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더시

 


承德 / 승덕 / Chengde
몽골어: ᠬᠠᠯᠠᠭᠤᠨ ᠭᠣᠣᠯ / Халуун гол
1. 개요
2. 역사
3. 피서산장
3.1. 상세
3.2.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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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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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부 허베이성지급시. 베이징에서 동북쪽으로 250km, 장자커우에서 서쪽으로 400km 가량 떨어져 있다. 인구는 2016년을 기준으로 347만명이다.

2. 역사


만리장성의 북쪽의 러허강에 접해 있는데, 18세기에는 강의 이름을 따 열하(熱河)로 불리며 청나라 황실의 여름 별궁 피서산장으로 쓰였다. 특히 건륭제가 즐겨 찾았다고. 당시 이궁과 티베트 불교(라마교) 사원은 현재까지 지나 북쪽 외곽에 웅장한 규모로 남아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연암 박지원열하일기에 등장하여 유명한 도시이다. 청나라 건륭제 때에 편찬된 사고전서의 보관을 위해 문진각(文津閣)이 지어졌다. 장서는 1915년에 북경 도서관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른다. 20세기 들어서는 중화민국 시절부터 1955년까지 존재했던 열하성성도였고, 따라서 한때 이 도시 자체가 열하의 영어식 이름인 Jehol(우정식 병음)이나 Rehe(한어병음)로 알려지기도 했다.

3. 피서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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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락사(普樂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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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타종승 사원(普陀宗乘之庙). 건륭제 시대에 티베트의 포탈라궁을 본따 지어졌다. 사원의 면적이 22만 제곱m에 달하는 거대사원.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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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국어
청더 피서산장과 주변 사원
영어
Mountain Resort and
its Outlying Temples, Chengde
중국어
承德避暑山庄及其周围寺庙
프랑스어
Résidence de montagne et
temples avoisinants à Chengde
국가·위치
중국 허베이성 청더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4년
등재기준
(ii)[1], (iv)[2]
지정번호
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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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산장은 1702년 강희제에 의해 청나라 황제들의 여름 궁전으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 말년에 완성되었으며 약 200년간 황제들이 이용했다. 가경제함풍제는 이곳에서 사망하기도 했다. 한때는 베이징 다음가는 대단한 위상을 보여줬으나 청나라 말기에는 서태후가 이곳보다 이화원에 집중하면서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고 방치되기도 했다.
궁전은 황궁과 정원 구역으로 나뉘는데 정원은 다시 산림, 호수, 초원 지대로 구성되어 있다. 사무실이 갖춰진 황제의 종합유원지인 셈. 중국5A급여유경구에 지정되어있으며 인근에 있는 12개의 사원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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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상세


피서산장과 주변 사원의 경치는 자연환경과 건축물의 조화를 보여 주는 훌륭한 사례로, 현대에 까지도 경관 설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피서산장은 청나라 황제가 머물던 정원 형태의 궁전이며, 사회·정치·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 더욱이 이곳은 중국 봉건사회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피서산장은 궁전 구역과 자연경관 구역(호수, 평원, 산악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100,200㎡에 달하는 궁전 구역은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청 황제가 그 궁전에 기거하면서 행정 사무 및 의식을 치르는 장소였다.
이 구역은 정궁(正宮), 송학재(松鶴齋)·만예송풍(萬叡松風)·동궁(東宮)을 포함한 네 그룹의 건물들로 구성되는데, 건물들은 중국 전통의 간결한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황제의 근엄함도 갖추고 있다. 남동쪽에 위치한 496,000㎡의 호수 구역은 중국의 신화를 바탕으로 전통적인 중국 정원 양식에 맞게끔 설계되었다. 이 구역에는 장강 남부 지역과 비슷한 경치를 만들어내는 8개의 호수와 여러 건물이 있다.
북쪽으로 펼쳐진 평원 구역은 607,000㎡ 규모이며, 서쪽의 초원과 동쪽의 산림 구역으로 나뉜다. 그중 초원 구역에서는 말의 경주가 열렸고, 나머지는 특별한 손님을 모시는 정치적 접대소 역할을 했다. 이곳의 이름은 ‘만 그루의 나무가 있는 정원’이라는 뜻의 만수원(萬樹園)이다. 이 산림의 서쪽 구역에는 황제의 가장 큰 장서각 중 하나인 문진각(文津閣)이 있고, 또 다른 여러 건물들은 풍경 사이사이에 들어서 있다.
북서쪽에 위치한 산악 구역에는 400,000㎡가 넘는 광대한 부지와 4개의 큰 협곡(정자, 송림, 예서, 송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구역에 세워졌던 전당과 정자, 사원, 수도원 가운데 지금은 40여 채의 잔해만이 남아 있다. 피서산장 주변의 사원은 몽골인과 티베트인 등 소수민족에 대한 유화 정책과 국경지역 통치를 강화하려는 방안으로 세워졌다. 12개의 라마교 사원들은 각기 다른 건축 양식을 보여 준다. 그 가운데 보녕사(普寧寺), 보우사(普佑寺), 안원묘(安遠廟), 보락사(普樂寺)는 건축학적으로 한족 양식과 티베트 양식의 조합이라는 특징이 나타나는데, 사원의 앞면은 한족 양식이지만 뒷면은 티베트 양식으로 되어 있다. 보락사의 상락왕불(上樂王佛)과 보녕사의 관음상이 보여주는 이미지들의 기교와 예술성은 특히 유명하다.

3.2. 역사적 배경


과거에는 이곳을 비롯하여 인근에 접하는 내몽골 남동부와 요서 이북을 열하(러허)라고 일컬었으며, 그래서 만주 지역에 해당될 때도 있다.
청나라는 몽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그 지역의 국경 방어를 굳건히 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그중 하나가 베이징에서 350㎞ 북쪽에 있는 몽골 초원에 사냥터인 목난위장(木蘭圍場)을 만드는 것이었다. 황제는 매년 사냥할 때마다 가족과 후궁은 물론, 관료들과 팔기병(八旗兵)까지 대동했다. 이 수천 명의 수행단을 수용하기 위해서 황제의 열하행궁(熱河行宮)[3]이라고 알려진 피서산장과 주변 사원 사이에 21개의 임시 별궁을 세워야 했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재위하는 동안 진행된 건축은 1703년에 착공하여 1792년에 끝났다. 이 작업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1703년~1714년의 호수 구역 개발 단계에서는 별궁과 정자, 궁전의 담을 짓기 위해 작은 인공섬과 제방을 건설했다. 이어 1741년~1754년에는 나머지 궁전과 전망 좋은 정원을 추가로 조성했고, 1713년~1780년에는 사원들도 지었다. 하지만 1911년 청나라가 붕괴됨에 따라 이 휴양지도 방치되었고, 복원 사업은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후에 진행되었다. 1928년 중화민국 초기에 러허성이 세워지면서 청더 시도 여기에 속했다가 1955년 중화인민공화국 때 러허성을 폐지하였고 청더시는 허베이성에 속하게 되었다.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여름 궁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