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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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송의 제9대 황제. 묘호는 흠종(欽宗), 시호는 공문순덕인효황제(恭文順德仁孝皇帝). 휘는 환(桓). 조송(趙宋)을 북송과 남송으로 나눠 구분할 때, 개봉을 수도로 한 북송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절일인 건룡절(乾龍節)에서 따온 건룡황제(乾龍皇帝)나 후에 동생 고종이 존호로 올린 효자연성황제(孝慈淵聖皇帝)를 줄인 연성황제로 통칭하기도 한다.[2]
2. 생애
2.1. 황제로서의 삶
휘종의 적장자[3] 로 1100년에 태어났으며 원래 휘는 단이었다. 그러다가 1102년 2월에 훤이라고 고치고, 다시 같은 해 12월에 환이라고 고쳤다. 이후 대관(大觀) 2년인 1108년에 정왕(定王)으로 봉해지고, 정화(政和) 5년(1115) 15세의 나이에 황태자가 되었다. 따라서 사실 본인이 일찍 요절하거나 정변이 일어나서 황제가 갈리는 것이 아니라면 무난히 다음 황제 자리가 보장된 상태였다.
그러나 아버지 휘종이 국정을 운영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고 그림을 그리거나 서예를 하는 데에만 몰두하면서[4] 내시 동관이나 재상 채경 등에게 정사를 맡기고 황실과 국가재정은 방만하게 운영해왔기에 신종, 철종 시기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안정화시켜놓은 재정[5] 이 완전히 파탄나버린 상황이었다. 더해서 '''웬수같으신 아버지'''께서 거란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사이에서 외교질하다가 금나라 군대가 개봉으로 쳐들어오는 위급한 상황이 펼쳐지자, 금군을 소집하면서 이 사태의 책임을 진다며 퇴위 선언을 하고 아들에게 양위한 다음 채경, 동관 등을 데리고 안전한 남쪽으로 튀어 버렸다.(…)
여튼 아버지가 싸지른 거 뒷정리하기 위해서 흠종은 이강을 등용하여 금나라 군대를 막게 하고, 그 사이 뒤에서 협상을 통해서 배상금 지불, 영토 할양 등의 조건을 제시하여 간신히 강화를 맺을 수 있었다.[6] 덤으로 남쪽으로 튄 아버지를 다시 수도로 모셔왔다.[7] 또 이번 사태의 책임을 물어 채경, 채유, 동관, 양사성 등을 유배, 처형시켰다. 하지만 금나라 군대가 철수하자 주전파 대소신료들이 나서서 '''"아니되옵니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하였고, 경험도 많지 않고 국제 정세 파악 등이 미숙한 젊은 흠종도 그런 의견을 쫓아서 강화 조약 자체를 '''파토'''내버렸다.
2.2. 정강의 변과 포로 생활
이미 휘종 때부터 여러 차례 송나라의 배신에 열이 뻗힐 대로 뻗힌 금나라는 다급한 송나라의 대응을 무시하고 그대로 공격을 계속하여 송나라 군을 괴멸시키고 개봉을 함락시켰다. 이때 금나라는 황제 흠종, 상황 휘종, 불과 10살밖에 되지 않은 태자[8] 을 비롯한 황실 일족,[9] 대소 신료, 궁중 내 내시, 궁녀 등 1만4천여 명을 포로로 잡아 금나라로 압송하였다.(정강의 변) 흠종과 휘종에게는 이것이 송나라 강산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었으며, 흠종은 죽어서도 영영 송나라로 돌아오지 못했다.
흠종이 금나라 군대의 포로로 끌려갈 때 금나라는 이들을 여러 무리로 나눈 뒤 데리고 갔다. 이때 휘종은 4번째로, 흠종은 7번째로 출발했는데 흠종은 출발 당시 검은 옷을 입고 머리에는 모직물로 된 전립이 씌워진 채 검은 말에 태워져 전담 병사들의 감시 아래 이동하게 됐다. 가는 길에 흠종은 망국의 짐을 짊어진 자신의 신세와 굴욕 등을 한탄하며 하늘을 쳐다보며 곡을 했지만 그때마다 옆에 있던 금나라 병사들에게 크게 질책받고 제지되어 곡소리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처지로 끌려가게 되었다. 여기에서 흠종의 비극은 그치지 않았다. 자신과 함께 이동하던 사람들이 다치거나 병에 걸려 죽어나갔고 흠종의 황후인 주씨(시호: 인회황후(仁懷皇后)) 역시 치욕을 경험해야 했다.
외모가 예쁜 편이었던 황후 주씨에게 금나라 장수가 노래를 부르라 시키자 주씨는 자신의 비참한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여진족인 금나라 장수는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서[10] 오히려 흥겨워하며 다시 노래를 부르라 재촉했다. 그 후에는 아예 술 시중까지 들라고 했는데, 주씨가 이를 거부하자 금나라 장수 택리가 주씨를 아예 끌어당기면서 강제로 술 시중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에 주씨는 술자리 시중 들기를 끝까지 거부하며 격렬하게 저항했고 격분한 택리에게 기절할 때까지 맞았다. 흠종이 결국 참다 못하여 분노를 터트렸는데, 오히려 포로가 반항을 한다고 열받은 택리가 흠종을 죽이려 들었다. 이때 금나라 현령이 "폐하(금 태종)께서는 저 놈을 생포해오라 했습니다. 죽이면 장군님만 손해입니다."라며 택리를 말리고 설득해서 흠종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황후 주씨는 이 때 당한 치욕과 폭행으로 인해 결국 몸져 누웠고, 흠종이 눈물을 흘리며 주씨를 치료해달라 요청을 했음에도 철저하게 무시당하여 결국 세상을 뜨고 말았다. 더 비참한 것은 한때 일국의 황후였던 그녀의 시신이 금나라 군에게 멍석으로 대충 말아져 지나가던 중 아무 곳에 묻혀 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흠종의 굴욕은 끝나지 않았는데, 압송되어 금태종 앞에 끌려왔을때 실컷 맺어놓은 강화 조약을 주전파 신료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파토낸 것은 흠종의 정신이 혼미하였기 때문이라면서 금태종은 그에게 중혼후(重昏候)라는 칭호를 부여하여 모욕했고 금의 신하들에게 비웃음과 조롱을 받았다. 아울러 굴욕적인 항복 의식도 치뤄야만 했다. 이후 흠종은 휘종과 함께 금나라 수도에서도 다시 이송되어 귀양살이를 해야만 했는데 그 곳은 하얼빈 이란현 근방으로 당시에는 오국성이라고 불린 지역이다. 당연히 오국성과 남송과의 거리는 엄청나게 멀었기 때문에 탈출하지도 못했다. 이후 남송의 고종이 나서서 금나라와 협상한 끝에 부모님(송휘종)의 유해와 많은 황실 일족, 대소 신료들이 살아남은 사람은 송환되고, 죽은 사람은 유해의 일부라도 송나라로 귀환할 수 있었던 상황 속에서 동생 고종과 남송 조정은 흠종만큼은 끝까지 언급되지도 않았고 송환 절차도 밟지 않았다.
사실 애초에 고종은 넌지시 흠종의 송환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을 금나라 조정에 전달하기까지 했다. 이는 고종은 흠종의 이복 동생이자 휘종의 9번째 아들에 불과했고 더구나 서자였기 때문이었다.[11] 반면 흠종은 적자이자 장남이었기 때문에 송나라 예법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던 적장자 계승원칙에 따르면 확고한 정통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흠종이 돌아오면 고종은 제위를 흠종에게 당연히 양도해야 했으며, 때에 따라서는 흠종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황제에 올랐기 때문에 문책을 받을 수 있었기에 고종은 자신의 제위를 지키기 위해 형을 적국에 방치해둔 것이다. 결국 흠종은 금나라 땅인 오국성에서 30년 가까이 억류당했다가 1161년 숨을 거두고[12] 영원히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휘종이 금나라에서 묻혔던 묘는 북한의 고령진역 근처에 있고 흠종의 묘는 두만강 건너에 위치한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에서는 오국성의 위치를 함경도가 아니라 헤이룽장성 의란현으로 보고 있다. 거기다 얼마 되지 않는 흠종의 자손들은 모두 금의 폭군 해릉왕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그의 대는 끊겼다.
그러나 위 내용과는 상당히 다른 기록들도 있다. 이 기록들에 따르면 금희종은 일전에 금태종 때 흠종에게 내려진 중혼후라는 모멸적 칭호를 없애고 그 대신에 천수군공(天水郡公)으로 바꾸어 봉하였으며 흠종에게 녹봉도 주었다고 적혀 있다. 죽은 휘종은 혼덕공이라는 칭호를 없애고 천수군왕으로 봉했다.[13] 그리고 희종은 흠종을 너그럽게 대했으며 오국성이 아니라 금나라의 수도인 상경 회령부에 머물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14]
3. 평가 및 이모저모
흠종은 아버지 휘종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고[15] 사치 향락을 부리지도 않았다. 사실 아버지가 망쳐놔서 망국의 군주가 되었지, 평화로운 치세에 군주가 되었으면 여느 군주들처럼 평범하게 나라를 다스렸을 것이다. 그러나 재능이 평범해서 혼란에 처한 나라를 구하지 못하고 결국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 더해서 금태종의 말마따나 강화 조약만 유지했어도 수도가 함락되는 굴욕도, 적국에서 포로 생활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즉, 아버지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에는 본인 역시 온전히 면죄부를 받기에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만화 슈토헬에서는 금나라 장군 지르구스의 회상 속에서 등장하는데 흔히 알려진 것처럼 빈곤하거나 모욕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지는 않았던 것으로 묘사된다.[16] 흠종은 오국성에 감금되어 있지만 진귀한 송나라 황실 물품들을 가지고 생활하는데다가 여진 귀족 소년이었던 지르구스가 말벗을 해주고 있다. 흠종은 이 소년의 스승 역할을 하며 지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억류된 흠종의 가치는 떨어지게 되고 결국 금 조정의 명령을 받은 지르구스에게 살해당한다.
악비가 주인공인 드라마 정충악비에서도 나오는데 훗날 송고종이 되는 동생 조구를 이유도 없이 구박하는 형으로 나온다.
같은 멸망군주인 위나라의 원제와 이름이 같다. 다만 한자는 다르다.
4. 둘러보기
[1] 절일을 건룡절(乾龍節)이라 하였는데, 정강의 변이후 고종이 존호를 올리기전까진 절일에서 명칭을 따온 건룡황제라 부르기도 했다.[2] 시호나 묘호는 엄연히 사망한 황제에게만 붙였으므로 이러한 용법은 금나라로 압송된 후 사망시까지 사용되었다.[3] 생모는 현공황후(顯恭皇后) 왕씨이다.[4] 휘종은 회화 그리기 실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재능이 뛰어났다. 따라서 아주 세련된 수금체(瘦金體)라 불리는 새로운 서체도 개발했다. 실제로 훗날 학자들은 그의 한자 서체가 얼마나 섬세하고 정교한지 마치 아주 가늘게 뽑은 금사와도 같다고 찬사를 보냈을 정도로 평판 역시 예술적 측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5] 신종의 모후이자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후 고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신법을 반대했지만 본인 스스로가 사치를 피하고 검소한 데다 사사로운 일을 줄이고 국고에서 헛된 지출이 나가지 않도록 아들 신종과 손자 철종을 교육시킨 걸로도 유명하다.[6] 당시 금나라 군을 지휘하던 장수 종한은 하동, 하북의 땅과 황금 1천만 정(錠), 은 2천만 정, 비단 1천만 필을 바치라고 강요했고, 흠종은 그 가혹한 조건을 모두 받아들인 다음 24명의 관원들에게 명해 금나라군을 도와 황실의 내외척 및 관리들의 집, 심지어는 승려들이 있는 사찰과 도관까지 샅샅이 뒤져,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와 진귀한 골동품들을 거둬들이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금나라에 바쳤을 뿐만 아니라 전국 주와 군의 지도들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7] 휘종이 강남으로 튄 이유는 화북이 함락되고 흠종이 죽으면 다시 강남에서 황제를 하려는 속셈도 있었다고 한다. 이걸 눈치챈 흠종이 휘종을 다시 개봉부로 데리고 왔다. 문제는 이들 부자가 재회한 후, 휘종이 급박한 상황이 안정되자 평소처럼 연회를 열어 즐기는 등의 삶을 다시 보냈다는 것이다. [8] 인회황후 주씨의 아들이자 흠종의 적장자로 휘는 심.[9] 당시 개봉에 있었지만 철종과 휘종에게 두 번이나 폐출된 원우황후 맹씨의 경우에는 황실일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런 비극을 당하지 않았다.[10] 당시 여진족과 한족은 언어가 달라서 통역을 써야했다.[11] 고종의 모후였던 현인황후는 처음에 휘종의 궁녀로 입궁하였다. 이후에 현비가 되었다가 고종이 즉위하면서 황후의 존호를 받았다.[12] 야사에 의하면 해릉왕 시대에 말발굽에 밟혀 죽었다고도 한다. 거기서 다 나아가 해릉왕이 요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천조제까지 데려와서 같이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천조제는 죽은 지 수십년 지났으며 흠종은 병환으로 죽은 게 분명하다. 금사(金史)에도 흠종이 죽자 금나라 측에서 장례를 지냈다는 내용이 나온다.[13] 출처: 송사전 금열전.[14] 아버지인 휘종과 함께 금나라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거나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강의 변 항목 참조.[15] 다만 아버지 휘종처럼 후궁만 100명을 두진 않았지만 흠종도 황후 주씨를 포함해서 총 12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더해서 그 역시 아버지처럼 금나라 압송 이후에도 자녀를 얻었다.[16] 애초에 모욕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이야기 자체가 정충악비의 원작인 설악전전에 나온 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