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보병사단
'''
中部戰線 의守護者 ,祖國統一 의先奉將 '''
1. 개요
대한민국 육군 제27보병사단은 제7보병사단, 제15보병사단과 함께 제2군단 예하부대이다. 강원도 화천군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부전선을 책임지는 예비사단이다.
2. 상세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부대"라는 뜻으로, '''이기자''' 부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2] 부대마크는 27사단의 숫자 27에서 2색(빨간색, 흰색)과 7각을 조합한 방패모양이다. 가운데에는 '이기자'라는 부대명칭이 쓰여있다. 이 덕분에 이기자 부대는 그 부대마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처음 봐도 바로 알 수 있다.
'''악명 높은 훈련강도'''로 유명하다. 원래 전방 예비사단의 특성상 훈련강도가 높을 수밖에 없지만, 27사단은 하필이면 예비사단 중 뭐 같은 지형으로 악명 높은 화천군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춘천보다 훨씬 이북지역. 이런 특징은 같은 화천군이 작전 구역인 제7보병사단, 제15보병사단 항목에서도 잘 묘사된다. 오죽하면 102보충대에서 이 부대와 2사단으로 배치받은 장정들에게는 '전투화를 바꿀 기회'를 한 번 더 줬겠는가. 자주 짤방으로 돌아다니는 '''훈련은 무자비하게''' 문구가 새겨진 비석은, 바로 여기 27사단 유격장에 존재한다. MBC 진짜사나이에 방영되었듯, 정예수색요원 양성교육으로 사단 직할 수색대대가 굉장히 유명하다. 사단 내 정예병력으로 취급받는 각 사단의 수색대 중에서도 인지도와 훈련결과, 부대 운영성과 등을 종합적으로 볼 때 최고 수준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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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9년 9월 저출산에 따른 군축을 이 사단도 피해갈 수 없었다. 정확히는 육군본부 관계자가 6사단은 포천으로 이전시키고, 11사단과 함께 해체를 기정사실화 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에 화천 주민들은 "마을도 해체하란 말이냐!" 는 현수막을 걸고 지역 상권이 붕괴될 거라며 한 목소리를 내며 서명 운동을 벌이면서도 여타 전방지역 실무단과 함께 회의를 갖기도 했다.
국방개혁으로 인해 2020년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승격되었다.
3. 역사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20개 사단 증편 계획에 따라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병력들이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인근에 산재해 명령을 기다리던 중, 동년 9월 18일 사단 창설일에 맞춰 기갑연대(현: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 3대대 11중대장 안도현 대위와 일행 장교들이 이끄는 2개 중대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명월리까지 도보로 이동해 별도의 부대 창설을 한 게 해당 사단의 시초다.
전군 유일의 행동실천형 명칭을 가진 부대이다. 흔히들 이 부대에 대해 '한국전쟁 때 한 번도 못 이겨서' 또는 '북한군에게 군기를 빼앗겨서' 이름을 이기자라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창설연도를 보면 알겠지만 한국전쟁이 끝나고 창설된 사단이기에 개전 초기 비참하게 밀려난 제7보병사단이랑 금성 전투 때 깃발을 빼앗긴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얘기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사단명에 대한 또 하나의 낭설은 초대 사단장의 부인 이름이 '이기자' 여사님이 아니냐는 것이다. 당시 위의 이름이 매우 흔한 이름이기는 하지만 초대 사단장의 부인 이름과는 전혀 관계 없다.[3] 하지만 '사단장 부인 이름설'(?)을 크게 의식한 탓인지, 27사단 부대사에서는 초대 사단장 이름을 표기할 때 반드시 사단장 이름 옆에 괄호를 치고 부인 이름도 함께 싣는다. 다른 사단들을 찾아본 바에 따르면 거의 유일하게 이기자 부대만이 사단장과 사모님의 이름과 함께 표기한다고.
베트남 전쟁 당시 79연대 1대대가 군사 원조단인 비둘기 부대 예하 제101경비대대로 참전하였다.
정확히는 한국군사원조단(이후 건설지원단, 비둘기 부대 순으로 명칭 변경) 예하에 127공병대대가 있었는데 이를 경비하기 위한 부대가 제101경비대대였다.[4] 군사원조단은 사이공 인근 순환고속도로 건설등 베트남에 대한 지원을 했기 때문에, 한국군 지원 목적의 제100 군수사령부와는 별개의 부대이다.
제 101 경비대대는 79연대 1대대를 모체로 하여 편성 후(장교 34명, 사병 728명) 1965년 3월 16일 사이공 북서쪽 22km 지점인 '지안'에 지휘소를 설치 했고, 이후 추가 파병 요펑에 의해 6월 27일, 제 27사단에서 다시 1개 중대를 편성(장교 6명, 병 161명)하여 제101경비대대 제5중대로 증편했다.
이들은 2개 중대는 주둔지 경계, 수색작전 및 예비부대였고 2개 중대는 중대전술기지 또는 이동식 중대전술기지 형태로 움직였는데 주로 127공병대대 예하 1개 공병중대와 편조되어 건설현장 외곽경비를 담당하였다. 공병대가 사이공 외곽에 원형으로 도로(16번 동부 환상도로. 일명 따이한 고속도로)를 건설하다 보니 일정 시일마다 계속 이동하였는데 이에 따라 경비대 중대전술기지도 이동해야 했다.[5]
경우에 따라 1개 소대가 소대전술기지로 운용되기도 하였고, 1개 소대는 철수한 해병대 공병분대 대신 사이공의 대사관과 관저, 주월사 사이공 방송국 경비를 담당하였다.
작전 지역인 지안과 라이티에우의 북베트남군 165A 연대와 지방게릴라는 도합 510명 가량으로 상호 교전으로 총 전사 48명(장교 1명)과 전상 76명(장교 5명)이라는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27사단 일부 병력이 먼저 파병되어 있는 관계로 남베트남과 미군 측에서 추가파병을 요구하자 주월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은 처음에는 27사단을 논의했지만, 한국전 참전 경력이 있는 부대를 파병해야 한다는 정부내 방침에 의해 백마부대가 2차 파병부대로 결정 된다.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도 참전하였다. 당시 훈련 갔다 오는길인데 짐풀지 말고 다시 트럭에 타라고 해서 처음에는 농담하는지 알았다고... 그리고 유서를 쓰고 그 안에 손톱 넣으라고 하자 그제야 진짜인지 알고 다들 눈물흘렸다. 그때는 진짜 죽으러 간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78연대의 김대영 상병님이 9월 25일에 강릉 교전현장에서 전사하셨다.
세월이 흘러 가끔 사격훈련하다가 탄피 분실하면 행보관이 어디선가 슬쩍 하나를 꺼내와서 수량 메꾸는데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때 사용했던 탄피라고...
4. 신병교육대
4.1. 위치
4.2. 상세
5. 예하 부대
5.1. 사단 직할대
- 본부대
- 공병대대
- 정비대대
- 보급수송대대
- 화생방지원대
- 수색대대
- 의무근무대 - 과거 215이동외과병원이 같이 있었다.
- 정보통신대대
- 군사경찰대
- 전차중대
- 방공중대
- 보충중대
5.2. 제77보병여단 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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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단본부
- 제1대대 진격
- 제2대대 꿈터 (멸공)
- 제3대대 햇살 (신병교육대)
- 수송대
- 수색중대
5.3. 제78보병여단 상승독수리
- 여단본부
- 차성도 1대대
- 통일선봉 2대대
- 명지령 3대대
5.4. 제79보병여단 쌍독수리
- 여단본부
- 백호 1대대
- 들소 2대대
- 불사조 3대대
5.5. 포병여단 최무선
- 여단본부
- 제99포병대대
- 제239포병대대
- 제251포병대대
- 제259포병대대
6. 출신 인물
6.1. 사단장
출처
- 2대 김봉철 소장(1954. 8. 25 - 1954. 10. 9)
- 3대 김계원 준장(1954. 10. 10 - 1956. 4. 12)
- 4대 정래혁 준장
- 5대 이치업 준장 : 관동군 59사단 출신이며 번개장군으로 유명했다.[7]
- 6대 박경원 준장
- 7대 김동수 준장
- 8대 전부일 소장
- 9대 안광영 준장
- 10대 이준학 소장
- 11대 임지순 소장
- 12대 나희필 소장
- 13대 윤흥정 소장
- 14대 최영식 소장
- 15대 김선일 준장
- 16대 권영각 소장
- 17대 정진권 소장
- 18대 정순현 소장: 갑종 46기. 이기자 유치원 앨범으로 인터넷에서 유명해졌다. 관련글. 퇴역 후 금오공고 4~5대 교장을 역임한 경력이 있다.(1985년~1992년) 금오공고 링크
- 19대 김찬기 소장
- 20대 편동수 소장
- 21대 윤인하 소장
- 22대 편장원 소장
- 23대 양상태 소장
- 24대 오형근 소장
- 25대 김현수 소장
- 26대 이풍길 소장
- 27대 김승광 소장(육사 25기)
- 28대 김기성 소장(육사 27기)
- 29대 김군식 소장(3사 1기)
- 30대 이명구 소장(육사 29기)
- 31대 하정열 소장(육사 31기)
- 32대 이승우 소장(육사 33기)[8]
- 33대 김인동 소장(3사 12기)[9]
- 34대 전인범 소장(육사 37기)
- 35대 이진원 소장(육사 39기)[10]
- 36대 김종태 소장(3사 18기)[11]
- 37대 김정수 소장(육사 42기)[12]
- 38대 허강수 소장(3사 23기)[13]
- 39대 정해일 소장(육사 46기)
6.2. 장교/부사관
6.3. 병
한국의 포크그룹 동물원의 리더. 1990년에서 1991년 사이에 복무했다.
노무현 前 대통령의 아들. 1993년 3월 16일~1995년 5월 18일 근무.
아이돌 그룹 빅뱅의 멤버. 2018년 3월 13일 신병교육대로 입대했고 신교대 조교로 복무했다.
스타크래프트2 전 프로게이머. 2017년에 입대해 정보통신대대 운용중대에서 가설 주특기로 복무하였으며, 입대 전에 스타2 프로게이머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선수이다. 2019년에 제대를 하였다.
- 삼삼삼 - 황현홍. 유격조교로 근무
아이돌 그룹 BTOB의 멤버. 2018년 8월 21일 신병교육대로 입대했고 사단 군악대에서 복무했다.
아이돌 그룹 B1A4의 멤버. 2019년 1월 22일 신병교육대로 입대하여 사단 군악대에서 복무했다.
대한민국의 배우. 2020년 5월 12일 신병교육대로 입대하여 27사단에 그대로 자대배치 받아 복무 중이다.
탤런트 및 영화배우. 78연대에서 81mm 박격포 주특기로 복무하였다. 생김새와는 다르게 후임들에게 천사같았다고 한다.
트위치 스트리머 겸 유튜버.
탤런트 및 영화배우. 2013년 3월 5일 입대해 이틀 후인 7일 사단 신병교육대에 배치되었다. 이후 김태우와 마찬가지로 수색대대로 지원하였으나 수색대 무박 4일 훈련 중 중도 포기로 인해 사단 예하 연대로 배치되었으나 모종의 과정[14] 을 통해서 신교대 조교로 차출, 그 후로는 계속 조교로 복무하다가 전역했다.
탤런트 및 영화배우. 2010년 사단 신병교육대에서 교육을 받고 국방부 홍보지원대로 전출되었다.
전직 테니스 선수. 1998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병역특례로 신병교육대 4주 훈련을 마치고 나왔다.
배우. 2018년 6월 19일 신병교육대로 입대해 해당 사단의 조교로 복무했다.
프로 바둑기사. 2009년 12월 입대하여 수색대대에서 복무 중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나가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로 인해 2010년 12월 13일부로 이기자부대 수색대대에서 나온 그는 2011년 10월 6일까지 한국기원에서 예술ㆍ체육요원으로 근무하고 전역했다.
탤런트 및 영화배우. 1984년에 입대해 79연대에서 60mm 박격포 주특기로 복무하였으며, 군 입대전의 강변가요제 입상 경력[15] 덕분에 문선대 단원으로 선발되어 분기별에 한 번씩 부대 위문공연에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허리부상으로 인해 중간에 의병 전역을 하게 되었다.
7. 기타
7.1. 근무환경
7.2. 사단가
1절
민주 자유 대진군에 발맞춰 가는
조국의 부름 받은 우리 전우들
북녘땅을 향하여 총칼 겨누고
최선봉에 나서리라 북진의 사단
2절
추상 추풍 엄한 군기 굳은 단결로
필승의 훈련 받은 우리 전우들
조국 산천 찾아서 천여리 넘어
진출선을 헤치리라 북진의 사단
후렴
이색 칠각 빛나는 우리의 사단
장부의 일편단심 함께 뭉쳐서
하늘 높이 올려보자 27사단
7.3. 일화
해당 사단의 초기 멤버이자 1968년 4월 예비군 창설과 함께 초대 예비군 중대장이었던 안도현의 일화가 존재한다. 이 중대장은 당시 수시로 무장공비가 출몰하고 반공 이념이 누구나 투철했던 시기답게 현역과 견줄 만할 매우 엄격한 훈련체계로 예비군 대원들을 통솔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중대장을 했었을 당시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용담리에서 농민의 조모가 이른 새벽 가마솥 속 옥수수와 감자를 훔쳐 달아나는 공비를 발견하고 그의 아들이 이장님 댁[16] 에 신고하여 군경 합동 수색팀이 조직, 공비의 이동 동선을 따라 험준한 화악산을 중심으로 포위망을 펼치고자 그와 예비군들도 여기에 동원되어 M1 카빈과 실탄을 지급받고 그의 지시에 따라 수색 작전에 참여하게 된다.
이 와중에 그는 십오 년 전 경험을 토대로 피로와 허기에 발각을 감수하고 민가를 약탈할 정도라면 절대 화악산 방향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짓고, 만약 이 상황에서 이동 경로를 예상한다면 화악산보다는 광덕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개울을 끼고 수도권 방향으로 도주하고 있을 것이라며 상급 부대장을 설득했으나 간첩작전 대응 메뉴얼 이외의 루트로는 수색할 수 없다 하여 그는 대원 절반을 경찰 지원으로 투입하는 한편, 나머지 절반과 함께 경기,포천 방향의 광덕 계곡으로 향하게 된다.[17]
신고 후 3시간이 경과해 먼 동이 터서 전방 식별이 가능할 즈음, 개울을 수색하던 예비군에게 이상한 발자국이 있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물속 이끼에 찍힌 발자국을 발견하고 이후 모든 대원들에게 노리쇠 장전을 명한 후 정밀 수색과 함께 전방 주시 주의를 명령했다. 그렇게 약 5분을 진행할 즈음 기관총 발사음이 콩볶는 소리처럼 들렸고, 그는 서둘러 군경에게 공비의 현 위치를 무전으로 송신하는 한편 예비군 대원들과 함께 발음지를 향해 나아갔고 이윽고 바위 뒤에 숨은 무장공비와 예비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지다 잠시 소강 상태에 있을 무렵 그 중대장은 무장공비들에게 투항을 권고하게 된다.
"야 내래 리북서 내려와 남한서 살고 있는 예비군 중대장이다, 투항만 하면 내가 너희 목숨만큼은 내가 보장한다. 투항하라"
그럼에도 교전이 지속되는 사이 그의 무전대로 춘천과 화악산 방향에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병력들과 군용 트럭 소리를 들은 두 명의 무장공비들은 수류탄 두발로 그 자리에서 자폭을 하게 된다. 다만 이후 전공을 두고 일이 꼬여서 그와 예비군들은 마을 주민들이 공비 잡느라 수고했다며 끓여 놓은 육개장과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 걸로 없었던 일로 하게 되고, 공비들을 압박한 게 전부인 군경들은 각각 일계급 특진을 했다.
8. 사건사고
8.1. 1990년대
90년대 초반 신교대에서 총검술 훈련 중 찌르기 자세를 잘 하지 못하는 훈련병의 자세를 교정하던 조교가 발목을 트위스트 추듯이 움직이라며 오른쪽 발등의 옆(지표면)을 착검한 K2로 찌르며 가르치던 중 긴장한 훈련병이 발을 틀었고 그대로 발등에 대검이 관통... 조교는 영창, 훈련병은 퇴교 후 다시 입대, 영창으로 간 조교는 꽤 모진 것(K2 가스마개 잃어버린 훈련병을 개머리판으로 두들겨 패다가 분이 안 삭는지 총열을 잡고 몽둥이 쥐듯해서 실신할 정도로 폭행)으로 유명해서 당시 영창 근무자들이 엄청 갈궜다는 후문.
1990년대 군단 FTX 중 도하훈련을 하다가 피곤에 지친 병사 한 명이 부교를 졸면서 건너던 중 소총을 물에 빠트렸고 결국 못 찾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군사고사례집에 단골로 나오는 유명한 사건이다.
약 1997년경 78 연대 X대대에서 도하훈련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훈련상태가 마음에 안 든다고 중대장이 얼차려의 일종으로 전원 입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나오는데 소대장 한 명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당황한 중대장이 중대원들에게 전부 물에 들어가 찾으라고 했다. 이에 침전물이 일어나 물속이 더욱 탁해져서 소대장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나중에 소대장은 익사한 채로 발견되었다. 이후 해당 대대는 3년에 한 번하는 도하훈련을 5년간 못했다. 그리고 이건 괴담인데 사건 직후 해당 대대 탄약고에서 거수자가 나타나 "정지! 정지! 누구냐?"라고 수화 했더니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입고 있던 한 장교가 "나 5중대 소대장이다.", "(용무는?)옷 갈아 입으러."라고 말한 후 5중대 옆문을 열고 들어갔다는...
1990년대 말 2대대 6중대에서 A병사가 막사 안에서 목 매달아 자살했다. 구조상 2소대와 3소대가 문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1자형인데 그 문에 목을 매달았다.
8.2. 2000년대
2002년 말~2003년 초 사단 직할 수색대대에서 이등병이 백일휴가 때 탈영하여, 청와대에 글을 올리는 사건이 있었다. 이후 수색대대는 해체 위기까지 왔었다.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되고, 이 이등병은 다른 연대에 전출 됐으나, 거기서도 좀 많은 문제를 일으키나, 무사 전역함. 2003년 이 부대 모 연대에서는 탄약대대로 2개월 정도 각 중대가 돌아가며, 파견 탄약고 경비 근무를 서나, 그때 신임 중대장이 탈영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2005년 초 77연대 본부에서 전입온지 1달도 채 안되었던 이등병이 보일러실에서 자살했다. 유서에서 병영부조리 관련 내용이 적시되어 있었고 뉴스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가 된 사건이기 때문에 이때부터 군 전체에서 이등병에 대한 관리를 시키게 되면서 이등별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2006년 여름 79연대에서 ASP경계근무지원으로 파견나갔던 소총중대에서 K3사수인 일병이 자살했다.
2008년 여름 27사단 259 포병대대 본부포대에서 한 병사가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해당 병사는 취사지원 임무를 수행 중이었는데, 취사반장이 창고에서 취사 물품을 가져오라고 하여 들어간 후 몇 시간 뒤 결국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되었다. 곧 바로 응급 후송을 실시하였으나 결국 후송 도중 사망하고 만다. 창고는 취사밴에서 불과 20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실제로 조금만 주위를 기울이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이라 더욱 아쉬움이 크다. 참고로 당시 병사를 발견한 간부는 아직까지 해당 부대에서 근무 중이며 현재 그 창고는 치장물자 창고로 여전히 쓰이고 있다.
8.3. 2010~2012년
이 부대의 가장 큰 흑역사로는 2010년 흑금성에게 작계 5027을 유출시킨 33대 27사단장 육군소장 김인동 장군이 있다. 그때는 사단장 직을 마치고 상급부대가서 참모직을 하고 있었고 군단장 진급이 유력했다고 한다. 김인동은 이적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징역 2년을 살았다.
2011년 겨울경 병사 한 명이 활동복만 입고 탈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초기에는 수색대로만 이루어진 추격조가 편성되었으나, 날이 밝아오면서 시간이 지체되었기에 각 부대에서 병력들을 차출해 주변을 탐색했고, 결국 탈영병은 근처 농가에서 잡혔다.
11년 초 혹한기 훈련도중 이등병 병사 한명이 총기를 소지한채 탈영하는 사건이 있었다. 훈련중이던 부대와 헌병들의 끈질긴 추적끝에 탈영 18시간만에 춘천에서 붙잡혔다.
2011년 6월 부대 전술 훈련 중에 부대원 최모 상병이 탈영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무기와 장구류는 놓고 갔었기에 무장탈영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더 웃긴 사건이 추가적으로 발생했는데, 이 부대와 함께 훈련 중이던 같은 27사단 대항군 부대에서도 똑같이 탈영병(이모 일병)이 발생한 것이다. 아마도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 탈영병을 잡기 위해 훈련으로 대치 중인 두 부대는 즉각 훈련을 중단하고 탈영병 수색에 전념했고, 결국 탈영병 체포에 성공했다. 기사
2012년 말 포병연대 어느 예하부대에서 병사 한 명이 포상에 목을 메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 포병대대 특성상 포상에서 자살하는 일이 빈번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연도와 장소를 유추해볼 때 27사단 X9포병대대 X포대에서 있었던 일인 거 같다. 그리고 그 포상에서 귀신 목격담과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들이 현재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 여담으로 당시 사단장이었던 이진원 예비역 육군소장(육사 39기)은 포상 때문에 또 다시 악몽을 재현하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다. 7사단 포병연대장 시절 예하대대에서 실종병사 포상발견(다행히 멀쩡했다.) 사건으로 해프닝을 겪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자살이라는 대형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결국 중장 진급에 실패하고 고향인근[18] 부대장을 지내고 2016년 11월에 예편했다.
2012년 한여름 27사단 2XX포병대대 X포대에서 포상에서 한 병사가 목을 메달아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그 후 한 달간 포상을 폐쇄하게 되었고, 모든 장병들은 정신교육 집중기간 때처럼 막사에 짱박혀있었다.
2012년 9월 사단급 전술훈련 마지막날 훈련을 마치고 복귀하던 수색대대 차량이 졸음운전으로 춘천-사창리 구간 국도변 가드레일을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사고에서 병력수송을 하던 K-511 2-1/2톤 트럭이 가드레일을 뚫고 전신주를 충돌하였는데, 그 전신주가 그대로 차량 위를 덮쳐 뒤에 타고 있던 상병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탑승자들이 부상을 입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숨진 상병은 쓰러지는 전신주에 그대로 덮쳐져 화를 면하지 못한 안타까운 상황이였다. 그런데, 이 사고가 더 안타까운 이유는 사고 상황을 접수받고 출동한 정비대대 10톤 구난차량이 긴급한 상황에서 과속을 하다 운전부주의로 사고현장 5km를 앞두고 전도되어 구난차량을 운전하던 운전관은 경상을 입었고, 선탑임무를 실시하던 차량정비관은 중상을 입어 한 달 동안 의식을 찾지 못하다가 결국 사고발생 40일 만에 사망하였다. 이로써 이 사고로 발생한 사망자는 총 2명이 되었다. 나머지는 경상에 그친 터라 다행히 전부 회복하였다.
이 사고에서 숨진 상병은 사후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고 1계급 추서되었다. 당시 상병의 부모님이 사단에 보낸 편지가 있는데 이 내용이 '국가를 위해 희생한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와 관련하여 본인들은 어떠한 수사요청도 하지 않고 다만 아들의 희생이 귀감이 될 수 있도록 기억해달라' 정도의 내용이었다. 이 내용은 곧장 귀감사례로 선정되어 국방일보에 게재되었고, 장례도 최고 예우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단본부 내부에 해당 상병을 기리는 건물이 있다.
그러나 구난차량에서 숨진 정비관은 선탑임무 부주의에 대한 유족의 이의제기로(당시 구난차량 전도사고는 1차적 접촉사고 후에 운전관/선탑자가 지속운행가능이라고 판단하여 운행하다가 이들이 발견하지 못한 뒷바퀴 이탈로 인해 벌어진 2차사고이다. 유족 측에서는 부대에서 강제로 지속운행 지시를 하였다고 주장한다) 1계급 추서되지 못하고 중사계급으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17년 9월 기준으로 숨진 상병의 유족은 매년 묘지를 방문할 때마다 숨진 정비관의 묘에도 헌화를 하고있다. 여담으로 정비대대 공원에는 숨진 정비관을 기리기 위한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당시 부대입구에 설치하려고 정비대대장이 건의하였으나 사단에서는 유족의 이의제기로 인하여 이 건의를 기각하고 자금지원은커녕 설치조차 불허하였다. 이에 반발한 대대장이 자신의 사비로 설치하였다. 이 대대장은 이후에도 원주, 춘천에서 근무하며 상급부대 지시를 무시하고 부하를 위한 부대운영을 했다.
8.4. 2013~2014년
2013년 가을쯤 다른 포대에서 한창 유행하던 살인진드기에 감염되어 병사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이 병사는 서울에 있다는 큰 의무대까지 실려갔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 중순 모 대대의 유격훈련 마지막 날에 인접대대의 부대원이 탈영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당초 예정된 복귀 행군을 취소하고 이들을 탈영병 추적에 동원하기 위해 급히 예정된 루트를 수정 급속코스로 복귀행군 하였다, 다행히도 해당 탈영병은 새벽에 신병이 확보되어 유격으로 골골대는 상황에서 탈영병을 쫓는 대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8.5. 2015년~
대학에서 컴퓨터공학과, 3사관학교에서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임관 후 첫 근무지로 2008년 7월부터 2009년 10월까지 1년 4개월 동안 27사단 정보통신대대에서 근무했던 유호철 대위의 사망 사건에 대해 논란중이다. 군에서 27사단 정보통신대대,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 등 3개 부대에서 7년간 정보통신 장교로 근무하면서 군 건축물 내에서 통신선로 보수 및 설치작업을 하며 지속적으로 석면에 노출되었던 유호철 대위는 2014년 8월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2015년 1월 의병제대 후, 국방부와 소송 중이던 같은 해 3월 26일 연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유호철 대위에게는 부인과 갓 태어난 아들이 있있고, 게다가 국가유공직 및 관련하여 당사자로서 소송 증에 판결을 일주일 앞두고 사망하여 소송종료 사유로 소송까지 중지되어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하였다. 2018년 4월에 청와대 웹사이트에 유 대위의 대한 청원이 올라왔으나 30일간 총 청원자수가 20만명을 넘지 못해 청와대의 답변을 듣지 못하였다.. 기사 청와대청원글
9. 여담
3군단 시절인 1958년, 페치카가 전군 최초로 시험 보급된 부대이다.
2009년 11월 제34대 사단장 전인범 소장이 취임한 이후 부대가 더 야전적으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안경 착용자들에게도 전부 안경에 끈을 달아놓도록 한다. 솔직히 조금 멋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는 훈련에서나 실전에서 안경이 떨어지지 말라는 좋은 취지에서 시행되는 것이다. 또한 부대역사관을 정비하여 정신전력을 강화하고 지역주민들과의 화합을 도모하여 지금까지도 사창리 주민들로부터 좋은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이기자 수색대대의 무박훈련도 전인범 장군이 만든 것이다.
전인범 사단장은 사단 장병들의 헤어스타일도 모히칸 스타일로 바뀌었는데 '이기자컷'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육군인데 모히칸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다니는 군인이 있다면 백이면 백 27사단 장병이다.[19] 이는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때 이기백 장군의 부관으로 따라갔던 전인범 당시 중위가 테러 현장에서 부상자들을 구하고 응급처치를 도왔던 경험과 교훈이 계기가 되었다. 머리에 파편상을 입은 부상자의 두발이 길어서 피가 머리카락에 뒤엉켜 응고되어 정확한 상처 부위를 찾아 제대로 치료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경험을 겪은 뒤, 나중에 부대원의 머리모양을 독자적으로 정할 수 있는 재량을 가진 정도의 위치가 되면 머리를 최대한 짧게 깎도록 지시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결국 먼 훗날 27사단장이 된 후 그 결심을 실제로 실천한 것.
2011년 11월 35대 사단장, 이진원 소장[20] 이 새로 취임한 후 규제가 조금 풀렸다. 하지만 여전히 육군 전체를 통틀어 가장 짧은 수준. 한때 전인범 소장이 사단장 임기 후 바로 진급해 2군단장에 취임할 것이라는 루머가 돌아 수많은 2군단 병사들을 공포에 떨게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장성급 장교라 하더라도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한 계급에서 적어도 2개 보직 이상은 거쳐야 다음 계급으로 진급 심사 대상에 들어갈 수 있다.[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이분의 부대 운영 철학이 특별했다는 반증이라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2002년 초 78연대 2대대 6중대가 군정보화 시범사업 부대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자체 인트라넷으로 대대 홈페이지, 중대 홈페이지, 심지어 소대 홈페이지까지 만들어졌던 적이 있다.
후술할 가수 김태우가 현역으로 근무할 당시 부대 연례행사인 "이기자 페스티벌"에 온 초대가수의 질이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2007년에는 짬이 안 될 때라 그랬는지 인맥을 총동원해서 임정희, 양파, 메이비, 손담비, 린, 수호, 원더걸스, 크라운J, 길건 등 위문 공연 역사상 최대의 라인업을 끌어모았다. 특히 Tell Me로 안팎에서 엄청난 인기를 모은 원더걸스와 혼신의 비방용 댄스를 보여준 길건의 무대는 이후 장병들 사이에 수없이 회자되었다. 2008년 때는 2007년보다는 질이 떨어졌지만 문지은, 임정희, 서인영, 원투 등이 출연하는 등 괜찮은 수준이었다. 2009년 2월 그가 전역한 후 수개월 뒤에 열린 09년 페스티벌 때는 그를 포함해 아이유, 브라운 아이드 걸스, 마이티 마우스, 아웃사이더 캔, 황보, 김미연 등이 참여했고, 한창 사랑비로 활동하던 김태우 역시 무대에 서서 전우들을 만났다.
2011년 이기자 페스티벌도 게스트진이 화려했다. 브레이브걸스, 에이핑크, 이파니, 디아 등 젊은 신인 걸그룹이나 육체파(...) 여가수 위주의 패널라인에 사창리는 불타올랐다.
. [22]2009년에 잠깐 사단 장병들의 상담역을 맡았던 적이 있다(얼마 지나지 않아 병영생활 전문가 제도가 도입되어 민간인에게 문제병사를 상담시키지 않는다). 이외수의 집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주변 군부대에서 5분대기조가 달려온다고 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사실 농담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통합방위법 시행령 제23조에 의하여 국가 중요시설·기반시설이 아니므로 개인에 대한 군인력 지원을 할 수 없다. 다만 감성마을이 사단 작전지역에 포함되기 때문에 상황이 발생했을 시 5분대기조 등의 정상적인 작전 활동은 당연히 가능하다. 2013년 1월, 화천산천어축제 전야에 이 문제와 더불어 상당한 논란과 문제제기가 있었다. 이외수 논평 및 논란 항목 참조.
인기 있는 군생활 이야기 블로그 중 하나인 <가츠의 군대이야기>도 이 27사단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주인장 '악랄 가츠'는 78연대 출신. 폭소를 터뜨리게 하는 개그 사이사이에 이 부대의 처절함(특히 훈련강도)이 매우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참고로 위에 언급된 전인범 前 사단장도 사단장 재임 시절 이 블로그에 팬레터(?)를 보냈다.
주둔지인 사창리의 물가가 비싸서 외박나간 장병들이 고통받고 있다. 물론 이것은 거의 모든 군부대 주변 지역이 비슷하다. 주말에 외박 나오는 군인들의 지갑이 가장 큰 돈줄이기 때문. 숙박업소는 주말/평일 요금표가 따로 있을 정도다. 국민의 세금으로 위수지역 악덕상인들만 배불리는 셈. 위수지역을 확대하든지 물가를 통제하든지 대책이 필요하지만 그런 거 없다.
포병 연대의 경우 예하 4개 대대가 모두 전시초기 대포병 화력전을 위해 미리 전방에 배치되어 있다.[23] 아예 7사단, 15사단의 주둔지역 내에 배치되어 있어 사단 본부까지 가려면 육공 기준 1시간이 넘는 고행의 길을 가야 한다. 다만 그만큼 사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은 오히려 재앙에 가까운 수준이다. 포병여단부터 사단본부, 심지어 타 사단에서까지 와서 간섭해대는 경우도 있다. 위병소 근무를 서보면 실제로 사단 관련 차량보다 주변에 깔려있는 2군단 예하 부대들인 7사단, 15사단이나 2포병여단 관련 차량을 훨씬 더 자주 볼 수 있는데, 그 때문에 포병대대 위병근무자들은 사단 예하 연대의 차량번호보다 7사단과 2포병여단의 차량번호를 더 먼저 익히는 불상사가... 게다가 99포병대대를 제외한 나머지 3개 포병대대는 다른 수많은 2포병여단 및 7사단 부대들이 밀집된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탈영을 하더라도 등산장비로 암벽만 타고 다니지 않는 한 멀리 벗어나기가 힘들다.
2012년 8월에 78연대에 또래오래가 생겼다. 운영 시간은 평일은 일과 이후와 주말이고, 맥주(!)도 파는데 개인당 500ml 1잔으로 통제하고 있다. 병사 봉급으로 자주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라 자주 이용하기는 어려우나, 통상 군대 안에서 먹기 힘든 피자, 치킨, 맥주를 영내에서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타 부대에 비하면 엄청난 행운이다.
이기자 복지 회관과 주차장이 들어선 곳은 사보이 호텔 사주이자 대한교육 보험 회장을 지낸 경성 갑부 조준호의 마름 집이 있던 곳으로, 일개 마름에 지나지 않지만 산속에 상당한 규모의 집이었다고 한다. 그 집은 한국전쟁 직전에는 북한의 빨치산(조선인민유격대)의 소규모 유격대들이 쓰던 거점으로 쓰였다.
이기자 부대의 성지인 화악산은 남한 내에 제일 추운 산 중 하나로 겨울에 기온 하락이 심할 때 심심치 않게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린다. 수색대대의 별칭 또한 화악산 독수리. 2005년 5월 초에 화악산에 눈비가 내렸다. 그때 차량기동하던 장병들은 혹한기보다 더 떨었다고 한다. 광복 전 세상을 놀라게 했던 사교 백백교 교주 전용해가 은신했던 곳이다.
도마치 고개상에 위치한 유격장은 과거 삼청교육대의 강원지부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동원 예비군을 현역병만큼이나 빡세게 돌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잘못 걸리면 훈련기간 내내 산악행군을 하고 잠도 산꼭대기에서 A형 텐트를 치고 자야 하기도 하고 (동원 훈련에서의 만행), 더 재수가 없으면 K-4 같은 중화기까지 도수운반 해야 하고 (현역 때도 안 해본 도수운반 동원 훈련에 가서), 블랙호크와 치누크 헬기로 공중강습훈련을 받아야 하기도 하고 (다시 현역병이 된 기분이에요), 다른 수천여 명의 동원 예비군과 함께 사단 야외기동훈련에 참가하거나 (기사) 보트를 타고 도하훈련을 해야 하기도 한다 (노젓는 예비군). 다들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나면 상당수는 이를 갈면서 다른 곳으로 주소지를 바꾼다고 한다 (결국 한 명 남고 다 옮김).
[1] 현재는 정문 상부 판넬이 전광판으로 개수되어 있다.[2] 단군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순우리말로 이루어진 군부대명이다.[3] 여성 이름 끝자에 '아들 자(子)'가 붙는 것은 일본 여성들에게서 흔했었는데 한국 여성들의 경우 일제강점기 뿐만 아니라 최소 1960년대까지 이러한 경향이 많이 보였다.[4] 군사원조단 산하에는 제1이동외과병원도 있었지만 지역도 다르고 별도로 움직였다.[5] 반면 제100 군수사령부는 경비대대가 따로 없어 제 103공병대대의 2개 중대는 도로 경비, 1개 중대는 탄약고 경계를 담당하였고, 추가로 병력을 빼서 지원나온 미 헬기장 경계까지 담당하여야 했다(...).[6] 1953. 10. 9 - 1954. 8. 24[7] 간략한 행적은 송호성 장군 맨 마지막 문단 참조.[8] 27사단장 역임 후 제3야전군사령부 참모장, 육본 인사참모부장, 육군학생군사학교장 등을 거쳤다. 예편 후 군인공제회 감사로 임명되었다.[9] 군단장 진출이 유력했으나 흑금성 사건으로 구속되었다.[10] 유승호 전입 당시 사단장이었으며 이후 육군미사일사령관을 역임했다.[11] 27사단장 역임 후 교육사령부 교육훈련부장으로 영전하였다.[12] 수도방위사령관을 역임 후 대장 진급하여 제2작전사령관에 취임하였다. 직속상관이자 육사 2년 선배인 김운용 2군단장이 대장진급과 동시에 3군사령관으로 영전되자 잠시 2군단장 직무대리를 수행했다는데, 2군단 예하 사단장들 중 최고참이었기 때문이다. 15사단장은 1기수 후배 7사단장은 2기수 후배.[13] 前 7포병여단장 출신으로 2017년 9월 발표된 장성급 인사에서 진급과 동시에 영전하였다.[14] 당시 이진원(육사39기) 사단장이 조교로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유는 불명.[15] 1984년 중창단 '덧마루'를 결성하여 '길을 잃은 친구에게'라는 곡으로 장려상을 수상함.[16] 전화기가 흔치 않던 당시엔 긴급 신고처였다.[17] 광덕산 포천 경계의 고개를 현역 장병, 장교 등 군관계자 및 이곳을 거쳐갔던 전역자들은 속칭 캐러맬고개라고 부르는데, 이에 대해서는 백운산문서 참조.[18] 이진원 장군의 고향은 공주이고, 송영무 국방부장관의 고등학교 후배이다.[19] 근데 이건 전인범 사단장 시절의 얘기고, 2017년 현재는 27사단은 짧은 머리규정이 완화된 반면 제3보병사단이 그런 헤어컷을 채택한 상태다. 일명 백골컷. 여담으로 백골컷을 만든 사람은 '''비육사 최초 특전사령관'''이 되었다.[20] 육사 39기로 대령 시절에 이미 화천에 근무한 적이 있는데 7사단 포병연대장을 지냈다. 그 직전에는 청와대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탈모 때문에 고생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중간과 앞머리를 남겨 두는 전인범식 이기자컷이 불가능했을지도[21] 하지만 문재인 정부에선 그런 건 없다. 당장 김정수 사단장이 직통으로 중장 진급과 동시에 수도방위사령관으로 영전되었다.[22] 15사단섹터내에 있었다[23] 27사단이 2군단 예비사단 역할을 해야하기에 90년대 중반에 1군에서 가장 먼저 포대가 K-55로 자주화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