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킴튼

 


'''조지 킴튼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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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이름
가브리엘 시블리 "시드 "킴튼
(Gabriel Sibley "Sid" Kimpton)
생년월일
1887년 8월 12일
사망년월일
1968년 2월 15일
국적
[image] 잉글랜드
출신지
리브스덴
포지션
공격수
신체조건
178cm
등번호
-[1]
소속팀
'''사우스햄튼 FC (1910-1920)'''
감독
DFC 프라하 (1921)
폴로니아 바르샤바 (1921-1922)
KS 크라코비아 (1923)
르아브르 AC (?-1926)
프랑스 대표팀 (1934)
프랑스 대표팀 (1935-1936)
RC 파리 (1935-1939)
FC 루앙 (1939-1940)
FC 루앙 (1945)
르아브르 (1945-1946)
AS 쉘부르 (1946-1950)
1. 생애[2]
1.1. 선수 생활
1.1.1. 클럽
1.2. 감독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3. 수상
3.1. 감독


1. 생애[3]



1.1. 선수 생활



1.1.1. 클럽


킴튼은 왓퍼드 근교의 리브스덴(Leavesden)[4]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왓포드 FC에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떨어졌고 1910년 9월부터 당시 남부 리그 소속이었던 사우스햄튼 FC에서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시즌에는 센터 포워드로 22경기에 출전, 7골을 기록하여 사우스햄튼의 강등권 탈출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그의 득점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사우스햄튼의 새 감독은 다음 시즌의 그를 라이트 하프백, 아웃사이드 라이트 등 여러 포지션으로 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우스햄튼의 성적은 작년과 비슷하게 강등권 바로 윗자락이었다.
1912-13 시즌엔 더욱 팀의 상황이 좋지 않아 10월이 넘어가도록 단 1승밖에 올리지 못했고 킴튼의 자리도 위태로워졌다. 2월 무렵부턴 그의 자리가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킴튼은 새 시즌 11월이 되어서야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로 다시 출전을 시작했고 다음 해 10월에 다시 센터 포워드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그리고 킴튼은 그 시즌에 10골을 넣어 사우스햄튼의 6위에 보탬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에 킴튼은 소니크로프트(Thornycroft)라는 조선 회사에서 일했고 1919년에 다시 축구 리그가 시작되었을 때 킴튼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 때까지 사우스햄튼에 남아 있던 단 세 명의 선수 중 하나였다. 하지만 킴튼은 해당 시즌에 단 두 차례의 출전에 그쳤고 킴튼은 이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접었다.
킴튼은 사우스햄튼에서 149경기, 30골의 기록을 남겼다.

1.2. 감독


킴튼은 여러 팀에서 감독을 맡았다.
1934년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킴튼은 물 건너 아스날 FC의 W-M 포지션을 프랑스에 접목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선수들은 더 잘 할 수 있다. 그들은 축구의 규율을 따라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토리노에서 열린 프랑스의 첫 경기. 상대는 유럽 대륙 최강이라 평가받던 분더팀 오스트리아였다. 킴튼은 베리에스트를 불러 오스트리아의 핵심 선수 신델라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라는 지시를 내렸다.
프랑스 선수들은 열심히 싸웠지만 오스트리아에 아깝게 패했다. 그리고 프랑스 축구팬들은 그 결과에 호의를 보였다. 프랑스 대표팀이 파리리옹역에 도착했을 때 4천여명의 환대를 받았다.
킴튼은 1935년부터 RC 프랑스의 감독을 맡았고 프랑스 대표팀에서도 일을 겸임했다. 1935년 3월, 독일에 프랑스가 1대3으로 패하면서 프랑스 대표팀에서의 그의 입지는 좁아져갔고 기어어 1936년 네덜란드에 1대6, 체코슬로바키아에 0대3으로 패하자 프랑스 축구 연맹은 킴튼에게 더 이상 일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RC 프랑스에서 킴튼은 당시 팀의 서포터들이 선호하던 경제적인 축구를 비판했다. 하지만 RC 프랑스에서 킴튼은 1935-36 시즌의 더블과 1938-39 시즌의 쿠프 드 프랑스 우승을 이끌어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어 냈다.
킴튼은 RC 프랑스에 쿠프 드 프랑스 우승컵을 선물하고 FC 루앙으로 떠났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고 축구 리그는 중단되었다. 킴튼은 나치에 체포된 적도 있었지만 무사히 돌아왔고 FC 루앙에서 1945년까지 있다가 르아브르 AC의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킴튼은 르아브르에서 시원찮은 성적을 올리다 경질당했고 AS 쉘부르에서 그의 감독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그의 가장 큰 가치는 신뢰도와 다재다능함이었다. 위대한 플레이어로 평가받을 레벨은 아니었지만 용기와 분주함으로 인기를 얻었다.

3. 수상



3.1. 감독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3] 출처: 위키피디아[4] 영국 영화의 성지인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가 이 곳에 있다. 이 곳에서 007 시리즈, 해리 포터 시리즈 같은 대표적인 영국 영화들이 촬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