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르 몸젠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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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계 독일인으로, 19세기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역사학자 중 한 사람. 로마에 관한 연구에서는 당대 사람들 중 가장 독보적인 업적을 자랑하는 인물로 이를 바탕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정도였다. 단순히 역사학자뿐만이 아니라 언론인, 정치인, 법률인, 고고학자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각각의 영역마다 뚜렷한 족적을 남긴 먼치킨.
2. 생애
1817년 지금은 덴마크의 영토인 슐레스비히 지역의 가르딩에서 루터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역이 지역인만큼 덴마크의 혈통도 꽤나 섞여있는 가계였지만 본인은 평생 스스로를 독일인이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에 걸맞게 행동했다. 고전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바탕으로 학위를 수여받은데 이어 1837년에는 홀슈타인에 있는 킬 대학교로 진학하여 법학을 전공한다.[1] 그렇지만 이 시기 킬 대학교에서 로마법을 주전공으로 연구하게 되면서 후일 그의 로마사 연구에 지대한 도움이 된다. 이후 덴마크 왕실의 장학금을 바탕으로 몸젠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옛 로마 제국의 영역들을 여행하면서 당시까지 보존되고 있던 로마의 문서들을 연구하는 기회도 얻게 된다.[2]
그렇지만 1848년 혁명의 와중에 몸젠은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프로이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합병을 지지했고 그로 인해 덴마크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서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3] 고향을 떠나 라이프치히로 이주한 몸젠은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법학 교수로 임용되게 된다. 그의 학문적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 1857년에는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초빙되고 1861년부터는 베를린 대학교의 로마사 전담 교수자리까지 겸임하게 된다. 학문적 성취와 그에 따른 명예가 나날이 높아져갔지만, 아무래도 최고점은 몸젠 본인의 저서 <로마사(Römische Geschichte)>를 통해 190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4] 이러한 명예의 절정에서 1903년 몸젠은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3. 업적
로마와 관련하여 평생 1500개 이상의 논문 및 출간물을 발간하면서 오늘날까지도 로마사의 가장 권위있는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남아있다. 특히나 그는 당대 로마인들이 남긴 문서에만 집중하던 역사학계의 관행에서 벗어나 비석, 화폐와 같은 유물들을 중시하면서 로마사 연구의 새로운 체계를 뿌리내리게 한다. 금석학의 경우 몸젠이 거의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5] 몸젠이 생전에 수집한 여러 비석들은 오늘날도 베를린 아카데미에 보관되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몸젠에게 불멸의 명예를 안겨준 <로마사> 1~3권의 경우 그가 겨우 37살일 때 저술된 것이다(1854~1856년. 1년에 1권 꼴이다). 로마사 1권은 가장 긴 분량으로 이탈리아 통일과 포에니 전쟁까지, 2권은 그리스 복속까지, 3권은 카이사르의 죽음까지다. 덕분에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없었다고... 다만 후세에는 아쉬운 것이, 몸젠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부터는 더 이상 책을 펴내지 않았다. 그는 로마사를 3권까지 쓴 뒤 제정을 다룬 4권을 '''건너 뛰고''' 70세가 다 된 1885년에 로마 속주를 다룬 5권을 먼저 써서 마무리지었다(1904년 유작으로 개정본 공개).
이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설은 몸젠이 카이사르를 깊이 존경했고 자기의 영웅이 죽은 이후의 역사를 쓸 마음이 안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 여사는 19세기 자유주의의 아들로 내심 공화정을 지지했던 몸젠이 차마 로마 제정이 수립되는 것을 서술할 엄두가 안나서 책을 더 이상 쓰지 않았다라고 주장하지만 글쎄... 어쨌든 당대에도 <로마사>를 완결지어달라는 독자들의 욕구가 빗발쳤지만 몸젠은 묵묵부답이었다. 또한 베를린 학술원의 대표로서, 동료들의 교회사 연구나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설립한 라인 강 방어선 연구 등을 출판하는데도 크게 도움을 주었다.
로마법과 채권법에 관련한 그의 연구는 후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으로까지 이어지는 근대적 민법 체계 형성에 큰 기여를 한다.[6]
몸젠은 독일 진보당 소속 의원으로 프로이센 하원과 제국의회(Reichstag)에서 거의 20년에 걸쳐 의정활동을 펼쳤다. 몸젠은 자유주의자로 통일 이후 여전히 전제적인 제2제국의 정치상에는 꽤나 실망을 했다고 전해진다. 특히나 비스마르크의 사민당 탄압을 신나게 까시다가 코렁탕 먹을 뻔 하셨다고...
동시에 프로이센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합병 시도를 지지했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다.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을 열렬히 지지했지만 그렇다고 사후에 등장하는 어떤 또라이와 같은 배타적 민족주의자는 결코 아니었으며 소수민족(특히 유대인)의 독일 내 동화를 추구했다. 일단 본인부터가 덴마크계이니 뭐... 그런데 슬라브족은 두형만 보더라도 열등민족이라고 깐 적도 있다... 우생학이 판치던 당시 시대에 따른 한계라고 봐야할 듯.
4. 여담
- 유약해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한 정력했다. 부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16명이나 낳았다...
- 길을 가면서도 책을 읽을 정도로 열정적인 학자였다고 한다.
- 훌륭한 역사학자의 피는 어디 안가는지 그의 증손자인 볼프강 몸젠과 한스 몸젠도 현대 독일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거물이었다.
- 저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박사학위 논문 "중세 상사회사 서설"을 심사한 사람이 바로 몸젠이었다. 당시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학위신청자가 자신의 논문에 관해 제시한 3개의 논점에 대해 다른 학자들과 신청자가 토론을 벌여야 했다. 로마사 분야의 최고권위자인 몸젠은 베버가 '식민도시colonia'와 '도시municipium'에 대해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베버의 의견에 물음을 제기했으나, 얼마간의 토론 이후 '베버의 논제가 옳다는 것에 승복하진 않지만 이 수험자의 앞날을 방해할 마음은 없다'고 말하며 토론을 끝마쳤고 베버의 박사학위논문심사는 그렇게 통과되었다. 평생을 몸담은 자신의 전문연구분야에 대한 젊은 학자의 도전적인 의견을 무시하지 않고 학자 대 학자로서 의견교환을 한 것으로 보아 학자로서의 겸허함을 갖춘 사람이었던 것 같다.
- 몸젠의 로마사는 2013년부터 우리말로 된 번역서가 순차적으로 나오고 있다. # 다만 몸젠의 로마사가 아직까지 정설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고전으로서의 지위와는 별개로 이것도 상당히 오래된 책이다. 20세기에 사료비판 방법론뿐 아니라 고고학이 발달하면서 고대사에 대한 해석은 몸젠의 시대와 비교하면 상전벽해로 바뀌었다.
-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교정에는 그의 석상이 있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서독 분단 시절에는 훔볼트대가 동베를린 지역에 속하게 되어 그의 석상이 치워지고 이 대학 법학부 졸업생인 카를 마르크스의 흉상이 세워졌다. 그러다 동서독 통일 이후 마르크스의 흉상 대신 몸젠이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1] 당시 법학의 중심지는 괴팅겐이었지만 괴팅겐에서 유학할만큼의 돈이 없어서 집 가까운 킬 대학교를 갔다고 한다. 안습.[2] 법대 시절 소일거리 삼아 친구들과 시집을 하나 냈는데 이게 덴마크 왕의 마음에 쏙 들어서 장학금 수혜자로 뽑혔다는 소문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카더라... 그리고 이 시집은 나중에 몸젠이 명성을 얻게 된 뒤 인기 대폭발...[3] 결국 이 땅은 20년 뒤에 비스마르크가 덴마크와의 전쟁을 통해 차지한다.[4] 100년이 넘는 노벨문학상 역사상 정말 몇 안되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비문학 작가이다. 1950년대 이후부터는 애초에 노벨상 위원회가 문학작가에게만 상을 주었는데, 2015년에는 수필가, 2016년에 '''가수'''로서 비문학 작가도 주고있다.[5] 라틴 금석문 전집(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을 기획한 사람이 바로 몸젠이다. 다만, 그리스 금석문 전집(Corpus Inscriptionum Graecarum)은 몸젠보다 먼저 아우구스트 뵈크(August Boeckh)가 기획하였다.[6] 오늘날 로마법 연구자들이 로마법 대전 연구에 사용하는 표준판본이 바로, 몸젠이 교감(校勘)한 것을 파울 크뤼거(Paul Krueger), 루돌프 쇨(Rudolf Schoell) 등이 다시 수정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