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미다례

 


1. 개요
2. 명칭
3. 위치
4. 역사


1. 개요


침미다례는 원삼국시대의 소국이다. 마한 연맹의 일원이었다.

2. 명칭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역사서에 각각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 정사 삼국지: 신운신국(臣雲新國)
  • 진서: 신미국(新彌國)
  • 일본서기: 침미다례(忱彌多禮). 침(忱)과 해성부가 같은 탐(耽)을 넣어 읽으면 탐미다례가 된다. 아래에 나오는 일본서기의 명칭 토무타레(トムタレ) 또한 이를 의식한 듯하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신운신국 / 신미국 / 침미다례를 동일한 국가, 또는 계승된 국가들로 본다.출처
  • 신운신국은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금관가야, 아라가야, 신리국과 함께 한반도의 여러 소국 중 지도자의 명칭이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4개국 중 하나이다.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서는 한반도 전체에 수많은 작은 나라가 존재했지만 이 중 오직 4개 나라만이 신지를 우대하는 호칭을 가지고 있었다.[1] 각각 "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 "안야축지분(安邪踧支濆)" "신리아불예(臣離兒不例)" "구야진지렴(拘邪秦支廉)"이기 때문에, 3세기경에는 백제보다 이 나라가 더 우세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 신미제국은 서진에 조공할 때 20개국을 거느렸음.
  • 일본서기에 따르면 침미다례가 도륙당하자 주변의 4개 읍이 동시에 항복했음. 이는 침미다례가 최소 4개국에 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지역 종주국이었음을 뜻함.
중국 역사서에 적힌 마한의 나라 이름들의 한자 표기는 우리말의 이름을 당시 중국 음에 맞게 음차했을 뿐이라서 한자 자체의 뜻은 대체로 별 의미가 없다. 발음만 신경쓰면 된다.

3. 위치


전라남도 남해안에 있었다고 추정하는데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신미국이 서진에 사신을 파견할 수 있었으니 아마도 바다를 통해서 중국에 닿을 수 있었을 것이다.
  • 일본서기 기록에 따르면 백제에서 침미다례를 남만(南蠻)이라고 표현했으니. 위례성에 수도를 두고 지금의 기호 지방에 근거한 당시 백제보다는 남쪽에 있었을 것이다.
  • 일본서기 기록에 따르면 가야에서 군대를 서쪽으로 돌려서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면 침미다례에 닿았다. 당시 가야가 대체로 지금의 경상남도 일대에 위치했으니 그 서쪽으로 가면 전라남도이다. '고해진'이라는 지명에서 진(津)은 물가라는 뜻이 있다.
그 외에도 고고학적 발굴, 침미다례(忱彌多禮)의 고대 일본어 발음(토무타레, トムタレ) 등에 근거하여 전라남도 남해안에 위치했던 것이 유력하다. ‘침미’의 고대 일본어 훈이 ‘토무(トム)’이므로 백제 시대 도무군에 해당하는 강진 · 해남 일대라는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이 지역에 설치되었던 현재 해남군 현산면에 해당하는 침명현(浸溟縣)이 침미와 음이 비슷한 데다 백제가 침미다례를 공격하기 전에 점령한 고해진과 가깝다는 점도 주된 근거이다출처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에서 전남 해남 지역 3세기 고분군이 나오면서출처 침미다례 / 신미국의 후기 역사가 조명받을지 관심이 모였다. 해당 고분군은 3세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양상으로 백제가 침미다례를 공격했다는 근거가 되는 일본서기 신공기(神功紀)에 나오는 신공 49년[2] 목라근자, 사사노궤의 침미다례 관련 기록과도 연관이 있는지 관심이다.

4. 역사


중국 역사서 《정사 삼국지》 동이전에서 마한의 국가를 나열하면서 신운신국(臣雲新國)이라는 국가가 하나 보인다.
3세기 중반, 마한의 맹주 목지국이 백제의 공격을 당하면서 맹주 자리를 빼앗기게 되고, 이에 신미국이 백제의 세력 확장에 크게 당황하여 서진에 사신을 파견하게 된다. 중국 역사서인 《진서》 장화 열전에 따르면, 3세기 후반, 마한에 신미제국(新彌諸國), 그러니까 신미국(新彌國)을 중심으로 한 20여 나라가 있었다. 신미국은 20여 소국을 거느리고 서진에 사신을 파견했다.

東夷馬韓、新彌諸國依山帶海,去州四千餘里,歷世未附者二十餘國,並遣使朝獻。

동이 중 마한(馬韓) 신미제국(新彌諸國)은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띠삼아 유주에서 4천여 리나 떨어져 있었다. 지난 세월동안 귀부해오지 아니한 나라가 20여 개나 되었는데 나란히 사절을 보내서 조정에 공물을 바쳤다.

《진서》 장화 열전

4세기, 백제 근초고왕에게 병합되었다.[3] 남만(南蠻)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백제에게 성가신 존재였던 것은 물론 문화적으로도 상당히 이질적인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드러난다. 전방후원분 문서 참조.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남가라·녹국·안라·다라·탁순·가라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몰아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 왕 초고와 왕자 귀수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벽중·포미·지반의 옛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9 진구황후(神功皇后) 섭정 49년[4]

도륙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아주 무참히 당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공포 분위기 때문인지 주변의 4읍이 항복했다. 마한의 미다례를 병합함으로써 백제는 영토가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전라남도 남해안까지 닿았다. 하지만 실제론 그 이후에도 독자적인 세력이 온존했다는 게 고고학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영산강 유역의 소국들을 영도하는 세력이 일단 근초고왕에게 타멸되고 백제국의 맹주국 위치를 받아들이게는 되었으나, 그 일대의 만만찮은 세력인 여러 소국들을 완전히 제압해서 직할 통치 지역으로 만들어버리기엔 백제의 여력은 적어도 그 시기엔 부족했다.
후대 왕인 아신왕 대에 일본서기에서 침미다례가 한번 더 언급된다.

백제기에 말하였다. 아화가 왕이 되어 귀국에 무례했다. 그래서 침미다례 및 현남, 지침, 곡나, 동한의 땅을 빼앗았다. 이 때문에 왕자 직지를 천조에 보내 선왕 때의 우호를 다시 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10 오진 덴노 8년[5]

야마토가 침미다례 등을 빼앗았다는 것은 일본서기 집필자들이 개작한 내용인 듯하다. 정황상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백제의 침미다례 등을 빼앗았다는 것이 본래의 내용일 것이다.
양직공도에 기록된 백제의 9개 부용국 중 '지미(止迷)'가 있는데 신미국을 가리킨다고 주정한다.출처
이후 이 일대는 475년 한성 함락 후 오히려 세력이 더 커졌다. 전방후원분이 바로 이 일대에 여럿 생기는데, 정작 침미다례의 기존 중심지는 아닌 주변부에만 분포하는 양상을 봤을 때는 어떤 형식으로든 전방후원분을 만든 주체들이 침미다례 기존 소국들의 정치적 기득권이나 우위는 인정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후 영산강 유역은 동성왕~무령왕 시대를 거치면서 적어도 6세기 중반까진 백제의 일원화된 지배체제 안에 완전히 편입되어 독자적인 운동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적어도 그 시기에 침미다례라고 부를 정치체제가 완전히 없어졌다곤 볼 수 있겠다.
근데 이걸 두고 부여계의 백제가 삼한계 세력인 침미다례를 정벌했다는 걸로 보긴 어렵다. 우선은 고고학적으로 백제가 과연 부여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자체가 의문시되며, 굳이 관계를 들자면 고구려와의 인연은 부인할 수 없으나 고대 국가 백제국은 애초에 고구려계뿐만이 아닌, 다른 마한 계열 소국들과 동일 문화권으로 추정되는 세력과 연합하여 건국했음이 드러나는 형편이다. 진변한이 마한과는 시초부터 달라서 셋을 삼한계로 묶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영산강 유역 세력은 천안 목지국으로 대표되는 안성천 일대 세력, 금강 유역 세력과는 문화권이나 이해관계가 조금씩 달랐다. 다만 고대 한국사가 고조선계 일원론적 견해에서 부여계, 삼한계 등 다원론적 의견이보다 유력하다는 건 특기할 사실이긴 하다.

[1] 다만 이 구절이 신지 우대 표현이라는 것은 추측일 뿐 확실한 것은 아니다. 수많은 나라 중 일부 나라만이 특이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고, 이 중 훗날 가야로 발전하는 김해시금관국함안군안라국은 다른 많은 사료를 통해 지역 강국임이 명백히 확인되기 때문에 정황상 같이 타이틀이 언급된 나머지 둘도 주변국에 비해 어떤 우월한 부분이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2] 일본서기의 묘사대로라면 신공 섭정 49년은 서기 249년인데, 이주갑인상을 따른다면 실 연도는 369년이 된다. 하지만 일본서기에서 일률적으로 이주갑인상을 했다는 근거가 없어서 여전히 실 연도는 아리쏭하다.[3]일본서기》에 따르면 침미다례 정벌이 진구황후의 업적으로 바꿔치기 되어 기록되어있는데 야마토의 서쪽에 있는 나라임에도 황당하게 남만(南蠻 남쪽 오랑캐)이라고 적어 놓았다. [4] 이주갑인상을 고려하지 않고 일본서기의 연도 서술이 전부 사실이라 가정하면, 진구황후 섭정 49년은 서기 249년이다.[5] 이주갑인상을 고려하지 않고 일본서기의 연도 서술이 전부 사실이라 가정하면 오진 덴노 8년은 서기 277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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