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향남

 

'''최향남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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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1번'''
차동철(1986~1989)

'''최향남(1990~1991)'''

박철웅(1996~1997)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69번'''


'''최향남(1995)'''

조용수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9번'''
김응용(1983~1995)

'''최향남(1996)'''

엄병렬(1998)
'''LG 트윈스 등번호 27번'''
서효인(1987~1995)

'''최향남(1997~2003)'''

장준관(2004~2006)
'''KIA 타이거즈 등번호 37번'''
신동주(2003)

'''최향남(2004)'''

신용운(2005)
'''KIA 타이거즈 등번호 32번'''
임준혁(2004)

'''최향남(2005)'''

마이크 서브넥(2006)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58번'''
곽주섭(2005~2006)

'''최향남(2007~2008)'''

오승택(2010~2011)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92번'''
공석

'''최향남(2011)'''

김민호(2013~2015)
'''KIA 타이거즈 등번호 99번'''
호라시오 라미레즈(2012.2~2012.5)

'''최향남(2012.5~2013)'''

브렛 필(2014~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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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최향남 (崔香男 / Choi Hyung-Nam)
'''생년월일'''
1971년 3월 28일 (53세)
'''신체'''
187cm, 91kg
'''출신지'''
전라남도 신안군
'''학력'''
목포산정초 - 영흥중 - 영흥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90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해태)
'''소속 팀'''
해태 타이거즈 (1990~1996)
LG 트윈스 (1997~2003)
KIA 타이거즈 (2004~2005)
'''버펄로 바이슨스 (2006)'''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2006)
롯데 자이언츠 (2007~2008)
앨버커키 아이소톱스 (2009~2010)
롯데 자이언츠 (2011)
KIA 타이거즈 (2012~2013)
고양 원더스 (2014)
비너노이슈타트 다이빙 덕스 (2015)
'''지도자'''
글로벌선진학교 감독 (2016~2017)
상하이 골든 이글스 투수코치 (2020~)
'''별명'''
향운장
1. 개요
2. 선수 경력
2.3. KIA 타이거즈 1기 시절
2.4. 버팔로 바이슨스 시절
2.6. 앨버커키 아이소톱스 시절
2.8. KIA 타이거즈 2기 시절
2.8.1. 2012 시즌
2.8.2. 2013 시즌
3. 지도자 경력
4. 기타
5. 연도별 주요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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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7일 월명 야구장에서 마운드로 나가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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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노이슈타트 다이빙 덕스 시절.

1. 개요


한국프로야구와 미국 마이너리그, 오스트리아 리그에서 활약한 투수이다. KBO 리그 역사상 손에 꼽히는 저니맨이자 풍운아.
별명으로는 향운장[1], 향기나는 남자[2], 향기남[3], 최향남좋은일[4] 등이 있다.

2. 선수 경력



2.1. 해태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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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신안군 출신으로 목포 영흥고등학교에서 고교 선수 생활을 보냈다. 선배들이 구타를 하려고 해도 몸이 하도 말라서 차마 때리지 못했다는 웃지 못할 전설이 있는 선수다. 그래도 영흥고등학교 시절에는 제법 수준급의 선수라서, 연고 팀 해태 타이거즈가 호시탐탐 노렸던 선수였다.[5]하지만 정작 최향남 자신은 동국대학교에 진학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해태의 입단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담임 선생님이 '''체육특기자'''로 원서를 써 줘야 하는데 실수로 '''일반 전형'''으로 원서를 쓰는 바람에 '''당연히''' 불합격. 최향남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고 담임 선생님은 미안하다며 '''가방을 사주는 걸로 퉁쳤다고 한다(...)''' 본인 말로는 그 때부터 자기 야구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동국대학교 진학이 좌절되고 야구 선수로서의 길이 막혀 막노동판을 전전하다가 소식을 들은 해태가 1990년 단돈 500만 원에 입단시키면서 프로 선수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뒤의 LG 트윈스 시절의 에피소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유분방한 타입의 최향남은 해태의 엄격한 '''군대식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을 못 했고, 결국 입단 첫 시즌 후 별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한 채 '''현역'''으로 입대하는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경기도 연천군의 26사단 포병부대에서 2년 6개월 간 현역으로 복무했다고 한다.
대개 이쯤되면 조용히 방출되는 것이 정상인데 그렇지 않았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유인즉슨 김응용 당시 감독이 그를 엄청 아꼈기 때문이었다. 김응용이 사석에서 최향남을 '향기나는 남자'라 부르며 선동열의 후계자로 최향남을 꼽았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많이 아꼈지만, 해태 시절에는 결국 이렇다 할 꽃을 피우지 못했다. 선동열의 후계자로 꼽았던 것처럼 해태시절 별명은 불펜 선동열일 정도로 연습투구에서는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지만 실전에서는 새가슴으로 불리며 기대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1996 시즌이 끝난 후, 좌타자 보강을 노리던 해태 타이거즈최훈재LG 트윈스로부터 데려오면서 대신 최향남을 맞트레이드했다.[6]

2.2. LG 트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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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감독이 아꼈던 재능은 정작 LG에서 터졌다. 이적 첫 해인 1997년 120.1이닝을 던지면서 8승 3패 평균자책 2.99를 기록하면서 일약 LG의 에이스로 도약한 것. 시속 150km에 육박하는 빠른 공이 마운드에서의 자신감과 결합하면서 드디어 터지기 시작했다. 5월 17일 OB전 생애 첫 선발승을 시작으로 한 달 가까이 한화전 완봉승 등 패전 없이 6연승에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LG 트윈스/1997년/5월LG 트윈스/1997년/6월 참조. 그러나 시즌 말에 급성 충수염 수술을 받아 포스트시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 해인 1998년에도 '''12승'''을 거두면서 LG 마운드의 핵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두 시즌 동안 LG는 한국시리즈에 오르면서 불꽃을 피우던 때였고, 그 중심에 최향남이 있다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한창 도약하려고 하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부상이었다. 어깨 뼈가 웃자라는 부상[7] 때문에 결국 더 성장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점차 LG 마운드에서의 비중은 사라지게 되었다. 1999년 8승[8], 2000년에는 구원 투수로 잠시 활약했고[9], 2001년을 부상으로 날린 후, 2002년 다시금 재기에 성공해서 7승을 올리면서 돌아오는가 싶었지만, 2002년 추웠던 KIA와의 PO에서 다시 어깨 부상을 당하면서 결국 LG에서의 생활을 접게 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LG에서의 생활을 접게된 결정적인 계기는 아파치 머리로 비롯된 코칭스태프와의 충돌이었다. 처음 머리 가운데만 노랗게 염색한 아파치 머리를 하고 나타나자 당시 이광은 감독이 머리에 대해 지적을 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오히려 '''머리 전체를 염색하고 나타났다!''' 당연히 구단은 난리가 났고 이를 미루어보아 반항심이 많은 듯하다. 본인 말로는 가운데만 노랗게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전체를 노랗게 했다고 했는데 어쨌든 이 사건도 그렇고 선수협 문제로 최향남은 단단히 찍히고 결국 팀을 떠나게 되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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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말에 최성미 씨(1977년생)와 결혼했다.

2.3. KIA 타이거즈 1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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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을 재활로 완전히 날린 후, 친정 팀인 KIA로 돌아갔다. 이 때 입단 조건으로 내건 것이 해외로 나갈 경우 조건 없이 보내준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KIA 입장에서는 입단 당시 만 33세인 선수가 가봤자 어디를 가겠냐고 생각해서 이 조건을 수락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어쨌든 KIA에서 2004년과 2005년 그럭저럭 계투진에서 힘을 보태는 정도로 활약을 했다. . 그리고 계속 타진하던 해외 진출을 위해 트라이아웃도 보고, 미국으로 건너가 테스트도 받았는데, 마침내 결실을 맺어 2005 시즌 종료 후에 미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산하 트리플A 팀인 버팔로 바이슨스에 입단하면서 진짜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2.4. 버팔로 바이슨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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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람들은 그의 도전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흔히 더블 A 평가를 받기도 하는 KBO 선수가 트리플A에서 하면 얼마냐 하겠느냐, 또 34세의 나이니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던 것. 그런데 여기서 최향남은 8승 5패 평균자책 2.37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내면서 팬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11] 만일 최향남이 24세였다면, 정말 한 경기 정도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를 밟았을지도 모르는 성적.
최향남 자신에 따르면, 도전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던 시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향남은 엄연히 처자가 있는 몸인지라 계속 도전을 할 수는 없었고, 국내 복귀와 잔류에서 고민하는 모습 때문에 버팔로 측에서도 재계약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결국 국내 복귀를 타진하게 되었는데, 처음 찾아간 SK 와이번스 쪽에서는 김성근 감독이 그의 자유분방함이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당시 최향남이 복귀하면서 요구한 연봉이 '''5억원'''이나 되었던 지라 김성근이 아니었어도 SK로 갈 확률은 없었다. 5억원 이야기가 최향남 입에서 나온 뒤로 SK는 물론 다른 팀들도 최향남을 외면했고 무적선수가 되어 미아가 되기 직전 롯데 자이언츠로 가게 되었다. KIA 타이거즈는 그의 권리를 포기한지라 그의 롯데행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12]
여담이지만 이게 토종 KBO리거 출신으로 해외에 진출했다가 리턴하면서 원 소속구단이 아닌 다른 구단으로 복귀한 첫 사례이다. 이후 이범호, 황재균, 김현수(1988) 등이 뒤를 이었다.

2.5. 롯데 자이언츠 1기 시절



최향남은 롯데와 계약 당시 계약금 1억 연봉 1억 총액 2억에 계약을 맺었는데, 이 때 좀 흠좀무했던 게 8승 이하의 성적을 거둘 경우 마이너스 옵션으로 연봉 8천만원을 삭감하는 조건을 '''본인 스스로''' 계약서에 삽입했다. 대신 10승 이상시 플러스 옵션 1억원도 추가. 미국 야구에 도전하며 한 단계 스텝업한 기량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었고 시범경기에서 완벽투를 선보이며 기대를 높였다. 그런데 정작 시즌 개막을 며칠 앞두고 식중독에 걸리는 바람에 컨디션이 흐트러졌고, 개막후 무려 10경기 연속 선발등판에서 단 1승도 따내지 못하는 불운에 울어야 했다. 6월 13일 두산전에 8이닝 무실점 호투로 가까스로 국내 복귀 첫 승을 신고했다. 직전 두 경기인 삼성전 8이닝 1실점, KIA전 7과 1/3이닝 1실점의 호투에도 불구하고 승을 못챙기는 등 천신만고끝에 거둔 승리였다. 결국 시즌을 5승 12패 평균자책점 5.00이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계약 조건대로라면 8천만원을 토해내고 최저연봉급인 2천만원만 수령해야 했으나 롯데는 그냥 1억원을 다 지급해 줬다고 한다.
기대가 컸던 2007년의 부진으로 인해 2008년에는 별다른 기대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원래 롯데 자이언츠의 마무리였던 임경완이 난조에 빠지면서 마무리 공백이 생기자 궁여지책으로 최향남에게 마무리를 맡기게 되었고, 이것이 대박이 터졌다. 공의 구위나 빠르기는 일급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인터벌을 짧게 가져가는 투구방식과 마무리로서의 대담함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훌륭하게 롯데의 뒷문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이 때, 짧은 인터벌 때문에 "술이 식기 전에 목을 베어 온 관우에 빗대어 향운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다비드 코르테스가 오기 전까지 롯데 자이언츠의 마무리를 수행하면서 2승 4패 9세이브를 기록하며 2008년 롯데 돌풍의 한 축을 맡았다. 이때 군대 갔던 게 도움이 되기도.

2.6. 앨버커키 아이소톱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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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계속 롯데의 불펜에 남을 것으로 보였으나, 2009시즌 다시 한 번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며 미국으로 건너가기에 이른다. 이 때,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포스팅 시스템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원래 최향남은 롯데에게 공짜로 풀어주기를 요청했지만, 최향남이 KIA에게 퉁수치는 걸 체험한 롯데가 그냥 풀어줄리는 만무한 일 상징적인 의미라도 보류권을 갖기를 원했고, 결국 최향남은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 때 포스팅 금액은 '''101달러.''' (롯데선수로는 유일하게 포스팅 시스템으로 해외에 진출한 케이스, 롯데 역사상 최초이자 최다액 포스팅 사례)원래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입찰해서 그를 데려갔지만 시범경기가 끝난 후 웨이버 공시했고, 그가 간 최종 행선지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산하의 트리플A 팀이었다.
2009년 마이너리그 트리플A 앨버커키 아이소톱스(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산하 AAA팀)에서 뛰며 9승 2패 평균자책 2.34를 기록했다. 세부 수치로 보면 FIP 3.25에 50이닝 기준 PCL에서 FIP 9위를 찍었지만, 결국 나이가 걸림돌이 되어서 메이저리그 승격에는 실패했다. 2010년에도 같은 팀에서 뛰었지만, 이 해에는 1승 2패 평균자책 5.84로 부진하면서 결국 팀에서 방출되기에 이른다. 이 때 조쉬 린드블럼과 한솥밥을 먹었다고 한다. 이후 일본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탈락하고 롯데 자이언츠와 접촉 중이었으나 결렬. 다시 마이너 재도전을 시도했다. 당시 로이스터 감독은 차라리 롯데로 오는 것이 선수생활을 더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아쉬위하고 있다고..
이 때 롯데로 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롯데에서 10시즌을 치룬 후 다시 메이저리그로 도전하기 위해서였는데 그게 되지 않아서였다. FA 조건을 채우지 못했기에 돌아올 경우 한 해를 더 넘겨야 한다. 애초에 메이저리그 진출 때 로이스터 감독 및 롯데가 적극 지원해주어서 가 놓고 안 될 거 같자 롯데로 돌아온다고 했다가 다시 말을 바꾼 것이기 때문에 롯데에는 그냥 돈 받고 쉬러 오냐고 팬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최향남을 옹호하는 기사가 계속 떠서 욕을 더 받는 중. 그렇게 꿈을 강조하고 싶었으면 돌아온다는 얘기를 하지 말든가. 그렇게 집착할 정도로 메-쟈리그에 대한 꿈이 있다고 볼 수도 있고...

2.7. 롯데 자이언츠 2기 시절


2011시즌에 최향남이 롯데로 돌아올 것이라는 소식이 들어왔다. 메이저리그에 미련을 못 버린 최향남은 롯데에 피해를 주기 싫다며 일본 독립리그인 도쿠시마 인디고 삭스에서 계속 공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롯데가 계속 최향남을 찔러보고 있지만 아직 확답은 없는 상태. 현재 서울에서 몸을 만들고 있는 중인데 롯데가 현재 마무리 투수가 없는(...) 실정이고 계약을 하게 되어 롯데에 온다면 롯데의 마무리로써 큰 힘이 되어주리라. 그리고 1년, 연봉 7000만원에 정식 계약했다.

'''하지만 2011 시즌이 25% 정도 진행된 5월 중순, 1군에서는 물론 2군에서도 완벽하게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 이 분에 이어 또 한명의 실종자 탄생.
결국 '''2011년 7월 23일 웨이버 공시'''가 나왔다. 초반에 팔꿈치 부상을 당한 후 재활 훈련을 꾸준히 했으나 회복이 안 되고 있다고 한다. 벌써 만 40세로 사실상 선수생활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나이.
2008년 이후에도 계속 롯데의 마무리 투수로 남았으면 팀이나 본인 모두 달랐을 거라는 롯데팬들의 아쉬움은 여전하다.

2.8. KIA 타이거즈 2기 시절


2012 시즌중에 뜬금없이 KIA 타이거즈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는 기사가 나왔다. 선동열 감독이 보는 앞에서 볼을 뿌렸는데 선동열 감독은 스피드는 느리지만 볼은 아직 쓸만하다는 판단을 내려 구단에 계약하라고 했다고 한다. 정식으로 계약을 마치면 2군에 합류해 몸을 만들게 될 예정이라고. 젊고 강한 팀을 만들기 위해 이종범을 은퇴시켜놓고 역시 노장인 최향남을 중용하는 선 감독의 행보에 일부 팬들이 크게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선 감독은 '''최향남은 투수이기에 중용하게 되었다'''는 발언을 남겼다. 다만 선동열 감독 인터뷰에서 이종범이 젊은 선수들에게 밀리는 상황이었다고 말하였으나, 시범경기 당시 이종범의 타율은 3할을 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상 투수 출신인 선동열 감독의 투수를 바라보는 시각과 야수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로 보여진다. 그러나 2012년 이것은 신의 한수가 되었다.
6월 5일 KIA와 연봉 7000만원에 입단 계약을 맺었다. 선수로 복귀하게 됨에 따라 2012년 기준 KBO 선수들 중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같은 1971년생 선수들 중 생일이 가장 빠르다. 최동수는 9월 11일생, 류택현은 10월 23일생.

2.8.1. 2012 시즌



그리고 2군에서 3경기 등판해서 컨디션을 조절한 이후 6월 17일 1군에 올라왔다. 이날 LG전 9회에 등판해 1이닝 2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하였다. 이때 맘 고생이 좀 심했다.
6월 19일 삼성전에 등판해 진해수가 남겨놓은 승계주자를 깔끔하게 분식. 6월 20일 경기에서는 연장전에 등판해서 기대 이상의 제구력을 보여주며 1.1이닝을 퍼펙트로 막았다.
6월 27일 LG 트윈스전, 9회말 6:4로 팀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등판하여 선두타자 박용택에게 2루타를 맞았지만 후속타자들을 모두 범타로 처리하여 2008년 9월 11일 이후 1,358일만의 세이브를 기록하였다.
7월 4일 무등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는 팀이 0:1의 살얼음판 리드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9회초 등판하여 13개의 공을 던지며 이종욱을 2루 땅볼, 정수빈을 삼진, 김현수를 2루 땅볼로 잡으며 경기를 깔끔히 마무리, 시즌 두번째 세이브를 기록했다.
7월 8일 목동 야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전에서 2:1로 아슬아슬한 리드를 가져가던 상황에서 9회말에 등판. 유한준과 대타 정수성을 루킹삼진으로 잡고, 이후 김민성에게 좌익수 앞 안타를 맞기도 했으나 서건창에게 다시 루킹삼진을 얻어내며 경기를 마무리지었다. 이날은 1이닝 18투구수 4타수 1피안타 3탈삼진을 기록, 시즌 세 번째 세이브를 올렸다. 이로써 역대 2위의 최고령 세이브 기록을 경신하게 되었으며, 송진우의 최고령 기록과는 5일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7월 17일 무등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2:0으로 뒤지던 9회초 등판하였으나 이종욱에게 중견수쪽 안타를, 최주환에게 희생번트를 허용. 김현수는 볼넷으로 보내고 김동주에게 2타점 2루타를 얻어맞으며 부진했다. 이후 양의지는 유격수쪽 땅볼, 오재일은 우익수 뜬공으로 잡았다. 이날은 1이닝 21투구수 6타자 4타수 2피안타 1사사구 2실점 2자책점을 기록.
7월 19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0:6으로 이기던 9회초, 박지훈이 2아웃을 잡고 제구가 흔들리며 만루 위기를 맞자 이어서 등판. 단 2개의 공으로 '''광고가 끝나기도 전에''' 이원석을 3루 땅볼로 잡아내며 경기를 마무리지었다.
7월 25일 넥센 히어로즈전에서 1:3으로 앞선 상황의 9회초에 등판하여 삼자범퇴를 잡으면서 드디어 '''한국 프로야구 최고령 세이브 기록을 경신하였다. (41세 3개월 28일)''' 이후로도 계속 기록을 경신해나갔으며, 2016년 4월 최영필이 새로 기록을 세우기 전까지 계속 최고령 세이브 기록 자리를 지켜나갔다.
복귀 이후 마무리 투수로 뛰면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다. 나이 탓에 파워는 압도적이지 못하지만, 대신 배짱과 노련함을 갖추었으며 특유의 짧은 인터벌은 여전하다. 좋은 공을 가지고도 자신있게 뿌리지 못하는 젊은 투수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모습이다.
8월 2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팀이 4:2로 앞서던 9회말 오랜만에 등판했으나 영 불안한 모습이다. 홍성흔황재균에게 안타를 허용하며 1실점을 하였고, 이후 정훈은 삼진으로, 손용석은 1루수 땅볼로, 김주찬은 중견수 뜬공으로 잡으며 경기 마무리. 구속은 140km대까지 올라왔으나 제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인터벌도 길어진데다 새가슴 기질이 다시 발동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날 2피안타 1탈삼진 2실점 1자책점을 기록하였지만 4:3으로 팀이 이기면서 어찌어찌 세이브는 챙겼다.
8월 3일 잠실 야구장 두산 베어스와의 3연전 첫 경기에서 9회말 1사 1루 상황에서 등판, 김현수는 뜬공으로 잡았으나 정진호에게 볼넷을 허용, 이후 양의지에게 끝내기 2타점 2루타를 맞으며 블론세이브를 기록하고 말았다. 팀은 4:5로 패. 어제의 컨디션 난조와 연투로 인한 구위 저하가 겹친 모습을 보였다. 이날은 ⅔이닝 7타자 25투구수 4타수 2피안타 3사사구 2실점 2자책점을 기록.
8월 4일은 쉬었고, 8월 5일 6:4로 앞서던 9회말 1사 상황에 등판. 이원석에게 안타를 맞았지만 이종욱임재철을 각각 뜬공과 삼진으로 잡아내며 경기를 끝냈다. 이날은 ⅔이닝 3타자 11투구수 3타수 1피안타 1탈삼진 무실점 무자책점을 기록. 최고령 세이브 기록을 또 경신했다.
8월 6일 무등 야구장 넥센 히어로즈전에서 2:3으로 아슬아슬하게 리드하던 9회초 무사 1,3루 상황에서 유동훈에 이어 등판. 희생플라이로 1실점을 하긴 했으나 이후 타자들을 뜬공으로 잡아냈고, 9회말 밀어내기 볼넷으로 팀이 승리를 하면서 1승을 챙겼다.
8월 7일 넥센과의 연이은 경기에서 9회초 호투하던 김진우에 이어 마무리로 등판하였다. 연투 상황이라 걱정하던 사람들도 많았지만, 오히려 빠른 인터벌을 되찾으며 13투구수 무피안타 무사사구 2탈삼진 무실점 무자책점을 기록하며 경기를 깔끔히 마무리했다.
이후 갑자기 장염 증세를 보였고, 어쩔 수 없이 마무리 경험이 있는 윤석민이 당분간 대신 마무리로 올라오게 되었다.
8월 22일 무등 야구장 LG 트윈스전에서 팀이 4:5로 리드하던 9회초 등판. 오랜만에 짧은 인터벌과 공격적인 피칭을 선보이며 경기를 깔끔히 마무리지었다. 김용의는 삼진으로 잡고, 윤요섭에게 몸에 맞는 공[13]을 허용한 후 대주자 이대형이 나가며 위기를 맞았지만, 김상훈이 2루 도루하던 이대형을 잡아내고(!) 윤정우는 우익수 뜬공으로 잡아내며 경기 마무리. 이날은 1이닝 3타자 18투구수 2타수 1사사구 1탈삼진 무실점 무자책점을 기록, 시즌 8번째 세이브를 챙겼다. 최고령 세이브 기록은 계속 경신되고 있다.
9월 6일 무등 야구장 SK 와이번스전에서 팀이 0:2로 리드하던 9회초 등판. 박재상최정을 깔끔하게 삼진으로 잡아내고 이호준은 우익수 뜬공으로 처리하며 경기를 마무리지었다. 이날은 1이닝 3타자 14투구수 3타수 무피안타 무사사구 2탈삼진 무실점 무자책점을 기록, 오랜만에 시즌 9번째 세이브를 챙기며 최고령 세이브 기록을 또 갈아치웠다.
9월 8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 경기에서 스코어 4:4, 11회말 2사 2, 3루의 위기 상황에서 등판하여 큰 이병규를 2루수 플라이로 잡고 이닝을 종료시켰으나, 여전히 스코어 4:4인 12회말에 선두 타자 이대형(!)에게 3루타를 맞고 김용의에게 끝내기 희생 플라이를 허용하여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다. 이번에는 중요한 순간에서 너무 성급한 피칭을 했던 게 도리어 해가 되었다는 평이다. 이날 최향남의 기록은 ⅔이닝 8투구수 1피안타 1실점 1자책점 패전.
9월 12일 무등 야구장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팀이 0:1로 간신히 리드하던 9회초에 등판하여 선두 타자 홍성흔을 초구만에 2루수 플라이로 잡아냈으나 강민호에게 11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안타를 맞고 박종윤을 삼진으로 잡고 조성환에게 안타를 맞아 2사 1, 2루의 위기를 자초하였다. 그리고 황재균에게 1타점 적시타와 도루, 황성용에게 2타점 적시타를 허용하며 스코어 3:1을 만들고 강판되어 서재응의 승리도 날림과 동시에 블론세이브를 기록하고 말았다. 다음 투수인 한승혁전준우를 우익수 플라이로 잡고 이닝을 끝내서 최향남의 추가 실점은 늘어나지 않았고, 팀이 스코어 3:1 그대로 패하여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다. 이날 최향남의 기록은 ⅔이닝 32투구수 4피안타 1탈삼진 3실점 3자책점, 블론세이브, 패전.
9월 15일 어깨와 팔꿈치 통증으로 1군에서 말소되며 시즌 아웃되었다. 일부 타이거즈 팬들은 최향남에게 퇴근본능을 잘 발휘한다고(...) 말했다 한다. 당연히 마무리를 잘하니까...

2.8.2. 2013 시즌


3월 30일 넥센과의 홈 개막전에서 9:10으로 앞서던 8회초에 등판하여 김민성을 2루수 땅볼로 처리하고, 서건창에게 안타를 허용했지만 정수성을 삼진으로, 이택근을 유격수 땅볼로 처리하면서 1이닝을 실점없이 막으며 '홀드'를 기록했다. KIA팬들은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해서 기뻐했지만, 한편으로 젊은 계투요원들이 '''43세'''의 최향남보다도 못한다는 현실에 씁쓸해하기도 했다.(...) 한편 데뷔 24년차의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4월 2일 한화전에서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홀드를 기록했다.
4월 5일 롯데전에서는 1과 ⅔이닝동인 1실점(1자책)을 허용하고 내려왔으나, 팀은 넉넉하게 앞서고 있어서 승패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4월 7일 롯데전에서는 7회말 2사 2루 상황에서 구원 등판하여 뜬공으로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며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8회말 연속 안타를 맞고 무사 1,3루 상황에서 마무리 투수 앤서니로 교체되었다. 다행히 앤서니가 파울플라이-병살타로 위기를 넘기고, 9회말도 무사히 막아 내면서 세이브를 기록하였다. 최향남은 ⅓이닝동안 2피안타를 기록하며 조금 부진하였지만, 앤서니 덕분에 홀드를 챙겼다.
4월 10일 광주 두산전에서 연장 10회초 3:3 동점 상황에서 등판하여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그의 호투는 이후 팀이 연장 12회말에 끝내기 안타로 승리하면서 빛을 발할 수 있었다.
4월 16일 광주 LG전에서 6회초 2:1 박빙 상황에서 등판하여 선발 양현종이 적립해둔 2사 1,2루 위기를 삼진으로 극복한 다음, 7회초에도 등판하여 삼자범퇴로 깔끔하게 처리. 홀드를 챙겼다.
하지만 잦은 등판으로 피로가 쌓였는지 제구나 구위 모두 조금씩 안 좋아졌고, 결국 고질적인 팔꿈치 부상 문제로 4월 28일 재활군으로 내려갔다.
7월 23일 1군에 다시 올라와 괜찮은 활약을 해주고 있다. 7월 28일 NC 다이노스전에서 8회 동점 상황에 등판하여 1이닝 무실점 2삼진, 삼자범퇴로 막고 다음 회 팀이 역전하며 시즌 첫 승을 올렸다.
8월 29일에는 시즌 2승을 기록하며 송진우에 이어 역대 2위 최고령 승리 (42세 4개월 30일) 를 따냈다.
올 시즌 최종 성적은 26경기 30⅓이닝 2승 2패 8홀드 방어율 4.45 28피안타 2피홈런 8사사구 24탈삼진으로 마감하였다.
시즌이 끝난 뒤 방출되었는데 또 미국 무대에 재도전하기 위에 팀에 방출 요청을 했다고 한다. 관련기사 여기에 대해서는 "불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라며 지지하는 의견과 "KIA에 와서 도대체 한게 뭐냐?"라는 비판이 나오는 등 의견이 상당히 갈렸다.[14]
결국 어디에서도 오퍼가 들어오지 않아 미국 재도전은 사실상 무산되었다. 나이를 감안할 때 더 이상의 도전은 무리일 듯.

2.9. 고양 원더스 시절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에 실패했고 이후 선수 생활 연장을 위해 고양 원더스에 입단했다고 한다. 앞으로의 메이저리그 도전은 완전히 접겠다는 의사도 밝혔다고 한다..관련기사
2014년에는 고양 원더스의 퓨처스 리그 교류전도 90경기로 대폭 늘어나면서 주축 선수로 활약하며,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후배 선수들에게 전하는 멘토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러나 교류전을 1/3 가까이 소화한 2014년 5월 20일 현재 교류전 등판 기록은 없다.
그 후 등판성적은 처참한데.... 방어율 7.71 1패, 4.2이닝 4실점이라고.....
교류전 81경기중 8월 24일 경기에서 3이닝 무실점으로 간만에 좋은 성적을 냈다. [15] 고양 원더스에서의 1년간의 성적은 5경기 등판, 1승1패 9.1이닝 소화, 방어율 3.86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냥 그럭저럭 성적은 나온듯.
9월에 고양 원더스가 해체되면서 다시 야인으로 돌아갔다. 2015년 기준으로 한국나이 45살이고... 특유의 성격도 고치지 못한 것으로 보아 현역연장은 힘들 듯 하다...고 생각했는데

2.10. 비너노이슈타트 다이빙 덕스 시절


뜬금없이 오스트레일리아도 아니고 오스트리아 야구리그에 진출했다. 역시 풍운아다운 선택이라는 평이다. 팀은 비너노이슈타트 다이빙 덕스. 롯데 트레이너 출신의 한국인인 하승준씨가 감독으로 있는 구단으로 하승준 씨의 연줄을 통해 진출한 듯. 해당 팀은 리그 내 강팀 급은 아니지만, 최상위 리그에 소속되어 있으며, 최향남뿐만 아니라 SK 출신의 황건주도 함께 오스트리아로 건너갔다. 초빙 선수이므로 한국-오스트리아의 야구 교류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대사관 차원에서 큰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2015년 파이널 시리즈에 진출 해 일본인 선수들이 있는 비엔나 원더러스와 맞붙게 되었다.
정규 시즌 MVP로 선정되었다.

3. 지도자 경력


오스트리아에서 1년 동안 선수생활 한 후 2016년 초에 아이티로 가서 야구 재능기부를 하겠다는 계획을 언급했으나 생각을 바꿔 2016년 8월 10일부터는 경북 문경에 있는 국제학교인 글로벌선진학교 야구부의 감독으로 감독 생활을 시작한다고 한다. 2017년 후진 양성에 힘쓴 공로로 한은회 시상식에서 공로패를 수상받았다. 기사 그러나 아마야구 지도자 자격이 없는 관계로 실질적으로는 다른 감독이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2020년부터 중국야구로 진출해 상하이 골든이글스의 투수코치으로 활동한다.#

4. 기타


  • 엘롯기를 모두 거치며 선수생활을 했다.
  • KBO 성적보다 AAA 성적이 더 좋다. AAA에선 3시즌 통산 2.81 KBO에선 15시즌 통산 4.05로 AAA 시절이 30대 중후반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신기한 경우다. 대표적으로 윤석민을 보면 AAA에서 5.74 자책점을 기록했다.[16] KBO가 AA~AAA 정도로 평가받고 용병이라는 핸디캡까지 감안하면 KBO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매우 상반되는 모습이다. 이승엽, 박병호같이 MVP를 2번 이상 받고도 상위리그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이라던지[17] 강정호, 류현진, 오승환처럼 KBO에서 성공하고 메이저리그에서도 성공한 선수들도 KBO 시절보다 기록적인 부분이 감소했다.[18] KBO의 팀 분위기와 안 맞았다는 얘기가 있을정도[19] 노장을 좋아하는 김성근조차도 입단을 거부할 정도였다.
  • 안티도 굉장히 많은 선수이다. 젊은 시절의 반항으로 팀에서 계속 엇나간 것도 있지만, 거듭된 해외 진출 도전이 특히 문제. 좋게 말하면 도전 정신이 강한 거지만 다른 시점으로는 해외 진출 실패로 낙동강 오리알이 된 신세에서 기회를 준 국내 팀인 KIA와 롯데의 뒷통수를 친 철새 행위나 국내에서도 최고가 되지 못한 선수가 헛바람이 들어 해외 진출을 하려는 허세로 보는 사람들도 많기 때문.
  • 사실 최향남이 KIA에 친 뒤통수는 당시 KIA 구단의 일처리 실수도 있어 이해가 되지만, 롯데에서 마이너 리그로 진출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변명의 여지없는 뒤통수의 향연이다. 롯데 소속이던 2008년 말, 시즌이 끝나자마자 구단과 아무 이야기 없이 자기 맘대로 해외 에이전트들과 접촉하며 메이저 리그 구단 물색을 물색했는데, 당시 최향남은 FA 신분도 아니고 엄연히 롯데 소속이었다. 이것 때문에 롯데 구단은 그가 계속 미국 무대 도전 의사를 밝히자, 이적료 챙기기가 목적이 아닌, 상징적인 의미로써의 보류권을 가지기 위해 최향남에게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미국 무대 도전해 보자고 했고,[20] 그 결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입찰한 101달러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 김응용이 주시했던 선수이기도 하다. 불펜의 선동열, 향기나는 남자라고 아꼈다. 하지만 결국 해태 시절에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LG 트윈스에서 포텐을 폭발하게 된다. 그래도 KIA시절 고향팀으로 돌아와 중간계투로 제 몫을 하긴 했다.
  • 옛 해태 출신으로는 보기 드문 콩라인이다. 1991년, 1993년 우승 당시에는 현역 복무 중이었고, 1996년에는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제외됐기 때문. 그리고 LG에서 두 차례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기록한 뒤 2013년을 마지막으로 독립리그로 옮기면서 영원한 콩라인이 되었다.
  • 박명환야구TV에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말재주가 화려하거나 뛰어난 편은 아니였지만 차분하고 진솔한 모습으로 호평을 받았다. 박명환 말에 의하면 지금 얼굴이 중학생때 얼굴이며 어려보인다고 저절로 동안 속성을 획득했다.

5. 연도별 주요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세이브
홀드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90
해태 타이거즈
5
5⅓
0
1
0
0
15.19
10
7
3
1991
현역으로 군 복무
1992
1993
1994
1군 기록 없음
1995
19
67⅔
0
5
0
0
3.86
54
39
54
1996
17
31⅓
1
0
0
0
4.88
35
16
30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세이브
홀드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97
LG 트윈스
23
120⅓
8
3
0
0
2.99
112
48
74
1998
28
173⅓
12
12
0
0
3.63
144
60
111
1999
15
93
8
5
0
0
4.26
78
43
87
2000
21
78
4
7
5
0
3.46
79
34
80
2001
3
8
0
1
0
1
6.75
7
7
5
2002
23
109
7
9
0
0
4.46
95
66
75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세이브
홀드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4
KIA 타이거즈
16
45⅓
2
1
0
0
3.57
40
27
37
2005
12
41⅔
2
5
1
0
4.10
39
24
3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세이브
홀드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6
버팔로 바이슨스
34
106⅓
8
5
0
0
2.37
95
39
103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세이브
홀드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7
롯데 자이언츠
24
122⅓
5
12
0
0
5.00
139
49
66
2008
37
50⅓
2
4
9
3
3.58
36
15
48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세이브
홀드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09
앨버커키 아이소톱스
33
57⅔
9
2
0
0
2.34
51
21
77
2010
12
24⅔
1
2
0
0
5.84
37
7
17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세이브
홀드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11
롯데 자이언츠
1군 기록 없음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세이브
홀드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012
KIA 타이거즈
24
20⅓
1
3
9
2
3.98
19
7
20
2013
26
30⅓
2
2
0
8
4.45
28
9
24
<color=#373a3c><colbgcolor=#ffff88> '''KBO 통산'''(15시즌)
293
996⅓
54
70
24
14
4.05
915
451
745
<color=#373a3c> '''AAA#s-1.3 통산'''(3시즌)
79
188⅔
18
9
0
0
2.81
183
67
197
<color=#373a3c> '''역대 통산'''(18시즌)
372
1185
72
79
24
14
3.85
1098
518
942
[1] 특유의 짧은 인터벌로 경기를 빠르게 마무리짓는 모습에서 따 온 별명. 관운장의 명언 중 하나인 "술이 식기 전에 화웅의 목을 베고 돌아오겠다"를 패러디한 "포카리가 식기 전에 돌아오겠다", "컵라면이 익기 전에 경기를 끝내겠다" 등등의 명언도 유명하다.[2] 언론에서 많이 사용한 별명이다. 한자명이 향남(香男)이란 데서 따 온 것으로 보인다.[3] 어원은 '향기나는 남자'와 동일. 김응룡 감독이 해태 시절 짝사랑이라 할정도로 최향남을 총애해서 직접 붙여줬다고도 한다.[4] 말 그대로 최향남+남 좋은일. 불을 지를 때 불리던 별명이다. 불을 지르면 당연히 상대팀한테는 좋은 일이니까...[5] 영흥고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동시에 야구부가 창단되었으나, 2003년에 해체되었다.롯데의 박건우, KBO 심판으로 활동하는 문승훈,추평호 등이 이 고등학교 출신이다.[6] 이때 최훈재 말고도 제2의 김재현이라는 평가를 받던 고졸 2년차 조현도 받아왔으며, 반면 김응용 감독의 눈 밖에 나버린 송유석, 동봉철이 LG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 트레이드 결과는 해태가 LG에게 2선발급의 투수와 필승조를 조공한 꼴이 되었다. 최훈재도 입단 1년차때는 중심타자로서 V9에 일조하였으나 2년차때는 평범한 성적을 남기며 두산으로 트레이드된다.[7] 회전근개가 움직이면서 견봉이라는 뼈와 부딪혀 계속 자극을 받게 되는데, 자극을 받으면 우리 몸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주 쓰는 손에 굳은살이 박히듯 노폐물을 뼈 끝에 쌓고 그게 굳어져 마치 뼈가 자라난 것처럼 된다. 보통 중노년에게 많이 일어나는 퇴행성 질환인데, 투수들은 직업특성상 젊은 나이에도 앓는 선수가 종종 있다. 유명선수로는 KIA 윤석민이 이 질환으로 은퇴했다. 보통 수술로 웃자란 뼈를 깎아내는 식으로 치료하는데 결국 과사용이 원인이라 선수생활을 계속하는 한 재발할 수밖에 없다.[8] 99년 LG의 투수진은 말 그대로 김용수를 빼면 초토화 되었는데 그나마 최향남이 제 몫을 해줬다.[9] 다만 이 시기에 이런 경기를 보이며 털리기도 했다.[10] 지금은 선수단 내에서 우규민, 이동현, 최동환, 오지환, 김지용 등 머리 염색하거나 장발로 기르는 선수들이 꽤 나온 것을 보면 구단 내에서 머리 염색에 이젠 신경을 크게 쓰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15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고 한국 사회도 많이 변했으니...[11] 그 윤석민도 AAA에서 불이나 지르던 것을 생각해보면 최향남이 잘 한 것임을 알 수 있다.[12] 사실 이건 KIA의 실수다. FA가 아니었기 때문에 '''선수 임대나 임의탈퇴의 절차를 거쳐서 최향남에 대한 권리를 확보해둬야 했는데''', 최향남 본인의 말만 믿고 무조건으로 풀어줬다 통수를 맞은 것.[13] 비디오 화면을 보면 준비 동작을 취한 윤요섭의 배트에 공이 먼저 튕겨지면서 어깨를 맞힌 것으로 보이지만, 주심은 일단 몸에 맞는 공 판정을 내렸다. 대주자 이대형이 홈으로 들어오며 동점이 되었다면 엄청난 논란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판정이다.[14] 특히 선동열이종범을 은퇴시키면서 타자와는 달리 투수는 계속해서 던질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으며 그 명분으로 내세운 게 최향남이었으니(...). 물론 최고령 기록을 세우긴 하였지만 지난 2년간 딱히 보탬이 안된 것도 사실. 다만 그당시 KIA 불펜이 막장이었는지라 비교적 준수해 보이긴 했다.[15] 고양의 2014년 마지막 경기는 8월 27일 경기이다.[16] 다만 윤석민은 구속과 더불어 하락세였고, 그로 인해서 KBO에 복귀하고부터는 선발로 나서지 못했다.[17] 이승엽선수가 NPB 시절 커리어 06년도만 본다고 해도 KBO 시절 MVP를 5번받은 선수가 무관왕이 되었기 때문에 기대 이하의 성적이었다. 박병호 역시 KBO에서 2년연속 50홈런을 쳤지만 AAA도 정복하지 못했다.[18] 류현진은 통산 방어율 KBO 2.8 메이저리그 2.95이며 피홈런 비율이 1.3배정도 올라갔다.[19] 2017년에도 논란이 되는 고등학교 후배 폭행사건이라든지, 당시 김응룡의 해태 타이거즈는 엄청난 군기로 유명했다. 위에 서술되어있듯 대학교를 거쳐서 서재응, 최희섭처럼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20] 과거 선동열이종범, 이상훈이 한국에서 뛰다가 일본 주니치로 이적할 때 주니치가 소정의 이적료를 지불하고 임대 신분으로 데려가서 해태와 LG가 각 선수에 대한 보류권을 가졌던 것과, 2013 시즌 후 오승환이 완전한 FA 신분이 아닌, 한국 내 원소속구단인 삼성이 보류권을 가지고, 오승환을 데려가려는 해외 구단(한신)이 삼성에 이적료를 지급 후 일본프로야구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한 방법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