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궁
1. 개요
대한민국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청와대 내)에 위치한 조선의 왕들을 낳은 친어머니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신 장소다.[1] 즉, 칠궁은 법적 어머니인 왕비에게 바치는 효와는 별개로, 생모에게 바치는 사적인 효를 위해 세운 곳이다.
원래는 한성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영조가 자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 '육상궁'을 건립한 이후 융희 2년(1908) 연호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이 옮겨왔고 1929년 덕안궁이 들어온다. 그 결과 모두 7개의 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서 칠궁(七宮)이라고 이름 지어졌다. 유명한 장희빈의 위패도 여기에 있다.
2001년 11월 24일 일반에게 개방되었으나 청와대 관람코스에 들어 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가기는 힘들다. 보안상 문제로 담 넘어 청와대를 찍으면 안 된다.
칠궁은 서울 육상궁이라는 명칭으로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어 있다.
2. 구성하는 일곱 궁
여담으로 해설 중 누군가가 가운데 길로 오면 해설자가 귀신이 왔다고 하는 전통이 있다.[5]
3. 칠궁에서 폐지된 궁
의빈 성씨의 사당은 정조부터 순종 때까지 의빈묘(宜嬪廟) 혹은 의빈궁(宜嬪宮)이라고 불렀다. 간혹 안현궁(安峴宮)이라 하기도 했는데 1786년(정조 10)에 의빈의 빈소를 안현의 본궁에 마련했기 때문이었다. 의빈이 공식적으로 궁호를 받은 기록이 현존하지 않고 사당 명칭이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의빈궁(宜嬪宮)은 대빈궁(大嬪宮)과 한 가지 유사한 점이 있는데 옥산부대빈 장씨의 사당은 대빈(大嬪)이라는 빈호 자체로 대빈궁(大嬪宮)이라고 했다. 또한 경종 이후에 대빈방(大嬪房)[8] , 대빈묘(大嬪廟)[9] , 희빈묘(禧嬪廟)[10] 라고 종종 기록했다.
1787년(정조 11)에 정조가 처음으로 의빈궁(宜嬪宮)이라는 칭호를 썼고[12] 우유량(劉佑良)은 의빈궁의 청지기였다.[13] 9월 13일에 의빈궁의 치제[14] 와 관련해서 해궁(該宮)이 담당했는데 해궁은 다른 궁방(宮房)과는 특별했다.[15] 보통 해궁보다 해조(該曹)에서 주관하는 경우가 많았다.내가 이르기를,
“'''의빈궁(宜嬪宮)'''의 치제(致祭)에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가 이미 수향(受香)하고 나갔는가?”
하니, 홍인호가 아뢰기를,
“이미 전향(傳香)하였습니다.”
하였다. 내가 이르기를,
“상제(祥祭)의 제문은 일찍이 친히 지어 놓은 것이 있으니, 승지는 '''해궁(該宮)'''에 나아가서 충의(忠義)로 하여금 축식(祝式)대로 쓰게 하고, 효창묘(孝昌墓)의 향축(香祝) 및 의빈묘(宜嬪墓)의 향축은 서제소(書題所)에 임시로 봉안하였다가 내일 새벽 묘소에 나아가 조상식(朝上食)을 할 때 섭제(攝祭)를 겸행(兼行)하도록 하라. 섭제 제관은 모두 곧장 나아가게 하는 것이 좋겠다.”[11]
1797년(정조 21) 2월부터 작성한 《제물등록》에는 육상궁(毓祥宮), 선희궁(宣禧宮), 의빈궁(宜嬪宮)를 삼궁(三宮)으로 지칭하여 동일한 격식으로 제사를 지냈다.[16] 1799년(정조 23년)에 완성한 《사전사례편고》에는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육상궁(毓祥宮), 연호궁(延祜宮), 선희궁(宣禧宮), 의빈궁(宜嬪宮)의 제사에 대해 담겨있다.[17] 1865년(고종 2)에 편찬한 《대전회통》과 1867년(고종 4)에 반포한 《육전조례》 등 법전에 의빈궁(宜嬪宮)이 기록 되었다.
즉, 의빈 성씨는 1787년(정조 11)에 빈호 의빈(宜嬪)으로 하여 사당을 의빈궁(宜嬪宮)으로 정하고 1797년(정조 21) ~ 1799년(정조 23)에 명문화했다고 볼 수 있다.
1873년(고종 10)에 개편된 《태상지》의 〈궁(宮)〉 조항에는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육상궁(毓祥宮), 연호궁(延祜宮), 경우궁(景祐宮), 선희궁(宣禧宮), 의빈궁(宜嬪宮)이 있었다.[18] 1898년(광무2)에 《향수조사책》에서 이 궁(宮)을 칠궁(七宮)으로 지칭했다.[19]
그러나 1908년(융희 2)에 제사 제도가 개정되어서 의빈궁은 칠궁에서 폐궁되었으나 명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20] 의빈궁은 의소세자(의소태자)와 문효세자(문효태자)의 무덤인 의령원과 효창원의 예법에 따라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냈다.
의빈 성씨는 정식으로 궁호를 받지 못했지만 의빈궁(宜嬪宮)이 사당이고 궁호였다고 볼 수 있다. 칠궁에 있었던 의빈궁이 철폐될 때 폐묘(廢廟)가 아닌 폐궁(廢宮)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왕세자의 무덤인 원(園)의 예로 제사를 지내게 된 점을 그 마지막 근거로 볼 수 있다.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에 봉안한 신위는 육상궁 안에 각별히 신주의 방을 만들어 합사하고, 폐궁(廢宮)의 경우 연호궁을 제외하고 모두 국유로 이속시킨다. 신위를 이안하는 절차는 궁내부에서 따로 이를 정한다. 의빈궁(宜嬪宮), 경수궁(慶壽宮), 영소묘(永昭廟), 문희묘(文禧廟)에 봉안한 신위는 매안(埋安)하고 해당 궁과 사당은 의빈궁을 제외하고 모두 국유로 이속시킨다. 다만 의빈궁과 경수궁의 묘소에는 영소묘와 문희묘의 원소(園所) 예에 따라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고, 매안 절차는 궁내부에서 따로 이를 정한다.[21]
4. 바깥고리
- 한국어 위키백과 : 서울 육상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서울육상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칠궁
- 시사상식사전 : 육상궁
- 시사상식사전 : 칠궁
-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 칠궁
- 답사여행의 길잡이 15 - 서울 : 육상궁(지상 건물 일체 포함)
- 두산백과 : 서울 육상궁
5. 사적 제149호
영조의 생모이며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영조 원년(1724)에 세워 숙빈묘라 했으나 영조 29년(1753)에 승격시켜 육상궁이라 고쳐 불렀다. 고종 19년(1882) 화재를 당하여 다음해에 복구했다. 육상궁은 칠궁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1908년에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는 7개의 궁들을 이곳에 옮겼기 때문이다. 칠궁은 육상궁, 저경궁, 대빈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을 일컫는데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친모로서 정비에 오르지 못한 7인의 신위를 모셔 제사지내는 곳이다.
육상궁은 나즈막한 담에 둘러싸여 있고 왼쪽에는 네 개의 사당이 각기 독립해 서로 접하여 서있다. 이 사당 앞쪽에는 제사지내는 곳과 우물이 있으며 그 앞에 정문이 있다. 제사 지내는 건물 주위의 뜰은 한국식 정원의 전형을 이루어 정숙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육상궁(지상건물일체포함) → 서울 육상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