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요)

 


'''요 제2대 황제'''
'''太宗 | 태종'''

[image]
'''묘호'''
'''태종(太宗)'''
'''시호'''
효무혜문황제(孝武惠文皇帝)
'''연호'''
천현(天顯, 927년 11월 ~ 938년 11월)
회동(會同, 938년 12월 ~ 947년 1월)
대동(大同, 947년 2월 ~ 947년 9월)
''''''
거란어
야율(耶律)
''''''
거란어
요골(堯骨)
중국어
덕광(德光)
'''생몰 기간'''
902년 11월 25일 ~ 947년 5월 15일 (45세)
'''재위 기간'''
'''거란국왕'''
927년 12월 11일 ~ 947년 2월 24일 (19년 2개월)
'''요 칭제'''
947년 2월 24일 ~ 947년 5월 15일
1. 개요
2. 생애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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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926년 ~ 947년). 거란식 이름은 야율요골, 중국식 이름은 야율덕광.

2. 생애


야율아보기(요태조)가 죽자 어머니 술률평이 잠시 섭정하여 후계에 위험이 되는 장수와 부인들을 모조리 모아놓고 "선황제가 그리우냐."라고 묻고는 '그렇다.'고 하자 마땅히 저승가서 뵈어야 옳다고 하고는 순장시켜 '''남김없이 몰살시켰다.''' 이후 차남이었지만 중원 문화를 숭상하던 야율돌욕이 어머니의 신임을 받지 못했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1]
야율돌욕은 혹은 야율배라고도한다. 발해 점령 후 태자의 신분으로 발해 부여부 자리에 괴뢰국인 동단국을 세우고 왕이 되어 발해 지방을 다스렸다. 동단국은 괴뢰국이었으나, 어느 정도 자치권과 외교권을 가지고 있어서 각국과도 교류했으며 일본에도 사신을 보내 지속적 관계를 요청하나 무시당한 일이 있다. 그러나 요의 세력이 강성해지고 중앙집권화가 조금씩 이뤄지면서 동단국은 982년, 거란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야율배는 동생에게 황위를 뺏기자, 이를 한탄하는 시를 남기고[2] 후당으로 망명하여 절도사가 되었으나 936년에 이종가에게 살해당했다.
936년, 후당의 정변에 개입해 석경당의 편을 들어 마지막 황제 이종가를 죽음으로 내몬 뒤 후당을 멸망시켰다. 석경당은 후진을 건국하고 스스로 거란의 제후국이 되었으며, 또한 거란은 군사를 빌려준 대가로 하북의 연운 16주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석경당 사후 즉위한 그의 아들 석중귀는 신하 노릇을 거절하고 945년에는 거란의 침략을 격퇴하기까지 한다. 이 때 아들을 잃게 되는데, 태후 술률평도 강화를 주장하지만 뚝심있게 밀어 붙인다. 결국 요와의 전투에서 나름 재미를 본 후진이 침략해오자 이를 격퇴한 뒤 역으로 수도 개봉으로 진격, 함락시켜 후진을 멸망시키고 석중귀를 포로로 끌고갔으나, 병사들에게 줄 상급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점령지를 수탈하고 병사들의 약탈을 방관하는 등, 점령지 관리를 소홀히 한 탓에 한인들이 봉기하고 후진의 절도사들이 반격을 가해와서 3개월만에 퇴각하고 말았다.[3][4][5]
자치통감에는 이 때 요 태종이 '''''중국인을 다스리기가 이렇게 어려운지 몰랐다!''''고 탄식했다고 전하며 요사에서는 태종이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고 반성했다고 한다. 태종은 여양도를 지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짐이 이번 원정에서 세 가지 잘못을 했다. 군사를 풀어 말 먹이와 곡식을 빼앗은 것이 첫 번째이고, 백성들의 사적인 재산을 빼앗은 것이 두 번째이고, 여러 절도사를 서둘러 진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 그 세 번째이다.'''' 그리고 태종은 황태제에게 전황에 대해 얘기하며 자신의 잘못을 수습할 해결 방안도 제시하여, '''''하동은 아직 귀부하지 않고 서로의 추장들도 서로 무리지어 어디로 귀부할까를 밤낮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그들을 제압하는 방법은 오직 백관들의 마음을 구하고, 군사들의 마음을 다독거리며,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세 가지 방법뿐이다.''''' 라고 말했다. 이를 통해 요 태종이 개봉에 머무르는 3개월 동안 중국의 정치적 상황, 경제, 문화, 행정에 대해 체험하면서 중국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초보적으로나마 그 통치법을 이해하게 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요는 이 때의 실패를 교훈 삼아 연운 16주와 정주민들에 대한 통치 방식을 개선하고 중앙집권화된 제국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하려 했다. 그러나 태종 본인은 이 때쯤 열병에 걸렸는데 그를 온몸에 얼음으로 감싸 열을 낮추려고 했으나, 그대로 붕했다. 결국 그는 그대로 얼음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와 안장되었다. 그가 죽은 후 후사는 형 야율배의 장남이자 태종에게는 조카인 세종이 계승하였다.

3. 둘러보기



[1] 순장에 관련된 얘기가 이게 끝이 아니다. 술률평은 야율아보기가 죽으면서 자신의 신하들을 순장해달라고 했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신하들은 반발했다. 문제는 요나라에 실제로 순장 풍습이 있는지라, 지목당한 신하들은 순장을 면할 명분이 없었다. 많은 신하들이 순장당한 와중에 한족 출신 관료 조사온이, 황후가 황제랑 가장 가까웠으니 먼저 순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술률평은 자신은 어린 아들(당시 야율배는 이미 28세였다.)이 있으니 대신 팔 하나를 순장시키겠다며 정말로 자기 팔을 잘랐다.(조사온 역시 술률평의 팔과 함께 순장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요사 순흠황후 열전에서 조사온은 죽음을 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술률평은 단완태후(팔을 자른 태후)라는 별명을 얻었다.[2] 작은 산이 큰 산을 누르니, 큰 산은 아무 힘이 없구나. 고향 사람들 보기가 부끄러워, 아예 나라 밖으로 가버리련다. 원문 : 小山壓大山, 大山全無力. 羞見故鄕人, 從此投外國. 소산압대산, 대산전무력. 수견고향인, 종차투외국.[3] 태종이 개봉에 입성한 직후, 한림학사 장려가 "지금 우리 대요가 중국을 얻었는데, 마땅히 중국인으로 다스리게 해야지, 거란인이나 측근들로만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고 진언했으나 태종은 이를 무시했다.[4] 철퇴하기 전에 요 태종과 풍도가 만난 일화가 있다. 풍도는 요 태종을 만나자 스스로 "저는 재주도 덕도 없는 멍청한 늙은이입니다."고 자신을 낮췄으며 요 태종이 “지금 이 시기에 천하의 백성을 무슨 방법으로 구할 수 있겠는가?” 고 묻자, “페하, 지금 같은 난세에는 그 누구도 어떠한 방법이 없습니다. 설사 부처님이 오신다 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단 한 명 폐하만이 천하의 백성을 구할 수 있습니다.” 고 말하며 약탈과 학살을 그만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태종은 풍도가 마음에 들어 요의 관직을 하사했으며 약탈을 그만두었다고 한다.[5] 사실 이때 거란족들이 한족들을 상대로 너무 난폭하게 굴었다. 야율덕광은 한족을 사로잡으면 얼굴을 칼로 찌르고 살려준다는 글자를 새겨서 풀어주었고, 야율덕광의 사촌동생인 마답은 더 잔인해서 한족을 붙잡으면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뽑고 팔을 부러뜨려 죽였고 그렇게 해서 죽인 한족의 손과 발을 잘라서 집에 장신구처럼 걸어두었다. 또한 거란족 군대는 지나가는 길가의 집을 모조리 불태워 폐허로 만들었으며, 전투를 벌일 때마다 강제로 끌고 온 주변 백성들을 선봉에 내세워 적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내어 죽게 했다. 출처: 중국의 판타지 백과사전/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2018년 5월 출간/ 97~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