 뜻이다.[11] 애시당초 촉한의 이데올로기는 위를 쳐서 한 황실의 권위를 되살리는 것이었다. 당연히 주적은 위나라고 오나라는 목표가 아니었다.[12] 물론 이것 역시 대단한 허상이다. 촉한은 망하던 그 시절까지 한중을 빼앗긴 적은 '''단 1번도 없다.''' 263년 촉이 망할 때도 한중은 20만에 달하는 조위군의 공세에도 함락이 아니라 우회돌파되었는데 여몽이 고작 무슨 수로 한중을 차지한단 말인가? 차라리 제갈량을 포섭해서 내응하게 만든다는 게 더 설득력 있어보인다.[13] 참고로 중국 돈 10위안짜리에 그려진 그림이 바로 영안 근처 삼협이다.[14] 참고로 이 사람, 서릉 전투에서 기가 막힌 공성전을 감행해 성공한 사람이다. 여몽보다 공세적인 전술이 약하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사람이다.[15] 이 인구수 통계는 오나라의 형주 병탄 이후를 기준으로 낸 것이기는 하지만, 그 전에도 촉의 인구수가 오의 인구수보다 많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위와 비교하면 변화량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16] 실제로 중국 역사에서도 장강 이남의 남조가 북벌을 실시해 그 끝에 중국을 통일한 사례는 명나라국민당의 중화민국, '''딱 두 번 뿐이였다.''' 그나마도 남조와 남송이라는, 한족 국가의 중추가 강남이어야 하는 상황이라 강남 개발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시대상이 반영된 결과였다.[17] 그나마도 전국 13주 중 하나의 주에 불과했던 촉이 상대적으로 전란이 극에 달했던 중원보다는 피해가 덜한데다 유비-제갈량이 역량을 극대화해서 이정도 차이로 줄어든 셈이다.[18] 번성 공방전에서 관우가 겨우 5천 보기를 동원할 때 서황은 조조의 12영을 지원군으로 받았다. 관우의 군이 강병이었기 때문이라고 서술했다.[19] 조조의 사망을 예측했다면 당연히 약해질 위나라의 방어선을 뚫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다. 설령 여몽이 형주 침공을 생각했더라도 손권의 형주 병탄 이후 합비 꼬라박 성향을 볼 때 손권이 전략안을 수정했을 가능성도 농후했다.[20] 관우에게 전력이 상당히 묶인 사이 촉은 제갈량의 북벌루트를 따라 옹양주 병탄을 위한 출전이 가능하며, 그 외에도 위나라는 주변 세력들 때문에 촉오 공동전선만 신경쓸 수도 없었다.[21] 형주를 점령했으나 역량도 제대로 써먹어보지 못한데다 원래의 장강방어선 구축 목적이었던 양번 - 영안 점령도 현실화하지 못했으니 실현 가능성으로는 위연의 자오곡 계책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그나마 양번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것도 자오곡 계책에서 주장했던 하후무의 도망을 조비가 양번 소개로 현실화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이루어졌을 뿐 곧 조인에게 탈환당했다.[22] 주유, 노숙 이후에는 그나마 제갈각이 이러한 전략가적 면모를 표출했으나, 자질의 한계로 인해 자멸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