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도성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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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 고구려의 성이었으며 현재 위치는 중국 지린성 지안시 국내성 터로부터 북쪽에 있다. 아직까지도 고구려 시대의 성벽이 일부 남아있다. 고구려 왕조의 두 번째 수도이자 두 번째 이중수도인데 환도성은 산성 수도였으며 짝으로 평지성 수도 국내성이 있었다.
2. 조사 내용
고구려의 다른 성들과 마찬가지로 평상시에는 평야에 위치한 국내성을 수도로 사용했으나, 위급한 상황이나 전시엔 산에 있는 환도성으로 수도를 옮겨 적의 침입이나 상황에 대비했다고 알려져있다.
고구려 동천왕 시기에 위나라의 관구검에게 국내성과 함께 환도성을 빼앗긴 적이 있고 고국원왕 시기에도 중국의 전연에게 빼앗긴 적이 있다. 관구검에게 털린 기록을 살펴보면 험지를 통과하여 지나갔다는 기록이 있다. 또 관구검 기공비가 확인된 지점이 지금의 마선구 고분군의 뒷편인 것을 감안하면 환도성의 서쪽을 통과해 성 내부로 침공했을 가능성이 있다. 환도산성은 남문은 옹성구조로 방어력이 높지만 다른 쪽은 그렇지 않다.
2.1.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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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산성의 남문 좌측의 성벽.
환도산성의 붕괴된 성벽을 통해서 고구려 산성의 전형적인 축조 기법을 엿볼 수 있다. 고구려 대형 산성, 평지성의 특징으로써 석재를 주로 사용하는 석성의 구조를 택하고 있으며 채움돌은 대부분 마름모형(◊)의 뾰족한 면을 쐐기처럼 끼워서 유지력을 강화하였으며 가장 바깥면에 사용되는 면석(面石)도 사각형에서 한쪽만 삐죽하게 튀어나온 오각형의 석재(◀+■)를 뾰족한 쪽을 사용하여 면석과 채움석이 서로 맞물리게 쌓았다. 위의 사진에서 붕괴된 단면을 보면 이해가 쉽다.
특히 오각형 형태의 쐐기형 성석을 사용하는 것은 크기와 재료를 떠나서 거의 대부분의 고구려 산성에서 확인되는 특징이다. 국내성을 비롯하여 중국, 북한 등지에 소재하는 고구려 성곽에서 모두 이런 특징이 나타나고 있어 고구려 성곽을 판별하는 주요한 근거 중의 하나이다. 뿐만아니라 서울 아차산 일대 보루군의 작은 보루들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보이며 임진강, 한탄강 유역에 소재하는 호로고루 등의 고구려의 중소형 보루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더욱이 해당 유역이 지질학적인 특징으로 현무암이 굉장히 많은데 그럼에도 오각형으로 가공하여 쌓는 방식을 택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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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도산성 남문의 치. 성벽의 경사도를 보면 들여쌓기한 것이 확연히 보인다.
성벽 자체도 가장 아래의 밑단을 가장 튀어나오게 쌓아서 기단처럼 만들고 그 위로 성벽을 들여서 쌓는 들여쌓기의 방식으로 쌓아 구조적 안정성을 가미하였다. 특히나 고구려 성곽의 특징 중의 하나인 치(雉)를 활용하는 것이 환도산성에서도 많이 확인되는데, 이때의 치의 모서리 부분을 둥글게 만들어서 쌓는 것이 특징이다. 특유의 모서리 처리 방식은 삼국시대 성곽 중에서는 고구려에서만 유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면석을 쌓는 방법 역시 소위 品자형 쌓기라고하여 정연하게 막힌 줄눈으로 쌓은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이처럼 정연하게 쌓은 경우를 성곽용어에서는 바른층쌓기라고 명시하지만 유독 고구려 산성을 논할때만 품자형 쌓기라는 표현이 두드러지게 많다. 그 밖에도 육합쌓기라는 표현으로도 이러한 정연한 면석 축조방식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처럼 여러 기법들을 활용하여 성벽을 견고하게 쌓았다. 논자에 따라서는 붕괴되더라도 면석만 떨어져나가는 형태로 매우 정교한 구조로 평가하기도 한다.
2.2. 내부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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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도산성의 장대지
그 밖에 성 내부시설로는 장대(將臺)와 추정 궁궐터의 흔적이 남아있다. 고구려 대형 성곽의 또 다른 고유한 특징 중의 하나는 의도적인 석축 장대지를 설치한다는 점이다. 저 장대의 바로 뒤쪽인 북쪽 20여m 지점에는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으며 중국측 보고서에서는 아예 병영지라고 추정하기도 하여 이 장대로 추정되는 시설이 사실상 장대임을 전제하고 있기도 하다. 그 밖에 장대 또는 망대(望臺)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석축으로 저렇게나 많은 돌을 사용했는데 고작 4~5m 더 높은 조망권을 얻기 위하여 저 정도로 쌓은 것은 단순한 망대라고 보기 힘들며 사용된 노동력을 고려하면 장대와 같은 지휘자의 공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신라나 백제 등의 삼국시대 다른 국가의 성에서도 장대지로 추정되는 곳은 있지만 명확히 장대지인지 건물지인지 알 수는 없고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했다는 것이 전부인 반면 일부 고구려 성곽에서만 명확한 장대, 망대가 확인되고 있어 고구려의 특징으로 파악되고 있다. 특히나 장대의 구조가 위의 사진과 똑같이 2개의 계단이 설치된 형태로 통일성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처럼 수도, 도성의 방어성으로써 철저하게 축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의문스러운 것은 성 내부에 무덤이 축조되고 있는 점이다. 고분이 발굴된 것이 아니라 정확한 분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6세기에서 7세기 언저리에 축조된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요한 인물의 무덤이라는 전제도 있을 수 있지만 고대 동아시아의 관념상 성 내부에 무덤을 만드는 경우는 잘 없었고 성 내부에서 무덤이 있는 경우에는 폐성되고 난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거나, 아니면 성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환도산성의 성격을 고려하면 맞지 않는 말이다. 특히나 당나라로 넘어간 고구려 유민 1, 2세대들─대표적으로는 연헌성의 묘지명을 보면 사망한 시점인 7~8세기에도 자신의 가문이 당시에 고구려 제2의 도시인 국내성 출신임을 강조하기도 하는 등의 위상 유지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이라서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
그 밖에도 내부 건물지인 추정 궁궐터 역시 진짜 궁궐터인지 아닌지에 대해 이렇다할 정설이 없다. 원래 건물지의 성격을 추론하는 것은 유물이 없으면 건물지만으로는 설명하기가 힘든데 이는 비단 고구려만 그런게 아니라 백제의 웅진기 공산성, 사비기 부소산성에서도 이러한 난제가 산적해있는 편이다.
역사적으로는 국내성 천도 이후부터 존재했으리라 추정되는 유적이지만 고고학적으로는 1~3세기의 자료는 거의 확인되지 않고 4~5세기의 자료들만이 확인되고 있다.
3. 역사
3.1. 고구려와 한나라의 전쟁
28년, 후한(後漢)의 요동태수(遼東太守)가 침입해왔는데, 그 군세가 막강해서 막기가 힘들었다. 대무신왕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계책을 물었는데, 을두지는 당시 좌보 벼슬을 지내던 송옥구와 더불어 성을 지키면서 지구전을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왕은 환도성으로 들어가 한나라군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한나라군이 오랫동안 성을 포위한 채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을두지는 한나라군이 물러나지 않는 이유는 한나라군이 고구려의 땅이 척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환도성의 물과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나서는 한나라군에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면서 물에서 나는 귀한 잉어와 수초, 맛좋은 술 등을 보내주면 한나라군이 알아서 물러날 것이라며 계책을 말해 주었다.
대무신왕은 을두지가 알려준 계책을 따랐다. 당시 한나라군의 장수들은 고구려군이 오랫동안 성안에서 나오지 않고 뻐겨대자(...) 초조해하던 참이었는데, 고구려 사신이 잉어와 수초, 술을 가져오자 성안에 아직도 물과 식량이 풍족하여 성을 빼앗기가 힘들다고 여기고는 화친을 받아들여 군사를 이끌고 물려났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을두지가 언급한 위나암성의 지형묘사[6] 가 오늘날 오녀산성의 모습과 부합해 고구려의 집안지역으로의 천도는 산상왕이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긴 서기 209년(산상왕 13년)에 이루어졌[7] 으며, 고구려 초기 위나암성은 환도성(산성자산성)이 아니라 오녀산성이라는 설이 있다.[8]
3.2. 고구려와 위나라의 전쟁
242년, 동천왕은 오나라와 친교를 맺고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위나라의 관구검이 1만 명으로 현도를 거쳐 공격해 왔다. 동천왕은 처음에는 6천 명의 위군을 물리치는 등 크게 승리를 거두었으나... 자세한 건 비류수 전투 문서 참고.
4. 같이보기
[6]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암석 지대에 있어 물이 나오는 샘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포위하여 우리가 곤란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못의 잉어를 잡아서 수초로 싸고, 또한 약간의 맛 좋은 술을 준비하여 한나라 군사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漢人謂我巖石之地 無水泉 是以長圍 以待吾人之困 宜取池中鯉魚 包以水草 兼旨酒若干 致犒漢軍) 출처는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7] 마침 삼국사기에 산상왕 2년 2월조에 환도성 초축 기사가 있다.[8] 노태돈, 「고구려 초기의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한국고대사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