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홉스
[clearfix]
1. 개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서는' 인간의 삶은 고독하고, 가난하고, 불결하고, 잔인하며, 짧다.[2]
ㅡ『리바이어던』
17세기에 활동하던 영국의 철학자로, 대표적인 저서로는 리바이어던이 있다. 리바이어던은 근대 국가 체제의 사상적 시발점으로 평가되는 중요한 사상을 담고 있다. 근대 자유주의의 맹아를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근대 성경주석자로 유명했다.인간은 평화와 자기 방어를 위해 그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한, 또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럴 경우에는 만물에 대한 이 권리를 기꺼이 포기하고, 자신이 타인에게 허락한 만큼의 자유를 갖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ㅡ『리바이어던』
2. 일생
엘리자베스 1세 때,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영국 상륙을 시도하려한 1588년에 출생했다. 당시 그의 모친은 임신 7개월 중이었는데 무적함대가 마을 근방까지 올지 모른다는 소문에 놀라 조산하고 말았다.[3] 이른바 칠삭둥이. 운좋게 목숨은 구했지만 아버지 토머스[4] 가 천하의 난봉꾼 목사라 주먹다짐 끝에 교구에서 쫓겨나게 되어 편모가정으로 유년시절을 보냈다.
다행히 부유한 삼촌의 후원으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옥스퍼드 대학교에 진학해 이후 추천으로 캐번디시 가문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면서 인생이 피게 된다. 거기서 평생 후원자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장서와 여러 고위층 문객들을 직간접으로 접하면서 깊은 학문적 소양을 쌓게 된다. 그 중 하나가 프랜시스 베이컨의 비서로 일하게 된 것으로 이때 경험론적 학풍에 영향을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2번 정도 유럽으로 여행을 갔는데 그 때 말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만나기도 했다. 베이컨, 갈릴레오라는 당대 명사들과의 만남은 그의 학문관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한편 그 와중에 르네 데카르트, 피에르 가상디 등의 인물들과도 교류했는데 특히 데카르트와는 학문 접근 방식과 철학과 광학이론 등을 가지고 견해 차이를 보였다. 가장 논쟁이 된 데카르트의 저서 성찰에 홉스의 비평문도 같이 실리기도 했다. 홉스는 데카르트를 "기하학만 했으면 위대한 수학자가 될 것을..."이라고 깠고, 데카르트는 그냥 무시했다. 그 외에도 원적 문제를 증명했다면서 존 윌리스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당한 일이 있었다.[5] 당시 기록을 검토한 연구자들에 따르면 홉스는 점과 선이 너비와 넓이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여 수학에는 영 재능이 없어보인다고 한다.
후원자 캐번디시 가문이나 스승 베이컨 그외 친한 지인들이 왕당파라서 그도 그런 성향이 있다 여겨졌고, 실제로 정치사상은 그렇게 평가되기도 했다. 그래서 프랑스로 망명을 가 집필 활동에 몰두했었다. 리바이어던도 이 시기의 산물인데, 리바이어던의 급진성으로 인해 왕당파들에게도 크롬웰에게 아부떠는 이론을 전개한다며 경원시되었다. 이후 1652년 2월에 와서야 귀국하게 된다. 찰스 2세의 귀환 환영식 자리에는 존 로크도 있었다고 한다.
이후 조용히 집필에 집중하면서 16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고령에도 이웃집 소녀에게 연애감정을 느껴 연서를 쓰기도 했다고. 생전부터 그의 사상은 배척을 받아 홉스의 사상에 조금이라도 호의적 경향을 비치면 '호비스트'라고 낙인찍혔다고 한다. 홉스의 말년 집필 중엔 이런 자기 사상에 배척과 반발에 대한 반박 작업도 있었다.
3. 주요 사상
홉스는 실용성을 강조하는 철학자인데, 그는 철학의 주목적을 체계적으로 지식을 나열하여 인간의 삶과 복리증진에 이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홉스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는 합리주의자들과 경험주의자들이 서로 각축전을 벌이며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철학의 체계 재구축에 진력을 다했던 시기였는데, 홉스 또한 이들의 영향을 짙게 받은 바 있다.
우선 홉스는 철학을 크게 세 분류로 나눈다. 현재의 과학에 해당하는 자연철학, 윤리학, 정치철학이 바로 그것들이다. 자연철학은 귀납과 더불어 인류의 복리를 증진시키고, 윤리학과 정치철학 또한 마찬가지라고 평한다.
홉스는 형이상학을 대단히 혐오했다. 인문주의자들로부터 연연된 스콜라 철학에 대한 혐오증은 그의 본질적인 철학적 체계와 함께 같이 계승되었다. 진정한 철학자는 원인으로부터 결과를 도출해내고, 알려진 결과로부터 원인을 찾아내는 작업을 추리라 명명하고 이를 반복되게 행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당대에는 철학과 과학이 아직 분리되지 못했던 시기였기에 시대적 한계라 평하고 그 이상의 평가를 자제하는 것이 현대 철학사가들들 사이에서 공통분모로 기능되는 전제 중 하나이다.''
그런고로 홉스의 철학은 현대의 유물론에 가깝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다르게 그는 신이 부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지 신은 철학의 주제가 아니라고 말할 뿐이다.'''
홉스가 무신론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위의 홉스의 생애의 각주만 살펴봐도 알겠지만, 분명 중세에도 나이롱 신자가 있었을 것이고 사회의 강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예배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라는 제법 유의미한 반론이 나올 만 하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말했듯이 결코 홉스를 무신론자라고 결론 지을 수 없다. 실제로 그는 신 존재증명을 나름대로 구성했는데, 내용은 이렇다. "원인의 지식에 관한 호기심이나 사랑은 자연히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 자체는 아무런 원인을 갖지 않는 하나의 원인을 생각하게 하며, 따라서 자연적 원인들을 깊이 조사하려 하면 반드시 영원한 하나의 신이 있다고 믿게 되기 '''쉽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의 감탄할 만한 질서에 의해서 우리는 그것의 원인을 신이라고 부르지만, 우리 마음 속에 신의 관념 또는 심상을 갖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홉스는 신이 분명 존재하는데 그것을 우리가 증명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홉스의 신 인식은 당시 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 상당한 곤혹을 가져다 주었는데, 그의 신 인식은 분명히 유물론자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홉스에 의하면 신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단순한 물질적 정신이며, 삼위일체, 그리고 그것의 위격들은 하나의 순수하고 단순하며 영원한 물질적 정신이라고 명백하게 말한다. 보듯이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전혀 호환되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확정지을 수 있는 사실은, 분명 그는 유신론자였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
게다가 로크와 함께 근대 성경주석학자이기도 했다. 사실 이런 문제는 간단하게 보면 뉴턴처럼 신은 믿었지만 조금 다른 방향인것으로 추정된다.
사회계약론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자연상태(통치자가 없는 상태)에서의 인간은 이기적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기존의 이론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사회성을 지적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인간은 천성적으로 모여 살게 되어 있으며 그것이 바람직한 상태라고 진술했다.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가족, 마을, 국가 등의 순으로 모여서 사회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홉스의 경우 자연상태라면 서로 싸움이나 하겠지? 하면서 이의를 제기한다.
그의 사상은 간명하다. 심리학과 물리학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그의 사상의 근거는 물리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인간 심리에 대한 논증을 시작한다. 홉스가 이런 시도를 취한 것은 정치학을 과학적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둘 수 있다.
인류학계를 양분하는 홉스주의자와 루소주의자의 논쟁은 유명하다. 홉스주의자는 원시전쟁이 잔악무도하고 절멸전쟁이라는 논지를 펼치는 쪽이라면, 루소주의자는 의례화된 전쟁일 뿐 진짜 잔악한 전쟁은 근대에 와서나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측. 한때 루소주의자가 인류학계를 휩쓸었지만 요즘은 홉스주의자의 의견이 맞는 것으로 판명됐다.(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인종청소의 증거들이 발굴된 바 있다) 물론 홉스가 민족지를 토대로 자연상태에 대한 분석을 한 건 아니고.
[1] 실제 발음은 [hɒbz\]에 가까우므로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면 '호브스'로 표기해야 함이 타당하다. 유성 파열음은 '으'를 붙여 적기도 하거니와 현행 표기 원칙에 준하는 외래어 용례의 표기 원칙 제6장에 "어말의 -s[z\]는 ‘스'로 적는다."라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관용적으로 '홉스'라는 표기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국립국어원의 규정 용례는 '*홉스, 토머스'이다.[2] 원문 : "In such condition there is no place for industry, because the fruit thereof is uncertain, and consequently no culture of the earth, no navigation nor the use of commodities that may be imported by sea, no commodious building, no instruments of moving and removing such things as require much force, no knowledge of the face of the earth, no account of time, no arts, no letters, no society, and which is worst of all, continual fear and danger of violent death, and the life of man, solitary, poor, nasty, brutish, and short."[3] 자신은 "공포와 쌍둥이로 태어났다"고 하기도 했다.[4] 부친과 이름이 같다.[5] 존 월리스는 뉴턴 직전 미적분학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 기호를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