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항공 611편 공중분해 사고
中華航空611號班機空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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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가 일어나기 '''8일''' 전에 찍힌 사진. 저 뒤에는 UPS 항공이 보인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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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재현 사진. 사진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항공 사고 수사대 시즌 7의 중화항공 611편 부분에서 공중분해 장면이다.
1. 개요
2002년 5월 25일, 제일 분주한 노선으로 뽑히는 타이베이 - 홍콩 노선을 운항 중이었던 중화항공 611편은 여느때나 다름없이 타이완 타오위안 국제공항을 오후 2시 50분 정각에 출발하였다.
보잉 747-200 항공기는 오후 3시 7분에 이륙한 후 이 날 오후 4시 28분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얼마 가지 못해 비행기가 펑후 제도 상공 11km(35000ft)에 도달하자마자 공중분해되어 추락하면서 225명의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타이베이 - 홍콩 간 항공 노선은 항상 이용량이 높았기 때문에 대형 기종인 보잉 747 기종이 투입되는 경우가 잦았고, 사건 당시에도 이런 이유로 긴급 투입된 보잉 747 기체가 운행되었다. 사고 기체는 중화항공이 도입한 보잉 747-200 기종으로서, 1979년 7월 16일에 초도 비행을 하였으며, 동년 8월 2일에 중화항공에 인도되었다. 본래 사고기의 등록번호는 B-1866이었으나, 1999년 1월 등록번호가 B-18255로 재등록되었다. 사고기에는 프랫&휘트니 JT9D-7AW엔진 4기가 장착되어 있었으며, 2002년 6월에 오리엔트 타이 항공으로 매각될 예정이었다.[2]
5월 25일 오후 03시 07분에 이륙한 사고기는, 03시 28분부터 비행 도중 기체가 분해되기 시작하여 03시 31분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어떤 예후도 보이지 않고 항공기가 갑자기 사라진 상황에 놀란 중화민국 정부는 당초 폭탄 테러를 의심하고 수사를 시작했다.[3] 하지만 사고 해역이 대만 해협인 만큼 잔해를 찾기 어려웠으며 지상 추락 사고에 비해 사건 조사에 어려움이 많았고, 폭탄 테러의 증거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기내 잡지 및 비행 서류들, 승객들의 가방, 사진, 심지어는 신 대만 달러(NTD)에 이르기까지 사고 지점에서 10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비행기가 공중분해된 것을 알 수 있었다.
2. 사고 원인
사고 원인은 '''22년 전'''인 1980년 2월 7일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4] 에 착륙하다가 발생한 테일 스트라이크였다. 이 당시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의 보잉 관계자는 홍콩에서 초기점검을 받을 것을 권했지만 중화항공은 사고기에 승객을 전혀 탑승시키지 않은 채 타이베이시로 귀환시켜 단 하루만에 응급조치만 실시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980년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중화항공 자체 기술진에 의해 최종 수리 작업을 받았다.
보잉사의 보잉 747-200 수리 매뉴얼(Structure Repair Manual)에 따르면 테일 스트라이크 정도에 따라 다르지만, 심하게 파손된 경우 파손된 부분을 제거해서 새 것으로 교환해야 했다. 그러나 파손된 부위가 너무 커서 어려움이 따르자 보잉의 현지 서비스 팀인 FSR에게 수리매뉴얼(SRM)에 제시한 방법 대신 파손된 부위를 제거하지 않고 그 위를 덮어 씌우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자문했다. 하지만 보잉 측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중화항공 측은 파손된 부위를 제거하지 않고 그 부분을 왁스로 비벼 평탄하게 만든 뒤 그 위를 덧붙이는 방법으로 수리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정비사는 보잉의 수리 매뉴얼에 따라 고쳤다고 사인했다. 그러나 보잉 측은 당시에 중화항공 측으로부터 그런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이게 사건의 발단이 된 것이다.
공중분해된 파편을 조사하던 중 640번째의 파편에서 수리한 부분에 덮어 씌워져 있던 것을 들어내자 틈새로 갈색 액체가 흘러나온 듯한 흔적이 보였다. 이 이야기는 바로 꼬리 부분이 뚫려서 기내에 있던 공기들이 밖으로 새나갔다는 증거가 되었다. 갈색이었던 이유는 사고 9년 전인 1993년까지 중화항공 측은 기내에서 흡연을 허용했기 때문에 자욱한 담배 연기가 꼬리날개 쪽으로 몇 년 동안 나가면서 담배 연기에 있는 니코틴 성분이 산화 작용으로 갈색 액체가 되어 틈새 주변에 점착이 되었던 것. 1993년 이후로 기내를 금연구역으로 지정하였지만 이 자국이 아직도 남아있었다는 건 정비가 매우 소홀했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기체 파편을 잘라내서 그 속을 보니 부품이 오랫동안 산소에 노출되어 변색되어 있었다. 결국 테일 스트라이크 때문에 수리한 부분이 금속 피로에 의해 기체에 균열이 오기 시작하였고, 그 균열이 항공기 동체를 한 바퀴 도는 순간 800km/h의 속도로 비행하던 기체가 한계에 다다르며 견디지 못하고 공중에서 분해된 것이다.
결국 기체 노후화와 소홀한 정비가 만나 공중분해라는 항공 사고 역사상 최악의 상황을 만들어 낸 셈이다. 1985년에 발생한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5] 와 비슷하다. 이걸 '''22년씩이나 버텼다는 게 용하다.'''
3. 미디어
이 사고는 2009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방영되었던 항공 사고 수사대 시즌 7에서 "산산조각난 비행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그리고 에어 크래쉬:스페셜 리포트 4화에도 나왔다.
4. 같이 보기
[1] 저 뒤쪽이 어째 지저분해 보인다면 그건 '''기분 탓이 아니다...'''[2] 참고로 이 기체는 문제의 중화항공 611편과 그 복편을 운행으로 중화항공에서는 퇴역할 예정이었다. 곧 이 비행이 이 기체의 마지막 아웃 바운드 비행으로 예정되어 있던 것이다. 만약에 오리엔트 타이 항공으로 매각됐었다면 공중분해 사고를 내고 오리엔트 타이 항공 자체가 해체되었을지도...[3] 당시 중국이 군사 훈련 중이었다. 그래서 격추설이 떠돌았으나 레이더 분석 결과 사실 무근이었고 오히려 '''민간 항공기'''가 사라졌다는 소리를 듣고 '''중국에서도 수색 지원을 했다.''' 사고 사망자 중에 중국 본토인도 9명 있었기에 격추가 사실이었으면 외교 문제를 넘어서 자국민을 죽인 장쩌민을 성토하는 소리가 울렸을 것이다. 사고 당시에도 중국 대륙에서 타이완 섬으로 관광을 오는 수요가 어마어마했고 중국이 민간 여객기를 격추하는 막장 국가인 것도 아니다. 그러니 격추설은 어불성설일 뿐.[4] 공항 자체가 착륙이 매우 위험하고 어려운 형태여서 예전에도 사고가 잦았고, 매우 위험한 공항 중 하나였다. 1998년 현재의 홍콩 첵랍콕 국제공항으로 이전하면서 폐쇄된 후, 항구로 개조되었다.[5] 사고 7년 전인 1978년 6월 2일에 오사카 국제공항에서 발생한 테일 스트라이크 사고 이후 파손된 벌크헤드를 제대로 정비하지 않아서 격벽이 금속피로로 인해 터져서 유압 계통을 싹 다 끊어먹는 바람에 기체 조종 불능으로 추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