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일스 데이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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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재즈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는 '''재즈계를 넘어서 대중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위대한 인물'''이자 '''재즈의 진보가 정체될 때마다 새로운 해답을 제시했던 최고의 뮤지션'''이다.'''"난 음악을 네다섯 번 정도 바꿔놨지요. 당신은 하얗게 태어난 거 빼고 무슨 중요한 일을 하셨는지?"'''
— 1987년 로널드 레이건의 백악관에서 열린 레이 찰스 기념 연회에서, 옆에 앉은 사교계 백인 여성이 자신에게 무슨 업적으로 이곳에 왔는지 물어보자 마일스 데이비스가 한 말.[1]
재즈 역사상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라고 불리우며, 우수 넘치고 로맨틱한 트럼펫 톤으로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재즈"라는 단어의 무드를 확립해버린 입지전적 인물이다.
2. 생애
2.1. 유년기
일리노이 주 앨턴에서 태어났지만, 가족들이 생후 얼마 안되어 인근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한 탓에 그 곳에서 주로 자랐다. 할아버지가 아칸소 주의 부농이자 회계사였고, 아버지는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치의학을 전공한 치과의사였기에 마일스 가족은 드물게 비교적 넉넉한 중산층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세계 대공황 크리 때 세인트루이스도 큰 타격을 입었고, 한 동안 힘든 생활을 견뎌야 했다.
그럼에도 마일스 가족은 중산층으로서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특히 패션 감각이 뛰어난 편이라 언제든 남의 눈에 확 띄는 깔쌈한 옷차림을 과시했다. 어린 마일스도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바 등을 통해 번 돈으로 말쑥한 정장이나 구두, 넥타이 등을 사는데 보탰을 정도였다. 또 악기 연주도 이 때 익히기 시작했는데, 열 살때 아버지의 동료 의사가 선물해준 코넷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공황 여파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되었던 1938년에 부모 사이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별거 상태에 들어갔고, 이 때의 갈등과 싸움은 당연히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2] 그런 와중에도 마일스는 트럼펫으로 악기를 바꾸었고, 학교에서 정기적으로 밴드 연주를 지도하던 트럼페터 엘우드 뷰캐넌에게 정공법 연주를 배웠다. 마일스는 다른 아이들보다는 다소 약한 음량 때문에 고생하기도 했지만, 일리노이 주 고등학교 음악경연대회에 학교 밴드를 이끌고 출전해 1등을 하기도 하는 등 일찍부터 연주자의 재능을 조금씩 보여주기 시작했다. 뷰캐넌 외에도 당시 세인트루이스 교향악단의 수석 트럼페터를 역임한 조지프 거스탯(Joseph Gustat)에게 난이도 높은 연주법을 배우기 위해 과외를 신청하기도 했다.
이후 동네 소규모 밴드에 객원으로 참가해 연주하거나 자신이 직접 친구들을 모아 밴드를 만들어 연주 활동을 계속 했고, 당시 본좌 트럼페터들 중 한 사람이었던 클라크 테리와 같이 연주하기도 했다. 1940년대 중반에는 세인트루이스에서 프로 밴드로 나름대로 이름난 에디 랜들의 밴드인 '룸부기 오케스트라' 에 정식 단원으로 입단했고, 빌리 엑스타인 밴드의 순회 공연 때도 잠깐이나마 동행하기도 했다.
2.2. 초창기 활동
1944년 9월에는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원에 트럼펫 전공으로 입학했는데, 흑인 학생이 이 음악원에 등록한 예는 그 당시에도 무척 드물었다. 마일스는 여기서 클래식 연주법에도 큰 관심을 갖고 배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당시 그 도시에서 막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비밥에 푹 빠졌다. 결국 음악원 수업은 아오안일 정도로 이 쪽에 매달리기 시작했고, 결국 때려치고 1945년 10월부터 찰리 파커의 그룹에 들어가 본격적인 연주자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주목받은 것은 결코 아니었는데, 아찔한 기교와 고음역을 넘나드는 연주를 선보이던 선배들인 디지 길레스피나 패츠 나바로와 비교하면 뭔가 부족해 보이고 부드러운 음색을 선보이던 터라 비밥 씬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까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서부 순회공연에서 차비를 모두 마약에 쏟아붓고 찌질대고 있던 파커를 충실하게 보필하면서 사보이 레코드에서 함께 음반 취입도 했고, 이 음반이 초기 비밥 녹음의 걸작으로 대서특필되면서 마일스도 스타 반열에 들기 시작했다.
1947년 8월에는 존 루이스 작곡의 Milestones[3] 와 마일스 자신의 자작곡들인 Little Willie Leaps, Half Nelson, Sippin' at Bell's 네 곡을 취입했는데, 마일스가 리더로 취입한 첫 앨범이자 자작곡이 들어간 첫 앨범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후에도 파커 그룹에서 계속 연주 활동을 이어갔지만, 1948년 시카고에서 공연할 때 파커가 아무 설명도 없이 연주에 불참하거나 연주료 지급 요청을 계속 쌩까자 제대로 꼭지가 돌아 결국 결별하고 말았다. 물론 그 후에도 종종 파커와 협연하거나 녹음을 하기는 했지만, 그저 일시적이고 사무적인 일일 뿐이었고 그 이상의 인간적인 관계는 맺지 않았다.
2.3. 쿨의 탄생
마일스는 물론 뉴욕 시절에 비밥에 깊이 빠져 있었지만, 동시에 당대 클래식 작품들의 공연이나 실험적인 연주를 보여준 새로운 유형의 밴드 음악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1946년에 만난 클로드 손힐 밴드의 편곡자 길 에반스(Gil Evans)가 마일스를 자신의 음악 활동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고, 마일스도 에반스의 밴드 동료들이나 친구들인 게리 멀리건, 존 루이스, 조니 캐리시 등의 편곡자들과도 어울리기 시작했다.
결국 이들 모임에서 손힐 밴드 같이 부드럽고 경쾌하면서도 종래의 빅 밴드 재즈와는 격을 달리하는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는 새로운 밴드의 결성이 적극적으로 논의되었는데, 다만 이들 모두 돈이 별로 없던 탓에 대규모 밴드를 만들기는 힘들었다. 토의 결과 피아노와 베이스, 드럼이 리듬 섹션을, 알토 색소폰과 바리톤 색소폰, 트럼펫, 트롬본, 호른, 튜바가 혼 섹션을 이루는 노넷(9중주) 편성의 악단이 탄생되었다.
노넷은 1948년 9월에 뉴욕의 로열 루스트 홀에서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선보여졌는데, 재즈 연주자들이나 작곡가, 편곡자들에게는 꽤 강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지만 흥행 면에서는 나쁜 신세를 면치 못했다. 빅 밴드의 조직적인 스윙을 좋아하는 팬들이던 비밥의 거칠고 격렬한 사운드를 좋아하는 팬들이건 이 음악은 물에 술탄 듯 미지근한 사운드의 느슨한 무드 음악 정도로 폄하됐고, 결국 로열 루스트에서 2주 계약으로 마련된 공연 외에는 공개 무대에서 연주할 기회도 없었다.
하지만 그 때 청중들 중 스탄 켄턴 밴드의 편곡자였던 피트 루골로가 이 노넷을 캐피털 레코드에 소개했고, 이 음반사에서 1949년 1월 21일과 4월 22일, 1950년 3월 9일 세 차례의 세션을 통해 모두 열두 곡이 녹음되었다. 이 녹음들은 1950년대 중반에 이르러 ''''쿨의 탄생(The Birth of Cool)'''' 이라는 이름의 LP로 정리되어 발매되었고, 이내 밥의 뜨거움에 대응하는 음악이라는 관념으로 고정되었다. 이 앨범으로써 쿨 재즈의 개념이 최초로 정리된 것이다.
다만 노넷 내에서도 마일스의 뭔가 부족해 보이는 리더 역량이라든가 편곡 개런티 분배 문제 등으로 이런저런 논쟁이 빚어지기도 했고, 흑인 뮤지션들은 이 곡이 너무 말끔한 백인 취향의 사운드로 변질된 재즈만 보여준다고 대차게 까기도 했다. 하지만 마일스는 이에 개의치 않았고, 노넷의 주된 편곡자들이었던 에반스와 멀리건, 루이스 세 사람도 여기서 얻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나름대로의 쿨 재즈 어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쿨이 어떤 의미로 이해됐던 간에 마일스의 유명세도 계속 높아졌고, 1949년에는 태드 다메론의 쿼텟(4중주단)과 함께 생애 첫 해외 공연을 프랑스에서 갖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신인 시절부터 손대기 시작한 헤로인, 코카인을 비롯한 마약이 경력을 서서히 좀먹기 시작했고, 1950년 가을에는 빌리 엑스타인 밴드의 드러머였던 아트 블레이키와 마약을 하려다 걸려서 체포되는 지경에 이르렀다.[4][5] 비록 블레이키가 마약이 몽땅 자기 꺼라고 해서 마일스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내 여론은 마일스=약쟁이로 굳어져 버렸다.
실제로 이 때 마일스는 약기운에 헤롱대면서 상당히 기복이 심한 연주를 보여주고 있었고, 비평가들도 다시금 마일스의 약점을 이것저것 거론하면서 신나게 까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밥을 적극적으로 녹음하던 소규모 음반사인 프레스티지와 1951년에 계약을 맺기도 했고, 이 음반사에서 알토 색소포니스트였던 재키 매클레인과 함께 '탐구(Dig)' 라는 수작 LP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해 겨울 결국 아들의 마약 남용 소식을 듣고 빡친 아버지가 강제로 세인트루이스에 끌고 가면서 음악 활동도 잠시 중단되었다.
2.4. 하드밥과 퍼스트 퀸텟
세인트루이스에서 칩거하는 동안에도 마일스는 계속 마약을 구하러 몰래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이것도 마약을 하다가 덜미를 잡혔고 아버지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는 굴욕을 당하기까지 했다. 결국 마약 중독 치료를 받는다는 조건으로 가석방되기도 했지만, 그 이후에도 마일스는 이런저런 꼼수를 부리며 계속 마약을 했다.
하지만 마일스의 방탕한 행동은 가족들과의 관계를 벌어지게 만들었고 주변 뮤지션들의 무시와 조롱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심지어 델로니어스 몽크나 맥스 로치마저 자신을 까는 것을 알게 되자 열폭을 감출 수 없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서부에서 갑툭튀한 곱상한 백인 트럼페터인 쳇 베이커가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로 연주하면서 차세대 재즈맨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결국 마일스는 다시 세인트루이스로 돌아와 힘들게 헤로인을 끊었다. 하지만 코카인을 비롯한 다른 마약은 간헐적으로 하고 있었고, 브랜디나 보드카, 위스키 같은 독한 증류주로 주린 배를 채우는 등 막장 모드는 여전했다. 그럼에도 헤로인 끊은 효과가 있기는 있었는지, 1954년에 제이 제이 존슨과 럭키 톰슨, 호레이스 실버, 퍼시 히스, 케니 클라크 등 하드밥의 최상급 뮤지션들을 대동하고 프레스티지에서 내놓은 '푸른 아지랑이(Blue Haze)' 와 '워킹(Walkin')' 두 앨범이 좋은 평을 받으며 재기에 성공했다.
이 여세를 몰아 1954년 6월 말과 12월 말에도 밀트 잭슨과 소니 롤린스, 델로니어스 몽크, 퍼시 히스, 케니 클라크 등과 함께 '백스 그루브(Bag's Groove)' 와 '마일스 데이비스와 모던 재즈의 거장들(Miles Davis and Modern Jazz Giants)' 두 앨범에 들어가게 될 녹음들을 취입했다. 다만 세션 중에 'The Man I Love' 를 녹음할 때 몽크와 마일스의 스타일이 서로 충돌하며 미묘한 긴장 관계가 조성되기도 했다. 사생활 면에서도 분란이 끊이지 않았고, 10대 시절부터 동거하던 내연녀 아이린과 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위한 양육비 소송에 휘말려 체포되기도 했다.
1955년에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뒤에도 찰스 밍거스와 엘빈 존스 등을 대동하고 만든 '블루 무즈(Blue Moods)' 같은 수작 앨범을 내는 등 계속 활동을 이어갔지만, 당시 재즈씬에 대한 강한 비판이 담긴 글을 언론에 발표한 것이 어그로를 끌어 밍거스와 격한 논쟁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 해 봄에는 마일스의 재능에 주목한 메이저 음반사인 콜럼비아에서 스카웃 제의가 공식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마일스는 자신의 전속 밴드를 계속 거느려야 한다는 조건에 동의했다.
하지만 아직 프레스티지와 맺은 계약도 진행되고 있었고, 계약 해지를 위해서는 음반사 측에서 제시한 개수 만큼의 앨범을 더 내야 했다. 게다가 그가 거느리고 있던 퀸텟(5중주단)에서 테너 색소폰 주자였던 소니 롤린스가 탈퇴했고, 마일스는 프레스티지와 콜럼비아 양측의 계약 이행을 위해 새로운 색소포니스트를 찾아야 했다. 이 때 적절히 등장한 연주자가 존 콜트레인이었고, 마일스의 퀸텟은 재정비되어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비록 주변 사람들이 '왜 콜트레인 같은 햇병아리를 넣었나요?' 라고 빈정대기는 했지만, 마일스는 콜트레인이 코드(화음)나 템포, 리듬 등의 이론에 대단히 빠삭하고 뛰어난 연주 기교를 갖고 있는 것에 주목해 계속 새로운 것을 시도하라고 직간접적으로 자극하고 있었다. 피아니스트 레드 갈랜드와 베이시스트 폴 체임버스, 드러머 필리 조 존스는 하드밥 시대의 최고 리듬 섹션 멤버들이라는 칭송을 받을 만큼 저마다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
콜럼비아와 가진 첫 녹음 세션은 1955년 10월에 있었고, 1년 뒤인 1956년 6월과 9월의 세션에서 녹음된 곡들을 합쳐 '라운드 어바웃 미드나잇('Round About Midnight)' 이라는 LP로 발매되었다. 하지만 콜럼비아와 프레스티지 사이의 이중 계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레스티지에서 더 많은 녹음을 진행해야 했고, 1955년 11월 16일의 세션으로 제작된 '마일스(Miles)' 와 1956년 5월 5일, 10월 26일 이틀 동안의 세션으로 제작된 소위 'in 시리즈인 ''''스티밍(Steamin')'''', ''''릴랙싱(Relaxin')'''', ''''워킹(Workin')'''', ''''쿠킹(Cookin')'''' 까지 다섯 장의 앨범들이 순식간에 나왔다.
이들 중 'in 시리즈의 네 앨범은 하룻 동안 거의 열 곡에 이르는 엄청난 숫자의 곡을 녹음했다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유명한데, 당시 재즈 아티스트들이 한 세션당 녹음하는 곡이 평균 서너 곡 정도였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꽉꽉 채워서 녹음한 셈이었다.[6] 또 이 앨범들에는 녹음 전후 스튜디오에서 연주자나 제작진이 나눈 대화나 실수 장면들이 그대로 수록되어 클럽 공연 실황이나 리허설 장면 같은 현장감도 느낄 수 있다.[7]
곡목도 뮤트(약음기) 끼운 트럼펫의 울적한 솔로가 두드러지는 전형적인 발라드부터 길레스피나 몽크, 롤린스, 마일스 자신이 작곡한 신명나는 비밥/하드밥 스탠더드, 밴드 멤버들인 콜트레인과 갈랜드의 작품까지 광범위하게 아우르고 있고, 마일스가 전체적으로 음을 아끼는 긴축적인 연주를 보여준 반면 콜트레인은 매우 빠르고 열정적인 연주로 대비되는 효과를 보여주었다. 어쨌든 일반적인 평가는 '''닥치고 하드밥 최상의 명연들 중 하나'''.
하지만 이 퀸텟이 늘 순조롭게 굴러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마일스가 그럭저럭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 밴드에 강한 통제력을 발휘했지만, 오히려 콜트레인을 비롯한 나머지 멤버들이 모두 약쟁이가 되어 마일스를 자주 빡돌게 했다. 결국 1957년 4월에 콜트레인과 필리 조 존스가 해고되었고, 레드 갈랜드도 9월에 연주에 자주 빠졌다는 이유로 마찬가지로 해고되어 첫 퀸텟은 사실상 해체되었다.마일스 데이비스와 존 콜트레인의 일화 중 이런 일이 있다.
색소폰의 솔로 연주가 자꾸 길어지자 존 콜트레인은 '''"어떻게 멈추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마일스 데이비스는 이렇게 말했다.
'''"입에서 악기를 떼 봐, 병X아."'''
2.5. 길 에반스와의 공동 작업
새 전속사인 콜럼비아는 마일스를 하드밥 연주자 보다는 다른 방면의 연주자로 밀어보려고 했다. 특히 군터 슐러나 제이 제이 존슨 등을 중심으로 클래식과 재즈의 장점을 융합시키려고 하던 '서드 스트림' 계열의 음악에 경도시켜 보려고 했는데, 마일스도 이 제안을 받아들여 몇 곡의 서드 스트림 작품을 녹음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이내 마일스에게 지루함과 실망을 안겨주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려던 마일스에게 콜럼비아 사장이었던 조지 어배키언이 '쿨의 탄생' 시절 작업했던 길 에반스와 새로운 형태의 빅 밴드 앨범을 내보지 않겠냐고 제의했다. 마일스와 에반스가 이 제안에 동의해 1957년부터 1960년 사이에 ''''마일스 어헤드(Miles Ahead)'''',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 ''''스케치스 오브 스페인(Sketches of Spain)'''' 세 장의 앨범이 공동 작품으로 발매되었다.
'마일스 어헤드' 는 레오 들리브 같은 19세기 프랑스 작곡가들의 오페라 선율에서부터 기존의 스탠더드 넘버, 아마드 자말 등이 작곡한 비교적 새로운 곡까지 온갖 시대와 양식의 곡들을 뒤섞은 일종의 메들리 형태 앨범이었는데, 오히려 전체적인 분위기는 에반스의 편곡에 의해 통일된 형식으로 다듬어졌다. '포기와 베스' 는 거슈인 형제가 만든 동명 오페라의 베스트 넘버들을 중심으로 에반스가 작/편곡한 몇몇 대목이 끼워진 앨범이었고, '스케치스 오브 스페인' 은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스 협주곡 2악장과 파야의 발레 '사랑은 마술사' 의 도깨비불 노래, 세비야 지방의 독특한 가톨릭 민속 종교음악인 사에타(Saeta) 등이 에반스의 스페인풍 창작곡과 어우러진 앨범이었다.
이들 앨범은 표면적으로 빅 밴드에 솔로 트럼페터가 참가한 그저 그런 뻔한 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음악은 굉장히 독창적이면서도 안정된 사운드를 보여주며 콜럼비아에 대박을 안겨다 주었다. 에반스는 클로드 손힐이나 스탄 켄튼이 그랬던 것처럼 기존 빅 밴드에서는 잘 쓰이지 않던 플루트나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 튜바 같은 악기들을 추가 편입했고, '스케치스 오브 스페인' 에서는 라틴 타악기도 추가해 음악의 색채 변화를 다양하게 구사했다.
편곡에서도 원곡의 맛을 그대로 살리기 보다는, 새로운 코드를 도입하거나 아예 자신이 새로 작곡한 대목을 접합시키기도 하고 브리지(이행부)를 각 곡과 자연스레 연결시키는 등 탁월한 작편곡 실력을 보여주었다. 솔리스트 마일스는 트럼펫 외에도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코넷 계열의 금관악기인 플뤼겔호른을 연주하며 에반스의 편곡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 이 앨범들에서부터 적극적인 편집 작업이 도입되었는데, 수록곡 대부분은 여러 테이크를 거쳐 녹음되었고 그것도 그대로 실리는 것이 아니라 프로듀서나 엔지니어들과 함께 테이프를 잘라 붙이는 식으로 수 차례 편집을 가해 만들어진 마스터 테이프가 음반 제작에 사용되었다. (이 작업 방식은 훗날 전기 마일스 데이비스 시대에 가서 거의 창작 영역에까지 도달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2.6. 모달 재즈와 섹스텟
한편 파토난 퀸텟을 뒤로 한 채, 마일스는 1957년 가을부터 유럽 순회 공연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 중요했던 것은 공연 보다는 루이 말이라는 프랑스 영화감독이 제의한 영화음악 작업이었다. 말은 '사형대의 엘리베이터(Ascenseur pour l'échafaud)' 라는 영화의 촬영을 막 끝마친 상태였는데, 마일스로서는 첫 영화음악 작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말은 미리 철저하게 계획되어진 작곡과 연주 보다는 즉흥적인 연주로 얻어진 재즈 음악을 도입하고 싶어했고, 마일스는 편집된 영화 필름을 수 차례 보면서 작업 구상에 몰두했다. 결국 12월 4~5일에 르네 위르트르제 쿼텟과 함께 가진 녹음 세션에서 영화에 쓸 음악이 모두 녹음되었는데, 마일스는 여기서 코드 몇 개 혹은 아예 코드 없이 진행되는 상당히 단순하고 추상적인 형태의 음악을 도입하는가 하면 베이스나 드럼 만으로 긴장을 고조시키는 등의 실험을 행했다.
미국에 돌아온 뒤, 마일스는 이 때의 경험을 살려 새로운 그룹을 결성했다. 퀸텟에서 연주했던 콜트레인과 갈랜드, 체임버스, 필리 조 존스가 모두 복귀하고 새로이 알토 색소폰 주자로 캐논볼 애덜리가 영입되어 섹스텟(6중주단)이 탄생했다. 마일스는 이들에게 복잡하고 다양한 코드로 이루어지는 비밥 어법 대신 몇 개의 한정된 음계와 코드 만으로 연주하는 새로운 시도를 해볼 것을 요구했다. 음계도 기존의 장단조가 아닌, 그 이전의 체계였던 선법(mode)을 응용했다.
섹스텟의 첫 녹음은 1958년에 '''마일스톤즈(Milestones)''' 라는 타이틀로 발매되었는데, 아직 수록곡들은 기존의 하드밥이나 전통적인 블루스에 기반을 둔 곡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 중 한 곡인 타이틀곡 Milestones에서는 선법과 적은 코드에 입각한 연주가 선보여졌고, 평론가들은 이 곡에서부터 마일스가 본격적으로 모달 재즈를 시작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사실 모달 재즈의 실마리는 마일스가 혼자 제시한 것은 아니었고, 이미 빌 에반스와 길 에반스를 비롯한 뮤지션들이나 수완 좋은 편곡자이자 빠삭한 이론가였던 조지 러셀의 논문 등을 통해 제시되어 있었다. 클래식 교육을 받았던 빌 에반스는 드뷔시나 라벨 등 프랑스 근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통해 선법의 매력을 이미 체득하고 있었고, 러셀은 기존의 음계 위주 재즈가 아닌 몇 개의 음으로 제시할 수 있는 수많은 음계와 코드의 가능성을 중심으로 새로운 어법에 대한 가능성을 썰로 풀어놨다.
마일스톤즈 발표 후 섹스텟에서는 몇 차례의 인원 조정이 행해졌는데, 필리 조 존스와 갈랜드가 탈퇴한 뒤 지미 콥이 드러머로, 빌 에반스가 피아니스트로 새로 영입됐다. 특히 백인 피아니스트였던 에반스의 영입이 열띈 논쟁을 유발했는데, 마일스는 이미 '쿨의 탄생' 에서 흑백 혼합 밴드를 이끈 바 있었고 실력과 아이디어가 좋다면 어느 인종이든 상관 없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새로운 라인업의 섹스텟은 1958년의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 녹음을 섞은 '1958 마일스(1958 Miles)' 라는 음반으로 처음 시장에 선보여졌다.
실제로 에반스는 마일스에게 선법의 구체적인 의미를 가르쳐 주었고, 자신의 조용하면서도 감각적인 연주법을 통해 마일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결과물이 1959년의 ''''카인드 오브 블루(Kind of Blue)'''' 라는 앨범이었고, 여기서는 윈튼 켈리가 피아니스트로 참가한 정통 블루스 곡이었던 Freddie Freeloader를 제외한 모든 곡이 모달 재즈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첫 곡인 So What은 도리안(Dorian) 선법[8] 을 기반으로 작곡된 매우 절제된 테마를 통해 본격적인 모달 재즈의 유행을 알린 것으로 유명하다.
카인드 오브 블루는 상업적으로도 그 때까지 콜럼비아에서 나온 마일스의 앨범들 중 최고의 판매 실적을 올렸고, 동시에 수많은 논쟁과 모방자들을 낳았다. 심지어 그 특유의 단순성과 엄격함 때문에 테리 라일리나 스티브 라이히 등 소위 미니멀리즘 계통의 작곡가들도 사로잡았고, 재즈 뿐 아니라 당대 음악 전반에 영향을 끼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심지어 '''이 앨범 안갖고 있으면 재즈팬 아님 깝ㄴㄴ''' 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
길 에반스와 작업한 앨범들과 모달 재즈를 선보인 두 섹스텟 앨범으로 마일스는 재즈계의 본좌에 등극했지만, 이 때 마일스의 인생에서 가장 심한 논란을 불러 일으킨 폭력 사태에도 휘말렸다. 1959년 8월 말 뉴욕의 버드랜드 클럽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는데, 백인 경찰들과 시비가 붙어 구타당한 사건이었다. 법정에서는 피고 마일스와 원고 경찰 어느 쪽에서 어그로와 다굴이 시작되었느냐에 대해 격한 논쟁이 오갔다.
이 사건은 결국 마일스에게 무죄 판결이 내려지면서 종결됐지만, 당시 불거지고 있었던 미국 내 흑백 인종 문제의 공론화와 더불어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확산됐다. 하지만 마일스는 그냥 '백인 경찰들은 개색히'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고, 흑인의 의식을 깨우쳐줬네 뭐네 하는 말에도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2.7. 세컨드 퀸텟
구타 사건이 마무리되자 마일스는 활동을 재개했는데, 그 사이 콜트레인과 애덜리, 에반스는 자신의 밴드나 그룹 활동을 위해 탈퇴했고 나머지 멤버들도 대부분 뿔뿔이 흩어지면서 섹스텟도 자연스럽게 와해됐다. 마일스는 새 그룹을 만들기 위해 여러 연주자들을 찾아다녔는데, 특히 색소폰 주자의 영입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새로 영입된 색소포니스트들이었던 소니 스팃이나 행크 모블리, 조지 콜먼, 샘 리버스는 모두 오래 머물지 못했고, 전임자들이었던 콜트레인이나 애덜리와 달리 모달 재즈에 대한 이해력도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었다. 비록 모블리와는 '어느 날 내 왕자님이 온다면(Someday My Prince Will Come)' 을, 콜먼과는 '천국으로 가는 일곱 개의 계단(Seven Steps to Heaven)' 을 취입했지만, 어느 앨범도 마일스의 욕구를 온전히 반영하지는 못했다.
행크 모블리가 퀸텟의 색소폰 주자로 있었던 1961년 5월에는 처음으로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단독 공연을 개최했는데, 자신의 퀸텟 외에도 오랜만에 길 에반스가 조직하고 지휘한 재즈 오케스트라와 같이 협연하는 호화로운 공연이었다. 다만 마일스가 녹음 허락을 하지 않아서 프로듀서 테오 마세로가 카네기홀 조종실의 빈약한 장비로 몰래 녹음한 모노 음원만 남아 있고, 공연 도중 맥스 로치가 흑인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무대에 난입해 연주가 중단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하지만 1년 뒤 스탄 게츠 등이 몰고 온 보사노바 열풍에 편승해 조잡하게 만들어진 스튜디오 앨범 '고요한 밤(Quiet Nights)'[9] 에 비하면 훨씬 완성도 높은 수연이었고, 마일스와 에반스 콤비의 최후 걸작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두 콤비는 '고요한 밤' 이후에도 1968년까지 피터 반스의 연극 '꼬치고기의 시간(The Time of Barracudas)' 을 위한 음악이나 Falling Water 같은 곡들을 추가로 녹음했지만, 이들 녹음의 음반화는 마일스와 에반스의 스튜디오 녹음을 집대성한 CD 여섯 장 짜리 세트가 1996년에 발매될 때까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일스의 새로운 퀸텟은 1963년 4월과 5월 사이 리듬 섹션에 베이시스트 론 카터와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 드러머 토니 윌리엄스가 차례로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이듬해 여름에 색소포니스트로 웨인 쇼터가 영입되면서 새로운 퀸텟의 편성이 완료되었고, 1964년 9월에 서독의 서베를린 필하모니에서 열린 공연의 실황 앨범에서부터 이 퀸텟의 연주를 확인할 수 있다.
새 퀸텟은 1965년 1월에 녹음한 '''E.S.P.''' 를 시작으로 '''마일스 스마일즈(Miles Smiles)''', '''마법사(The Sorcerer)''', '''네퍼티티(Nefertiti)''', '''마일스 인 더 스카이(Miles in the Sky)''', '''킬리만자로의 여인들(Filles de Kilimanjaro)''' 까지 4년 동안 모두 여섯 장[10] 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는데, 수록곡들의 대부분은 모달 재즈에 기반하고 있었지만 종래의 마일스 음악과는 많이 달랐다. 음악을 떠받쳐주는 역할이 대부분이었던 리듬 섹션, 특히 베이스와 드럼의 역할이 멜로디 메이커로까지 증대되었다. 관악기들도 기존의 솔로나 코러스 연주 역할이 아닌 리듬 섹션의 역할을 도맡기도 했고, 라이브 무대에서는 서로 몇 마디씩 솔로를 한다고 미리 정해놓고 시작하는 경우도 없었다.
철저히 연주자들의 직관에 흐름을 맡기는 식의 음악이었는데, 오넷 콜먼 등의 프리 재즈만큼은 아니었지만 연주자들의 자율성과 창의성이 극대화된 형태의 음악이 창출되어 화제가 되었다. 마일스 뿐 아니라 모든 멤버들이 자작곡들을 앨범에 수록했고, 특히 쇼터의 곡은 기존의 대칭적인 구조나 규격화된 블루스 형식을 모두 타파한 혁신성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잘나가던 이 퀸텟을 꾸려나가면서도 마일스는 조금씩 변화를 주기 시작했는데, '마일스 인 더 스카이' 에서는 행콕과 카터에게 일렉트릭 피아노와 일렉트릭 베이스를 새로 연주하도록 했고 Paraphernalia라는 곡에서는 기타리스트 조지 벤슨이 일렉트릭 기타 세션으로 참가했다. '킬리만자로의 여인들' 에서도 행콕과 카터가 마찬가지로 전기악기들을 다루었고, Frelon Brun과 Mademoiselle Mabry 두 곡에서는 칙 코리아와 데이브 홀랜드가 각각 일렉트릭 피아노와 일렉트릭 베이스 주자로 새로 영입되어 연주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론 카터가 전기악기 연주하기 싫다고 탈퇴하는 등의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마일스는 전기악기와 음향에 대한 선호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이후 발매된 두 장의 앨범에서 극대화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2.8. 일렉트릭 마일스 데이비스
사실 새 퀸텟 활동 후반기에 마일스는 이미 기존의 어쿠스틱 연주 형태에 싫증을 내고 있었고, 오히려 당시 음반 차트를 휩쓸고 있던 제임스 브라운과 아레사 프랭클린 등 소울 가수들이나 지미 헨드릭스와 슬라이 스톤 같은 이들이 이끌던 록밴드의 음악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마일스는 길 에반스의 주선으로 헨드릭스 생전에 공동 앨범을 기획하기도 했지만, 마일스가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하는 바람에 무산된 적도 있었다.
재즈 계에서 전기악기의 중요성은 이미 예전부터 조금씩 강조되고 있었는데, 이미 1940년대에 찰리 크리스천이 일렉트릭 기타를 재즈에 도입했고 레이 찰스는 1950년대 후반 울리처 모델의 일렉트릭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재즈에서 전기악기의 비중은 어쿠스틱 악기에 비하면 그다지 크지는 않았다. 게다가 재즈를 누르고 젊은층의 광범위한 대중성을 획득한 록 음악은 바로 그 전기악기의 엄청난 음량 증폭과 이펙터 등을 사용한 광범위한 음색 조절 능력으로 수많은 음악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고 있었다.
마일스는 그 때까지도 유명한 재즈맨이기는 했지만, 재즈 씬 밖으로 나가면 '아저씨 누구심?' 이라고 묻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고립감을 느끼기도 했다. 마일스는 전기악기와 장비들의 새로운 음색과 다양한 기능들을 적극 활용해 록의 대중성을 자신의 음악에 도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록을 하고 있다는 인식은 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새로운 음악을 '재즈 록' 이라고 분류하던 평론가들에게 "내 음악이 흰둥이 따위가 하는 그런 건 줄 아냐?" 라며 상당히 언짢아했을 정도였다.
'킬리만자로의 여인들' 을 녹음한 1년 뒤인 1969년 2월 18일에 예전의 퀸텟 체제를 유지한 채 여러 전기악기 주자들을 대동한 특이한 세션이 행해졌는데, 킬리만자로에서 이미 연주한 바 있었던 코리아와 홀랜드 외에 조 자비눌과 존 맥러플린이 각각 일렉트릭 오르간과 일렉트릭 기타 연주자로 참가한 옥텟(8중주단) 편성이었다. 하지만 이번 세션은 자비눌이 가져온 자작곡인 In a Silent Way를 빼면 뭔가 기존 작곡의 개념에서 틀도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고, 새로 영입된 두 연주자들도 마일스가 뭘 하려는지 별로 말이 없어서 꽤나 당혹스러웠다고 한다.
게다가 이 날 녹음된 분량은 겨우 18분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음반 하나를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물론 이틀 뒤인 2월 20일에도 같은 멤버들을 대동하고 'The Ghetto Walk' 와 'Early Minor' 두 곡을 더 녹음했지만, 정작 새 앨범인 ''''인 어 사일런트 웨이(In a Silent Way)'''' 에 사용된 녹음들은 2월 18일 세션에서 만들어진 것들 뿐이었다.[11] 턱없이 짧은 분량의 녹음을 음반 한 장 분량으로 늘려 편집한 인물은 프로듀서였던 테오 마세로였는데, 이미 마일스와 길 에반스의 공동 작업에서 몇 차례 해본 바 있던 작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보수적이었던 재즈팬이나 평론가, 뮤지션들 뿐 아니라 나름대로 최첨단을 달리고 있다고 생각한 이들에게도 이 앨범은 꽤나 당혹스러운 물건이었다. 너무 똑같은 부분만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엽적인 지적에서부터 '마일스가 흑인의 재즈를 버리고 백인의 록에 아첨하고 있다' 는 식의 비난까지 다양한 디스가 이어졌지만, 마일스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사실 똑같은 부분이 반복된다는 지적이야 원체 녹음된 분량이 적은 것을 마세로가 애써 늘린 탓에 나왔다고 쳐도, 가공할 만한 보컬이나 미칠듯한 드럼 비트, 기타의 강렬함 같은 것도 찾아볼 수 없는 18~19분 짜리 통짜 연주곡들을 대뜸 록이라고 규정짓는 것도 꽤나 억지였다.
아무튼 이 앨범은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음향과 고요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조심스럽게 제작되었음에도 마일스 데이비스가 전기악기와 음향을 구사하는 연주로 확실히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물건이 되었고, 1969년 8월 19~21일 3일 동안 녹음된 후속작인 더블 앨범 ''''비치스 브루(Bitches Brew)'''' 에서는 그 발상을 더욱 추상적이고 전위적으로 밀어붙여 수많은 이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했다. 이전 앨범에서 연주한 맥러플린과 코리아, 자비눌 외에 잭 드조넷과 레니 화이트, 하비 브룩스, 베니 모핀 등 다른 연주자들을 추가해 13명이라는 대규모 그룹으로 녹음했고, 마일스는 트럼펫에 마이크를 연결하고 에코나 딜레이 이펙터를 사용해 다른 전기악기들처럼 음량과 음색의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이 앨범에서도 마일스는 자신의 의도나 음악의 방향성 등에 대해 별 코멘트를 하지 않았고, 녹음 상황에 맞춰 간혹 간략한 지시를 내렸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미리 준비된 작곡이라는 개념은 굉장히 희박해졌고, 연주자 개개인의 직관이 합쳐 빚어낸 집단 창작물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거기에 '인 어 사일런트 웨이' 에서처럼 테오 마세로의 주관이 들어간 편집까지 더해졌고, John McLaughlin을 제외한 대부분의 곡이 10분 이상의 대곡으로 다듬어졌다. 심지어 타이틀 곡인 Bitches Brew는 27분이나 걸리는, 단일 재즈 작품으로는 굉장히 방대한 규모가 되었다.
비치스 브루는 발매된 직후 미친듯이 팔려나가면서 동시에 인 어 사일런트 웨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한 논쟁 떡밥을 풀어놨고, 심지어 보수적인 재즈 팬들은 환불 소동까지 빚기도 했다. 그 때까지 마일스를 실드쳐주던 평론가나 뮤지션들까지도 마일스와 테오 마세로에게 이해할 수 없다거나 돌았냐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미리 작곡되어진 음악이라는 개념에 대한 도전이나 스튜디오 녹음의 최대 강점인 편집을 창작 영역에까지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것은 확실히 어느 누구보다 앞선 발상이었고, 훗날 앰비언트나 사이키델릭 같은 장르의 뮤지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이 앨범 이후 그 동안 세컨드 퀸텟 멤버로 마지막까지 쭉 자리를 지켜오던 웨인 쇼터가 조 자비눌과 함께 웨더 리포트를 결성하기 위해 탈퇴하면서 마지막 퀸텟의 맥도 같이 끊기고 말았다. 마일스는 잔뜩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키스 재릿이나 스티브 그로스먼, 개리 바츠, 데이브 리브먼, 마이클 헨더슨, 빌리 콥햄, 피트 코지 등 새로운 연주자들을 재빨리 섭외해 계속 이런저런 그룹을 이끌면서 일렉트릭 시대를 계속 이어갔다. 1970년에는 전설적인 흑인 권투 선수 잭 존슨에게 바치는 헌정 앨범인 ''''A Tribute to Jack Johnson'''' 을 발매했고, 그 직전인 2월부터 4월까지의 공연들도 라이브로 녹음되어 훗날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1972년에는 칼하인츠 슈톡하우젠을 비롯한 유럽 아방가르드의 최전선에 있던 작곡가들이 내놓은 공간 지향적 음악에서 영향을 받아 ''''온 더 코너(On the Corner)'''' 라는 음반을 발표했는데, 기존의 전기악기 외에도 인도의 전통악기들인 시타르와 타블라를 추가해 당시 유행하던 아시아 음악의 영향도 포괄했다. 하지만 이 앨범은 전작들과 달리 영 좋지 않은 판매량을 기록했고, 마일스는 빡쳐서 음반사가 마케팅을 잘못 했느니 뭐니 하면서 노발대발했다. 마일스 입장에서는 꽤 억울했겠지만 [12] , 당시에는 이미 마일스보다도 좀 더 록 지향적이고 대중 친화적인 방향으로 향하던 웨더 리포트나 리턴 투 포에버, 마하비쉬누 오케스트라 등의 퓨전 그룹이 더 인기를 끌고 있었고, 마일스는 허비 행콕이나 칙 코리아, 조 자비눌, 존 맥러플린 등이 자기 아이디어를 훔쳐갔다고 실컷 열폭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별 소용은 없었고, 마일스 자신도 마약과 술의 과용으로 인해 육체와 정신 모두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다. On the Corner 앨범 발매 열흘 뒤 마일스는 고속도로 출구에서 시속 100km로 우회전을 하다가 본인의 람보르기니 미우라를 전복시킨다. 발견 당시 두 다리가 모두 부러져 바지를 뚫고 뼈가 튀어나오고, 코카인 봉지가 터져 피와 코카인으로 범벅이 되어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마일스 본인은 '그 교통 사고 이후로 모든 것이 흐려지기 시작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콜럼비아에서도 앨범으로 발매된 것 외에 수많은 스튜디오 녹음이나 라이브 녹음을 채산성 문제로 음반화하지 않았고, 마일스도 1975년 일본에서 열린 투어와 귀국 후 진행한 몇 차례의 공연을 끝으로 사실상 은퇴 상태에 들어갔다. 오사카 공연 실황을 담은 '아가르타(Agartha)' 와 '판게아(Pangaea)' 두 라이브 앨범 외에는 후속 앨범도 사실상 없었고, 다급해진 콜럼비아는 그 동안 풀지 않았던 미공개 녹음들을 부랴부랴 컴필레이션 앨범으로 묶어서 발매해야 했다.
1976년 봄부터 1979년 여름까지 마일스는 3년 약간 넘는 시간 동안 그야말로 방구석폐인이 돼서 술과 마약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캐막장 상태로 지냈다. 간혹 찾아오는 지인들도 만나려 하지 않았고, 억지로 마련된 극소수의 세션에서도 무기력한 모습만을 보여주며 재기할 기미도 없던 상태였다.
2.9. 활동 재개와 말년
1979년 7월 쯤부터 콜럼비아 부사장이었던 조지 버틀러가 몇 달이고 계속 마일스를 찾아가 활동 재개를 간청했는데, 마일스는 자기 몸 추스르기도 힘든 상태였다. 하지만 버틀러의 근성에 결국 마음을 움직여서 1980년 봄에 새로운 녹음 세션을 갖기로 했다. 예전처럼 빌 에반스[13] 나 로버트 어빙 3세를 비롯한 젊은 음악인들을 영입하고 녹음을 시도했지만, 몇 년이나 손놨던 트럼펫도 제대로 불지 못할 정도로 아직 컴백 준비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여차저차해서 컴백 앨범 '혼을 든 남자(The Man with a Horn)' 가 1981년 출시되었는데, 예전처럼 앨범 전체를 관통하던 강한 직관이고 집중력이고 제대로 발휘되지 못한 범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그쳤다. 1981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미국과 일본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 때의 실황 녹음들로 제작된 '우리는 마일스를 원한다(We Want Miles)' 와 '마일스! 마일스! 마일스!(Miles! Miles! Miles!)' 두 라이브 앨범도 나왔다.
비록 그 동안의 공백으로 인한 연주력 저하와 노쇠함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예전처럼 관객들을 쌩까고 고개를 푹 숙이거나 아예 등을 돌리고 연주하던 슈게이징 스타일의 무대 매너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관객들과 농담도 주고받거나 직접 밴드를 소개하는 등 훨씬 청중 친화적인 뮤지션으로 변모했고, 음악도 예전처럼 자기 중심적이고 불안해 보이는 추상성보다는 소위 '퓨전' 이나 펑크(Funk)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간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때부터 당뇨병과 뇌졸중을 비롯한 만성 질환에 시달리기 시작했다.[14] 그래서 재활 훈련과 치료를 위해 한의학이나 미술에 매달리기도 했다. 뇌졸중에서 회복된 뒤에는 해마다 '스타 피플(Star People)' 과 '디코이(Decoy)', '너를 체포하겠어(You're Under Arrest)' 같은 앨범들을 발표했다. 비록 이 앨범들도 예전의 것들 만큼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지 못했지만, 재즈의 거장이 건재함을 알리기에는 충분했다. 1984년에는 주로 클래식 거장들만 받아온 덴마크의 대표적 음악상인 레오니 소닝 음악상을 재즈 뮤지션으로서는 처음으로 받게 되었고, 이 시상식을 위해 재즈 트럼페터 겸 작곡가 팔레 미켈보르그가 작곡한 대규모 모음곡 '오라(Aura)' 를 준비했다.
'오라' 는 이듬해 초반에 콜럼비아에 의해 녹음되었고, 이것이 마일스가 콜럼비아와 작업한 마지막 앨범이 되었다. 비록 콜럼비아는 마일스의 상업적 가치를 아직 인정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뉴 트래디셔널 재즈를 표방하던 젊은 재즈맨들을 전속 아티스트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 중 마일스가 재즈를 버리고 팝의 상업성에 눈이 멀었다고 끊임없이 디스를 걸어오던 같은 음반사 소속 신진 뮤지션인 트럼페터 윈튼 마샬리스가 마일스의 신경을 굉장히 거슬렀다.
물론 마일스는 안좋은 건강 상태 속에서도 계속 연주 활동을 이어갔지만, 동시에 마이클 잭슨이나 티나 터너, 신디 로퍼 등 팝 가수들의 앨범에서 게스트로 연주하는 등 정통주의를 표방하는 재즈 뮤지션들에게는 이러저러하게 찍힐 만한 활동도 병행했다. 그리고 과외 일로 배우나 화가, 패션모델 활동까지 하는 등 재즈에서 점차 멀어지려 하는 듯한 행보 때문에 자신의 안티들로 하여금 신나게 깔 거리를 제공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결국 마일스는 콜럼비아와 맺은 계약을 해지함과 동시에 워너브라더스와 새로운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마일스는 일렉트릭 베이스를 비롯한 여러 악기의 연주와 편곡,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 다재다능한 재주를 갖고 있던 후배 마커스 밀러와 손을 잡고 '투투(Tutu)', '뮤직 프롬 시에스타(Music from Siesta)', '아만들라(Amandla)' 등의 앨범을 계속 발표했다. 이들 앨범에서 마일스는 뉴 트래디셔널 진영에서 계속 까고 있던 펑크 성향을 아랑곳 없이 계속 밀고 나갔고, '뮤직 프롬 시에스타' 에서는 1960년대 길 에반스와 만든 '스케치스 오브 스페인'의 아이디어를 현대적인 발상으로 재탄생시켰다.
팝 음악인들과의 협연이나 게스트 출연도 계속되었고, 영화 출연과 OST 제작도 병행해 '딩고(Dingo)' 와 '더 핫 스팟(The Hot Spot)' 두 사운드트랙 앨범도 1990년에 발매되었다. 하지만 이미 마일스의 연주 인생은 끝나가는 분위기였고, 자신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1991년 여름에 계속 새로운 것을 추구하던 지금까지의 행보와는 전혀 다른 과거 회귀성 무대를 준비했다. 그 해 7월에 스위스의 몽트뢰에서 열린 재즈 페스티벌에서 퀸시 존스가 지휘하는 대규모 빅 밴드를 대동하고 '쿨의 탄생' 에서부터 '스케치스 오브 스페인'까지 자신과 길 에반스가 공동 작업한 곡들을 리바이벌했다.
이어 파리에서는 그 동안 자신과 연주했던 여러 뮤지션들을 한 자리에 모아 195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마일스의 대표 레퍼토리들을 연주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두 공연 중 몽트뢰 실황은 'Miles & Quincy Live at Montreux'이라는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하지만 귀국 후 당시 막 대중음악계의 주류를 휩쓸고 있던 힙합과 재즈의 결합이라는 실험 정신을 다시 한 번 발휘했고, 이지 모 비를 비롯한 힙합 가수/DJ들과 공동 작업한 힙합 앨범 '두밥(Doo-Bop)' 을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으로 남겼다.
앨범 작업 후 8월 25일에 수척한 몸을 이끌고 로스앤젤레스의 할리우드 보울에서 웨인 쇼터가 지켜보는 가운데 공연을 가졌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건강 악화로 입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뇌졸중과 폐렴이 재발하는 등 악재가 겹쳐 거의 한 달 동안 혼수 상태에 빠진 끝에 9월 28일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10월 5일 뉴욕에서 진행되었고, 마일스의 가족, 친구, 지인 500명이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했으며 유해는 브롱스의 우드론 묘지에 안장됐다.
3. 음반 목록
커리어로써 중요한 음반만 기재한다. 괄호안은 발매일로 녹음된 날짜와 다를 수 있다.
- Birth of the Cool (1957) : '쿨의 탄생'이라고 알려진 음반. 이름처럼 쿨 재즈의 탄생을 알린 작품이다. 1949년부터 50년까지 녹음된 곡들의 컴필레이션 음반이다.
- Cookin' with the Miles Davis Quintet (1957) : 레이블 프레스티지와의 계약조건으로 인해 녹음된 in'4부작의 첫번째 앨범이다. 녹음은 56년.
- 'Round About Midnight (1957) : 마일스 데이비스식 하드밥이 제대로 구현된 작품.
- Relaxin' with the Miles Davis Quintet (1958) : 4부작의 두번째 앨범. 녹음은 56년.
- Kind of Blue (1959) : 모달재즈의 정수이자 재즈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 자세한것은 항목 참조.
- Workin' with the Miles Davis Quintet (1959) : 4부작의 세번째 앨범. 녹음은 56년.
- Sketches of Spain (1960) : 재즈와 클래식의 결합이 시도된 앨범으로 명반으로 회자되는 작품 중 하나.
- Steamin' with the Miles Davis Quintet (1961) : 4부작의 네번째 앨범. 녹음은 56년.
- In a Silent Way (1969) : 일렉트릭 마일스 데이비스의 시작을 알린 작품. 앰비언트적 성향이 강한 앨범이다.
- Bitches Brew (1970) : 본격적으로 다양한 전자 악기가 도입된 작품. 파격적인 음악으로 호불호가 갈리지만 역시나 명반으로 꼽힌다.
- On the Corner (1972) : 훵크와 아프리카 음악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앨범이다.
- You're Under Arrest (1985) : 거의 팝에 가까운 앨범이다. 마이클 잭슨을 커버한 곡으로도 유명하다.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앨범.
- Doo-bop (1992) : 재즈힙합을 시도한 앨범. 당시에는 크게 까였으나 훗날 힙합이 크게 성장하면서 괜찮은 앨범으로 여겨지고 있다.
4. 수상 경력
- 재즈 잡지 '다운비트' 독자 선정 최고의 트럼페터 (1955, 1957, 1961)
- 그래미상 연주 시간 5분 이상의 재즈 작품 부문 (1960 Sketches of Spain 앨범)
- 그래미상 대규모 그룹 혹은 독주자를 동반한 대규모 그룹 연주 부문 (1970 Bitches Brew 앨범)
- 그래미상 재즈 기악 연주 독주 부문 (1982 We Want Miles 앨범, 1986 Tutu 앨범, 1989 Aura 앨범)
- 그래미상 재즈 기악 연주 빅밴드 부문 (1989 Aura 앨범)
- 그래미상 평생 공로 부문 (1990)
- 그래미상 리듬앤블루스 기악 연주 부문 (1992 Doo-Bop 앨범)
- 그래미상 대규모 재즈 앙상블 연주 부문 (1993 Miles & Quincy Live at Montreux 앨범)
- 덴마크 레오니 소닝 음악상 (1984)
- 뉴잉글랜드 음악원 명예 음악 박사 학위 (1986)
- 세인트루이스 명예의 거리 헌액 (1990)
- 오스트레일리아 영화 연구소상 오리지널 뮤직 스코어 부문 (영화 'Dingo'. 미셸 르그랑과 공동 수상. 1991)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5급) (1991)
-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헌액 (1998)
- 할리우드 록워크 헌액 (2006)
-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2006)
- 미국 음반산업협회(RIAA) 4중 플래티넘 (2008 Kind of Blue 앨범)
5. 작품 목록
- 스크루지 (1988) - 거리 음악가 역
6. 성격 및 인간관계
생애 동안 이룬 엄청난 업적과 비교할 때, 그의 성격이나 인간관계는 꽤 나쁜 것으로 알려졌다. 사이 나쁜 사례로 치자면 우선 델로니어스 몽크와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이 둘 사이가 어느 정도였냐면 1954년 발매된 '마일스 데이비스와 모던 재즈의 거장들(Miles Davis and Modern Jazz Giants)' 이라는 앨범의 수록곡 중 'The Man I love (take 2)'란 곡에서 후반부 연주 도중 몽크가 고의적으로 마일스의 연주를 망칠 심산으로 피아노를 갑자기 멈추는 부분이 있을 정도.[15] 후에 자서전을 통해 마일스가 그것은 알려진 것과 다르다는 얘기를 한 적도 있지만, 이 둘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것은 정설인 듯.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둘의 사이가 나빴던 것은 사실이지만, The Man I love의 에피소드에서는 몽크가 그냥 그렇게 연주한 거라는 말도 있다. 몽크의 스타일이 워낙 기괴하고 예측불능이라 그게 망치려고 그랬는지 연주의 일부분이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게 흠좀무. 그런데 실제로 연주를 들어보면 '''이 부분이 굉장히 간지가 난다'''.
여하튼, 마일스는 여러 매체에서 몽크의 음악성을 인정했고, 실제로 자신의 선배인 몽크의 칭찬을 받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 둘 사이를 츤데레라 하는 사람도 많긴 하다.
또한 무슨 이유에서인지 스티비 원더도 자주 깠다. 성격이 온화했던 원더는 마일스가 자신을 비난하자 맞서 싸우지는 않고 TV에 나와서 많이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직속 선배인 루이 암스트롱도 자주 깠다. 그를 광대라고 깠다고 아는 사람도 있지만 정확하게는 음악가로서의 루이 암스트롱은 존경하지만, "백인들 앞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고 광대처럼 웃는 것"은 싫다고 깠다.
다만 이는 재즈의 역사와 시대상에 비추어 보면 지나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암스트롱 시절에 재즈는 음악 자체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었고, 주로 나이트클럽 등지에서 공연되는 쇼의 일종으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먹고 살기 위해 음악만 연주한 것이 아니라, 연주 막간에 만담이나 장기자랑 같은 것들을 통해 사람들을 웃겨 인기를 끌었던 것. (사실 요즘도 나이트에서 이렇게 먹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암스트롱은 위대한 연주자였지만, 성격 자체가 밝고 명랑한데다 예전 버릇이 많이 남아 연주 중간에 개그를 한다거나 농담을 많이 했는데, 마일스가 이런 부분을 깐 것이다.
또한 흑인이지만 당대 미국의 기준으로도 중산층 이상이었던 집에서 태어나 무려 줄리어드에서 음악 교육을 받았던 마일스 데이비스와는 달리, 루이 암스트롱은 어릴 적 뒷골목을 전전하며 야매로 트럼펫을 배우고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약간의 사례를 받고 음악을 연주해주던 마칭 밴드(Marching Band)에서 연주자 경력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는 것이 음악가의 역할이라고 여겼을 가능성도 높다.
우연의 일치지만 루이 암스트롱보다 확실히 한 세대, 마일스보다도 반 세대 쯤 뒤의 각각 알토, 테너 색소폰의 거장으로 군림했던 캐논볼 애덜리와 존 콜트레인 간의 관계에도 비슷한 다이나믹이 있었는데, 당장 성장 과정부터 캐논볼은 그 당시엔 흑인 사회에서 독보적으로 엘리트라 할만한 대학 교수 집안에서 나고 자라 학벌도 좋았고, 가진 사람의 여유와 친화력을 바탕으로 다른 재즈 뮤지션과 달리 마약도 안 했고 밝은 분위기에 명랑한 무대 매너로 라이브 공연에서 군림한 반면, 콜트레인은 마일스와 유사하게 엔터테이너보다 음악의 첨단, 혁신을 추구하는 선구자의 길을 걸었다.
악기를 다루는 능력 자체로는 찰리 파커 이후 최고의 알토 색소포니스트라 평가 받은 캐논볼 애덜리지만, 본인의 음악적 성향, 철학도 암스트롱과 비슷하게 대중을 즐겁게 하는 엔터테이너에 가까웠기에 더 이상 라이브 공연을 볼 수 없는 현대 와서 재즈 역사에 남긴 지평이란 측면에선 데이비스, 콜트레인, 빌 에반스 같은 카인드 오브 블루의 세션 멤버들에 비해 훨씬 평가가 박한 편이다.[16]
종합해 보면 원래 마일스 데이비스는 음악적인 재능을 떠나 인간 자체로만 보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성격도 꽤 오만하고 바람둥이였으며, 항상 마약에 쩔어 살았기 때문에 디스코그래피에서 몇 년씩 공백기간이 보이면 십중팔구 마약에 쪄들어서 트럼펫을 잡지도 않고 방탕하게 지냈던 시기이다.
그러면서도 그 괴팍한 성격을 나타내듯, 남이 마약하는 것은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 증거로 자신의 1기 퀸텟에서 존 콜트레인이 쫓겨난 표면적인 이유는 마약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고, 본인 자서전에선 자기도 약쟁이인 주제에 다른 약쟁이 동료들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 가득하다.[17]
그런데 사실 약물 중독자들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탓에, 친구와 치고 받고 싸웠다가 → 울면서 화해하고 → 또 싸우는 패턴을 아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옆동네 락이나 메탈, 힙합씬에서도 허구헌 날 지지고 볶고 화해하고, 급기야는 밴드를 해체해 버리지 않는가! 재즈씬에서도 똑같은 짓이 벌어졌던 것이다.
아니, 애초에 20세기 초중반 극심한 인종차별 아래 미국에서 음악 하나만으로 사회에 큰 족적을 남기며 동시에 마약천지, 난잡한 성 문화 같은 현대 대중음악계 일탈과 비행의 문화를 만들어 낸 이들이 힙합, 록 음악가들보다 앞서서 대중 음악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재즈 음악가들이었다.
소위 이 20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재즈 거인들의 세대의 마지막 생존자라 할 만한 소니 롤린스의 인터뷰나 회고록 같은 걸 보면 "(흑인 음악의 대선배로서) 젊은 힙합, 래퍼들의 문화적 퇴폐성, 일탈에 대해 어찌 생각하냐"라는 질문을 듣고 가소롭다는듯 코웃음 치는 듯한 내용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7. 에피소드
- 1959년 뉴욕에서 클럽 연주 후 바깥에 잠시 쉬기 위해 나간 사이, 인종과 관련해 백인 경관과 시비가 붙어[18] 머리를 얻어맞아 머리가 깨진 적이 있다. 당시 기사 이 때문에 이 사건 이후 백인 관객들에게 등을 돌리고 연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자 이것도 또 다른 인종차별이 아니냐며 많은 팬들이 항의하기도 했는데, 재즈 피아니스트 케니 드류는 "마일스는 일종의 지휘자임. 연주할때 뒤돌아 보는 것도 그런 거임"이라는 꽤나 억지스런 변명을 대신 해주기도. 사실 마일스 데이비스는 머리가 깨지기 전부터 공연 매너가 안 좋기로 유명했다. 곡이 끝나고 관객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면 무시하고 다른 곡을 연주하거나, 신청곡(특히 초창기의 발라드 곡들) 요청이 있으면 대놓고 씹거나, 기분 나쁜 얼굴로 자기 구두짝만 쳐다보며 연주하거나 등등... 한 마디로 슈게이징. 본인이 워낙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강했던 탓에 수준 떨어지는 관객님들 따위하고 소통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허나 이 양반이 이런 개떡 같은 무대 매너로 시종일관 자기 연주만 챙겨대는 짓을 해도, 공연장은 매번 만석이었다.
- 여자 관계가 굉장히 복잡하기로도 유명했다. 정식 결혼은 못했지만 사실혼 관계였던 아이린 커손부터 시작해서 첫 번째 부인이 된 무용가 프랜시스 테일러, 두 번째 부인이 된 펑크 가수 베티 마브리, 세 번째 부인이 된 배우 시슬리 타이슨, 그 후 동거녀로 죽기 직전까지 지낸 조 겔바드 등이 그의 매력과 카리스마에 이끌렸지만, 음악 활동 때처럼 이내 싫증이 나면 여자도 갈아치운다는 식의 생활 방식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 피눈물을 흘리며 이혼 혹은 결별했다.
그나마 마일스가 죽어갈 때까지 간병을 하며 곁에 머물었던 겔바드 정도가 그럭저럭 관계가 괜찮은 편이었지만, 겔바드도 마일스가 가끔 빡치면 자신을 두들겨 팼다고 회고할 만큼 나쁜남자 기질이 다분했던 모양이다. 어느 여자든 간에 자신이 애정이 있으면 직접 요리도 해주고 장도 봐줄 정도로 극진했지만, 애정이 식으면 그야말로 꿔다놓은 보릿자루 혹은 그 이하로 취급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마일스의 자서전이 나왔을 때 페미니즘 인사들이 엄청나게 깐 것도 대부분 이 여자 관계 때문이었다. 여자 관계뿐만 아니라 가족들과의 관계도 무척이나 나빳다.
어쨌든 마일스의 음악과 사생활에서 여성이라는 존재는 늘 필요했고, 부인이 된 세 여성들은 모두 적어도 한 번씩은 마일스의 음반 커버에 사진으로 모습을 드러냈다.[19] 아이린과 지내던 풋풋한 뉴비 시절 때는 그녀와 가끔 여유가 생기면 크림 소다나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바의 이름을 딴 Sippin' at Bells라는 곡을 작곡했고, 이 곡은 지금도 재즈 스탠더드 넘버로 리얼북에 올라와 있다. 이외에도 Fran-Dance와 Mademoiselle Mabry 역시 각각 프랜시스, 베티와 사귀고 있었거나 결혼했을 때 만들어진 곡들이다.
어쨌든 마일스의 음악과 사생활에서 여성이라는 존재는 늘 필요했고, 부인이 된 세 여성들은 모두 적어도 한 번씩은 마일스의 음반 커버에 사진으로 모습을 드러냈다.[19] 아이린과 지내던 풋풋한 뉴비 시절 때는 그녀와 가끔 여유가 생기면 크림 소다나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바의 이름을 딴 Sippin' at Bells라는 곡을 작곡했고, 이 곡은 지금도 재즈 스탠더드 넘버로 리얼북에 올라와 있다. 이외에도 Fran-Dance와 Mademoiselle Mabry 역시 각각 프랜시스, 베티와 사귀고 있었거나 결혼했을 때 만들어진 곡들이다.
- 체력 단련을 위해 권투를 대단히 즐겼고, 덕분에 다른 트럼페터들보다 체격이 튼튼하고 군살이 거의 없는 멋진 몸을 가질 수 있었다. 잭 존슨에게 앨범을 헌정한 것도 스스로 권투 덕후임을 인정한 셈. 하지만 이런 장점은 약쟁이가 되었을 때는 별로 득이 되지 못했다. 특히 욱하는 성격 때문에 그 권투 실력으로 부부싸움을 비롯한 주먹다짐을 일으켜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거나 황색언론의 먹잇감이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쨌든 마일스는 자기 아들들에게도 권투를 배울 것을 적극 권장했고, 아들 중 한 명은 이후 미군에 입대해 주독미군에서 군 생활을 할 때도 군 체육대회에 권투 선수로 참가해 우승하기도 했다.
- 그와 같이 음악을 했던 연주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멤버보다는 항의하면서 좀 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는 멤버들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캐쩔어서 남이 하는 충고나 얘기는 잘 안들었다.
- 그는 여러 실험적인 음악 장르를 많이 시도했지만 유독 전위적인 프리 재즈만큼은 인정하지 않았다. 본인 자서전에서 말하기를 '오넷 콜맨 등 프리 재즈 연주자들이 자기 전공 악기가 아니라 아무 악기나 막 연주하는 건 선배들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프리 재즈를 싫어한다'고 밝혔다. 이유가 좀 설득력이 없다(...).
- '누구누구와 사이가 안 좋더라' 라는 식의 카더라소문이 많다. 위에서 언급된 델로니어스 몽크와의 떡밥이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과거 드러머인 맥스 로치와도 여자 문제로 대판 싸운 적이 있었다고도 한다. 소문 외에도 아예 공인된 설전까지 벌였던 찰스 밍거스 같은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동료들에게도 그다지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그 다음 가는 떡밥으로는 퍼스트 퀸텟과 섹스텟의 멤버였던 존 콜트레인과의 관계인데, 원체 콜트레인 자체가 마일스에 버금가는 위대한 음악가였던 탓에 팬들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땠을지에 대해 많이 궁금해하는 편이다. 그런데 오만함 그 자체였던 마일스와 달리 콜트레인은 무척 겸손했고 Only 음악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대체적으로 양호한 편으로 전해진다.
콜트레인 외에도 마일스가 거의 안 깠던 동료 음악인으로 웨인 쇼터가 있으며, 마일스의 생애 마지막 공연이 된 할리우드 보울 콘서트에서도 특별히 Happy Birthday to You를 인용한 솔로 연주를 관객으로 듣고 있던 쇼터에게 선사하기도 했다(그 날이 마침 쇼터의 생일이었다).
콜트레인 외에도 마일스가 거의 안 깠던 동료 음악인으로 웨인 쇼터가 있으며, 마일스의 생애 마지막 공연이 된 할리우드 보울 콘서트에서도 특별히 Happy Birthday to You를 인용한 솔로 연주를 관객으로 듣고 있던 쇼터에게 선사하기도 했다(그 날이 마침 쇼터의 생일이었다).
- 목소리가 매우 걸걸하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이런 목소리는 아니였다# 본인 자서전에 따르면 1955년 성대 폴립 수술을 받고나서 가능한 목소리를 높이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음반제작진과 계속 소리높여 언쟁을 하다가 평생을 그러한 목소리를 가지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8. 영향력
우선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한다면, 재즈라는 음악 장르에서 비밥→하드밥→쿨→퓨전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개척을 이룩해 그 폭을 엄청나게 넓혀놓은 데 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그 혼자서 이룩한 것은 아니고, 이 과정에서 그가 픽업한 재즈 뮤지션들의 협력이 무척 중요했다. 그러나 그들의 진가를 알아보고 자기 밑으로 불러들인 마일스의 안목도 보통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을 좀 한다 싶으면, 상대방이 어떠한 인종이든 경력이든 상관치 않고 자기 밑으로 데려올 정도로 인재 욕심이 있었던 듯.
실제로 그렇게 끌어모아 그와 함께한 존 콜트레인, 빌 에반스, 허비 행콕, 웨인 쇼터, 토니 윌리엄스, 존 맥러플린, 데이브 홀랜드 등등은 그 후에 마일스 데이비스에 버금가는 인기와 영향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많은 연주자들이 지금도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그가 뿌린 씨앗은 결국 더 큰 나무를 자라게 했고, 결국에 그는 그 위에 영원히 군림하게 된 것이다. 이건 뭐 끝판대장이라는 말도 좀 부족한, 신 위에 있는 신.
마일스 사후에도 그의 전속사였던 프레스티지(=콩코드 뮤직 그룹 산하), 콜럼비아(=소니 BMG 뮤직 엔터테인먼트 산하), 워너브라더스(=워너 뮤직 그룹 산하) 레이블에서는 계속 그 동안의 녹음을 모은 박스 세트나 미발표 녹음 혹은 순회 공연의 실황녹음을 발굴해 음반화해 재즈팬들의 지갑을 탈탈 털고 있다. 해적판도 숱하게 나오고 있는데, 이 때문에 소니 BMG에서는 그 동안 해적판으로 나온 녹음들의 오픈릴 테이프 원판을 세계 각지의 방송국 음향 자료실과 마일스의 유품에서 찾아내고 법적 절차를 정식으로 밟아 'The Bootleg Series'라는 라이브 앨범 세트를 2011년부터 발매하고 있다.
최근까지 그의 영향력은 음악을 뛰어넘을 정도로 상당해서 카우보이 비밥, 탐정 진구지 사부로[20] 를 비롯한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곳곳에 감지된다.
[image]
케이온!의 2기 애니메이션 중 5화에서 스즈키 쥰이 속한 재즈연구회 부실에 붙은 포스터들 중에도 등장한다. 그 유명한 Kind of Blue의 음반 커버.
일상 10화에도 언급되었다.
에드워드 노튼이 감독, 주연한 영화 '마더리스 브룩클린'에 등장하는 '트럼펫 맨'[21] 은 이 양반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신들린 연주 실력, 빠꾸 없는 직설적인 성격은 딱 봐도 그의 생전 모습과 판박이.
또한 사후에 미국 애플사의 광고모델로 발탁되기도 했다. 사진
마이클 만의 영화 콜래트럴의 재즈 클럽 씬에서 모티브로 나오기도 했다. 콜래트럴에서 언급되는 일화는 사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일화 중에서 꽤 유명한 것이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
라는 매우 센티멘탈한 이야기.
그러나 마일스 데이비스 본인은 자기에 대한 모든 일화 중에서 이 얘기를 가장 싫어했으며 '''"그건 내가 들어본 얘기 중 가장 심한 구라"'''라며 발끈하곤 했다(...). 그러나 마일스 본인의 오만한 성격과 마약의 힘 때문에 충분히 있을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본인이 부정하기도 하기 때문에 진실은 저 너머에.
덧붙여 콜래트럴에서 나온 연주는 영화를 위해 새로 연주된 것이 아니라 마일스 본인의 오리지날 연주다. 비치스 브류 앨범 중 'Spanish Key'라는 곡. 아마도 마이클 만 감독이 이 앨범, 특히 이 곡의 광팬이라서 다른 사람의 연주로 대체할 수 없었던 듯.
한국 팬들 사이에서는 마대수, 또는 마일신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참고로 한국 위키가 굉장히 상세하니 이것보다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다면 참조하도록 하자.
끝으로 그의 업적을 대변하는 농담 한마디.
[1] 마일스 데이비스의 업적과 성격을 동시에 보여주는 적절한(?) 예이다...[2] 마일스가 평생 시달렸던 우울증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3] 나중에 마일스의 섹스텟 연주로 유명한 같은 이름의 곡과는 관계 없다.[4] 그곳엔 헤들리 칼리먼이라는 색소포니스트가 수감중이었고,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마일즈의 머리는 고슴도치처럼 위로 솟아있었으며 여느 헤로인 중독자와 같이 약을 끊으려고 애를 먹고 있었다고 한다.[5] 다른 수감자들이 신고식으로 마일즈와 아트 블레이키에게 까딱하다가는 여기서 살해당할 수 있다는 식으로 무서운 분위기를 조성했고 마일즈는 조금 울었다고(...) 한다. [6] 동시대의 재즈 음반들 중 이 마라톤 세션 기록에 견줄 만한 것은 피아니스트 아트 테이텀이 말년에 파블로에 취입한 솔로 앨범들 뿐이다.[7] 1956년 10월 세션에서 녹음된 'If I Were a Bell' 의 초반 스튜디오 잡담 부분에서는 훗날 마일스의 명대사로 회자되는 "연주하고 나서 무슨 곡이었는지 말해줄거요(I'll play it and tell you what it is later)." 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8] 장조음계(Major Scale)의 두번째 음인 레(Re)음을 으뜸음(Root)으로 하는 선법(Mode). 구성음은 Re-Mi-Fa-Sol-La-Ti-Do 일곱 음이다.[9] 마일스와 에반스도 자신들의 결과물이 영 좋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고, 앨범으로 발매하지 말아달라고 했지만 마세로가 콜럼비아 상층부의 압력 때문에 억지로 내놓았다고 한다.[10] 이후 마일스의 활동 중단 기간이었던 1976년에 나온 '워터 베이비즈(Water Babies)' 까지 합쳐 일곱 장으로 보기도 한다.[11] 이 때 빠진 2월 20일 녹음은 2001년에 'The Complete In a Silent Way Sessions' 라는 CD 세 장짜리 세트에 묶여 정발되었다.[12] 온 더 코너는 현재 상당히 고평가 받는 앨범이다. 비치스 브류와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그루브와 비트의 가능성을 열였다고 평가받았다.[13] 색소폰 연주자로, 같은 이름의 피아니스트와는 동명이인이다.[14] 특히나 예전에 오랫동안 했던 마약이 건강을 악화시킨 주범이었다.[15] 곡의 5분 25초 경에 나온다. 피아노가 멈추고 15초 정도 지난 후에 급하게 색소폰이 등장한다.[16] 물론 이것도 상대적으로 봐야 하는게, 하드밥과 소울 재즈란 장르만큼은 캐논볼과 평생 함께했던 동생, 냇 애덜리를 빼놓고 얘기할 순 없고, 초기에는 이런 세련된 엘리트로서 이미지를 보이던 캐논볼도 60년대 후반 들어 그 시대의 조류를 타 과감한 일렉트릭 재즈를 거침없이 추구했다. '''무엇보다 웨더 리포트란 현대 재즈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밴드의 리더, 조 자비눌이 미국에 처음와 아무런 연고, 인맥, 명성도 없었을 때 그를 발굴 해서 10년간 밴드 피아니스트로 키웠던게 캐논볼이다.'''[17] 애초에 저 자서전도 마일스가 마구 떠든 내용을 퀸시 트루프라는 작가가 정리한 책이었고, 실제 사실과 다른 대목이 너무 많아서 출간 직후부터 소송 드립이 펼쳐지는 장관을 연출했다.[18] 하도 인상이 더럽다보니 백인 경관이 마일스를 범죄자로 의심하여 신분증을 검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백인 경관이 '검둥이'라는 인종차별적 발언까지 지껄이며 검사를 강행하자 발끈해서 욕으로 맞불을 놨다가 그 경관을 빡치게 만들어 경찰 곤봉에 쳐맞고 만다.[19] 차례대로 프랜시스는 Someday My Prince Will Come과 E.S.P., 시슬리는 Sorcerer, 베티는 Filles de Kilimanjaro의 앨범 커버에서 볼 수 있다.[20] 단적으로 PS2 시절에 나온 진구지 사부로 게임 중 두 번째 작품의 부제가 Kind of Blue다. 그리고 게임에 등장하는 재즈 그룹 So WHAT의 이름과 각 챕터 제목 또한 마일스 데이비스의 곡 제목이다. 클리어 후 2회차 플레이 시에 찾을 수 있는 패스워드를 찾아서 내용을 보면 어느 정도로 영향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21] 마이클 K 윌리엄스가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