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하링어

 


[image]
이름
지그문트 하링어
(Sigmund Haringer)
생년월일
1908년 12월 9일
사망년월일
1975년 2월 23일
국적
[image] 독일
출신지
뮌헨
포지션
풀백
신체조건
174cm / 75kg
등번호
-[1]
소속팀
FC 바이에른 뮌헨 (1927-1934)
FC 바커 뮌헨 (1934-1939)
1. FC 뉘른베르크 (1939-1940)
 국가대표 
15경기 / 0골 (1931-1937)
1. 생애[2]
1.1. 선수 생활
1.2. 이후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3. 수상
3.1. 클럽
3.2. 국가대표


1. 생애[3]



1.1. 선수 생활



1.1.1. 클럽


뮌헨에서 태어난 하링어는 10살에 축구를 시작했으며 16살에 바이에른 뮌헨의 유스팀에 입단했다. 1927년부터 1군팀의 멤버가 되었고 6회 연속 바바리안 챔피언십 우승을 이뤘지만 독일 챔피언십에선 1932년을 제외하면 그다지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데뷔 시즌이던 1927-28 시즌부터 하링어는 토너먼트에 출전하였고 바이에른이 SpVgg 슐츠와의 8강전에서 5대2로 승리하는데 1골을 보태며 일익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10일 후에 열린 4강전에서 함부르크 SV에게 후반에만 7골을 내주며 2대8로 시원하게 털렸다.
다음 시즌에는 바이에른 뮌헨 최초의 레전드로 칭해지는 콘라트 하이트캄프가 뒤셀도르프 SC 99에서 이적해왔고 하이트캄프와의 강력한 풀백 듀오와 더불어 센터 하프 루트비히 골트브루너와 함께 수비진의 중심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바이에른은 독일 전국 챔피언십 8강에서 브레슬라우어 SC 08에 3대4로 패배하였다. 하링어는 이 경기에서 1골을 넣었지만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1932년에는 바이에른 지역리그에서 2위로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 참가했지만 결국 팀 역사상 최초로 독일 전국 챔피언이 되는 기염을 토했다.[4] 결승전의 상대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바이에른은 2대0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1934년, 하링어는 같은 뮌헨을 연고로 하는 바커 뮌헨으로 이적하고 말았다. 바이에른 구단과 트러블이 있던 하링어에게 전 바커 뮌헨 회장 에우겐 세이볼트가 나서 이적을 설득했고 하링어는 이에 따랐다. 바커 뮌헨은 하링어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가울리가[5] 바이에른에서 하위권에 머물렀고, 1938년에는 강등까지 당했다.
하링어는 1939년 뉘른베르크로 다시 이적했고 1년 후 선수 생활을 접었다.

1.1.2. 국가대표


하링어는 1931년 1월 남부 독일 대표팀에 데뷔했다. 그 시합에서 좋은 활약을 펼쳐 3대0 승리를 이뤘고, 이것을 지켜본 대표팀 감독 오토 네르츠의 눈에 띄었다. 곧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고 라이트 하프백으로 프랑스전에 데뷔하였다.
1933년의 스위스전과 1934년의 월드컵 지역예선 룩셈부르크전에도 출전하며 경험을 쌓은 하링어는 빌리 부슈, 한스 슈바르츠와 함께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는 3,4위전을 제외한 독일의 3경기에 출전했고 4강전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는 상대 공격수 안토닌 푸치를 막느라 고생하기도 했다.
하링어의 마지막 A매치는 1937년 4월 하노버에서 열린 벨기에와의 경기였고, 그는 라인홀트 뮌첸베르크와 풀백으로 출전하여 1대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1.2. 이후


2차 대전 이후 하링어는 뮌헨에서 복권 판매점을 운영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강하면서도 위치 선정 능력이 좋은 수비수. 킥력도 좋아서 프리킥, 페널티 킥을 처리하기도 했다.

3. 수상



3.1. 클럽



3.2. 국가대표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현재 바이에른 뮌헨의 초월적인 포스와 다르게 이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그다지 별 볼 일없는 팀이었다. 이후에 바이에른 뮌헨이 다시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한 건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 등이 보강된 1969년으로 37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5] 나치 독일 시대의 최상위 지역 리그. 여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 진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