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슈케나짐
1. 개요
디아스포라 이후 서유럽, 동유럽에 정착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표현. 세파르딤, 미즈라힘과 함께 유대인 혈통의 주류를 이룬다.
2. 분포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약 1,500만 명 안팎으로 전세계 유대인 가운데 90% 가까이를 차지할 만큼 절대 다수였으나, 홀로코스트로 인하여 그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 현재 전 세계 인구는 1,000만에서 1,120만 명 정도로 추산되며 미국내에 500-600만 명, 이스라엘 내에 280만 명이 거주한다.
3. 역사
아슈케나짐(아슈케나즈 유대인)이라는 명칭은 성경 속 창세기·예레미야서에 등장하는 '아슈크나즈(אַשְׁכְּנַז, Ashk'naz)'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1세기 당시 유럽의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에 집단 거주하는 유대인들(게토)을 성경 속 단어들로 퉁쳐부르고는 했는데, 마인츠를 비롯한 라인란트 일대의 유대인들에게는 아슈크나즈의 이름에서 따온 아슈케나짐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다.[1] 이후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이 아슈케나짐이라는 명칭은 전 유럽의 상류층에게 퍼져나가게 되었고,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 전역에서는 곧 유대인들을 아슈케나짐이라고 부르게 됐다.[2]
원래 유럽은 유대인 인구가 많이 거주하던 지역이 아니었으나, 6세기 이후 동로마 제국에서 유대교를 탄압하자 일부 유대인들이 서유럽에서 그나마 상공업이 가장 발달하고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없는 지역인 플랑드르 일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6~8세기에 해당하는 고대 말 중세 초에는 유럽 기독교계의 반유대주의가 체계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도회지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도망온 기독교인들과 결혼하면서 유대교로 개종시키고 인구를 조금씩 늘려나갔다. 봉건 제도가 확립되면서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과 본격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한다.
3.1. 폴란드 유대인의 황금 시대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들은 예루살렘으로 출정하러 가기 전에 가까운 장소의 유대인들부터 학살하고 출발하던 일이 잦았다. 이런 대학살을 피하여 서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 중 상당수가 폴란드로 이주하였다. 1332년 폴란드 왕국의 카지미에시 3세는 당시 폴란드 왕국의 빈약했던 상공업을 부흥시킬 목적으로 유대인 이민자들에게 혜택을 주고 유대인들이 안정적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였다. 이민 과정에서 반유대주의 폭동이 일어나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 폴란드 왕국은 아무렇지도 않게 유대인 박해와 학살이 종종 일어나던 다른 지역에 비하면 비교적 안전한 지역이기도 했다.
특히 야기에우워 왕조 시대와 대략적으로 겹치는 1332년부터 1572년 사이의 기간은 폴란드 유대인들의 황금 시대로 불렸다. 14세기 폴란드 왕국이 동유럽에 거대한 영토를 지녔던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동군 연합을 이루고 리투아니아 귀족들이 폴란드인과 동화되어 이해관계가 일치하면서 유대인들은 동유럽 각지로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그문트 1세부터 지그문트 2세에 이르는 시기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유대인의 천국으로 불렸다고 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에서 이들을 적극 유치하고 보호했던 까닭은 중세 이슬람 치하의 스페인과도 흡사한데, 당시 가톨릭이 국교였던 폴란드는 동군 연합 과정에서 정교회를 믿는 인구가 많은 루테니아(오늘날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지역으로 영토 확장이 이루어졌다.[3] 폴란드인들은 이들 유대인 이주자들을 마름 혹은 도시의 소상인들로 정착시키면서, 정교회를 믿는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농노들의 사회적 신분이 상승하는 것을 차단시켰다. 폴란드-리투아니아 동쪽의 루스 차르국과 루테니아인 정교도들이 내통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조차 계속해서 의심하고 재산을 몰수한다든지 종교재판에 회부시키자, 적지 않은 세파르딤들이 폴란드로 이주하였다.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일대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일대가 된다. 덧붙여서 아슈케나짐과 세파르딤의 혈통이 나누어지던 11세기 당시만 하더라도 세파르드 유대인의 숫자가 아슈케나짐의 9배로 압도적이었으나, 세파르드 유대인들의 본고장이었던 이베리아 반도를 재정복한 스페인 왕국이 워낙 가혹한 유대인 탄압 정책을 펼친 결과 지속적으로 세파르드 유대인들이 서유럽 및 동유럽으로 이주해나갔고, 16세기 유대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세계 유대인 인구의 4분의 3 정도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거주했다고 한다. 20세기 초반이 되면 11세기와는 정 반대로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의 수가 세파르딤보다 9배 가량 많게 된다. 고대 유대교 학문의 중심지가 바빌로니아의 수라와 품베디타였다면 근세 유대교 학문의 중심지는 폴란드의 크라쿠프와 리투아니아의 빌뉴스가 떠올랐다.
야기에우워 왕조 시절 전성기를 누렸던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성립하면서 여러차례 격변을 맞이했다. 상술한대로 유대인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농촌에서 마름 혹은 도시의 소상인들로 정착시키면서, 정교회를 믿는 루테니아인 농노들의 사회적 신분 상승을 차단시키던 사회 시스템 때문에, 루테니아인들의 분노는 폴란드인 뿐만 아니라 유대인에게도 향했다. 흐멜니츠키 봉기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코사크들에게 학살당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영토 상당부분을 점령한 스웨덴 왕국과 루스 차르국 특히 루스 차르국은 연방보다 유대인에게 더 적대적이었다. 근세 폴란드와 헝가리 및 동유럽 지역의 상업은 유대인과 독일인들이 양분했었으나, 이후 독일인 상인들이 동유럽 각지에서 유대인들을 누르고 주도권을 더 가져가기 시작했다.
오늘날 아슈케나짐 유대인 중 금발벽안 아니면 이목구비가 동유럽계와 흡사한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아슈케나짐을 하자르 칸국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동유럽계와비슷한 이유는 동유럽에 더 오래 거주했고 교류했기 때문일 뿐이다. 또한 유대인 자체가 아랍인과 비슷하며 아랍인 또한 오래 인도 이란인의 영향을 받았으며 동유럽 슬라브인들은 옛 인도 이란인과 같은 얌나문화권에 있었기 때문에 슬라브와 유대인 자체가 서유럽인하고는 외모 특성상 좀더 다르다. 하자르 칸국은 유대교를 믿었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왔다. 하지만 정작 하자르 칸국의 구성원 대다수는 하자르 칸국 멸망 이후 유럽으로 이주한 경우보다는 셀주크 튀르크, 아스트라한의 볼가 타타르 후에 오스만 투르크등으로 옮겨진 경우가 많았다.[4]
3.2. 동부 유대인과 서부 유대인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멸망하고 폴란드 분할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유대인들이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기도 했다. 폴란드 분할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프로이센 영토의 유대인들은 상당수가 도시 부르주아지로 성장해나갔으나, 러시아 제국령 우크라이나 일대의 유대인들은 마름 역할을 하다가 경우에 따라 농노로 추락하기도 하는 등 사정이 비교적 좋지 않았다.[5]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으며, 자신이 유대인임을 나타내는 특수한 복장의[6] 착용 및 특수한 세금을 부과받는 것과 같은 차별 대우에 노출되어 있었지만, 계몽주의의 확대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서유럽 일대의 유대인들 중 상당수는 주류 사회에 동화된다. 이전까지는 부계명을[7] 사용하던 유대인들이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성씨를 쓰기 시작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
하지만 이러한 동화와 별개로 수천 년 가까이 만연했던 반유대주의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어서 동유럽 일대에서는 19세기에도 심심찮게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당시 동유럽의 시골에 살던 지주들은 도시에 있는 유대인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의심했으며, 라트비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농노들은 유대인들이 독일인, 폴란드인의 앞잡이라고 여기며 증오했다고 한다. 산업혁명 시대가 되자 농촌 인구가 도시에 '''빈민'''으로 유입되면서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8]
19세기 동유럽에서는 러시아 제국 농촌 각지에서 반유대주의 폭동이 번지자 상당수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데 이들은 오늘날 미국 유대인들의 직계 기원에 해당한다. 즉 오늘날 유대계 미국인 상당수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동유럽에서 이주해온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의 후손이다. 벨라루스나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들은 해당 지역의 벨라루스인과 우크라이나인 민족주의자들과 서로 반목이 심했던 편이었고, 당시 미국으로 이주한 동유럽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동유럽에서 찾는 것을 거부했다.[9]
서유럽은 상황이 비교적 나았던 편이었지만 유럽 내 자유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프랑스에서마저 20세기 초반 사회 전체를 뒤흔든 드레퓌스 사건이 터지면서 아슈케나짐 사이에서는 시오니즘이라는 사상이 크게 유행하게 된다.
1930년 초반 당시 아슈케나즈 유대인의 수는 대략 15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으며, 이 중 900만 명가량은 유럽에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는 이 900만 유대인 가운데 약 6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그 중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유대인들이 밀집해있던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우크라이나 일대에서의 피해가 심각했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에서는 전체 유대인 중의 90~91%가 쓸려나갔다.
홀로코스트 이후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의 중심지는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동됐고, 현재는 아슈케나즈 유대인의 숫자는 약 1천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미국에 거주하는 아슈케나짐이 대략 500만 정도이며, 이스라엘 본토에 거주하는 아슈케나즈계 혈통이 300만 정도, 나머지 국가에 거주하는 아슈케나짐들을 도합한 게 200만 정도로 계산된다. 또한 홀로코스트로 인하여 아슈케나즈 유대인들의 문화는 말 그대로 뿌리뽑히게 되는데, 특히나 약 500만 명의 화자를 가지고 있던 이디시어는 사실상 사어가 된다. 다행히도 문헌이나 음성 자료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어서 보존은 가능하다고 하다.
4. 정체성 문제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아슈케나즈 유대인을 판가름하는 구분은 일반적으로 (서유럽에 거주한다는 배경 하에) 유대교 신앙의 유무여부였다.[10] 하지만 19세기 민족주의가 전파되면서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되는데, 애초에 유럽에서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희소했던 만큼,[11] '같은 언어를 쓰면 같은 민족이다!'라는 소위 언어 민족주의가 이 당시의 주류 사상이었고 그 결과 아슈케나짐 사이에서도 이디시어 구사 여부가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잡게 된다. 19세기 후반 혈연적 민족주의가 정착한 이후에는, (종교를 공유하는) 문화적 민족 개념이었던 아슈케나즈 유대인 역시 혈연적 민족으로 변모하는데, 애초에 혈연적 민족도 아니었을뿐더러 오랜 통혼으로 인하여 외양으로 아슈케나즈 유대인을 구분하는게 사실상 불가능했고[12] , 나치의 경우에는 뉘른베르크 법을 통하여 4대 조상 기준으로 50% 이상 유대인의 피가 흐르면 유대인으로 분류했다.
5. 출신 인물
- 다비드 벤구리온
- 존 폰 노이만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발터 베냐민
- 빌리 조엘
- 슈테판 츠바이크
- 한나 아렌트
- 안네 프랑크
- 프란츠 카프카
- 골다 메이어
- 지그문트 프로이트
- 밀라 쿠니스
- 벤 스틸러: 50퍼센트 혼혈
- 로라 프리폰: 혼혈
-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 베냐민 네타냐후
- 사이먼 헬버그: 빅뱅이론의 하워드 왈로위츠 역
- 제프 골드블룸
- 세스 그린
- 더스틴 호프먼
- 멜리사 로치: 빅뱅이론의 베르나데트 매리언 로스텐코위스키 역
- 조나 힐
- 애덤 샌들러
- 애덤 리바인
- 마이클 볼튼
- 앤디 샘버그: 75퍼센트 유대인, 25퍼센트 이탈리아계.
- 아키바 셰퍼: 앤디 샘버그와 함께 론리 아일랜드 멤버.
- 귀네스 팰트로
- 개브리엘 기퍼즈: 원래 조상의 성은 혼스타인이었지만 할아버지가 미국으로 넘어온 후 반유대주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성을 서구식으로 바꿨다. 참고로 팰트로의 6촌 언니.
- 아이라 라피두스: 이슬람사를 전문으로 다루는 역사학자
- 레이첼 얌폴스키
- 론 제러미
-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부모 양쪽 모두 우크라이나계 아슈케나짐 유대인 출신
[1] 참고로 세파르딤의 어원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바디야 서의 스파르드라는 표현이 세파르딤으로 변화하게 된 것.[2] 원래 프랑스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표현은 열왕기에 나온 차르파팀(צרפתים).[3] 처음에는 엄연히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였던 우크라이나 일대는 루블린 조약 이후에는 대부분 폴란드 왕국의 직속 영토로 넘어가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지주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아예 폴란드인과 완전히 동화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4] 사족으로 하자르 칸국의 후예임을 주장하는 유대인 민족으로 카라임 유대인이 있는데, 이들도 중세 초 멸망한 하자르 칸국의 직계 후손보다는 중세 말 십자군 전쟁 시대 이후 레반트 지역에서 크림 반도로 이주한 유대인들의 후손으로 추정되고 있다.[5] 심지어 현대의 아슈케나짐 유대인 사회 내에서도 러시아 제국/소련 출신 이른바 동부 유대인과 서유럽의 아슈케나짐 유대인 사이의 갈등은 적지는 않은 편이다. 1970년대 소련의 유대인 이민 허용이나 소련 붕괴 이후 새로 미국이나 이스라엘로 이민한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의 경우 아슈케나짐 유대인은 다 부자일 거라는 편견과 다르게 상당수가 빈곤층이다.[6] 일반적으로 뾰족한 모자를 착용하였다. 다윗의 별이 사용되기도 했지만 이 표식을 가장 애용한 것은 훗날의 나치 독일.[7] 단순히 부계 성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변형한 성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아버지의 이름 앞에 ~의 아들이라는 뜻의 벤~을 붙여 성처럼 사용했고, 아랍인들은 같은 의미로 남자는 빈~, 여자는 알~을 붙이며, 벤과 빈은 어원적으로 같은 말이나 히브리어의 'e' 모음이 아랍어에서는 'i'로 변형되었고, 이외에 어원이 같은 다른 단어도 히브리어의 'e'가 'e' 모음이 없는 아랍어에서는 'i'가 되는 경우가 많다. 유럽에서도 러시아에서 (이 경우에는 성씨로 쓰는게 아니라 미들네임으로 쓰는 거지만) 아버지의 이름에 -ович를 붙이거나, 아일랜드계 성씨에서 자주 보이는 O'가 대표적.[8] 원래부터 유대인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던 농촌 인구가 도시에 빈민으로 유입이 되었다.[9] 여기에는 당시 미국 사회 내 폴란드계 미국인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도 이유였을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의 방언일 뿐이다."라고 말한 레프 트로츠키나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주동한 라자리 카가노비치가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이었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동유럽 각지의 민족주의와 동유럽 유대인들은 서로 상성이 굉장히 안 좋은 편이었다.[10] 종교가 생활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약했던 역사를 가진 한국인들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유럽에서 종교는 오랫동안 개인의 정체성을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심지어 1920년대 신생 폴란드가 인구 조사를 위해서 어느 오지 시골마을의 농민들에게 '당신네들은 혈연적으로 어느 민족에 속하냐'고 물었는데, 이 농민들이 '민족 그게 뭔데요? 우린 그냥 가톨릭 신자인데요?'라고 대답한 에피소드도 남아있을 정도.[11] 오랜 영국의 통치로 인하여 일찌감치 공동체 의식이 생긴 아일랜드 정도가 예외.[12] 보통 유럽에서는 매부리코이면 유대인이라는 고정관념이 있기는 한데, 뭐 매부리코가 유대인한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니까...중동이나 캅카스 이남은 매부리코 비율이 높은데 아랍인보다는 유대인이 유럽에 올 확률이 높아서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