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말로리

 

'''이름'''
'''조지 허버트 리 맬러리 George Herbert Leigh Mallory'''
'''출생'''
'''1886년 6월 18일 ,
영국 잉글랜드 노스웨스트 잉글랜드 체셔모벌리''' [image]
'''사망'''
'''1924년 6월 8일 (만 37세),
티베트 에베레스트 북쪽''' [image]
'''국적'''
'''영국 [image] (잉글랜드 [image])'''
'''직업'''
'''산악인'''
'''복무'''
'''영국군''' 중위 (1915~1918)

기자: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고 하는 거죠?(Why did you want to climb Mount Everest?)"

말로리: '''"그게 거기 있어서요.(Because it is there)"'''[1]

ㅡ 1923년 3월 18일.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 중기사 원문(PDF)

1. 소개
2. 일생
2.1. 1924년 에베레스트 등정
3. 논란
4. 75년만에 발견된 시신
5. 기타


1. 소개


영국산악인. 그가 유명해진 것은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정복한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논란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가 이 말을 했는지 아는 이는 거의 없지만 말 자체만큼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바로 위 등산에 대한 최고의 명언을 남긴 사람이기도 하다.

2. 일생


20대 초반부터 등산에 나섰으며 1910년대에는 몽블랑이라든지 유럽 여러 산을 등정했다. 루스 터너(Ruth Turner 1892~1942)와 1914년 결혼했으며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포병대에 지원하여 참전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등정에 지원하게 된다.
[image]
1921년 영국 에베레스트 등정대 사진(뒤에서 가장 오른쪽이 말로리)
말로리는 1920년대 이루어진 3차례의 영국원정에 모두 참가하였다. 하워드 베리를 리더로 하는 1차 등정대는 에베레스트 지역 탐사에 주 목적을 두었고, 1922년 브루스 장군을 대장으로 한 2차 등정대는 등정에 실패하였으며, 1924년 에드워드 노튼의 3차 등정에 참가한다.

2.1. 1924년 에베레스트 등정


찰스 G. 브루스(Charles G. Bruce/1866~1939) 육군 준장을 대장으로 한 3차 등정대는 1924년 6월 1일, 브루스와 말로리가 1차 등정에 나섰지만 눈보라로 인하여 결국 포기해야 했다. 다음날인 2일에는 등정대 다른 멤버인 에드워드 펠릭스 노튼(Edward Felix Norton,1884~1954) 소령과 하워드 섬머벨(Howard Somervell,/1890~1975)이 2차 등정에 도전했으나 이들은 8,611미터에서 포기해야 했다. 산소통 없이 도전했는데, 더 이상 올라갔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것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2차 등정이 실패하자 말로리는 산소통을 사용해서 등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산소통은 기술부족으로 무겁고 고장이 많았는데, 워낙 무거워서 그만큼 체력적으로 더 힘들고 위험했기 때문에 원정대는 마지막까지 사용을 망설였었다. 당시에는 산소통 1개가 거의 20킬로그램에 가까운 무게였기에 더 많이 가져가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산소통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말로리는 상대적으로 산소장비에 능숙하고 체력이 좋은 앤드루 어빈 (Andrew Irvine, 1902~1924)과 같이 산소통을 메고 3차 등정에 도전한다. 그리고 멤버이며 지질학자인 노엘 오델(Noel Odell, 1890~1987)과 몇몇 셰르파들이 도우면서 6월 4일 등정에 도전했다.
[image]
(1924년 등정대)사진 맨 왼쪽이 '''앤드루 어빈''', 그 옆이 '''조지 말로리''', 옆으로 에드워드 F.노튼, 노엘 오델,존 맥도널드, 앞은 왼쪽부터 에드워드 오스월드 셰비어, 제프리 브루스(Geoffrey Bruce,1896~1972), 하워드 섬머벨, 벤틀리 비템(Bentley Beetham/1885~1963).
여러 캠프를 두면서 서서히 도전하던 이들은 캠프마다 산소통과 먹을 것과 생필품을 따로 두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필품을 많이 가져갈 수 없었다. 6월 6일, 말로리와 어빈은 먼저 캠프 6(7,900미터)까지 올라가면서 거기에 친 천막에서 숨을 돌렸다. 뒤따라온 오델과 셰르파들이 여분의 산소통과 담요,옷,먹을 것을 두고 오델과 말로리와 어빈을 놔두고 우선 셰르파들은 내려갔다.
6월 8일 아침,말로리와 어빈은 정상 도전에 나섰고 남겨진 오델은 캠프 6에서 조금 올라가서 이 둘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기후가 나빠서 잠깐 물러선 다음에 서서히 기후가 나아져서 다시 도전했다. 이들은 각자 산소통 2개를 메고 있었으며 캠프 7을 만들 천막 및 가벼운 먹을 것과 여러 장비를 갖추고 올라갔다.
그리고 6월 8일 오후 12시 50분. 안개 속으로 약 7,940미터 정도 높이에서 말로리와 어빈이 올라가는 것을 멀리서 오델이 본 것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델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 둘이 그래도 정상에 오를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캠프 6에는 산소통 12개를 비롯하여 생필품들이 잘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캠프 6에서 가볍게 점심식사를 마친 오델은 내려와서 캠프 5에서 대기하던 다른 멤버들과 만난다. 그러나 오후 5시가 되어가도록 말로리와 어빈은 내려오지 않았으며 올라갈때부터 끼어있던 안개는 더욱 자욱해져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캠프 5 일행들은 "말로리와 어빈이 캠프 7을 설치한 다음, 날씨가 좋아지길 기다리는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말로리와 어빈이 캠프 6까지 내려온다면 최소한 먹을 것이나 여분의 산소통이 있으니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인 6월 9일 오델과 셰르파 2명은 말로리와 어빈이 있을 것으로 추측했던 캠프 6으로 올라갔지만 남겨진 캠프 6은 '''누구도 들어온 흔적이 없었다.''' 그제서야 오델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오델은 셰르파들과 올라가려고 했지만 셰르파 2명은 불길하다면서 올라가길 거부해 할 수 없이 오델 홀로 산소통을 메고 올라가야 했다. 홀로 올라간 오델은 해발 8,200미터에 설치된 캠프 7을 발견했지만... 말로리와 어빈이 가져간 천막만이 '''강한 바람에 반이 찢겨진 채로 휘날리고 있었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어빈과 말로리의 마지막 흔적이었다.
6월 10일, 다시 한번 몇몇 멤버들이 캠프 7을 찾아봤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때는 이미 산소통에 들어간 공기는 소진되고 말로리와 어빈이 가져간 식량은 떨어진지 오래일 시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둘은 죽었다고 봐야했기에 결국 브루스는 등정을 포기하고 내려가기로 한다.
6월 11일, 남은 등정대 일행은 내려와서 추도문을 읽고 두 사람의 명복을 빌었다. 한편, 1924년 10월 17일, 영국 세인트폴 성당에서 총리와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두 사람의 추도식이 열렸다.

3. 논란


1933년 퍼시 윈 해리스(1903~1979)가 이끌던 영국 에베레스트 등정대는 8,250미터쯤 올라가서 피켈이 하나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이 피켈은 바로 앤드루 어빈의 것이었다. 해리스 등정대도 결국 등정에 실패했지만, 이들이 발견한 이 피켈 때문에 세계적인 논란이 생긴다. 이 피켈은 어빈이 '''내려오던 길에 쓰던 것일까? 아니면 올라오던 길에 쓰던 것일까?'''가 논란이 되었다.
말로리와 어빈은 당시 코닥 카메라(kodak vest pocket autographic special)를 가져갔기에 에베레스트 정상을 올라갔다면 반드시 사진을 찍었을 테고 이게 발견된다면 말로리와 어빈이 세계 최초로 정상에 올라갔을 것임이 증명될 거라는 이야기가 있다. 우선 두 사람의 마지막 목격자였던 오델은 이 둘은 틀림없이 등정했으며 내려오던 길에 사고를 당해 죽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에 나오듯이 오델은 1987년 만 97살까지 살면서 1924년의 등정대원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는데[2] 죽을 때까지 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1953년 4월 29일, 비로소 영국원정대의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 1919~2008)가 대원자격으로 등반한 최초의 셰르파인 텐징 노르가이(Tenzing Norgay, 1914~1986)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사진을 남기고 무사히 내려오면서 다시 한번 이들이 과연 최초 등정자가 맞는지, 아니면 말로리와 어빈이 먼저 올랐는지가 호사가들의 화제거리가 된다. 혹자들은 영국인의 자존심이 뉴질랜드인과 세르파의 등정을 인정 못해서 벌어지는 논란이라고도 하나, 당시 이들의 등정 성공은 엘리자베스2세 대관식과 맞물려 '일개 섬나라로 몰락한 영국'이 아닌 '여전한 대영제국'의 승리라는 컨셉을 위해 어느 정도 영국정부와 원정대 간의 조율 하에서 이루어졌던 만큼 귀기울일 가치가 없는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4. 75년만에 발견된 시신


"8,100미터 지점에 웬 영국인 시체가 있었다. 영국인인지 어찌 아냐고? 당연히 유니온 잭이 다 찢어지긴 해도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채로 있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에베레스트에 시체는 별것도 아닌지라 대충 보고 지나쳤다."

ㅡ 왕홍보.

그리고 세월이 지나 1975년 중국인 왕홍보가 에베레스트를 등정할 당시, 목격했던 게 알려지기 시작한다. 왕홍보는 에베레스트 등정일로 알고 지내던 일본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그 이야기를 일본인 등산가 하세가와 료텐이 글로 써서 발표하며 그가 혹시 말로리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했다. 안타깝게도 이 둘 역시 에베레스트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1980년대부터 말로리의 유해를 찾기위한 등정대가 조직되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99년 5월 1일 오전 11시 45분. 에릭 시몬슨이 이끌던 조지 말로리 시신 수습 작업 등정대에 참가한 미국 산악인 콘래드 앵커는 에베레스트 북동릉 8138m 지점 약 30도 경사진 곳에서 앞으로 넘어진 채 숨진 모습의 시신을 발견했다. 앵커는 시신의 옷 주머니에서 손수건에 곱게 싸인 편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조지 말로리의 것이었다.
BBC가 스폰서로 참여해서인지 BBC는 특종으로 이걸 보도했고 생생하게 방송 카메라로도 시신이 나왔다. 추운 기후인지라 75년이나 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시신은 제법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얼핏보면 이건 무슨 마네킹이 아닐까 하는 형체로 남아있었는데, 옷이 찢어져 노출된 피부가 오랜 세월 강한 직사광선에 탈색된 것으로 보인다.
대원들은 조지 말로리를 감고 있던 로프를 제거한 후 주머니에서 고글나이프, 가위, 성냥, 행동식 양철캔, 손가락부분을 잘라낸 장갑, 보겔손목시계, 고도계, 등산화 등을 회수했다. 그리고, 주변의 흙과 돌을 모아 시신을 덮어 간단히 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관심거리였던 카메라도 발견됐지만 오랜 세월 방치된 필름의 상태가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3] 아쉽지만 "조지 말로리는 최초로 정상을 밟았는가?"라는 수수께끼는 영원히 풀 수 없게 되었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초등논란 따위와 상관없이 카메라(등정 시 원정대원에게 빌린 kodak vest pocket autographic special 카메라) 자체가 발견되지를 않았다.
현재는 말로리와 어빈은 실패했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원인은 1920년대의 '''기술력 부족'''을 꼽는데, 일례로 당시 말로리의 시신을 발견한 등정대는 유품을 보고 어이가 없어했었다. (현재의 기준에서)등산화는 무거웠으며 입고 있던 옷 재질을 분석하니 얼어죽지 않는 게 기적일 정도로 (그 당시에는 최선이었을지 몰라도)현대에 비해 너무나도 장비가 부실했다는 것. 참고로 동영상에서 발견된, 말로리가 입었던 옷의 재질은 개버딘(Gabardine)으로 날실에 양털, 씨실에 무명을 이용해 만든 직물이다. 그런데 현재 개버딘은 '''버버리 코트'''에 쓰인다. 즉, 고어텍스합성수지 등, 등산복 재료로 쓰기에 가볍고 좋은 재질들이 넘쳐나는 현시점에서 아무도 버버리 코트를 등산복으로 입고 다니는 일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악하기 짝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등산복으로도 8250미터까지 등반한 사실은 존재하므로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는 증거로써는 부족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의복보다 더 큰 등정 실패 이유는 (50년대 본격적 8,000미터대 고봉 등정성공의 사례에서 확인되듯이), 산소장비의 발전 그리고 산소장비 보다는 '극지법'과 극지법의 발전에 기인한 것이다.[4]
그리고 실패 근거로 꼽는 또하나의 원인은, '세컨드 스텝을 돌파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지금이야 사다리를 설치해서 쉽게 올라가지만 티벳쪽으로 초등정을 했던 중국팀은 '수많은 대원들이 서로의 어깨를 밟고 고정사다리를 설치하고 나서 올라가는 방법으로 돌파'했었고 이후 이들 팀은 '사다리 없이는 돌파가 불가능하다'고 공언했었고 오랫동안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있어서도, 콘래드 앵커가 이후에 직접 등반하여 증명한 바와 같이 이 구간은 사다리 없이 프리클라이밍으로 등반이 가능하며, 말로리의 경우 당대 영국 등반가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프리 클라이밍에 능한 타입이었다. 실제로 콘래드 앵커는 이 구간 등반 후 '말로리의 등반력으로 등반이 가능한 구간'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때, 조지 말로리와 24년 원정대는 에베레스트 등반사에 가장 뜨거운 논란의 주인공으로 남을 자격'은' 충분하다. 이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말로리와 어빈이 가장 먼저 올랐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당시 현장을 촬영한 동영상으로, 약 2분 50분쯤부터 보면 말로리의 시신이 나온다. 동영상에서 볼 수 있듯, 촬영 후 무덤을 만들어 돌과 흙으로 덮었기 때문에 현재는 근처를 지나가도 시신을 볼 수는 없다. 흙에 파묻혀 있던 얼굴 부분은 고인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파내거나 찍지 않았다.

5. 기타


  • 그의 유명한 명언인 "산이 거기 있기에"는 자주 패러디된다. 이 명언을 의외로 엄홍길이 말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의외로 꽤 많다.
  • 이 사람의 동생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공군 전투기사령부 사령관이었던 트래퍼드 리맬러리 장군이다. 그 역시 비행기 사고로 인해 알프스 산맥에 추락해 산에서 목숨을 잃는다.
  • 조지 말로리의 시신을 발견한 다큐가 고화질로 유튜브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올라왔다. #
  • SCP 재단에서는 SCP-1529에 의한 최초의 희생자로 설정되었다. 사실 힐러리보다 먼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고 시신과 함께 발견된 사진기에 증거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사진기에 SCP-1529도 함께 찍혀있어서 사진기의 발견이 은폐되고 업적을 인정받지 못한다.

[1] 우리가 일명 "산이 거기 있기에"로 알고 있는 바로 그 구절이다. 기자의 질문에 아주 귀찮다는 투로 대답을 했는데 보통 '시바 등산하는 데 이유가 어딨어 그냥 하는 거지' 내지는 '그럼 산을 내가 오르지 산이 나를 오르냐' 라고들 해석을 한다.[2] 등정대는 아닌 사람까지 포함하면 일행 사진을 찍던 사진 담당 존 바티스트 노엘(John Baptist L. Noel,1890~1989)이 99살까지 살았기에 여기 일원 가운데 가장 장수했다.[3] 현상하지 않은 필름은 점차 상이 흐려진다. 1920년대에 만들어진 필름의 수준은 빤하고, 그게 무려 70년을 넘게 방치됐으니...[4] 사실 40-50년대까지도 고어텍스는 물론이고 합성수지조차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50년대 성공적인 등반에 사용된 복장 역시 현재의 기준에서는 무겁고 부실한 것은 매한가지였으며,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복장과 큰 차이가 없었다. 1950년대 이후의 우모복자켓과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1920년대 영국원정대 역시 외피 속에 우모(깃털)를 넣은 자켓을 착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