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정(배구)

 


'''조혜정의 역임 직책 및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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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정'''
( 曺惠貞 / Jo Hea-jung )
'''생년월일'''
1953년 3월 5일 (71세)
'''출신지'''
부산광역시
'''출신학교'''
숭의여자고등학교
수원대학교
'''신체사이즈'''
신장 163.5cm, 체중 58kg
'''포지션'''
레프트
'''가족'''
남편 조창수, 장녀 조윤희, 차녀 조윤지
'''소속팀'''
국세청 (1971~1973)
대농(미도파) (1973~1977)
라이온스 베이비 (이탈리아) (1979~1981)
'''등번호'''
12번 (국가대표)[1]
'''지도자'''
GS칼텍스 서울 KIXX 감독 (2010~2011)
1. 소개
2. 선수 생활
3. 은퇴 이후
4. 선수 경력
4.1. 국가대표 경력
4.2. 개인 수상
5. 여담
6. 관련 문서


1. 소개


대한민국의 前 배구 선수, 前 GS칼텍스 서울 KIXX 감독이자 대한민국 4대 프로스포츠 사상 '''최초의''' 여성 감독.
165cm의 단신이지만 이를 극복하는 서전트점프 68cm, 러닝점프 72cm라는 놀라운 점프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2. 선수 생활


현역 시절 164cm의 단신으로 놀라운 점프력을 앞세워 강한 스파이크를 시원스럽게 날려 상대 팀 코트를 맹폭해 '''나는 작은 새''' 라는 별명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배구를 시작했다. 숭의여고 3학년이던 1970년, 17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승선하였다.
1976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배구 동메달의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는 대한민국 구기종목 사상 최초였다. 이외에도 1972 뮌헨 올림픽에 참가했고, 1970 방콕 아시안 게임, 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여 은메달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
국내 무대에서는 국세청과 대농(미도파)를 거치며 현역 생활을 하다가 무릎 부상으로 1977년에 국내 무대를 은퇴하고 현대건설에서 잠시 코치를 지냈으며, 1979년, 박기원LIG손해보험, 대한항공 감독의 부름을 받아 이탈리아 무대로 건너가 2년 간 플레잉코치로 활약하다 1981년에 선수 생활을 완전히 마감하였다.

3. 은퇴 이후


1981년 현역 생활 마감 후 한국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에서 감독 대행을 지낸 조창수와 결혼했다. 결혼 당시 스포츠 커플로도 큰 화제로 올랐는데, 슬하에 두고 있는 두 딸 조윤희, 조윤지 자매도 현재 프로골프 선수다. 그 후 송원여자고등학교 배구부 코치와 비치발리볼연맹 사무국장을 역임하였으며, 골프를 하는 두 딸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때 대구광역시에서 냉면집을 열기도 하였다.
2008년부터 KOVO 경기운영위원으로 배구 일선에 복귀하며 경기감독관 등으로 지내다가, 2010년 4월 이성희 감독의 후임으로 GS칼텍스 서울 KIXX의 감독직에 오르게 되어 프로배구는 물론 국내 4대 프로스포츠 통틀어 '''사상 최초의 여성 사령탑'''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였다.[2]
'''하지만 프로 감독직으로서는 처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그녀도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속설을 보여주고 말았는데, 국내 프로 스포츠 사상 최초의 여성 감독으로서 활기차고 즐거운 팀을 만들겠다는 그의 포부와는 달리 이렇다 할 색깔을 확실하게 보여주지 못했다. 당시 감독 선임 과정에서부터 논란이 있었고 그가 감독으로 있던 2010-2011 시즌에도 1라운드 까지만 해도 2승 2패로 나름 나쁘지 않은 성적을 냈으나 2라운드 이후로 용병 제시카 산토스 실바의 부진과 서브 리시브 불안 등으로 팀의 밸런스가 무너지면서 한때 '''12연패'''까지 당하는 등 최하위까지 속절없이 추락하게 된 것. 어떻게든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시즌 중반 용병도 산야 포포비치로 교체하고 당시 '''팀의 코치로 있던 장윤희를 현역으로 복귀시키는''' 초강수까지 두었지만, 이렇다 할 성과가 나오지 않자 시즌 후반기엔 신인급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세대교체와 리빌딩에 중점을 두었다. 결국 '''4승 20패'''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들었고, 성적 부진으로 사퇴한 뒤 이선구에게 감독직을 넘겼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사임 후에는 병원 신세까지 졌다고 한다.

4. 선수 경력



4.1. 국가대표 경력


  • 1970 방콕 아시안게임 (2위)
  • 1972 뮌헨 올림픽 (4위)
  • 1973 FIVB 월드컵 (3위)
  • 1974 테헤란 아시안게임 (2위)
  • 1976 몬트리올 올림픽 (3위)

4.2. 개인 수상


  • 1973 FIVB 우루과이 월드컵 MVP # - 세계대회에서 한국 선수가 MVP를 받은 건 1973 월드컵의 조혜정과 2012 런던 올림픽김연경 뿐이다.

5. 여담


  • '나는 작은 새'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데, 키가 무척 작았던 조혜정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활약하자 외국의 기자가 붙인 'Flying little bird'을 번역한 말이다.
  • 1976 몬트리올 올림픽 당시 쿠바와의 경기에서 무릎을 심하게 다쳐 출전하지 못할 것이라 예상됐는데, "동생이 여섯 명인데 학비를 제가 대야 한다"는 후배 백명선의 말에 의사의 반대를 만류하고 일본과의 준결승 경기에 출전하였다고 한다.#
  • 한 기사의 표현에 따르면 조혜정은 당시 소녀시대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유명했는데, 당시 사법고시를 3등으로 통과한 한 고시생이 "조혜정이 결혼해준다면 다시 시험을 치러 1등으로 합격하겠다"고 협박에 가까운 구애를 보낼 정도였다. 당시 한국에선 조혜정을 모르면 간첩이란 말까지 돌았다고 한다.#
  • 두 딸 조윤희와 조윤지는 골프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 2005년 당시 기사에 따르면 몬트리올 멤버 12명 중 6명 정도가 가끔씩 모였다고 한다.[3] #
  • 2012 런던 올림픽에서 36년만에 4강 신화를 쓴 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해 몬트리올에서 함께 뛰었던 이순복, 유경화와 함께 2일 런던으로 날아가 후배들을 응원했다. 한 인터뷰에서 "8강전을 앞두고는 ‘이탈리아만 이겨다오’라고 생각했는데 욕심이 생기더라. 지금의 전력, 자신감이라면 미국도 꺾을 수 있다"고 말했다.#

6. 관련 문서


[1] 1976 몬트리올 올림픽 기록지[2] 4대 프로포츠 이외의 타 스포츠까지 시야를 넓히면 e스포츠 구단 삼성전자 칸김가을 감독이 있었다.[3] 유정혜, 변경자는 해외에 살고 이순복은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카자흐스탄에서 살던 윤영내는 2004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