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네르츠

 


''' 오토 네르츠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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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축구감독 '''
''' 이름 '''
'''오토 네르츠'''
'''Otto Nerz[1][2]'''
'''출생'''
1892년 10월 21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호엔촐레른헤힝겐
(현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사망'''
1949년 4월 19일 (향년 58세)
연합군 점령하 독일 브란덴부르크오라닌부르크 작센하우젠
''' 국적 '''
연합군 점령하 독일
''' 신체 '''
불명
''' 직업 '''
축구선수(포워드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VfR 만하임 (1910~1919)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 (1919~1924)
''' 감독 '''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 (1924~1926)
'''독일 대표팀 (1926~1936)'''
1. 개요
2. 생애[3]
2.1. 감독 생활 이전
2.2. 감독 생활
2.3. 이후
3. 전술상 특징
4. 수상
4.1. 클럽
4.2. 감독


1. 개요


독일의 前 축구 선수, 축구 감독. 그리고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역사적인 초대 감독'''

2. 생애[4]



2.1. 감독 생활 이전


네르츠는 호엔촐레른의 헤힝겐(Hechingen)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와 고물상 일을 겸하던 빈농이었고, 열한 명의 형제자매가 있는 대가족이었다. 그 중 오토는 상당히 똑똑한 사람이라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교육학을 전공했고 1차 대전 시기에는 군의관으로 복무하였다.
1919년 이후에는 베를린에서 초등교사일을 하면서 1920년부터 25년까지는 체육 교육학 학위를 따기도 했다. 거기에다 1935년에는 의학 박사 학위까지 따냈다.
이런 바쁜 와중에도 네르츠는 축구에 취미를 가져 고향에 있을 때부터 FC 헤칭엔 클럽에서 축구를 했다. 가족을 따라 만하임으로 이주하고 나서는 VfR 만하임에서, 베를린에서 공부할 때는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에서 축구 선수와 달리기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수로서는 큰 업적을 남기진 못했다.

2.2. 감독 생활


네르츠는 1924년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자신이 몸담았던 테니스 보루시아 베를린의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과는 다르게 당시 독일에서 축구는 열등한 스포츠 취급을 받았고 축구팀의 전력도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팀들에 비해 약했다.
당시 독일 축구 연맹의 회장 펠릭스 린네만은 독일을 세계적인 축구 강국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있었고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에 집중했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대표팀에 전임 감독을 두는 것을 계획으로 잡았고 그 대상이 네르츠였다. 
네르츠는 1926년 독일 대표팀 감독에 취임하였고 네덜란드와 치른 국가대표 감독 데뷔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다. 하지만 정작 올림픽에서는 남미의 강호이자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를 만나 2라운드에서 1대4로 대패하였다.
네르츠는 이 패배에서 팀의 약점을 찾으려 노력했는데 당대 최강팀 잉글랜드를 주기적으로 관찰했고 하드 트레이닝도 도입했다. 그리고 에른스트 쿠초라, 프리츠 슈체판, 파울 야네스 같은 새로운 피들도 수혈하였다.[5] 그의 노력에 힘입어 1929년에는 5전 4승 1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독일의 정치계에 큰 변화가 왔고, 네르츠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원래 네르츠는 독일 사회민주당을 지지하는 중도좌파의 정치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네르츠는 1933년 무렵부터 SA에, 1937년에는 나치당에 가입하였다. 비록 생전에 독일 사회민주당을 탈퇴하면서 정치에는 무관심하다라는 입장을 밝히긴 했지만 유럽 스포츠계에서 유대인을 몰아내자는 반유대인 운동에도 참가하는 등 논란의 여지를 만들었다.
나치당은 대표팀을 파시즘의 선전에 이용하면서 독일인의 우월성을 주장하려 했고, 그들의 목표는 이탈리아와 함께 이탈리아의 홈에서 열릴 월드컵을 나눠 먹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독일 대표팀은 3위를 차지하면서 절반의 성공을 이뤄냈다. 다음 국제 대회인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독일 대표팀이 1935년의 A매치 17경기 중 13승을 거두자 나치당은 한껏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올림픽 본선에서 독일은 2라운드 상대 노르웨이에 일격을 맞으며 0대2로 패배하였고, 네르츠는 탈락의 책임을 떠맡은 채 해임되었다.

2.3. 이후


네르츠는 감독직에서 물러난 이후 잠시 후임 감독 제프 헤어베어거의 상급자 역할을 했다. 이 역할은 프랑스 월드컵까지였으며 이후에는 대학에서 체육 문화를 강의하고 저술 활동도 했다.
하지만 네르츠는 2차 대전 말엽에 나치 활동 경력으로 인해 소련군에 체포되었고 베를린NKVD 3번 캠프에 수용되었다. 1946년 10월에는 작센하우젠의 7번 캠프로 이송되었고, 1949년 4월 19일에 뇌수막염으로 사망했다.

3. 전술상 특징


네르츠는 잉글랜드식 킥 앤 러시 전술을 선호했다. 때문에 그가 대표팀을 맡던 당시에 독일 축구계를 주름잡던 샬케의 선수들과는 상성이 맞지 않아 슈체판을 제외한 샬케 선수들은 대표팀과 큰 인연을 맺지 못했다.

4. 수상



4.1. 클럽


  • 베스크라이스리가 우승 4회: 1910, 1911, 1913, 1914(VfR 만하임)

4.2. 감독


[1] nɛʁt͡s[2] Nerz는 한국어로 밍크라는 뜻이다.[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출처: 위키피디아, 11v11[5] 하지만 쿠초라는 나중에 제대로 사고를 쳐서 1932년 이후로 네르츠의 대표팀에 뽑히지 못했다. 자세한 이유는 쿠초라 항목의 뒷이야기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