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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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교리
3. 기원
4. 역사
5. 여담


1. 개요


  • Karaites
  • Qaraylar
카라임파 유대교를 믿으며 크림 반도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일대에서 퍼져 살며 튀르크어족이 속하는 크림 타타르어방언연속체 (카라임어)를 써왔던 유대인 일파를 일컫는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천오백여 명이 남아있으며, 카라임어 구사가 가능한 인구는 200여명 내외이다. 소련 시절인 1979년 소련 내 카라임 유대인 인구가 3,300여 명이었다는 통계가 남아있다.

2. 교리


카라임파는 문자로 기록된 토라와 타나크만 인정하고 탈무드, 구전 전승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경시하는 종파이다. 이들은 오직 토라와 타나크만이 “할라카”(유대교 율법)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여기며, 토라와 타나크 해석도 이슬람의 한발리파처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성향으로 유대교 교파 중 근본주의 성향의 소수 종파에 해당한다. 카라임이라는 말은 “읽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다른 유대인들과 다르게 하누카를 지내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고기와 우유를 같이 먹는 것이 가능하다.

3. 기원


이들의 종파 기원은 바그다드에 살던 서기 8세기 유대인 학자 아난 빈 다우드(Anan Ben David 715~795)와 그의 근본주의적 해석을 따르던 유대인들로 여겨진다.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다른 랍비들이 그를 고발해서 감옥에 한 차례 들어갔다 나온 아난은[1] 자신의 추종자들을 이끌고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그를 추종했던 유대인들은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퍼져살았다. 십자군 전쟁 이후 카라임 유대인 상당수는 제노바 상인들을 따라 리스크가 크지만 무역 이익이 많았던 크림 반도제노바 공화국 식민지로 이주하고, 여기서 하자르 칸국의 직계 후손인 유대교를 믿는 튀르크-슬라브인들과 혼혈되면서 오늘날의 카라임 유대인의 민족적 기원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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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임 유대인들은 제노바 상인들의 도움으로 크림반도로 이주하고 무역할 수 있었다.

4. 역사


크림 반도 정착 초창기의 이들은 킵차크 칸국과 그 후신 크림 칸국이 동유럽 각지에서 납치한 노예를 제노바와 맘루크 왕조, 오스만 제국, 사파비 왕조를 비롯한 각국에 수출하며 부를 축적하였다.[2] 이들과 맘루크 왕조 간의 무역을 연결해주던, 중동에 남아있던 카라임 유대인들은 시대가 지나며 미즈라힘, 세파르딤 유대인과 동화되며 소멸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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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뉴스 시의 카라임 유대교 시나고그
리투아니아 대공국비타우타스 대공킵차크 칸국과 외교전을 벌이던 중 이들을 리투아니아의 빌뉴스트라카이로 초청했는데, 이를 계기로 많은 카라임 유대인들이 발트해 연안에 정착했다. 매우 부유했던 카라임 유대인들은 크림 칸국의 노예 약탈이 쇠퇴한 이후에는 말을 타고 발트해에서 흑해에 걸친 카라임 유대인 네트워크를 오고가며 통상했다 한다. 이들은 통상 외에도 크림 반도에서 과수원과 농장, 낙농장을 직접 운영했으며, 버터와 양고기를 매일 먹을 수 있어서 다른 유대인들에게 큰 부러움을 샀다. 우크라이나 일대의 유대인 상당수가 소상인, 농노 아니면 마름으로 살던 시절이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내에서 흐멜니츠키 봉기가 일어났을 때 노예 무역으로 카자크들에게 찍혀있던 카라임 유대인 중 많은 수가 목숨을 잃었었다. 그러나 이들의 근거지는 크림 칸국과 발트해 연안이었기 때문에 인구 수는 대폭 감소했으나 영향력은 금방 복구할 수 있었던 듯 하다. 폴란드 분할 이후 카라임 유대인들은 러시아 제국 관리들에게 자신들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우겨서 거주 이전 제한이나 유대인 대상 세금을 면제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러시아 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민족 중 하나가 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들은 부자로 이름났던 카라임인들의 재산을 싹 몰수하면서 카라임 공동체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2차 대전 당시 나치가 점령한 지역의 카라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이 아닌 타타르인이라고 우겨서 홀로코스트를 피할 수 있었는데, 이들의 친척인 크림차크 유대인의 경우 인구 8천여 명 중 6천여 명이 홀로코스트로 희생되는 바람에 사실상 전멸했다. [3] 카라임 유대인은 이 때문에 후술할 아슈케나짐 유대인에 대한 음모론과 더불어 오늘날 유대인 사회에서 더 따돌림을 당한다.
카라임 유대인들은 2차 대전 이전에도 크림차크 유대인들보다 수가 3배 이상 많았다 하며 2차 대전 때도 상대적으로 적은 인명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들은 재산이 많다고 소문 나 있었기 때문에 소련 시절 볼셰비키들의 집중적인 약탈 대상이 되었고, 이 와중에 많은 카라임 유대인들이 배교하거나, 아니면 숨어살면서 교리를 까먹게 되었다. 카라임 유대인 상당수가 소련 시절 다른 민족과 결혼하면서 카라임어 구사가 가능한 사람들의 수는 대폭 감소했다.

5. 여담


크림반도의 크림차크 유대인, 카프카스의 무슬림 쿠미크인, 카라차이인, 발카르인과 함께 자신들이 하자르 칸국의 직계 후손이라 주장하고 있는 민족 중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하자르 유대인 대부분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 튀르크멘, 타타르 등에 동화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 카라임 유대인의 전승에서는 그가 하나피파의 시조인 아부 하니파의 도움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하는데, 신빙성은 부족하다.[2] 당시 크림 칸국의 약탈과 노예 무역은 매우 악랄하고 잔혹한 형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해자 입장이던 크림 타타르인과 카라임 유대인 모두 해당 문제는 언급을 최대한 피한다.[3] 애니메이션 감독 랠프 박시가 이 크림차크 유대인인데, 출생 당시 가족 전체가 난민이나 다름없었는지 팔레스타인을 거쳐 미국 빈민가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 영향으로 랠프는 커리어 내내 좌파적인 시선을 견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