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블랑카 회담
1. 개요
'''Casablanca Conference'''
1943년 1월 14일에서 1월 26일까지 이어진 회담으로, 당시 미합중국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그리고 자유 프랑스의 샤를 드골, 앙리 지로 등이 전쟁의 다음 단계를 검토하고 전략을 논의하고자 북아프리카 프랑스령 모로코 카사블랑카에 위치한 앙파 호텔에서 개최된 제3차 연합국 전쟁지도회의다. 암호명은 SYMBOL. 소련의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도 초대받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 가 아직 끝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참석하지 못했다.[1]
2. 논의 사항
2.1.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 요구
이 회담에서 처음으로 '이 전쟁은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Unconditional Surrender)을 통해서만 종결시킨다.'는 방침이 등장하였다. 무조건 항복이라는 용어 자체는 남북전쟁 시기 북군의 사령관이던 율리시스 그랜트가 처음 사용했는데, 유럽 내에서는 싸우다가 적당히 협상을 통해 강화하는 것이 일상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항복이라는 말은 널리 퍼진 용어가 아니었다.[2]
따라서 외교 실무 담당자들이 처음 무조건 항복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의 반응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 외교관들은 '이러면 추축국 국민들의 단결은 엄청나게 강해질 텐데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드는 거 아님?'이라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 역시 아돌프 히틀러만 제거된다면 독일 측과도 손을 잡고 소련의 팽창을 저지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 상당한 거부감을 표했다. 하지만 1차대전의 어정쩡한 종전이 2차대전을 불러왔고, 어정쩡한 종전은 결국 또다른 전쟁을 불러올 것이 자명하다는 루스벨트의 입장은 단호했고[3] , 결국 연합국은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을 종전의 조건으로 결정한다.
2.2. 자유 프랑스 내 지도자 문제
자유 프랑스의 양대 지도자였던 샤를 드골과 앙리 지로 사이 가운데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는 문제 역시 연합군 입장에서는 뜨거운 감자였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두 사람을 모두 회담장으로 초빙하였지만 갈등은 여전하였고, 두 사람은 처칠과 루스벨트 앞에서도 으르렁(...)거렸다.[4]
사실 루스벨트는 외곬적인 성향이 강했던 드골 대신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민간, 군사분야 총사령관인 지로를 선호하여, 그를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 옹립시키려 시도했으나 처칠의 반대[5] 에 부딪혔고, 게다가 지로의 정치적 수완이 그렇게 훌륭하지는 못해서 결국 종전 무렵이 되면 자연스럽게 드골에게 힘이 집중된다.
덧붙여서 본토를 독일에게 점령당한 프랑스는 회담 기간 내내 들러리 신세였고, 중요한 군사 문제를 다루는 회담에서는 철저히 배제당한다.
2.3. 그 외
- 소련 측이 요구한 유럽 내 제2전선 문제도 논의되었다. 미국이 곧바로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 북부에 상륙 작전을 실시할 것을 선호한 반면, 영국은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반도에 먼저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독일군의 세력을 분산시킬 것을 주장했다. 계속된 논의 끝에 결국은 영국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시칠리아 침공이 북아프리카 전선이 완전히 정리되는 대로 실시되기로 계획된다.
- 유럽 전선에서 영국의 입장이 대폭 수용된 대가로 영국은 미국에게 태평양 전선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영국 함대가 태평양에 돌아온건 1944년 말에 가서야 이루어지게 된다. 그 이전에는 대서양과 지중해에서 독일과 이탈리아 해공군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으니 그럴 여유도 없었다.
- 북아프리카 일대의 전후 독립에 관해서도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실질적으로 도출된 결과물은 없었다. 그리고 식민지를 포기할 마음이 없던 프랑스의 강경책으로 인하여 전후 북아프리카 일대는 아수라장이 된다.
- 이후 국민혁명군 참모장 겸 중국 주둔 미군의 총사령관이 된 앨버트 웨드마이어가 준장 시절에 카사블랑카 회담에 참가했다.
[1] 하지만 거의 소련이 승기를 잡았을 시점으로 독일의 6군에게 항복 권고를 보내던 때였다.[2] 당장 20년 전의 제1차 세계 대전만 하더라도 국력이 한계에 몰린 독일 제국이 협상국 측에 강화를 '제의'하면서 종전이 이루어진 것이지 항복을 통해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즉 조건부 항복이었던 셈이다. 해외 식민지를 모조리 빼앗기고 각종 무기개발 및 보유금지라는 사실상 고자가 되는 조건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독일 본토는 온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베르사유 조약은 너무 굴욕적이기만 하고 각종 패널티를 안겨주기만 할뿐 독일이 가진 국력을 실질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 덕분에 독일은 20년만에 다시 판을 키워 2차대전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육군원수 페르디낭 포슈가 베르사유 조약을 보고 '20년 짜리 휴전 조약'이라고 한탄한 것이 괜히 그랬던 것이 아니다.[3] 덧붙여서 루스벨트는 스탈린이 혼자 독일과 강화를 맺고 전쟁에서 내빼는 상황을 우려했는데 만약 무조건 항복이 연합국 모두의 강령으로 채택되면 이런 상황도 피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4] 이런 분열상이 드러나는게 우려됐던 루스벨트는 강제로 두 사람에게 화해의 악수(...)를 시켰고 기자들로 하여금 사진을 찍게 했지만 딱 봐도 어색한 게 드러난다. [5] 처칠 역시도 드골을 엄청 싫어했고, 전쟁 기간 내내 드골과 사사건건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어쨌든 처칠은 2차대전을 수행하기 위한 프랑스의 지도자로는 드골이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드골에게 힘을 보태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