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갑

 

1. 개요
2. 행적
3. 기타
4. 가족 관계
5. 창작물에서


1. 개요


趙秉甲
1844년 5월 15일 - 1912년 5월 23일 [1]
조선 후기의 관료. 본관은 양주이며 자는 요성(耀成)이다. 고종 당시 영의정을 지낸 조두순의 서조카. 백낙신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네임드 탐관오리로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꿔놓은 동학농민운동의 원인인 고부 민란의 원인을 제공했다.

2. 행적


철종 14년(1863년)에 관직에 올랐다. 그 후 고종 30년(1893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경상도 김해부사를 지내다가 전라도 고부군수로 부임했다.
부임하자마자 늘 하던대로 각종 탐관오리 행적을 일삼았다. 그의 대표적인 악행으로는 만석보라는 큰 저수지를 만든 것으로 이미 상류에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만든 보[2]가 있음에도 더 큰 보를 만들겠답시고 백성들에게 땡전 한 푼 주지않고 부역에 동원하는가 하면 보가 완성되자 만석보의 물을 쓰는데 과도한 세금을 매겨 거액의 수세를 뜯어냈다.[3]
또한 인근의 태인군수를 지낸 아버지의 공적 비각을 세운다고 다시 세금을 뜯고 강제 노역을 시켰으며 이외에도 백성의 재산을 탐내 무고한 죄를 뒤집어 씌워 재산을 뺏는 등의 각종 악행으로 백성들에게 원성을 샀다. 거기에 만석보도 잘못 만들었는지 홍수철마다 침수 피해가 발생해서 악명이 자자했다.
어느날 조병갑이 모친상을 당하자 부조금으로 2천냥을 걷어오라고 지시했다. 이에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이 대표로 나서서 항의하다가 곤장에 죽는 사태가 터지며 열받은 백성들이 폭발해 전봉준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동학농민운동(1894년)의 시작인 고부 민란이 일어났다. 미리 도망쳐서 린치는 피했지만 조정에 의해 파직당하고 고금도유배당한다.
유배된지 1년만에 고종에게 사면을 받아 1898년에 4품 법무 민사국장에 임명되고 몇 달 뒤에는 고등재판소 판사도 맡는다. 고등재판소 판사직을 맡은 지 1달 뒤인 1898년 5월 30일 동학농민운동을 지지하고 참여한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직접 사형 판결을 내렸다.

3. 기타


조병갑의 선정비는 현재 2기가 남아있다. 함양읍 역사 인물 공원에 있는 것과 2009년 천안 광덕면에서 새로 발견된 것이다. 함양 선정비 표지석에는 "조병갑이 유민을 편케 하고 봉급을 털어 관청을 고치고 세금을 감해 주며 마음이 곧고 정사에 임했기에 그 사실 없는 선정을 기리기 위해 고종 24년(1887년) 세웠다." 하는 내용이 있고, 천안 광덕면에서 발견한 선정비는 마모가 심해 글자판독이 어렵다. 이 선정비 2기는 조병갑이 고부 군수(1893년)를 지내기 전, 함양 군수(1880년)와 천안 군수(1882년)를 역임한 시절에 자기 공덕을 기리고자 셀프로 세운 것이다.
이와 관련, 함양군의회 군의원들은 "선조들의 충효와 선비 정신, 위민과 애민 사상이 깃들어 있는 역사 인물 공원 안에 있는 동학 혁명의 도화선으로 지탄받고 응징해야 할 조병갑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건 지역 주민의 자존심과 자긍심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며 역사적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하며 조속히 철거하자고 주장했다. 2007년 1월에는 30대 남성 백 모씨[4]가 함양에 있는 조병갑의 선덕비를 훼손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조병갑의 둘째 아들 조강희는 일제 강점기 때 경성일보[5]매일신보에서 일했으며, 친일 신문 동광신문에서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냈다.
함경도 관찰사로 방곡령을 실시했던 조병식이 사촌이다. 두 사람은 같은 양주 조씨로 이름의 첫 자인 병(秉)이 양주 조씨 20세손 항렬자이다. 조병식은 조병갑을 훨씬 능가하는 간신배에 탐관오리였다고 하니 나라를 말아먹은 집안이다.(두산백과 자료)[6]
독립운동가이자 수도경찰청장, 야당 정치인으로 지냈던 조병옥(趙炳玉)의 원래 이름은 조병갑(趙炳甲)이었는데, 조병갑의 악명이 워낙 높아서 조병옥으로 개명한 바 있다. 당시 갑오년에 태어나 조병갑이었는데, 그의 선생이 조병갑의 악명을 알고 조병옥의 부모에게 권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홍보 수석을 지낸 조기숙이 바로 이 조병갑의 증손녀이다. 월간조선이 이 사실을 폭로하면서 조병갑이 나중에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판사로 복직했다는 기사를 내어 논란이 일었는데, 조기숙은 조병갑이 동학 농민 운동의 정당성을 위한 희생양이고 조병갑이 동학 농민 운동을 유발했다는 것은 역사적 오류라며 항변했으나 여론이 악화되자 동학농민혁명군 유족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정남기 동학농민혁명유족회장은 후손이 책임질 일이 아닌데 사과의 뜻을 밝힌 것을 고맙게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내놓았으나, 일부 유족들은 "언론에 보도되니 그제서야 면피용 사과를 한다." 하며 탐탁찮은 반응을 보였다.

물론 아무리 탐관오리라고 해도 지금은 연좌제가 있는 조선시대가 아니므로 상기한 악행과는 무관한 후손이 조상의 죄업 때문에 욕 먹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냥 반응하지 않거나 간단히 사죄하고 끝내면 될 일을 정부 인사가 거짓말까지 하며 자기 조상을 옹호하다가 뒤늦게 면피용 사과를 했다는 점은 비판받아야 하겠다.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에 조병갑의 무덤이 남아있다. 다만 묘가 있는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 역시 조병갑과 그 가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듯.참고
일각에서는 동학농민운동과 연관성이 있다는 점에서 친일파로 오인하고 있지만 조병갑 본인은 직접적인 친일 행위를 한 적이 없어 친일파는 아니다.

4. 가족 관계


  • 아버지 : 조규순(趙奎淳), 태인 군수를 지냄.
  • 어머니 : 김해 김씨.
    • 형 :
  • 부인 : 숙부인 전주 이씨 이병양(李秉兩), 판서 이병문(李秉文)의 딸.
    • 아들 : 조강희(趙岡熙, 1889년 ~ ?)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 손자 : 조중완(趙重完)
  • 증손녀 : 조기숙(1959년 ~ ) 이화 여자 대학교 국제학부 국제학 전공 부교수.
  • 부인 : 숙부인 청송 심씨, 부사 심영규(沈永奎)의 딸.
    • 아들 : 조찬희(趙瓚熙, 1880년 ~ ?) 진사 역임.
    • 딸 : 김태규(金泰圭)에게 시집감.
    • 큰아버지 : 조두순(趙斗淳, 1796년 ~ 1870년) 영의정을 지냄.
  • 사촌형 : 조병식(趙秉式, 1832년 ~ 1907년)

5. 창작물에서



[1] 출처: 《양주조씨족보》 조병갑편.[2] 광산보, 혹은 민보라 불린다.[3] 현재 만석보가 있던 자리는 지방 사적으로 지정되었는데 거기 세워진 표지판에는 '만석보지(...)'라고 쓰였다. 만석보 '터'라고 했으면 읽는 사람도 민망하지 않을 텐데... 유홍준 교수가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에서 민간 차원으로 세웠던 만석보유지비(萬石洑遺址碑)와 비교하며 자세히 논평하였다.[4] 이후 이 사람은 같은 해 2월 삼전도비에 '''철거370'''이라고 낙서하여 훼손하거나, 2012년, 2016년에는 각각 노태우, 박정희 대통령 생가에 방화를 하는 등의 일을 저질렀으며 구속되어 이후 징역 4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기사.[5] 이 신문은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총독부 통감으로 부임한 후 침략 정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06년 창간한 통감부 기관지다.[6] 방곡령을 내린 이유도 흔히 생각하듯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상인들이 미곡을 다 가져가면 자신이 수탈할 미곡이 모자라서였다. 이후 조병식은 충청 감사가 되어 동학도들의 애절한 호소를 그냥 다 씹는 기염을 토한다. 이후 이리저리 좌천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정신 못 차리거 탐관오리 일직선으로 살았다고. 그리고 마침내 오직 고종의 전제 왕권 유지와 독립협회를 때려부수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은 정치깡패 집단 황국협회의 간부가 되어 직접 독립협회를 때려부수고 민권 운동을 탄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