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발
1. 整髮
스님이 삭발을 함.
2. 淨髮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음. 그렇게 다듬은 머리.
3. 조선 시대의 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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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撥
1553년 ~ 1592년
3.1. 개요
조선 중기의 무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고(子高), 호는 백운(白雲).
3.2. 상세
정발은 1553년(명종 8) 경기도 마전군 군내면(현 연천군 미산면 광동리 너븐골)에서 간성군수를 지낸 아버지 정명선(鄭明善)과 관찰사 남궁숙(南宮淑)의 딸인 어머니 함열 남궁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1577년(선조 10) 별시 무과에 병과 7위로 급제한 후# 해남현감, 거제현령 등의 지방 외관직과 비변사낭관 등 중앙직을 두루 거쳤다. 관련 기록이 많진 않지만 1589년 1월 비변사에서 무장을 불차 채용할 때 들어갔고 이순신·이복남·박진 등과 함께 이름이 거론되고 동년 7월 30일 국경을 넘어 염탐하던 여진족을 쏘아죽였다는 실록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북방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유능한 장수로 인정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몇 달 전에 부산진[1] 첨절제사로 부임하여 부산진성 수비를 맡았다. 1592년 3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가 길을 빌려달라는 내용이 담긴 투서를 건네고 왜관에 있는 일본인들이 급히 피신하는 것을 보고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는 부산 앞 바다에 있는 절영도[2] 에 주둔하며 군사 훈련과 사냥을 실시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날에도 절영도로 사냥[3] 을 나갔다 왜 선단이 접근한다는 보고를 들었는데 처음에는 세견선으로 오해하여 경계하지 않았다.
왜군이 육지에 근접해 조총을 쏘아대자 왜침임을 알아차리고 전선 3척을 자침시키고 왜관에 남아있던 왜인들을 구금하는 한편 백성들을 성안으로 소개시켜 농성에 돌입했다. 1592년 4월 14일 새벽,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1군이 부산진성으로 밀려들면서 정발이 지휘하는 부산진성 수비군과 격돌,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정발과 그가 지휘하는 수비군, 그리고 인근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은 그 어떤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분전했으나 30배 차이나는 압도적인 수적 열세와 조총이라는 신 무기의 위력을 이겨내지 못해 4시간여만에 전투는 패배로 끝나고 정발은 전사했다. 검은 옷을 입었다고 흑의 장군이라고 부르며, 이는 18세기 화공 변박의 부산진 순절도에도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전사 당시 관직은 절충장군(정3품 상계 당상관) 행 경상좌도 부산진 수군첨절제사. 전면 패주하는 혼란한 상황에서 초기 전황에 대한 파악이 늦어 한동안 전사 여부가 확정되지 않았으나 아내 임씨가 진정을 넣고, 임진년 말에 전사가 확인되어 공로를 인정받았다.[4]
정발이 처음 왜 선단이 접근한다는 보고를 받고 이를 세견선으로 오인한 사실은 실록, 난중잡록, 기재사초, 재조번방지, 연려실기술 등 임진왜란 관련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지만 사후 대응에 관해선 차이가 있다. 실록, 난중잡록, 연려실기술은 정발이 궁시를 쏘며 분전했다고 적은 반면 재조번방지에선 술에 취해 첩보를 무시하고 다음 날 허겁지겁 성으로 돌아가다 화살 한 대 쏘아보지 못하고 목이 잘렸다고 부정적으로 기술했다. 기재사초는 앞 단락에서 정발이 허겁지겁 진으로 들어가고 왜군이 성을 포위했다고 적었으면서 바로 뒤이어 정발이 전선에 타고있다 배에 올라탄 왜군에게 죽었다고 적는 앞뒤가 안 맞는 서술을 보인다. 그러나 정발이 대비를 갖춘 다음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고 적은 사료가 더 많을 뿐더러 개중 난중잡록은 해당 전투 생존자인 가은산 등의 증언을 담고 있어 이쪽의 신뢰성이 더 높다. 무엇보다도 500명이란 소수의 병력으로 수십배의 대군을 상대로 4~5시간동안이나 물고 늘어진 것을 생각하면 용감히 대처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5]
더구나 적진이었던 일본측에서도 평가가 매우 후했는데, 전후에 조선 통신사 황신에게 부산성 전투에 참여했었던 일본 장수 마쓰라 시게노부는 "우리는 부산진 전투에서 좌절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며 프로이스의 기록에도 "거의 전원이 전사할 때까지 싸웠다",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히 높은 훌륭한 병사들"이라고 적고 있다. 정발과 부산진의 병사들, 그리고 백성들이 치열하게 맞서 싸웠고 별다른 저항이 없을 것으로 예측했던 일본군의 입장에선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하다. 물론 직접적으로 싸우기 위해 달려들었다기 보다는 그냥 죽기 전에 저항이라도 해보자는 의미였겠지만, 낫들고 달려들고 지붕 기왓장 들어내서 성벽에서 던져대니 평소 전투하는거 구경하러 오던 일본 농민들을 생각하다가 큰코다쳤을 것이다. 당시 일본의 전투는 다이묘나 유력 가문들 간의 세력 다툼이었던 데다가 한쪽이 패하면 그것으로 전쟁은 종결되고 패전 측의 영지나 주민들은 승전 측에 예속되어지는 것으로 보상이 이뤄졌으며, 처벌도 전쟁을 일으킨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들 및 측근들, 가신, 또는 그 일가 위주로 진행될 뿐, 영지나 주민들은 승전 측의 경제력을 증가시키는 요소이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외침을 이미 경험해봤던 조선 주민들에겐 다른 얘기였다.[6]
전투가 워낙 혼란했던 건지, 시체는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의관장으로 장례가 치뤄졌다. 이후 진군을 멈추지는 않았고 일본군은 동래성으로 향했다.(동래성 전투) 일본군과 부산진 주변 백성들은 분전한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을 기리는 의미로 정발을 '''흑의 장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렇듯이 정발은 전쟁 중에 자신이 맡은 임무에 소홀했다는 의혹을 사기도 했으나 이내 누명을 벗었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충신으로 인정받았다. 사후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동래 충렬사에 배향되었으며, 묘소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백석리[7]#에 있으며 부인 임씨와 합장되어 있다.
현재 부산에선 송상현, 윤흥신[8] 과 함께 부산을 지켜낸 3대 맹장으로 숭상받고 있으며 정발의 동상이 동구 초량동 초량 교차로에 있다. 초량역 5번 출입구와 가깝다. 공교롭게도 지척에 일본 영사관이 있다.
김성한의 소설 7년전쟁에서는 어째서인지 송상현보다 18세 연상으로 나온다. 작가가 철저한 고증을 하는 스타일인데 아마도 출생연도인 1553년을 1533년으로 잘못 이해한 듯 싶다. 임진왜란 발발 2달 전 다이라 시게마스(平調益)[9] 가 마지막 교섭을 위해 부산으로 오는데 이때 정발이 시게마스와 함께 송상현을 찾아간다.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마지막까지 싸우다 애첩 애향과 함께 전사하고 만다.
[1]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일대. 이름 때문에 오해할 수도 있겠는데 부산진구가 아니다.[2] 지금의 부산 광역시 영도구.[3] 이때문에 간혹 전쟁의 낌새를 모르고 놀러나갔다는 오해가 종종 있지만 이 시기에 사냥은 그 자체가 기동 훈련이었다.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대부분의 국가에서 정기적으로 사냥을 통해 군사훈련을 하였다. 산이 많은 나라 특성상 군대가 사냥을 하려면 무기를 들고 동료들과 함께 산에서 죽어라 뛰어야 했고, 훈련 이후엔 잡은 동물의 고기라는 보상도 주어지는 꽤 효과적인 훈련법이었다. 조선 전기의 정기 군사훈련인 강무도 사냥으로 군사훈련하는 것이었다. 이를 종합해보면 정발은 일본의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사냥을 시행했다고 보는게 옳다[4] 선조 실록 1592년 8월 7일, 11월 25일 기사에서 정발이 정말 죽은 게 맞는지 선조가 확인하는 대목이 있다. 전쟁 초기의 혼란으로 파천 직후 조정이 파악한 초기 전투는 김해, 밀양, 상주 전투, 탄금대 전투 정도였기 때문이다.[5]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단병접전으로는 정발을 제압하지 못해서 조총으로 제압했다고 하여 100년 내전으로 단련된 일본군을 압도할 정도의 개인무력도 보유했을 수 있다.[6] 그래서 인지 성이 함락된 이후 가축까지 죄다 도륙하였다고 한다.[7] 이 곳은 현재도 경주 정씨 집성촌이다.[8] 을사사화에서 죽은 윤임의 다섯째 아들로, 개전 직후 다대포진에서 왜군과 맞서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휘하 장졸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참고로 윤흥신의 석상은 부산진역 인근의 고관입구에 있다. 뒤에 언급되는 정발의 동상과는 약 600m 가량 떨어져 있다.[9] 한국식 한자음은 평조익. 이 소설 초반부에 자주 등장하는 평조신(平調信), 이른바 야나가와 시게노부의 사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