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보병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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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육군 제1군단 제1보병사단 예하 '''제15보병여단'''. 별칭은 '''무적칼부대'''.
2. 상세
여수·순천 10.19 사건 당시 최남근 연대장이 반란에 가담하려 했던 흑역사도 있었다.
이후 한국전쟁 초반엔 제5보병사단 소속이었다가 임진강과 파주 전투에서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1개 대대만 남은채 후퇴중인 1사단 13연대를 재건하기 위해 7월 5일 최영희 연대장과 2개 대대가 13연대에 병합되고 15연대는 해체 수순을 밟았다. 하지만 15연대라는 호칭에 자부심이 있었던 15연대 출신 장병들은 15연대 해체 사유가 하필이면 군기도 잃을 정도로 괴멸당한 13연대 때문인 것, 또 자신들이 주류임에도 계속 13연대로 불리는 것에 불만이 있었고,# 이에 낙동강 다부동 전투 말기에 연대장의 건의로 육본 일반명령(육53호)에 의거 8월 25일부로 15연대 단대호로 개칭되었다. 반대로 기존 13연대 장병들은 자신의 연대가 사라졌다며 탄식했다.
다만 역대 15연대장 액자란 중 병합 전의 13연대장을 전임 연대장으로 해놓아 초대 13연대의 역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한편 13연대 단대호는 한동안 공란 상태였다가 11사단 창설 시 예하 연대로 신규 창설되었으나 15연대 장병들이 분가해 만든게 아니다 보니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이후 1사단 연대들 중 평양에 최선봉으로 입성했으며, 지금은 사단 예비연대로 평시엔 임진강, 통일대교 경계를 담당하고 있다. 참고로 김신조 사건당시 15연대가 공비들을 진압할때 큰 활약을 해서 15연대가 한때 큰 명성을 얻기도 했다. 물론, 피해도 있었다. 당시 15연대장 이익수 대령이 흉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1]
여단본부 위병소를 지나서 연병장으로 올라오다 보면, 거대한 언월도 상징물[2] 을 볼 수 있으며, 연대본부 부지가 예전 미군부대 주둔지[3] 여서, 상대적으로 편의시설이 좋다. 부대 내에 스쿼시장, 풋살장, 체육관, 목욕탕 등이 있다. 연병장의 형태도 잘 보면 일반적인 직사각형 연병장이 아니라 야구장 모양의 연병장이다. 2005년경 축구하기 좋도록 직사각형에 좀 더 가깝게 하면서 넓혔다. 부대 정문에 M47 패튼전차가 세워져 있다.[4][5]
과거 사단 내 제2신병교육대대가 15연대에 속해있었다.[6]
원래 명칭은 제15보병연대였으나 국방개혁 2.0 기본계획에 의거, 상비사단과 지역방위사단이 개편돼 15보병연대 역시 2020년부로 15보병여단으로 격상되었다.
3. 예하부대
3.1. 여단 직할대
3.2. 군수지원대대
3.3. 제1대대 방미
3.4. 제2대대 필승(장단)
대대본부는 장단에 존재
과거 1개 대대씩 FEBA와 강안경계를 로테이션 하였지만, 16년 2월 이후 2대대가 장단대대에 고정적으로 주둔하게 되었다.
3.5. 제3대대 여우고개
여우고개대대 생활관은 2006년에 완공된 침대형(1층 침대) 막사로 PX까지 생활관 건물에 있다. 입주 당시 총기보관함까지 전부 새거였다고. 그리고 예전에 1대대가 쓰던 작계지를 쓴다면 축하한다. 예하 중대 중 하나는 여우고개대대 막사와 작계지가 가까워 진지공사때 작계지에 천막을 치지 않고 막사에서 아침식사 후 작계지로 이동하여 작업 후 16시 30분에서 17시 사이에 막사로 복귀하여 저녁식사를 한다. 일부 진지는 분침호가 있어 훈련 중 야간에 불침번 세워놓고 분침호에서 침낭덮고 잔다.
4. 출신인물
4.1. 여단장
4.2. 장교/부사관
4.3. 병
- 백상현(스트리머)
1사단 15연대 수색중대 출신이라고 한다. 원래 잠복고환이 있어 병역면제 대상이었으나 본인이 잠복고환이 병역면제가 되는 병인지 몰라서 그냥 현역복무를 했다고 한다
5. 기타
5.1. 여단가
>겨레의 소원인 통일을 위해
>육군의 선봉에선 무적의 용사
>뭉치고 싸워서 이겼으니
>평양에 선봉으로 입성하였다
>아~~ 그 이름 칼부대 용사
>영원히 빛내리 15여단
>
>'-15여단가-’[여단으로]
>육군의 선봉에선 무적의 용사
>뭉치고 싸워서 이겼으니
>평양에 선봉으로 입성하였다
>아~~ 그 이름 칼부대 용사
>영원히 빛내리 15여단
>
>'-15여단가-’[여단으로]
6. 사건사고
7. 여담
- 문산읍 선유리 통일로 인근에 있었던 막사는[8] 2014년말 ~ 2015년 초에 철거되어 지금은 군 간부들을 위한 아파트인 문산어울림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당시 장병들은 이곳을 문산대대라 불렀었고 문산읍내와 가까워[9] 출타가 다른 대대에 비해 편했다. 그리고 2006년 당시 이 대대에 주둔했던 장병들에 한해 문산역 앞에 있는 목욕탕으로 단체 목욕외출을 실시한 적이 있었다.
[1] 사후 준장으로 1계급 추서가 되었다.[2] 2005년경 강풍으로 인해 칼날 중간쯤 부분이 부러져서 붙였다. 전역자는 전역하는 날 이 거대한 칼을 들 수 있다고 하며 칼을 들지 못한 전역자는 전문하사가 된다는 전설이 있다.[3] 이전에 미2사단 수색대대의 역할을 담당하는 7기병연대 4대대(이하 4/7기병대대) B중대 (B Troop, 4/7 Cavaly)(기갑수색-전차 및 장갑차, 헬리콥터로 구성)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 당시 기지 명은 Camp Rice였다가 Camp Garry Owen으로 변경되었고, 후에 4/7 기병대대는 선유리의 사단 전차대대 근처의 Camp Palham으로 이전하게 되면서 해당 부지가 무적칼연대 연대본부 주둔지가 되었다. 이전 당시 무적칼연대 연대본부 주둔지자리에는 육탄연대 본부가 들어오게 된다. 선유리에 있는 Camp Palham은 4/7기병대대가 이전해 온 후에 Camp Garry Owen으로 다시 명칭 변경되고, 4/7기병대대가 미2사단 2기보여단 소속으로 활동중, 2003년 이라크전 발발과 함께 2여단이 이라크로 파병나가면서 소속이 2여단에서 1중기갑여단으로 다시 변경되고, 1여단 완전 해체시까지 Camp Garry Owen으로 유지되었다. 지금은 해당부대는 완전히 해체된 상태.[4] 2000년대 초반까지는 A/B/C동 막사가 있어서 A동에는 본부중대, 의무중대, 통신중대, B동에는 수색중대, 전투지원중대가 있었다. C동은 C동창고라는 이름으로 1층만 각종 공구들과 기자재의 창고로 활용되었으나, 2000년대 초반 C동을 전반적으로 개수하여 사단 BOQ로 용도 변경하였다. 2000년대 중반 A동 1층은 100일 휴가대기(출발 전 연대장에게 휴가신고를 하고 연대 수송부에서 문산역까지 차량지원을 해줬다.) 등으로 사용하다가 수송대 독립 후 수송대, 2층은 본부중대, 3층은 통신중대가 사용하였고, B동 1층은 의무중대, 2~3층은 지원중대가 사용하였다. A,B동 막사는 한 내무실당 6~7명 정도가 생활하였고, 내무실마다 화장실이 있었으나 사용은 하지 않았다. A동과 B동이 통합하여 신막사로 다시 지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C동은 BOQ 전환공사 전까지는 1층의 창고 외에는 비둘기들이 살던 비둘기집이었다. 각 방마다 비둘기 똥이 한가득.[5] 2015년 이후 사용 중인 신막사는 1층에 통신중대와 의무중대, 2층에 지원중대, 3층을 본부중대와 수송대가 사용하고 있다. 4층에는 뜬금없이 사단 공병대대의 2중대가 들어와있는데 이유는 불명. 2층에 만들어진 구름다리를 통해 B동(참모동이라 부르는 간부도 있다.)으로 갈 수 있는데 가끔 악천후로 인해 폐쇄되는 경우 1층으로 돌아가는게 여간 귀찮은게 아니다.[6] 2012년 폐지[7] 2016. 05 ~ 2018. 06[여단으로] 개편되면서 연대를 여단으로 개사[8] 대대급 부대가 주둔했었다.[9] 다른 대대에서 차타고 나오는 시간만큼 걸어가면 바로 문산읍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