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필로 쿠비야스
1. 개요
페루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1988년에 알리안사 리마 감독을 맡았다.'''골없는 축구는 꽃없는 정원과 같다."'''
페루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힌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이 페루 축구의 영웅은 떡잎부터 달랐다. 만 16세였던 1966년에 자국 리그 최고의 명문팀인 알리안사 리마에서 데뷔하자마자 주전자리를 차지하고 19골을 넣으며 득점왕까지 차지해버렸다. 그야말로 충격적인 데뷔 시즌. 1972년까지 리마에서 뛰었는데, 리그에서만 120골 가까이 몰아넣으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으며 리그 우승 2회, 득점왕 2회, 1972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6골을 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했고, 펠레를 제치며 남미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소위 말해 '잘나갔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았다.
월드컵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일찍이 증명한 그는 스위스 슈퍼 리그의 명문 클럽인 FC 바젤로 이적했고 1시즌을 뛴 뒤 포르투갈의 FC 포르투로 이적해 3시즌간 활약하면서 1976-1977 포르투갈컵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1977년 그는 다시 알리안사 리마로 복귀했고, 이후 메이저리그 사커의 포트 로더데일 스트라이커스에서 리그 59골을 득점했으며, 이중에는 LA 아즈텍스를 상대로 7분만에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후 알리안사 리마에서 뛰는 등 여러팀을 전전하다가 1989년 은퇴를 선언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20세가 되기 전인 1968년에 데뷔했으며 그가 넣은 26골은 아직까지도 깬 후배가 없다. 약관의 나이로 출전한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조별예선에서는 불가리아를 상대로 동점골을 넣었으며, 모로코를 상대로 멀티골, 서독과의 경기에서는 만회골을 넣으며 조별리그에서만 4골을 집어 넣으며 우고 소틸, 엑토르 춤피타스 등과 함께 페루의 8강행[1] 을 주도했다. 하지만 8강 상대는 펠레가 이끄는 브라질이었고, 호베르투 히벨리누, 자이르지뉴, 토스탕이 페루를 상대로 득점한다. 쿠비야스는 후반에 호쾌한 슈팅으로 만회골을 득점하지만, 자이르지뉴가 승부에 쐐기를 박는 4번째 골을 터뜨려 4:2로 패배한다. 하지만 쿠비야스는 1970 멕시코 월드컵 신인상을 수상한다.
1975년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브라질과 콜롬비아를 꺾으며 테오도로 페르난데스로 대변되던 1930년대 대표팀에 이어 우승을 맛보았는데, 이 대회에서 쿠비야스는 이 대회에서 MVP를 수상한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도 출전한 쿠비야스는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멀티골을 넣었고, 이란에게 해트트릭을 선사하며, 총 5골을 넣으며 페루의 2차 리그에 진출하는데 기여했다. 하지만 2차 리그에서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폴란드를 만나서, 특히 아르헨티나에게 6:0으로 대패[2] 당하는 등 3전 전패를 당하며 탈락하고 만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도 출전했으나 득점 없이 귀국했다.
3. 플레이 스타일
쿠비야스는 펠레와 유사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는데 발군의 드리블 실력과 뛰어난 패싱력으로 팀의 공격을 풀어나가는 10번이었으며, 강력한 슈팅력으로 득점을 기록하기도 하였다.또한 테크닉과 좋은 프리킥 능력[3] 을 갖춘 것으로 유명하다.
4. 여담
- 1985년 은퇴를 했다가 1988년 알리안사 리마에서 현역 복귀를 한 것이 눈에 띄는 점인데, 이는 1987년 알리안사 리마 선수, 코칭스태프들을 몰살시킨 비행기 사고로 인해 팀이 해체될 위기에 처하자 복귀한 것이다. 유일한 감독 커리어도 이때 뿐으로, 잠시 선수 겸 감독을 지낸 것이다.
- 지금은 고국 페루에서 축구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가끔 유럽도 왔다갔다 한다는 듯.
[1]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은 16개팀이 4팀, 4개조로 분할되어 경기를 치뤘다. 조별리그를 통과한게 8강이다.[2] 이 경기는 승부조작으로 의심된다.[3]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 스코틀랜드를 상대로 기록한 아웃프런트 프리킥 골이 특히 유명하다. 그리고 그는 펠레, 호베르투 히벨리누, 데이비드 베컴등과 더불어 2개의 월드컵 대회에서 프리킥 골을 성공시킨 5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