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베케트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 1118년 ~ 1170년)은 중세 서방 교회의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가톨릭과 성공회의 성인이다.
1. 생애
런던의 주 장관인 길버트 베케트(Gilbert Becket)와 마틸다(Matilda)의 아들로 태어난 성 토마스 베케트는 노르만족의 후손이다. 그는 런던에서 출생하여 서리(Surrey)의 머튼 프리오리(Merton Priory)에서 수학했으며, 런던에서는 법률을 공부하고 파리 대학교에서도 그의 전문 과목을 계속 연구하였다. 부친의 사망으로 궁핍한 환경으로 내몰린 그는 1141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관으로 들어갔다. 이때 테오발드(Theobald) 대주교는 성 토마스 베케트가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와 프랑스의 오세르(Auxerre)에서 법률을 공부하도록 조처해 주었다.
그는 1154년에 부제로 서품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테오발드 대주교의 명을 받고 로마(Roma)를 오가면서 중요한 일들에 관여하였다. 1155년 성 토마스 베케트는 헨리 2세에 의하여 잉글랜드(England)의 수상으로 임명되면서 국왕 다음의 실권자가 되었다. 그는 헨리 2세를 수행하여 프랑스 툴루즈(Toulouse)로 원정을 나갈 때에는 부대장도 맡았다. 1161년 테오발드 대주교가 서거하자 헨리 2세는 성 토마스 베케트를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물론 그는 이 직책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1162년 그는 수상직을 사임한 후 사제품을 받고서 대주교로 착좌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엄격한 생활을 시작하였다. 1166년 성 토마스 베케트는 소위 '클라렌든 칙령'을 거부하였는데, 이 법은 교회 법정에서 행해야 할 성직자의 권리와 교황청에 호소하는 권리를 부인하는 악법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성 토마스 베케트는 프랑스로 축출되었다. 성 토마스 베케트는 이 사실을 교황에게 상소하였지만헨리 2세와 반목하기를 원치 않았던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 교황은 그를 지원하지 않았다. 이처럼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케트가 반목하고 있을 때, 성 토마스 베케트는 교황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 퐁티니(Pontigny)의 시토회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1166년 헨리 2세가 자신의 영향권 내에 있는 지역에서 모든 시토회 회원들을 추방하겠다고 위협할 때, 성 토마스 베케트는 상스(Sens) 교외의 성 콜룸바(Columba) 수도원으로 가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Louis VII)의 보호를 받았다. 루이 7세의 노력에 의해 헨리 2세와 성 토마스 베케트는 평화 협정을 맺었고, 비로소 그는 잉글랜드로 귀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정치적인 사건 때문에 그는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무참히 살해당하였다. 베케트는 종교재판관을 맡아서 재판을 진행했는데, 이 때 헨리 2세가 원하는 수준보다 온건하게 죄인들을 처벌해서 심기를 건드렸다. 이로 인해 헨리 2세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한 것. 이게 헨리 2세가 직접 명령을 내린 것인지, 아니면 부하들의 '과잉충성'인지는 불분명하다. 이 사건은 전 유럽을 뒤흔들었다. 성 토마스 베케트는 사망 즉시 순교자로 선포되었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그를 성인#s-2으로 시성하자 헨리 2세는 공적으로 잘못을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유해가 모셔진 성 토마스 베케트의 경당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순례자들이 모이는 성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남긴 다음의 말은 아주 유명하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리고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기꺼이 행하였다."
하지만 그의 수난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으니 1531년, 수장령을 선포하며 교회와 연을 끊고 막 나가기 시작한 헨리 8세가 뜬금없이 '''360년 전'''에 죽은 그를 역모 혐의로 기소(...)해버렸다. 그러면서 항변을 할 게 있으면 30일 간의 기한을 줄 테니 법정에 출두하라고 했지만, 당연히 이미 저승 간 양반이 부활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로 백골이 진토 된지라 재판정엔 나타나지 않았다. 이 궐석재판에서 헨리 8세는 그에게 유죄를 선고한 뒤 캔터베리 성당에 모셔지던 그의 유골을 불태우고, 조문객들이 바친 헌금을 싸그리 털어갔다.
영국의 시인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은 그를 소재로 "대성당의 살인"을 썼다.
2. 매체
이우혁의 소설, 퇴마록의 등장인물 박신부가 엑소시즘을 행할 때 베케트의 십자가를 사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