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동철
1. 소개
해태 타이거즈와 LG 트윈스에서 뛰었던 투수이다.
현역 시절 별명으로는 '''SF볼의 마술사'''가 있으며 그에 걸맞게 스플리터를 잘 던지는 것으로 유명한 투수였다. 차동철, SF볼의 마술사 “야구인생도 SF”
2. 선수 시절
2.1. 프로 입단 이전
광주일고 야구부에 들어간 이후[1] 1년 선배였던 선동열과 함께 원투펀치로 활약하였고[2] 2학년이던 1980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해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이후 1982년 건국대학교에 입학, 1982년 회장기 전국대학야구 추계리그에 출전해 팀은 준우승했지만 우수투수 타이틀을 가져갔다. 1983년 추계리그에도 출전해 최종전에서 완봉승을 거두며 건국대 야구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졸업 이후 198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해태 타이거즈에 1차 지명을 받았다.
2.2.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86년 신인으로 데뷔한 후 선발 중무리 가리지 않고 등판해 10승을 달성하는 등의 활약을 펼쳤다.
그해 7월 27일에는 청보전에서 연장전까지 완투 끝에 무승부라는 이색적인 기록을 만들었다.[3]
신인 시즌부터 선동열-이상윤-문희수에 이은 4선발로 주로 뛰었지만 마무리나 패전처리도 맡는 등 전천후로 등판해오며 마당쇠다운 활약을 펼쳤다. 송유석을 앞선 80년대 해태 왕조의 마당쇠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정확히 차동철이 해태에서 활약했던 시기는 송유석이 개화하기 이전이었다. 그러나 송유석과는 달리 원래 보직이 선발이었기 때문에 전문적 노예라 보기에는 좀 그런 면이 있다. 어쨌든 이런 전천후적 등판으로 인한 혹사는 부상과 함께 1989년 계투 전향을 불러오게 된다.
해태 타이거즈 소속으로 출전한 한국시리즈에서 2승(1986년 4차, 1987년 1차전) 1패(1986년 2차전), 2세이브(1986년 3차, 1987년 3차전)를 기록했다.
2.3. LG 트윈스 시절
트레이드 초 백인천 감독 재임기에는 부상에다가 감독의 미움을 사는 바람에 출장기회를 많이 얻지 못했다.[4]
이후 이광환 감독이 부임하며 다시 한 번 활약하게 되는데, 이 시기가 조금 더 전문 마당쇠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광환 감독 체제 하에서 차명석, 김용수 같은 전문 셋업/마무리 체제가 생기는 등, 투수 분업화가 나타났지만 지금보다는 확실히 엉성한 편이었다. 따라서 전천후 역할을 해 줄 투수가 필요했고, 차동철은 많은 이들이 피하는 이 전천후 투수를 맡아 때로는 승리조, 때로는 패전조, 때로는 대체선발까지 맡는 등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1997년에는 부상을 당해 많이 등판하지 못했으며 시즌이 끝나고 은퇴 선언을 하였다.
3. 은퇴 이후
건국대학교 야구부 코치로 임명되었고, 2011년에 감독으로 승진하였다.
2013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에서 건국대학교 야구부를 우승시켰다.
4. 여담
- KBO 리그 선수 중 5년 연속 우승을 맛본[5] 유일한 선수다.
- 비록 선동렬에 가려 2인자 느낌이 강한 선수였지만, 광주일고 2학년 시절부터 박노준, 김건우가 주축이 된 선린상고, 광주상고, 천안 북일고를 차례로 격침시킨 대물투수였다. 태산에 가리운 투수 차동철
- 여러 기록을 만들어 준 허용투수이기도 하다. 장종훈의 화려한 타격 역사를 열어준 이가 차동철인데 그가 1987년 4월 14일 대전 해태전에서 친 프로 첫 안타가 차동철의 공을 받아친 2루타였다. 또 역대 KBO 역사에 단 한 번뿐인 연타석 만루홈런 기록도 차동철이 완성시켰는데 1997년 5월 4일 대구 삼성전 2회말 때 정경배에게 만루홈런을 맞으면서 대기록이 완성됐다.
- 스플리터를 매우 잘 던져서, 1987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는 스플리터를 던진 게 부정투구로 오인받기도 했다. 후에 차동철은 이 스플리터를 문희수에게 알려줬고 문희수 또한 이 스플리터를 주무기로 사용했다.
- 친화력과 소통력이 상당히 뛰어나다고 한다.
- 1992년 타석에 한 번 들어선 적이 있다. 그리고 아웃.
- 아들이 매송중학교 야구부를 다녔고 유소년 국가대표라고 한다. 현재는 야탑고등학교 야구부에 소속돼 있다.
5. 통산 기록
6. 관련 문서
[1] 78년 전남고에 진학했으나 그 해 말 해체되자 광주일고로 전학갔고 이 과정에서 1년을 유급했다.[2] 생년이 같지만 선동열은 빠른 생일로 81학번이다. 차동철은 빠른 생일이긴 했으나 동갑내기들과 같이 졸업하여 82학번.[3] 청보 쪽 투수도 연장 완투였다. 투수는 김신부.[4] 1990년, OB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호투한 차동철을 감독이 2차전에서도 올리려는 것을 거부하면서 미움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5]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이상 해태, 1990년 LG[6] 커리어하이[7] 선발등판 3위(23경기)[8] 사구 4위(10개), 폭투 4위(4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