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K. 포크

 






'''미합중국 제11대 대통령
제임스 녹스 포크
James Knox Polk
'''
<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출생'''
1795년 11월 2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파인빌
'''사망'''
1849년 6월 15일 (향년 53세)[1]
미국 테네시 주 내슈빌
'''재임기간'''
제13대 연방하원의장
1835년 12월 7일 ~ 1839년 3월 3일
제11대 대통령
1845년 3월 4일 ~ 1849년 3월 4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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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부모'''
아버지 사무엘 포크
어머니 제인 포크
'''배우자'''
사라 차일드레스 포크
'''학력'''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채플힐
'''종교'''
개신교 (감리회)
'''신장'''
173cm
'''정당'''


'''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인물됨과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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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11대 대통령.
대통령 이전에 테네시 주지사와 연방하원의장을 역임했으며대통령 임기 중에 텍사스 합병 및 멕시코와의 전쟁으로 미국의 영토를 태평양까지 대거 확장시켰다.

2. 생애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테네시 주에서 보냈다.
졸업 후에는 내슈빌에서 법률 공부를 하게 되었고 1819년 테네시 주 상원의원을 시작으로 정치에 발을 들인다. 참고로 이 때 그의 룸메이트였던 윌리엄 모즐리는 플로리다의 첫번째 주지사가 되었다(앤드루 잭슨이 첫번째이긴 한데 이쪽은 아직 플로리다가 준주 시절이었다).
그후 연방 하원의장을 거쳐 테네시 주지사가 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 후 테네시 주지사 선거에서 2번 연속으로(1838, 1842) 낙선해버린다. 이러한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된 것은 의외의 결과였고, 포크는 처음에는 부통령 후보를 희망하였다. 이것은 앤드류 잭슨의 지지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포크는 잭슨을 열렬히 지지하고 자신의 스승처럼 여겼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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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도 40분이 아니면 전쟁이야
당시 선거에서 그의 상대는 헨리 클레이. 자신보다 훨씬 오랜 정치 경력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가 이미 2번이나 대통령 후보가 되었던 거물이었다. 이러한 그를 상대로 그는 당시 대세를 타고 있던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론에 따라 적극적이고(+강경한) 영토 확장을 추구했으며 포크 본인도 명백한 운명론의 신봉자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영토를 알래스카까지 북진시키겠다는 것(54° 40' or Fight). 어쨌든 이러한 내용이 먹힌건지 어렵사리 대통령에 당선된다. 불과 3만표 남짓의 차이였다.
대통령으로서 가장 주목받는 업적은 '''영토 확장'''이다. 우선 당시 말이 많던 텍사스 공화국을 합병시키는데 성공한다. 이로 인해 멕시코와의 관계가 틀어지게 되었으나, 포크로서도 텍사스에 만족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공공연히 태평양까지 진출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포크는 재커리 테일러 장군에게 몰래 명령을 내려 국경 쪽에서 집적거리며 충돌을 야기시키게끔 한다. 결국 미국-멕시코 전쟁이 터졌고, 결과는 미국의 승리. 이로 인해 헐값에 막대한 영토를 획득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 정적들은 그를 까기에 바빴는데, 우선 휘그당에서는 대부분 '''"비도덕적인 전쟁이다!"'''라며 전쟁에 반대하고 있었고 북부에서는 '''"얻은 땅이 거의 다 남쪽에 있으니 미주리 타협에 의해 다 노예주 되는 거 아냐?"'''라고 까고 있었다. 이 때 받은 스트레스가 그의 이른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1848년의 중간선거에서 휘그당이 동부의 반전정서를 받아 대거 당선되면서 여소야대의 하원이 등장했다.[2] 이때 첫 등원을 한 인물이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
어찌됐건 간에 그는 이미 재선에 도전하지 않겠다고 했던 상태였기에 1849년 백악관을 떠나게 되었다.[3] 그렇지만 퇴임 후 불과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사인은 콜레라.
임기 말부터 건강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퇴임한 포크는 민주당 지도부의 요청을 받아 남부 지역을 순회여행하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 남부에서 인기가 많았던 포크의 인기를 이용해 민주당의 지지도를 높이려는 전략이었다. 포크는 그대로 했고 순회여행도 민주당의 의도대로 진행되었는데 이 와중에 당시 뉴올리언스에서 유행하던 콜레라에 걸려 쓰러졌다. 그래서 여행을 취소하고 테네시 주의 별장으로 돌아왔지만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3. 평가


공약을 지켰음에도 까인(?) 본인 입장에선 억울한 임기를 지냈을 대통령. 남북갈등기의 대통령들이 대부분 낮은 평가를 받지만 이 사람은 우수한 대통령으로 꼽힌다. 비록 미군의 도발로 시작된 전쟁이긴 했으나 이 전쟁으로 캘리포니아, 텍사스 등을 비롯한 광대한 지역을 얻게 되었고, 이 전쟁을 지켜보던 영국이 미국과의 충돌을 우려하여 워싱턴 주, 오리건 등의 지역을 양도하여 현재 국토의 대부분을 완성하게 되었으며, 또한 미국이 태평양까지 진출하게 됨에 따라 현재의 강국으로 떠오르는 기반을 만들었기 때문. 더욱이 이 업적을 '''한 번의 임기''' 동안에 해낸 것 때문에 높이 평가받는다. 그렇기에 미국에서 대통령 업적 평가를 하면 10위권 초반대를 꾸준히 차지하는 편이다. 물론 "명백한 운명론"은 결코 정당한 것은 아니었고 거꾸로 말하면 멕시코에선 철천지 원수이다.
그런데 이렇게 우수한 대통령으로 평가받는 것 치고는 미국에서의 대중적 인지도는 높지 않다. 그래서 그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가장 덜 알려진 중요한 대통령(least known consequential president)'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
그런데 사실 이것도 애매한 것이, 엄밀하게 말하자면 영국은 원래 49°에서 타협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오리건 주는 원래 엄청나게 큰 지역이었고 미국과 영국은 이 지역을 공동통치하고 있었으나 대립이 너무 심각해져서 분할이 필수적인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이 제안한 타협안이 49°였다. 그런데. 이걸 54도 40분을 주장하면서 덤빈 것이 미국이었고, 54도 40분이 아니면 전쟁이라고 공약한 것이 포크였다. 하지만 49°에서 타협을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멕시코와 영국이라는 양국과 동시에 대립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했고, 당시 최강대국중 하나였던 영국에게서 물러나는 대신에 멕시코를 박살냈던 것이다.
포크 행정부의 국무장관이자 뒷날 15대 대통령이 된 제임스 뷰캐넌은 포크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다. 일을 열심히 한 나머지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너무 많이 늙은 사람처럼 보였다."


뒷날 33대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은 포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그는 자신이 하려고 하는 것을 정확히 말했고, 그것을 실행한 훌륭한 대통령이다"라고 짧게 평가했다.

4. 인물됨과 일화


50대의 벽을 깬 (당시) 최연소 대통령. 대통령이 됐을 시 나이가 49세였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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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칠드러스의 젊은 시절 초상화
함께 찍은 부부사진
1890년 촬영
또한 그가 (잭슨의 충고를 받아들여) 부인이 되는 세라 칠드러스에게 청혼했을 때, 그녀 왈, "주의원이 되어야 받아주겠다"고 하기도 했다. 결국 결혼에 골인했지만. 비록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지만, 금슬은 좋았는지 그는 죽는 순간에도 아내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I love you, Sarah. For all eternity, I love you.'''

나는 세라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했소.

세라는 당시로서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여성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했으며''' 그래서인지 영부인 뿐만 아니라 포크의 비서 역할까지도 수행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금욕주의자'''였는지 백악관에서 독한 이나 카드 게임, 심지어는 댄스 파티까지도 금지시켰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남편이 죽은 뒤에도 40여 년을 더 살았다'''고. 세라는 남편이 키가 상대적으로 작아서 어디에 입장하면 사람들이 대통령이 입장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해서 남편이 들어올 때 그 유명한 Hail to the Chief를 연주하도록 마련했다.
사라는 단명한 포크와 달리 88세까지 장수했다. 남편이 죽은 지 42년 뒤인 1891년 세상을 떠났는데 위의 사진들 중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는 사진이 '''죽기 1년 전에 찍힌 것.''' 남편과의 나이는 8살 차이였다.
사실상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단명한 대통령'''이다(53세). 미 역대 대통령 가운데는 존 F. 케네디(46세)와 제임스 가필드(49세)에 이어서 세 번째로 수명이 짧았던 대통령이지만, 이 두 대통령은 자연사가 아니라 암살당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포크가 더 확실한 셈이다. 그것도 대통령 임기를 다 마친 기준.
또한 고집불통#s-1으로 유명해서 얻은 별명이 영 히커리(Young Hickory). 이 별명은 그가 추종했던 잭슨(올드 히커리)에 비견해서 붙은 별명인데 정적들에게는 그의 작은 체구까지 싸잡아서 '꼬마 잭슨'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대통령에 퇴임할 무렵에는 본인도 속 시원하게 느꼈는지 "나는 곧 종 노릇을 그만두고 주인이 될 것이다(I'll soon cease to bo a servant and will become a sovereign)"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1990년대에 미국에서 인기 있었던 "못말리는 번디 가족 (Married... with Children)이라는 시트콤의 주인공인 알 번디(Al Bundy; 배우는 에드 오닐)가 다녔던 고등학교가 이 대통령의 이름을 기리는 포크 고등학교(Polk High School)이고, 그래서 시트콤 안의 알 번디는 여러 에피소드에서 "포크 대통령이 미국에서 제일 위대한 대통령"이라고 말한다.
[1] 암살당하지 않은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빨리 사망했다.[2] 정작 휘그당은 1850년 정권을 인수하던 선거에서는 하원 다수당을 잃는다.[3] 포크 이후 재선에 도전하지 않은 대통령은 러더퍼드 헤이스와 체스터 아서가 있다.[4] 포크 이후의 40대 대통령은 그랜트와 클리블랜드(둘 다 초선 및 19세기 기준.)가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