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수
1. 소개
前 해태 타이거즈의 야구선수이자 前 동강대학 야구부, 고창영선고 야구부 감독. 현역 시절 별명은 '''무등산 꽃돼지.'''
2. 아마추어 시절
광주일고 3학년생이었던 1983년, 방어율 제로와 3할대 중반 타율을 기록하면서 광주일고의 시즌 3관왕[1] 을 이끌었던 투타 만능의 에이스였고, 1984년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아 프로에 뛰어들었다. 이 때 삼성의 지명을 받은 정성룡, 롯데의 지명을 받은 조용철과 함께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고졸 신인 지명으로 남아있다. 그 때까지 2차례 있었던 신인지명에서 고3 선수가 단 1명도 호명되지 못했고 이후 해태의 역사에서도 고졸이 1차 지명을 받은 경우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 점을 생각하면[2][3] 그가 야구 게임 유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허접한 투수가 결코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담으로 원래는 후보선수 두 명과 함께 동국대학교에 진학하기로 약속이 되었는데, 문희수가 프로로 돌아서는 바람에 친구 두 명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고, 이 때문에 학부모들의 원성을 들은 광주일고 김대권 감독은 사표를 썼다고 한다.[4]
3. 프로 시절
프로에서의 성적은 입단 당시의 기대보다 좋지 못했다. 10승 이상을 거둔 시즌은 1985년, 1992년 두 번에 불과했고[5] , 1989년부터는 무릎 부상과 급속한 체중 증가로 인해 재활병동에서 반년을 보내다가 가을에 잠깐 얼굴을 보이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그래도 KBO 한국시리즈에서는 가을까치 김정수와 함께 필살의 히든카드로 활약하면서 1988년 한국시리즈 MVP를 거머쥐었고,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삼성의 에이스 박충식과의 투수전에서 대등하게 맞서는 등 인상깊은 모습을 많이 남겼다. 다만 1993년의 경우는 3회에 강판되고 선동열 VS 박충식 구도가 성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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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우승을 확정짓는 순간. 문희수의 선수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3차전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이것은 그가 1987, 1988, 1989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연달아 승리투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그것을 믿고 김응용 감독이 페넌트레이스에서 부진했던 문희수를 선발로 넣었지만 결과는..
참고로 '''한국시리즈 평균자책점이 0.68 이라고 한다.'''
KBO 리그 통산 12시즌 '''241경기 943.1이닝 59승 49패 13세이브 17완투 5완봉 평균자책점 3.69'''를 기록하였다.
1988년 9월 1일 전주 롯데전에서 더블헤더 1차전은 구원투수로 2차전은 선발투수로 승리를 거둬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하루에 2승을 거두었다.
4. 은퇴 후
1995년 은퇴한 뒤 1998년부터 2003년까지 해태와 그 후신 KIA의 투수코치를 맡았다가 2004년부터 동강대학의 야구부의 감독을 맡고 있다. 동강대 야구부는 통산 8년 동안 프로야구 드래프트에서 2013년 드래프트에서 KIA 타이거즈에 7라운드 지명으로 박준표가 지명되기 전까지 단 한 명도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지 못했을 정도로 약팀이지만[7] , 그래도 계속 감독직을 맡는 것을 보면 학교재단 측이나 학부모들의 신뢰가 상당한 것 같다.
2015년을 끝으로 동강대학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후임 동강대 감독은 홍현우. 이후 새로 창단한 고창영선고등학교 야구부 수석코치로 선임되었다.
2016년 고창영선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전태준 선수가 두산 베어스로 지명받는 등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2019년 도중 개인사정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현재는 야인.
2020년 6월 20일에는 KIA 타이거즈의 올드 유니폼 데이를 맞아 김봉연과 함께 시구, 시타를 하며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역대 최다 홈런을 갱신한 나지완에게 꽃다발을 수여하고, 구단으로부터 감사패와 특별 유니폼을 수여받았다.
5. 연도별 성적
6. 여담
운동선수로는 보기 드문 진보신당 당원이기도 하다. 그래서 진보신당 당원들은 당원 체육대회에서 야구를 하면 문희수가 속한 광주시당에게 질게 뻔하니 당원 체육대회에서 야구 종목을 빼자고 한다. 현재 당적은 불명. 그래도 보수적 인사가 많은 체육계에서 흔치 않은 진보적 인사다보니 진보 정당 등에서 여러번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다.
은퇴의 계기가 매우 황당하다. 또한 코치로서도 KIA 구단에게서 아무런 통보 없이 해고당한 일이 있어서, 캐리어에어컨 노동조합 정리해고 철회 투쟁에서 노동조합원들을 격려하러 방문하기도 했다.
7. 가족
그의 아들 문지훈은 광주일고에서 투수로 활동했으며, 2014년 두산 베어스의 2차 10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고려대학교에 입학했다. 외모가 부친을 닮았다. 2017년은 졸업반인 해로 프로 지명을 노려야 할 시기였으나 고려대 블로그 인터뷰 대학에서도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해 프로 지명은 받지 못했다.
8. 관련 문서
[1]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2] 더구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고졸 선수의 경우 '고졸우선지명'을 통해 연고 팀의 지명을 받는게 흔했고 1차 지명의 경우 대졸 선수들이 대상이었다. 고졸 선수들이 1차 지명을 받게 되는 건 1999년 말 고졸우선지명제가 폐지되고 나서이다.[3] 다만 1984년 당시 1차 지명 TO는 무제한으로, 2차보다 1차에서 지명되는 선수가 더 많았던 시절이었다.[4] 당시에는 고교 운동선수들은 실력이 부족하여 운동선수로 성공하지 못할 거 같으면 일단 특기자로 대학을 들어가서 운동을 그만두고 학업을 충실히 하는 쪽으로 전환하여 대졸 학벌로 취업을 하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고교 때까지 운동만하다가 그 자체를 그만두고 갑자기 대학입시공부를 하는 건 불가능 수준으로 어려우니 일단 입학은 체육특기자로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같은 학교의 동창 중 잘하는 선수를 따라 입학하는 걸 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근데 그것이 좌절되었으니 감독이 사표쓸만 했다. 비슷한 경우로 박경완도 본래 대학으로 진학하려다가 죽마고우 김원형의 소개로 쌍방울 연습생으로 입단하면서 졸지에 다른 친구들이 피를 제대로 봤다. 그로 인해 대학을 못 가고 함께 신고선수로 입단한 동기들에 의해 선수단 내에서 나쁜 쪽으로 소문이 퍼졌다. 결국 쌍방울 초기 박경완은 동료를 배신한 이기적인 선수+연습생 신분의 고졸선수+친구따라 들어온 낙하산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팀 선배를 비롯해 암암리에 온갖 무시와 멸시를 당했다. 참고로 대학의 케이스는 아니지만 축구 선수 안정환의 경우도 같은 중학교 축구부 동창들을 끼워팔기처럼 같이 받아주는 조건으로 축구 명문고가 아닌 유명하지 않은 고등학교 축구부에 들어가기도 했었다고 한다.[5] 그나마도 1992년은 5점대 방어율에 145이닝을 던지는데 그친, 다분히 운이 따른 10승이었다.[6] 그 중 차정구 현 KBO 심판은 차영화 코치의 아들이다.[7] 2011년까지 고율, 차정구, 전준호 등 3명이 신고선수로 프로에 입단했다.[6] 2011년 삼성에 입단한 이경록도 이후 대불대(현 세한대)에 편입했지만 원래 동강대에 입학했었다. 여담으로 이 4명 다 입단한 팀이 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