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조엘

 


''' 빌리 조엘의 주요 수상과 헌액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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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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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빌리 조엘
BILLY JOEL
'''
<colbgcolor=#0c0000> '''멤버'''
(개인자격)
'''입성 연도'''
'''1999년'''
'''후보자격 연도'''
'''1997년'''
<bgcolor=#0c0000> '''후보선정 연도''' ||<bgcolor=#0c0000> '''{{{#ffd700 1998년,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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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작곡가 명예의 전당 헌액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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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빌리 조엘
BILLY JO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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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d700 1992년}}}''' 출처 참조










''' 역대 그래미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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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레코드상'''
'''제20회
(1978년)'''

'''제21회
(1979년)'''

'''제22회
(1980년)'''
"Hotel California" - 이글스

'''"Just the Way You Are" - 빌리 조엘'''

"What a Fool Believes" - 두비 브라더스
'''올해의 노래상'''
'''제20회
(1978년)'''

'''제21회
(1979년)'''

'''제22회
(1980년)'''
"Evergreen" -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You Light Up My Life" - 조셉 브룩스

'''"Just the Way You Are" - 빌리 조엘'''

"What a Fool Believes" - 두비 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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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image]
'''이름'''
'''빌리 조엘
BILLY JOEL
'''
'''분야'''
'''음악'''
'''입성날짜'''
'''2004년 9월 20일'''
'''위치'''
'''6235 Hollywood Bl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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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lly Joel
빌리 조엘'''
'''본명'''
윌리엄 마틴 조엘
William Martin Joel
'''국적'''
미국 [image]
'''출생'''
1949년 5월 9일 (74세)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브롱스
'''직업'''
싱어송라이터, 작곡가, 프로듀서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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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66cm
'''배우자'''
엘리자베스 웨버 (1973 - 1982)
크리스티 브링클리 (1985 - 1994)
케이티 리 (2004 - 2010)
알렉시스 로데릭 (2015 - )
'''자녀'''
장녀 알렉서 레이 조엘
차녀 델라 로스 조엘
삼녀 레미 앤 조엘
'''활동'''
1965년 - 현재
'''데뷔'''
1971년 정규 1집 Cold Spring Harbor
'''악기'''
보컬, 건반 악기, 기타
'''장르'''
, , 팝 록, 로큰롤, 소프트 록, 컨트리 록, 포크, 재즈, R&B, 클래식
'''링크'''
BJ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1949~1964)
2.2. 초창기 (1965~1976)
2.3. 전성기 (1977~1986)
2.4. 중년기 (1987~2009)
2.5. 노년기 (2010~)
3. 빌리 조엘 밴드
4. 내한 공연
5. 엘튼 존
6. 개인사
6.1. 오토바이 교통사고
6.2. 기타
7. 디스코그래피
7.1. 앨범
7.2. 싱글
7.2.2. 빌보드 핫 100 2위
7.2.3. 빌보드 핫 100 3위~10위
7.2.4. 빌보드 핫 100 11~20위
7.2.5. 빌보드 핫 100 21~4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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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iano Man'''
미국싱어송라이터이다. 작사/작곡은 본인이 혼자서 하며 주로 피아노를 기반해서 작곡한 곡들이 대부분이다. 1973년 대표곡 Piano Man처럼 서사적이고 애환을 담은 통렬한 가사를 써서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래서 '''Piano Man'''은 그를 명칭하는 닉네임이 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1억 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으며, RIAA(미국 음반 산업 협회)에 따르면 미국에서 일곱 번째로 가장 많은 음반 판매고를 올린 뮤지션이다. 빌보드 200에서 가장 성공한 뮤지션 16위에 선정되었다.[1]
1971년 정규 1집 Cold Spring Harbor부터 1993년 정규 12집 《River Of Dreams》까지 총 12장의 정규 앨범들을 발매했으며 12집을 끝으로 앨범 작업에서 은퇴했다.[2] 그 이후로 발매된 앨범들은 라이브 실황과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2001년에 정규 13집 《Fantasies & Delusions》를 발매했는데 팝 앨범이 아니라 피아노 연주곡들로 수록된 클래식 앨범이다. 이후 정규 앨범은 한 장도 안 나왔다.
1992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 1999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3] 1993년에는 버클리 음악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Hon DMus)를 받았으며 총 6개의 명예 학위를 보유하고 있다. 2013년에는 케네디 센터 공로상을 받았다.[4]

2. 생애



2.1. 유년기 (1949~1964)


뉴욕 브롱크스에서 "윌리엄 마틴 조엘"(William Martin Joel)로 태어났다. 독일 유대인 아버지 "하워드 조엘"(Howard Joel),[5] 미국 유대인 어머니 "로서린드 니만 조엘"(Rosalind Nyman Joel).[6] 하워드 조엘은 이름이 헬무트(Helmuth)였으나 이후 하워드로 개명했고, 나치 박해를 피해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7] 빌리 조엘이 태어났을 때 브롱크스에서 거주했으나 그가 1살이었을 때 롱아일랜드 힉스빌로 이사를 갔다.[8] 빌리 조엘에게는 누나 주디스 조엘이 있는데 그의 어머니 로서린드 조엘이 세상을 떠난 자매 뮤리엘 니만의 딸을 입양한 것이다.[9] 1957년에 부모는 이혼했다. 하워드 조엘은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다른 여성과 재혼해 아들 "알렉산더 조엘"(Alexander Joel)[10]을 두었고, 오스트리아 에서 거주했다. 반면 로서린드 니만은 재혼하지 않았다.
빌리 조엘은 3살부터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고, 어머니로부터 피아노 레슨도 받았다.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면서 십대 때는 아마추어 복서로 활동하기도 했다. 총 22번의 경기에서 우승했지만 한 경기에서 코 부상을 심하게 당해 복서 활동을 멈추었다.[11] 고등학생부터 여러 클럽들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일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피아노 레슨을 받을 때 클래식을 전공하면서도 로큰롤R&B 등 다양한 음악을 들으며 큰 영향을 받았다.

2.2. 초창기 (1965~1976)


[image]
더 해슬스(The Hassles), 가장 왼쪽이 빌리 조엘이다.
1965년, 친구들과 함께 밴드 '에코스'를 결성했고 여러 음반사에서 돌아다니며 세션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했다.[12] 이후 밴드를 탈퇴한 빌리 조엘은 1967년에 사이키델릭 록 밴드 '더 해슬스'(The Hassles)에 합류했다.[13] 1967년 발매된 해슬스의 정규 1집 《The Hassles》는 상업적으로 실패했고, 1969년 발매된 정규 2집 《Hour Of The Wolf》도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1967년 11월 발매된 해슬스의 싱글이자 커버곡 "You've Got Me Hummin'"[14]은 미국에서 112위에 오르는데 그쳤다. 이 곡은 16년 뒤 1983년 발매된 "Tell Her About It" 12인치 싱글 B면에 수록되었다.[15]
1969년 해슬스를 탈퇴한 빌리 조엘은 해슬스의 드러머 존 스몰과 함께 듀오 아틸라(Attila)를 결성했다.[16] 프로그레시브 록헤비 메탈을 시도한 정규 1집 《Attila》를 1970년 발매했지만 이 앨범도 상업적으로 실패하면서 아틸라 활동도 그만두었다.
1971년 11월, 서정적인 곡들로 수록한 솔로 정규 1집 Cold Spring Harbor를 발매했다. 그러나 앨범 마스터링 중에 턴테이블이 빨리 돌아가는 채로 작업되어 곡의 속도와 빌리 조엘의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음이 올라간 상태로 발매되었다.[17] 이 음향 에러는 1983년 재발매반에서 수정되었다.
[image]
1972년 센트럴 파크에서
이에 분노한 빌리 조엘은 앨범 프로듀싱을 맡은 프로듀서이자 패밀리 프로덕션 레코드의 사장 아티 립한테 책임을 요구하자 패밀리 프로덕션 측은 오리지널 마스터 테이프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곡들의 저작권에 대한 모든 권리는 빌리 조엘에게 간다고 서명했다. 그러나 빌리 조엘은 1집 발매에 앞서 패밀리 프로덕션에서 정규 앨범 10장을 발매한다는 레코딩 계약 조건, 악보 출판권과 인세까지 계약을 체결한 상태였다.[18] 데뷔 앨범의 실패, 불리한 계약 문제로 데뷔 초부터 갖가지 문제들을 안고 순탄치 못한 시기를 보냈다.
《Cold Spring Harbor》 발매 이후 빌리 조엘은 뉴욕을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고, 1972년에는 6개월 동안 로스앤젤레스의 윌셔와 웨스턴 애비뉴의 교차로 근처에 위치한 술집에서 빌 마틴이라는 가명으로 피아노 연주자로 잠시 일했다.[19] 그 무렵, 필라델피아 라디오 방송국 WMMR의 음악 감독이자 무명이던 빌리 조엘을 큰 관심을 보였던 데니스 윌렌은 빌리 조엘에게 자신의 방송에서 라디오 공연을 부탁하자 1972년 4월 15일에 라디오 공연을 열었다. 이 공연은 라디오에서 전파되며 큰 인기를 끌었는데, 특히 《Piano Man》의 수록곡이 된 "Captain Jack"이 라디오에서 수차례 방영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20] 이 계기로 컬럼비아 레코드는 빌리 조엘에 큰 관심을 보였고 빌리 조엘은 컬럼비아와 계약하게 된다.[21]
1973년 11월, 컨트리 록과 포크 록을 시도한 정규 2집 Piano Man이 발매되었고 타이틀 트랙이자 1972년 로스앤젤레스 술집에서 피아노 연주자로 일했던 시절을 바탕으로 쓴 곡 "Piano Man"이 싱글로 발매되었다. 그 결과 2집은 미국 27위, 캐나다 26위, 호주 3위[22] 등 차트에 진입한 첫 빌리 조엘 앨범이 되었으며, "Piano Man"는 미국 25위, 캐나다 10위 등 기록하며 차트에 진입한 첫 싱글이 되었다.
그러나 빌리 조엘은 《Piano Man》으로 생긴 대부분의 수익을 받지 못했고, 그 성공을 이어갈 다음 작품을 작업한다는 압박을 받으며 다소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갔다.[23] 컨트리 록, 포크 록 위주의 곡들로 수록한 정규 3집 《Streetlife Serenade》를 1974년 10월 발매했지만 이전 앨범에 비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 앨범에는 미국 34위, 캐나다 30위에 오른 싱글 "The Entertainer"가 수록되었다.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다시 뉴욕으로 이사 간 빌리 조엘은 1976년 정규 4집 《Turnstiles》를 발매했다. 포크 록, 컨트리 록 등 미국 전통 음악에 록을 결합한 음악을 선보인 이전 앨범들과 달리 이 앨범에서는 록, 팝 음악 색채가 강하며 음악적으로 일취월장한 앨범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Say Goodbye To Hollywood", "Summer, Highland Falls", "New York State Of Mind", "Prelude/Angry Young Man", "Miami 2017" 등 현란한 피아노 연주를 담은 빌리 조엘의 1970년대 대표곡들이 다수 수록되었다.[24] 이 앨범은 미국 빌보드 200에서 122위에 오르는데 그쳤지만 호주에서는 12위에 오르며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2.3. 전성기 (1977~1986)


거물 프로듀서 필 라몬과 함께 작업한 정규 5집 The Stranger를 1977년 9월 발매했다. 빌보드 200에서 2위에 오른 이 앨범은 세계적으로 10~20위권 진입했고 미국에서 1천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RIAA 기준 다이아몬드(플래티넘 10장)를 기록하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음악적으로 호평을 받았다.[25] 이 앨범은 1985년에 기록이 깨지기 전까지 사이먼 앤 가펑클Bridge Over Troubled Water의 기록을 깨며 콜롬비아에서 가장 많이 인쇄된 앨범이었다.[26]
5집의 싱글들 "Movin' Out (Anthony's Song)", Just the Way You Are, "She's Always A Woman" 모두 싱글 차트 40위권 진입했고, "Just the Way You Are"는 1979년 제21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노래, 올해의 레코드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누렸다. 필 라몬은 5집부터 1986년 10집 《The Bridge》까지 10년 가까이 빌리 조엘과 함께하게 되었다. 1978년 발매된 정규 6집 52nd Street는 미국에서 1위에 오른 첫 앨범이 되었고 1979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하는 등 《The Stranger》 못지않게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27] 싱글들 "My Life", "Big Shot", "Honesty" 역시 히트했다.
1980년 정규 7집 《Glass Houses》에서 빌리 조엘은 뉴욕 분위기가 강한 이전 앨범들에서 벗어나 뉴웨이브펑크를 시도하여 더욱 거세고 록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이 앨범은 미국에서 1위를 기록하고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1981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앨범상, 최우수 로큰롤 남성 보컬상을 수상했고, 1980년대 미국에서 41번째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이름을 올렸다.[28] 7집 싱글들 "You May Be Right", "Don't Ask Me Why", It's Still Rock and Roll to Me는 10~20위권 진입에 성공했는데 "It's Still Rock and Roll to Me"로 첫 번째 빌보드 핫 100 1위 히트곡을 세우게 된다.
[image]
1978년 52nd Street 순회공연에서
1980년 북미 공연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 《Songs In The Attic》을 1981년 발매했다. 빌리 조엘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70년대 초기 작품들을 다시금 알려지게 하면서도 팬들의 바람을 들어준 것이라고 밝혔다.[29] 이 앨범은 세계 각지에서 10위권 진입에 성공했고, "Say Goodbye To Hollywood", "She's Got A Way"의 라이브 음원이 싱글로 발매되어 빌보드 핫 100 40위권 진입에 성공했다. 1982년 정규 8집 《The Nylon Curtain》은 뉴웨이브 음악을 시도하면서도 베이비붐 세대의 애환과 아메리칸드림에 관한 비관론 등의 사회적인 주제를 삼았으며, 비틀즈 색채가 강한 곡들로도 수록했다. 이 앨범은 음악적으로 호평받았다.[30] 싱글로 발매한 "Allentown", "Pressure"는 싱글 차트 40위권 진입했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곡 "Goodnight Saigon"은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1위를 기록했다.
1950~60년대 R&B, 로큰롤, 소울 음악에 영감을 받아 복고적인 곡들로 수록한 1983년 정규 9집 《An Innocent Man》을 발매했다.[31] 이 앨범은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싱글로 발매한 "Tell Her About It"은 두 번째 빌보드 핫 100 1위 히트곡이 되었고, "Uptown Girl"[32]은 영국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한 첫 번째 싱글이 되었으며, 1984년까지 연달아 발매한 후속 싱글들 "An Innocent Man", "The Longest Time", "Leave A Tender Monet Alone", "Keeping The Faith" 모두 미국 40위권 진입에 성공했다. 1985년 곡 We Are The World에 참여했고, 동년 9월 발매된 컴필레이션 앨범 《Greatest Hits - Volume I & Volume II》는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85년 발매한 싱글들 "You're Only Human (Second Wind)", "The Night Is Still Young"도 싱글 차트 40위권 진입했다.
1986년 발매한 정규 10집 《The Bridge》는 세계적으로 준수한 성공을 거두었고, 싱글들 가운데 "Modern Woman"[33], "A Matter Of Trust", "This Is The Time"이 싱글 차트 40위권 진입했다. 10집 수록곡 "Baby Grand"는 레이 찰스와 듀엣으로 불렀고, "Code Of Silence"는 신디 로퍼와 듀엣으로 불렀다. 이 앨범을 끝으로 빌리 조엘은 데뷔 시기부터 15년간 이어졌던 패밀리 프로덕션과의 악연에서 벗어났다. 이 앨범의 수록곡 "Getting Closer"가 이를 노래하고 있다.

2.4. 중년기 (1987~2009)


1987년 7월 26일부터 8월 5일까지 11일 동안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6차례 순회공연을 진행하며 소련 시절 러시아를 방문한 첫 번째 록 뮤지션들 중 하나가 되었으며 서방국가 뮤지션으로서 최초로 공연 실황이 전 세계 라디오에서 동시 방영되기도 했다.[34] 11일간의 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고, 러시아 공연들 실황을 담은 라이브 앨범 《КОНЦЕРТ》가 1987년 10월 발매되었다.[35]
1988년 개봉한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 올리버와 친구들에서 주제가 "Why Should I Worry"를 불렀고, 다저 역을 맡으며 성우로 출연했다.[36]
1989년 정규 11집 《Storm Front》를 발매했다. 빌보드 200 1위, 호주 1위, 캐나다 4위, 영국 4위 등 대부분의 국가에서 10위권 진입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미국에서는 1980년 7집 《Glass Houses》 이후로 1위에 오른 첫 앨범이 되었다. 1990년까지 연달아 발매된 싱글들 "The Downeaster Alexa", "I Go To Extremes", "And So It Goes", We Didn't Start The Fire, "Leningrad", "That's Not Her Style", "Shameless"[37] 대부분 세계 각지에서 싱글 차트 40위권 진입에 성공했다. 리드 싱글 "We Didn't Start The Fire"는 미국에서 1위에 오르며 빌리 조엘의 세 번째 빌보드 핫 100 1위 히트곡이 되었다.
1989년 8월, 빌리 조엘의 매니저였던 프랭크 웨버[38]에게 수백만 달러를 사기당해 잃어버려 법적 분쟁을 벌였고, 1992년에는 전 변호사 알렌 그루브먼을 사기죄, 수탁 책임, 의료 과오와 계약 문제로 소송을 걸었다.[39][40]
[image]
《River Of Dreams》 1994년 호주판 박스 세트 표지
1993년 정규 12집 《River Of Dreams》를 발매했다. 《Storm Front》처럼 주변 사람들의 배신과 은애(恩愛) 같이 자전적 주제를 삼았다. 빌보드 200 1위, 영국 3위 등 전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싱글들 "The River Of Dreams", "No Man's Land", "All About Soul", "Lullabye (Goodnight, My Angel)" 전부 싱글 차트 40위권 진입했다. 《River Of Dreams》를 끝으로, 빌리 조엘은 더 이상 팝 앨범을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41]
앨범 작업에서 은퇴한 이후 공연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1994년부터 2010년까지 16년간 엘튼 존과 함께 합동 투어 〈Face To Face〉를 진행했고, 이 시기부터 미국의 각종 대학교에서 강연회를 열었다.[42] 1997년에는 밥 딜런의 "To Make You Feel My Love",[43] 프레디 스콧의 "Hey Girl"을 커버해 싱글로 발매했다.[44]
2000년 10월 20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엘튼 존의 One Night Only 공연에서 함께 듀엣으로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불렀다.[45]
2001년 10월 2일 정규 13집 《Fantasies & Delusions》를 발매했다. 팝 앨범이 아닌 클래식 연주곡들로 수록된 앨범이며, 리처드 형기 주가 작업에 참여했다. 모든 수록곡들은 빌리 조엘이 작곡했고 연주는 리처드 형기 주가 맡았다. 13집이 발매된 시기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빌리 조엘이 리처드 형기 주를 초대하여 수록곡 "Invention In C Minor", "Air"를 연주했다.[46]
2005년에는 《River Of Dreams》 이후로 오랜만에 작곡한 신곡 "All My Life", 2007년에는 "Christmas In Fallujuh"를 싱글로 발매했다. "Christmas In Fallujuh"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캐스 딜런과 함께 듀엣으로 부른 곡이다.[47]
2008년 7월 16~18일 셰이 스타디움의 역사를 닫는 마지막 공연을 열었다. 16일과 18일에 두 차례의 공연을 진행했는데 폴 매카트니가 무대에 올라 함께 "I Saw Standing There", Let It Be를 불렀다.[48] 이 공연은 2011년에 라이브 앨범 《Live At Shea Stadium: The Concert》로 발매되었다.

2.5. 노년기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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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하는 빌리 조엘
2012년 12월 12일, 허리케인 샌디에 의한 피해자들과 미국 동부 복구를 위한 자선 공연 <12-12-12: The Concert for Sandy Relief>에 참여했다.[49]
2013년 12월에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한 달에 한 차례씩 여는 전속 공연을 무기한으로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50] 2014년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의 공연들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진행하면서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가장 많은 공연을 진행한 뮤지션이 되었다. 1978년 12월 14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첫 공연을 진행한 이후로 2020년 2월 기준으로 128차례의 공연을 진행했다.[51] 2020년 3월 이후로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하여 모든 공연들을 연기했다.[52]
대체로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들에서는 "Surprises", "A Room Of Our Own", "Scandinavian Skies", "Running On Ice", "All About Soul", "This Night", "You're Only Human", "House Of Blue Light", "Modern Woman" 등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거나 라이브에서 거의 부르지 않은 곡들과 커버곡들을 자주 불렀고, 브라이언 존슨, 스팅, 루퍼스 웨인라이트, 지미 팰런, 아이작 펄만 등 유명 인사들이 공연에 참여해 노래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한다.[53]

3. 빌리 조엘 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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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래리 러셀, 빌리 조엘, 알 허츠버그, 리스 클락 (1972년)
멤피스에서 공연하는 빌리 조엘 밴드 (1974년 3월)
빌리 조엘은 순회공연을 돌기 위해 백업 밴드를 1971년 결성했다. 기타리스트 알 허츠버그, 베이시스트 래리 러셀, 드러머 리스 클락이 밴드에 합류했다. 1972년까지 대부분 스튜디오 공연으로 진행했다.[54] 1971년 데뷔 앨범 Cold Spring Harbor에 백업 연주로 참여한 리스 클락은 1973년 Piano Man까지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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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1977[55]
1978~1981[56]
1982~1987[57]
1974년부터 1976년 사이에 베이시스트 더그 스테그마이어, 드러머 리버티 드비토, 색소포니스트 및 퍼커셔니스트 리치 카나타, 기타리스트 러셀 재버스, 하위 애머슨이 합류했다.[58] 역대 빌리 조엘 밴드 가운데, 가장 빼어난 연주 실력을 선보인 밴드로 평가받는다. 1978년 6집 《52nd Street》부터 하위 애머슨 대신 기타리스트 데이비드 브라운이 합류했고 1982년에는 리치 카나타 대신 키보디스트 데이비드 리볼트, 색소포니스트 및 퍼커셔니스트 마크 리베라가 합류했다.
2016년 방영된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하이어드 건: 영혼을 쏘다〉가 이 시기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59] 여러 세션 뮤지션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다큐멘터리로, 러셀 재버스와 리버티 드비토의 인터뷰와 그 당시 빌리 조엘 영상 등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조지 마틴과 함께할 수 있었지만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 필 라몬과 작업을 택했다는 이야기, 이들과 함께하는 건 가족과도 같다는 말을 하는 등 백 밴드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긴 시절의 빌리 조엘의 인터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법적 분쟁에 휘말린 빌리 조엘은 수백만 달러를 전 매니저 프랭크 웨버에게 사기당해 잃어버리고 밴드를 조정했는데, 이 시기[60]에 해고된 러셀 재버스는 굉장히 분통해 했고, 더그 스테그마이어의 1995년 자살이 이와 관련됐다는 얘길 강하게 남겼다. 빌리 조엘과 20여 년을 더 함께 했던 리버티 드비토도 2005년 불화로 갈라섰다. 리버티 드비토는 2009년에 빌리 조엘과 소니 뮤직을 상대로 10년간의 인세 미지불로 소송을 걸었는데 2010년에 타협적으로 끝났다.[61]
이들은 빌리 조엘에 대한 서운함과 아쉬움을 표했는데, 특히 해고가 아니라 그저 재계약 통보를 받지 못할 뿐이라는 점이 그들이 더 서운해했던 이유라고 한다. 빌리 조엘이 자신들도 모르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을 2006년에 열었을 당시 지인들이 그 표를 부탁할 때 자기가 해고된 걸 알게 됐다고 밝혔다. 그래도 리버티 드비토는 빌리 조엘이 전화해서 사과만 해준다면 언제든 다시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얘기를 남기기도 했다. 빌리 조엘과 갈라선 이후, 리버티 드비토와 러셀 재버스, 리치 카나타[62]는 2014년에 "The Lords of the 52nd Street"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빌리 조엘 곡들을 연주하며 순회공연을 가지고 있다.[63]
2020년 7월, 리버티 드비토는 자서전 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10년 전 소송 이후로 감정이 많이 누그러져 앞으로 빌리 조엘과 다시 친하게 지낼 수 있다고 밝혔다.[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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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왼쪽부터 마크 리베라, 크리스털 탈리페로, 비카 브램레트, 마이클 멜렛. 앞 왼쪽부터 데이비드 로젠탈, 데이비드 산토스, 빌리 조엘, 리버티 드비토, 토미 번스 (1988~2003)
1988년부터 데이비드 브라운, 리버티 드비토, 마크 리베라를 제외한 멤버들을 해고하며 13년 만에 밴드 라인업에 큰 변화를 가했다. 러셀 재버스 대신 토미 번스가 합류했고, 더그 스테그마이어[65] 대신 베이시스트 셔일러 딜, 퍼커셔니스트 및 백 보컬리스트 크리스털 탈리페로가 합류했다. 1993년 《River Of Dreams》 투어 때는 데이비드 브라운과 셔일러 딜 대신 베이시스트 톰 "T-본" 울크, 키보디스트 데이비드 로젠탈이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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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상단부터 마이클 델쥬디체, 척 버기, 앤디 시콘, 토미 번스. 토미 번스 아래부터 마크 리베라, 크리스털 텔리페로, 빌리 조엘, 데이비드 로젠탈, 칼 피셔 (2005~)
1988년 이후로 다시 한번 밴드 라인업에 변화를 가했다. 빌리 조엘과 법정 소송 다툼 및 불화로 갈라선 리버티 드비토 대신, 빌리 조엘의 음악을 다룬 브로드웨이 뮤지컬 〈Movin' Out〉에서 드러머로 참여했던 척 버기가 합류했다. 베이시스트는 앤디 시콘이 합류하고, 호른 세션으로 칼 피셔가 합류했고, 2013년부터 리듬 기타리스트로 마이클 델쥬디체가 합류했다.

4. 내한 공연


Piano Man 라이브
'''셋리스트'''
1. Prelude/Angry Young Man
2. My Life
3. Honesty
4. Zanzibar
5. New York State Of Mind
6. Allentown
7. The Stranger
8. Just The Way You Are
9. Movin' Out (Anthony's Song)
10. An Innocent Man
11. Keeping The Faith
12. She's Always A Woman
13. Don't Ask Me Why
14. The River Of Dreams
15. Highway To Hell
16. We Didn't Start The Fire
17. It's Still Rock And Roll To Me
18. Big Shot
19. You May Be Right
20. Scenes From An Italian Restaurant
21. Piano Man
2008년 11월 15일 현대카드에서 주최하는 슈퍼 콘서트를 통해 첫 내한 공연을 했다. 11월 14일 오후 2시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했고 기자들 앞에서 현대카드 피켓을 들고 인사했다. 공연은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진행했다.[66]
"The River Of Dreams"를 부르던 중, 1층과 2층에 있던 일부 관객들이 흥에 겨운 나머지 무대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이후 사람들이 앞으로 몰려들었는데 혹시 모를 안전사고를 대비해 공연에 투입된 경호원들이 무대 앞에 있는 이들을 저지하며 자리로 돌려보냈다. 이를 지켜본 빌리 조엘은 곡 연주를 중단하고 경호원들에게 "무슨 일이냐!"(What’s Going On!)라며 호통을 쳤다. 공연을 즐기고 있는 관객들을 그대로 놔두라는 의미였다. 이후 경호원은 물러났고 빌리 조엘의 대인배스러운 행동으로 관객들은 더욱 환호했다. 빌리 조엘은 무대 앞 관객들에게 그대로 있으라는 듯 손으로 표시를 하며 다시 연주를 이어갔다.[67]

5. 엘튼 존


엘튼 존은 빌리 조엘과 마찬가지로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 부르는 가수라는 공통점으로 서로 엮이는 경우가 많지만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음악적 만남이 거의 없었던 평범한 동료 사이였다. 한국에서는 두 사람을 라이벌 관계라고 언급하지만, 활동 시기가 같아도 전성기를 보내던 시기가 달라서 라이벌로 만날 일도 없었다. 두 사람은 데뷔 초기 때 서로의 음악을 접하면서 친분을 가졌다. 빌리 조엘은 가장 먼저 들은 엘튼 존 곡은 Border Song이며, 엘튼 존은 빌리 조엘을 Piano Man으로 알게 되었다고 밝혔다.[68] 1975-76년 경,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에서 처음 만났고 서로의 음악에 대해서 이야기했다고 한다.[69]
1976년 정규 4집 《Turnstiles》를 녹음했을 때, 컬럼비아 레코드가 시카고의 프로듀서였던 제임스 윌리엄 거시오를 섭외하여 앨범 프로듀싱을 맡게 했고 제임스 거시오는 백 밴드 연주로 엘튼 존 밴드 멤버였던 베이시스트 디 머리와 드러머 나이절 올슨[70]을 섭외하여 엘튼 존이 1974년 정규 8집 Caribou, 1975년 정규 9집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 1975년 정규 10집 Rock Of The Westies를 녹음했던 콜로라도의 카리부 랜치 스튜디오에서 앨범 녹음을 진행했다. 그러나 제임스 거시오의 프로듀싱에 불만을 품은 빌리 조엘은 콜로라도에서 녹음한 음원을 폐기했고, 뉴욕으로 가서 본인이 직접 프로듀싱을 맡고 기존의 빌리 조엘 밴드 멤버들과 함께 앨범을 재녹음했다.[71] 디 머리, 나이절 올슨과 함께 녹음한 《Turnstiles》 음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빌리 조엘은 엘튼 존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했지만 1976년 음악 잡지 <쥬크>에 실린 인터뷰에 의하면, 엘튼 존은 록 악기로서 피아노를 대중화한 가수라고 인정한다고 밝혔다. 엘튼 존을 좋아하긴 하지만 자신과 비교 대상으로 두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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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미국 〈Face To Face〉 투어 포스터
1994년 7월부터 2010년 3월까지 함께 합동 투어 〈Face To Face〉를 진행했다. 빌리 조엘이 엘튼 존에게 투어를 같이 하자고 제안하면서 같이 하게 된 것이다.[73] 1994~1995년, 1998년, 2001~2003년, 2009~2010년까지 16년간 진행하면서 북미와 유럽, 오세아니아, 일본을 방문했다.
모든 공연들은 대형 경기장에서만 열렸고 엘튼 존 밴드와 빌리 조엘 밴드가 함께 연주를 맡았다. 공연 첫 번째 곡들로 Your Song, "Honesty",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 Just the Way You Are 등 듀엣으로 부른 다음 이어서 엘튼 존의 15곡, 빌리 조엘의 15곡 정도 각각 공연을 마친 다음, 다시 듀엣으로 자신들의 곡들과 커버곡들, 마지막으로 Piano Man을 듀엣으로 부르며 공연을 마무리했다. 총 합쳐서 40곡에 가까운 셋리스트에다 3시간이 넘는 대형 공연이다.
비틀즈의 "Birthday", Here Comes The Sun, Back in the U.S.S.R., A Hard Day's Night, 리틀 리처드의 "Lucille", 제리 리 루이스의 "Great Balls Of Fire" 등 1950~60년대 곡들, 서로의 곡들을 듀엣으로 자주 부르거나 바꿔서 부르기도 했다. 엘튼 존은 빌리 조엘의 "New York State Of Mind", "Uptown Girl"을 불렀고, 빌리 조엘은 엘튼 존의 Take Me To The Pilot, Candle In The Wind,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불렀다.[74]
〈Face To Face〉 말고 다른 공연에서도 함께 모습을 보인 적도 있다. 빌리 조엘은 엘튼 존의 2000년 10월 매디슨 스퀘어 가든 공연에 참여해 "Goodbye Yellow Brick Road"를 같이 불렀고, 2001년 10월 20일 뉴욕 공연에서 9.11 테러에서 희생된 소방관들을 추모하기 위해 Your Song을 듀엣으로 불렀다.[75] 2004년 4월 21일 카네기 홀에서 열린 스팅 주최의 열대우림 보호 기금 마련 공연에서는 마이클 J. 폭스Johnny B. Goode를 부르는 사이에 엘튼 존과 함께 키보드를 연주했다.[76] 2004년 케네디 센터 공로상에 헌액된 엘튼 존을 축하하는 공연에서 빌리 조엘은 Bennie And The Jets, "The Bitch Is Back"을 메들리로 불렀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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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Face To Face〉 투어에서
빌리 조엘의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해 2009~2010년 〈Face To Face〉 일부 공연들이 취소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엘튼 존과 마찰이 생겨 한동안 사이가 악화되었다.[78] 두 사람은 2012년에 화해했지만 빌리 조엘은 앞으로 〈Face To Face〉를 진행하지 않는다고 밝혔다.[79]
레코딩 스튜디오에서의 만남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이 없다. 엘튼 존이 1995년 작곡한 "Red, White And Blues"라는 곡에서 듀엣으로 불렀지만 미발매로 남겨졌다는 이야기가 있다.[80]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이 쓴 1997년 곡 "Big Man In A Little Suit"을 빌리 조엘에게 주려고 했으나 거절되었다고 한다.[81]
2017년 1월 레이트 쇼에서 밝히길, 엘튼 존이 항상 자신에게 앨범을 더 내야 한다고 했는데 빌리 조엘은 반대로 엘튼 존에게 "너는 앨범을 덜 내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농담했다. 2021년 기준 빌리 조엘의 정규 앨범은 13장이고 엘튼 존은 32장이다.[82]

6. 개인사


  • 빌리 조엘은 1970년에 활동한 프로그레시브 록 듀오 '아틸라'의 드러머 멤버이자 친구였던 존 스몰의 아내 엘리자베스 웨버와 불륜을 저질렀다. 불륜 관계가 들키자 엘리자베스 웨버는 두 사람과의 관계를 일시적으로 끊었다. 친구를 배신했다는 죄책감과 수년간 이어지던 무명 시절, 음악적 침체 등 여러 복잡한 심경을 가졌던 빌리 조엘은 우울증을 앓았다. 존 스몰에게 전화해서 사과하고 어머니의 아파트에서 자살 시도했으나 그의 전화를 받고 곧장 아파트로 뛰어온 존 스몰은 바닥에 쓰러진 빌리 조엘을 발견하고 병원에 입원했다. 그로부터 몇 주 뒤, 가구 세정제 한 병을 마셔 또다시 자살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두 번째 자살 시도 이후 빌리 조엘은 스스로 정신 병원에 3주간 입원했다.[83][84] 이후 엘리자베스 웨버는 존 스몰과 이혼하고 빌리 조엘과 재결합하여 1973년 결혼했으나 1982년 이혼했다. 엘리자베스 웨버는 빌리 조엘의 사무 관리자로 일했고 그녀의 오빠 프랭크 웨버는 빌리 조엘의 매니저로 일했다. 1980년대 후반에 빌리 조엘은 전직 매니저로부터 수백만 달러를 사기당해 잃고 법적 분쟁을 겪었을 때 그 매니저가 바로 프랭크 웨버이다.
  • 이혼 이후 빌리 조엘은 1983년 생바르텔레미 여행 도중 만난 미국의 슈퍼모델 크리스티 브링클리[85]와 1985년 결혼했고 딸 알렉서 레이 조엘을 두었다. 두 사람은 1994년 이혼했지만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다.[86] 2004년에는 30살 연하 미국의 음식 평론가 케이티 리와 결혼했으나 2010년 이혼했다.[87] 2015년에는 32세 연하 알렉시스 로데릭와 결혼했고 2년에 걸쳐 두 늦둥이 딸 '델라 로스 조엘', '레미 앤 조엘'이 태어났다.[88]
  • 빌리 조엘의 장녀 알렉서 레이 조엘은 2006년에 EP "Sketches"로 데뷔하여 가수로 활동하며 여러 음반을 발매했다.[89]
  • 오랫동안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렸다. 2002년에 코네티컷주의 실버힐 병원에 입원했고 2005년 3월에는 베티 포드 센터에 30일 동안 입원했다.[90]

6.1. 오토바이 교통사고


1982년 4월 15일 롱아일랜드에서 오토바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1978년형 할리 데이비슨을 몰다가 빨간불에 질주하던 차에 부딪혀 몇 미터를 날아가면서 왼손 엄지가 안쪽으로 굽어지고 오른손이 반대쪽으로 펴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사람들이 사고 현장에 몰려들자 자신을 못 알아채게 도로에서 웅크리고 있었지만 경찰관이 와서 빌리 조엘의 오토바이에 써져있던 이름 "조엘. 윌리엄"을 읽고 그가 빌리 조엘이라는 걸 알아채자 운전자한테 "이봐 아가씨, 당신이 빌리 조엘을 쳤어!"라고 크게 말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더욱 몰려들었다고 한다. 병원에서 두 손 봉합 수술을 마친 뒤, 피아노를 매일 같이 연주하며 회복에 집중했다고 밝혔다.[91][92]
의사들은 손 부상으로 인해 피아노 연주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우려했지만, 빌리 조엘은 어차피 자신은 록 가수라서 손이 안되면 팔꿈치로 건반을 치겠다고 농담했다. 당시 수술로 왼손의 엄지손가락 윗부분의 뼈를 제거했기 때문에 왼손 엄지에 뼈가 없다. 오른손은 끝까지 내려가질 않는다고 한다.[93]
그 후에도 몇 차례 교통사고를 겪은 적 있었다. 2003년에는 롱아일랜드에서 2002년형 메르세데스 벤츠를 몰다가 나무에 충돌하여 차를 폐차했고, 2004년에는 1967년형 시트로엥 2CV를 운전하다가 빗길에 미끄러져 주택에 충돌했다.[94]

6.2. 기타


  • 노래방에서 가창력에 의지해 그의 곡을 부르는 사람들을 좌절시키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기교만 잘 부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빌리 조엘 특유의 뉴요커로서의 정체성과 느낌을 잘 고려하고 담아서 불러야 맛이 살기 때문이다. 하나도 힘 안 들이고 편하게 불러서 그렇지, 많은 곡들은 고음인 편이다.
  • 젊은 시절 때 이목구비와 헤어스타일과 전체적인 모습이 실베스터 스탤론과 상당히 닮았다. 게다가 빌리 조엘은 십대 때 복싱을 취미로 했다.
  • 비틀즈 광팬이다. 비틀즈로부터 많은 음악적 영향을 받았고, 빌리 조엘도 공연에서 비틀즈 곡들을 자주 불렀다.
  • 오토바이 마니아다. 집에 전시해 둔 오토바이가 수십 대 넘고, 아예 거대한 창고로 제작해서 오토바이들을 관리한다.
  • 1960~70년대에는 장발이었지만 1980년대부터 단발에 곱슬로 헤어스타일을 바꾸었고 나이를 먹으면서 대머리가 되었다.
  • 1995년 1월 일본에서 순회공연을 돌던 시기에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는데 다행히 지진 피해를 겪지 않았다. 당시 CNN에서 인터뷰하기도 했다.[95]
  • 공연할 때 맨 앞줄 티켓을 팔지 않고 아껴뒀다가 맨 뒷줄의 관객들을 무작위로 뽑아서 앞줄로 초빙한다고 한다. 그냥 돈이 있으니 와서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가는 부자들보다 없는 돈 써서 뒷자리라도 겨우 잡는 진짜 팬들을 잘 대접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 윤종신이 빌리 조엘의 노래를 듣고 음악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월간 윤종신을 통해 "Billy"라는 곡을 발표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

7. 디스코그래피



7.1. 앨범



7.2. 싱글



7.2.1. 빌보드 핫 100 1위



7.2.2. 빌보드 핫 100 2위


  • 없음

7.2.3. 빌보드 핫 100 3위~10위


  • Just the Way You Are (1977)
  • My Life (1978)
  • You May Be Right (1980)
  • Uptown Girl (1983)
  • An Innocent Man (1983)
  • You're Only Human (Second Wind) (1985)
  • Modern Woman (1986)
  • A Matter Of Trust (1986)
  • I Go To Extremes (1989)
  • The River Of Dreams (1993)

7.2.4. 빌보드 핫 100 11~20위


  • Movin' Out (Anthony's Song) (1977)
  • She's Always A Woman (1977)
  • Big Shot (1978)
  • Don't Ask Me Why (1980)
  • Say Goodbye To Hollywood (Live) (1981)
  • Pressure (1982)
  • Allentown (1982)
  • The Longest Time (1984)
  • Keeping The Faith (1985)
  • This Is The Time (1986)

7.2.5. 빌보드 핫 100 21~40위


  • Piano Man (1973)
  • The Entertainer (1974/1975)
  • Only The Good Die Young (1977)
  • Honesty (1978)
  • Sometimes A Fantasy (1980)
  • She's Got A Way (Live) (1982)
  • Leave A Tender Moment Alone (1984)
  • The Night Is Still Young (1985)
  • And So It Goes (1990)
  • All About Soul (1993)

[1] Greatest of All Time Billboard 200 Artists[2] 참고 자료: Billy Joel Reveals Why He Won't Make Another Album Ever Again[3] [4] Billy Joel: Johnny Mercer Award[5] 1923~2011[6] 1922~2014[7] Billy Joel - The Joel Files[8] 앨릭 볼드윈의 빌리 조엘 인터뷰[9] Billy’s Mom Rosalind Nyman Joel Dies At 92[10] 영국 출생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이다.[11] Billy Joel - classicbands[12] On This Day In Music: The Echoes Recruited A Young Unknown Piano Player, Billy Joel.[13] 더 해슬스 - 올뮤직[14] 미국의 작곡가 데이비드 포터와 아이작 헤이즈가 쓴 곡이다.[15] Tell Me About It 12인치 싱글[16] Billy Joel’s Heavy Metal History With Attila[17] 1971년 원반, Cold Spring Harbor의 1번 트랙 She's Got A Way[18] Billy Joel Bio[19] How Billy Joel Pushed Forward With ‘Piano Man’[20] 1972년 4월 15일 - 빌리 조엘 WMMR 라이브 음원[21] Billy Joel Timeline[22] 호주에서는 1976년 발매되었다.[23] Billy Joel Bio[24] Turnstiles - 올뮤직 리뷰[25] The Stranger - 올뮤직 리뷰[26] Billy Joel’s The Stranger 30th Anniversary[27] 52nd Street - 올뮤직 리뷰[28] Billy Joel Throws More Than Just Rocks At ‘Glass Houses.’[29] 《Songs In The Attic》의 라이너 노트[30] The Nylon Curtain - 롤링 스톤 리뷰[31] 빌리 조엘이 말하는 An Innocent Man[32] 이 곡은 추후 웨스트라이프가 리메이크하고 글리에서도 리메이크했다.[33] 1986년 개봉된 대니 드비토, 베트 미들러 주연의 〈골치 아픈 여자〉(Ruthless People)의 주제가로 삽입되었다.[34] Schock, Jeff (2014). A Matter Of Trust: The Bridge to Russia. Columbia Records[35] [36] 올리버와 친구들 - Why Should I Worry (1988)[37] 이 곡은 가스 브룩스가 1991년 커버해 싱글로 발매하기도 했다.[38] 빌리 조엘의 첫 번째 아내 엘리자베스 웨버의 오빠[39] 참고 자료: How Billy Joel’s three wives stole his heart and his money[40] A $90 Million Matter of Distrust Pits Billy Joel Against His Ex-Manager[41] 참고 자료: Billy Joel Reveals Why He Won't Make Another Album Ever Again[42] 2001년 11월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강연회[43] 해당 곡의 가장 첫 번째 커버곡이다.[44] 빌리 조엘 - To Make You Feel My Love (1997), 빌리 조엘 - Hey Girl (1997)[45] 엘튼 존/빌리 조엘 - Goodbye Yellow Brick Road (2000)[46] 2001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강연회에서 공연한 빌리 조엘과 리처드 형기 주[47] 빌리 조엘 - All My Life (2005), 빌리 조엘/캐스 딜런 - Christmas In Fallujuh (2007)[48] 폴 매카트니/빌리 조엘 - I Saw Her Standing There (2008), 폴 매카트니/빌리 조엘 - Let It Be (2008)[49] 빌리 조엘 - Miami 2017 (2012-12-12)[50] Billy Joel announces MSG residency[51] setlist.fm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 라이브 목록[52] 빌리 조엘 홈페이지의 공연 목록[53] 빌리 조엘/아이작 펄만 - The Downeaster 'Alexa' (2015년 3월 9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빌리 조엘/지미 팰런 - Start Me Up (롤링 스톤즈 커버곡) (2016년 1월 7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54] Billy Joel: The Life and Times of an Angry Young Man[55] 왼쪽부터 더그 스테그마이어, 빌리 조엘, 리버티 드비토, 하위 애머슨[56] 왼쪽부터 리버티 드비토, 더그 스테그마이어, 빌리 조엘, 리치 카나타[57] 빌리 조엘, 데이비드 브라운, 마크 리베라, 리버티 드비토[58] 빌리 조엘 밴드에 관한 리버티 드비토 인터뷰[59] 하이어드 건 - IMDB[60] 1989년 11집 Storm Front 발매 이전이었다.[61] Billy Joel Settles Royalty Lawsuit With Former Drummer[62] 다만 리치 카나타는 2006년 1~4월 매디슨 스퀘어 가든 투어 때 잠시 합류한 적 있었다.[63] The Lords of the 52nd Street 공식 웹사이트[64] Billy Joel Drummer Liberty DeVitto on His New Memoir, Making Peace With His Old Boss[65] 1995년 롱아일랜드 자택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66] '팝 거장' 빌리 조엘, 첫 내한공연 위해 입국…"한국 와 기쁘다"[67] 15일밤 올림픽공원에 '빌리 바이러스'가 퍼졌다…빌리 조엘 내한공연[68] 1998년 뉴질랜드 인터뷰[69] 1998년 3월 도쿄 기자회견[70] 디 머리와 나이절 올슨은 1980년에 재합류하기 전까지 엘튼 존 밴드에서 연주를 맡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엘튼 존 밴드 문서 참고.[71] 빌리 조엘 다큐멘터리[72] Unforgettable People (XV): Billy Joel[73] 엘튼 존/빌리 조엘 - 1994년 인터뷰[74] setlist.fm 사이트의 Face To Face 셋리스트 및 공연 일정 정보[75] 엘튼 존/빌리 조엘 - Your Song (2001년 10월 20일 라이브)[76] 2004년 뉴욕 카네기 홀 공연 사진[77] 빌리 조엘 - Bennie And The Jets/The Bitch Is Back 메들리[78] Billy Joel Has Patched Things Up With Elton John[79] Billy Joel Won't Tour with Elton due to Setlist Constraints[80] Rocket Man: Elton John From A-Z, 188 페이지[81] Elton: Jewel Box - The B-Sides[82] 스티븐 콜베어 - 빌리 조엘 인터뷰[83] Billy Joel Bio[84] 참고 자료: How Billy Joel’s three wives stole his heart and his money[85] "Uptown Girl" 뮤직비디오에 등장했다.[86] Billy Joel Posed to Look Like the Cover of His Album so Christie Brinkley Would Recognize Him[87] How Billy Joel’s three wives stole his heart and his money[88] Billy Joel welcomes third daughter, Remy Anne[89] 알렉서 레이 조엘 - Notice Me (2010)[90] Billy Joel: ‘Betty Ford Was Like A Concentration Camp’[91] 교통사고 회복 몇 개월 뒤의 빌리 조엘 인터뷰[92] 1982년 오토바이 교통사고를 회상하는 빌리 조엘[93] 참고 자료: That Time Billy Joel Injured Both Hands in a Motorcycle Accident[94] The Day Billy Joel Smashed His Third Car in Two Years[95] Billy Joel Unhurt in Quake; Donating Proceeds to Victi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