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후겸

 


鄭厚謙
1749년(영조 25) ~ 1776년(정조 원년)
1. 개요
2. 생애
2.1. 영조 생전
2.2. 영조 사후
2.3. 사후


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백익(伯益). 초명은 정인대(鄭麟大)#. 화완옹주의 양자이자 외척이다.

2. 생애


1749년 경기도 인천도호부 제물포(현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생선장수 정석달(鄭錫達)[1]의 6형제[2]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3] 이후 1757년(영조 33) 족숙인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과 영조의 서녀 화완옹주에 입양되었다.#

2.1. 영조 생전


당시 영조에게 가장 총애받던 딸 화완옹주양자이다 보니 정후겸도 덩달아 영조에게 많은 총애를 받았다. 1764년(영조 40) 장원서봉사(掌苑署奉事)#·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며, 이듬해인 1765년 식년시 생원시·진사시에 각각 3등 57위#, 2등 10위#로 급제하여 같은 해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세자익위사위수(世子翊衛司衛率)#에 제수되었다. 1766년(영조 42)에는 정시 문과에 을과 1위(아원)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제수되었다.# 이후 1767년(영조 43) 수찬에 올랐고, 이어 부교리·지평을 지내고 1768년 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개성부유수를 거쳐 호조참의·호조참판·공조참판을 지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정후겸은 김귀주와 함께 혜경궁 홍씨와 세손을 공격하는 등의 모략을 많이 세웠다고 하며, 세도가로 혜경궁 홍씨의 숙부였던 홍인한(洪麟漢)과 더불어 국정을 좌우하였다. 1775년 영조가 정조에게 대리청정할 것을 선언할 때에도 강력히 반대했고 동궁에 사람을 비밀스럽게 보내어 세손의 언동을 감시케 하기도 했다. 또한 한편으로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세손의 비행을 조작하고 부사직(副司直) 심상운(沈翔雲)을 시켜 세손을 보호하는 홍국영을 탄핵하는 등# 세손을 모해하는 데 분주하였다.

2.2. 영조 사후


정조 즉위 후 정조에 반대했던 노론 세력이나 화완옹주의 힘이 줄고, 정조의 측근인 홍국영, 채제공이나 소론, 남인 등이 힘을 얻으면서 정후겸도 힘이 줄어든다. 정조 즉위 후 대신들이 정후겸을 죽일 것을 요청하면서 결국 함경도 경원도호부에 유배되어 위리안치되었다가, 이후 정조 암살 시도가 일어나자 결국 사사되었다.

2.3. 사후


순조 때 역적으로 단죄되었지만 1908년(순종 융희 2) 내각 총리 대신이자 매국노 이완용과 법부대신 조중응 등의 건의로 복권되었다.#
[1] 1757년 참봉을 시작으로#, 정후겸의 후광을 입어 1759년 상의원주부(尙衣院主簿)#·감찰(監察)#·연기현감(燕岐縣監)#, 1765년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배천군수(白川郡守)#, 1768년 대구판관(大丘判官)#, 1772년 서흥부사(瑞興府使)#·상주목사(尙州牧使)# 등 문과는 커녕 생원·진사시에도 등과하지 않았는데도 정3품 요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2] #[3] 본생가 형인 정일겸(鄭日謙, 1747년생)은 1771년(영조 47) 식년시 진사시에 2등 17위로 급제하고# 1772년(영조 48) 정시 문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하여# 1775년 정3품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이르렀다. 본생가 첫째 동생 정시겸(鄭時謙, 1754년생)은 1773년(영조 49) 증광시 진사시에 1등 4위로 급제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