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회스
Rudolf Höss
1901년 11월 25일 ~ 1947년 4월 16일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원. 악명높은 아우슈비츠의 책임자이다.
히틀러의 측근이었던 루돌프 헤스와는 다른 사람이다.
2. 어린 시절
어릴 때 일찍 성직자의 길을 걷다가 접었다. 회스 본인 주장에 따르면 13세때 김나지움에서 친구를 계단에서 밀어 다치게 한 일을 신부에게 고백했는데 나중에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회스에게 벌을 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회스는 고해 신부가 고해성사를 자기 아버지에게 일렀다고 생각하고 신부가 되기로 한 마음을 접었다.(출처 루돌프 회스, 고백록) 그 뒤 성직자가 되기를 요구하던 아버지마저 14세때 사망하면서 성직자의 길을 완전히 접었다.
3. 1차대전
1차대전이 벌어지자 아직 미성년자였던 회스는 만하임에서 적십자 보조원으로 부상병을 돌보는 일을 했다. 여기서 본인도 부상병의 고통에 충격을 받았다고 본인이 직접 밝혔는데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이때 군인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연히 미성년자가 전쟁터에 가는 것에 회스의 어머니는 물론 주변 어른들도 모조리 반대했고, 병영기차에 몰래 탔다가 헌병에게 들켜서 집으로 보내진 일도 여러번 있었다. 그러다 결국 1916년 15세의 나이에 한 육군 기병대위 덕에 육군 제21용기병연대에 입대했다.
이후 회스는 오스만 투르크 전선에 배치되어 이스탄불과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싸웠다. 1917년에 회스의 어머니는 죽었지만 회스는 그럭저럭 생존해서 17세의 나이에 1급 철십자 훈장을 받고 부사관이 된다. 그렇게 기병 소대에서 소대장으로 활동하다가 1918년 다마스쿠스에서 종전을 맞고, 독일에 돌아왔다.
4. 정치깡패 시절
독일에 돌아온 직후 회스는 큰아버지와 갈등을 빚고 가출, 이후 북 독일에서 자신들을 의용군으로 부르던 정치 깡패집단에서 활동했다. 회스가 쓴 이력서에 따르면 처음에는 동 프로이센에서 활동하다가 이후 로스바흐(Roßbach) 의용군에 들어가 이후 메르렌부르크, 루트, 률리지엔 등지를 돌아다니며 국경경비 및 의용활동이라 자칭하면서 조폭 짓거리를 벌였다(출처: 루돌프 회스, 1936년 6월 19일 다하우 SS 인사부에 제출한 이력서 중). 그리고 그 와중에 1922년 11월 뮌헨에서 어느 전직 상병 나부랭이의 연설을 듣고 그 인간이 있던 작고 똘기넘치는 단체에 가입했다. 당시 회스는 입당 번호 3240번으로 나치당에 입당했다.
회스는 조폭짓을 하면서 자칭 비밀재판(vehmgericht)이라 불리는 린치 활동을 많이 벌였다. 그러던 중 파르힘 지방에서 민족주의계의 테러[1] 를 증언한 사람을 두고, 회스와 그 일당들은 이 증인을 납치해 비밀재판을 열고 독일의 배반자라는 이유를 붙여서 살해했는데, 이 증인 살인사건이 알려지면서 1923년 6월 28일 체포되었다. 그리고 재판 과정중 독일의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자신은 해방되거나 가벼운 형량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것 때문인지 사람을 살해해놓고는 겨우 징역 10년이라는 로또급 형량을 받았다(물론 회스는 회고록에서 이런 형량에도 징징거리고 있다). 그나마도 1928년 7월 14일에 대사면이 발표되면서 겨우 5년만에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회스는 회고록에서 자신은 살인사건의 주범이 아니였지만 슐라게터의 우정과 동료가 무죄로 풀려나게 해주려고 으리 있게 죄를 대신 뒤집어썼다고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데 그 다음 문단에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서 피해자를 살해했다고 아주 주범이라고 고해성사를 하고 있다.
5. SS와 수용소 근무
출소한 회스는 농업지원청년운동이라는 단체에 가입하고, 이후 결혼을 하고 아이도 가지는 등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 1933년 9월 SS에 가입했다. 후보자로 있다가 1934년 4월 1일 정식 SS 돌격대원이 되었다. 그리고 힘러의 요청으로 1934년 11월부터 다하우 강제수용소에서 근무했다. 회스 본인은 회고록에서 수용소에서 벌어졌던 반인륜적 처벌을 혐오하고 피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당시 수용소장이던 로리츠는 힘러에게 회스를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그 덕인지 SS 병사였던 회스는 단 2년만에 SS 장교계급인 Untersturmführer까지 진급했다. 반인륜 범죄를 회피했다고 보기에는 이 진급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 회스의 회고록에는 1934년 6월에 힘러가 직접 찾아와 SS에 가입을 요청했고 자신은 순진한 군사조직 같은 것이라 여기고 가입했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공식적인 SS기록에 따르면 회스는 이미 1933년 9월 20일에 SS에 후보자(Anwärter)로 가입해서 1934년 4월 1일에는 정식계급인 Mann 계급을 같은 달 20일에는 Sturmmann까지 진급했다. 거기에 체포된 이후 1946년 3월 14일 영국군 담당관에게 진술한 내용을 살펴보면 회스는 1929년부터 1934년까지 포메른에서 농업관련 기구에서 일하고 있었고 SS를 위한 기병대 조직을 만들던 중 그 지역을 담당하던 힘러의 관심을 사서 거기서 강제수용소의 관리를 맡게 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공식기록을 생각해보면 후자가 더 신빙성이 높다.
6. 아우슈비츠
1940년 5월 회스는 아우슈비츠의 신실되는 강제수용소 완성후에는 비르케나우라 불리는 수용소의 소장으로 근무하며 치클론 B를 사용하여 수많은 유태인을 가스실로 보냈다.
7. 체포 및 재판
제 2차 세계대전 말엽 아우슈비츠가 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한 시점 이전에 탈출하였으나 영국 정보부에 의해 붙잡혔고[2] 폴란드 최고국가법원에 의해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반 인륜 범죄를 행한 전범으로 사형 판결을 선고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당신 손에 죽은 유대인들이 정말 죽어 마땅했나?'라는 질문에 그것은 자신이 답할 내용이 아니라고 변론하였으며 아사 등 질병으로 사망한 1백만 명의 유태인들은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서 350만 명이 아니라 250만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등 발뺌하였다.
하지만 지옥에는 가기 싫었는지 죽기 직전에는 가톨릭 신앙으로 다시 돌아가서 틀린 이념을 믿었다는 고해성사를 하며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는 기색을 보였다.
8. 사형 집행
피해자 가족들의 요구 및 학살자에 대한 본보기로 아우슈비츠에 오직 회스만을 위한 특별 제작한 특설 교수대를 설치하였고 1947년 4월 16일 이 현수식 교수대[3] 에서 공개처형을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현재도 그 교수대는 남아있다.#
9. 후일담
- 루돌프 회스의 3녀인 브리기테는 1950년 독일을 떠나 스페인으로 갔다. 그곳에서 결혼한 후 남편의 직업상 이유로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워싱턴 시로 건너갔다. 거기서 옷가게 점원으로 취직했는데, 어느 날 그녀의 패션감각에 감탄한 한 유태계 여인이 삭스 젠델이란 고급 매장에서 일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해 함께 일하게 되었다. 어느 날 그녀는 과음한 나머지 매장 매니저에게 자기 아버지의 비밀에 대해서 말하게 되었다. 매장 매니저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매장 소유주들은[4] 아버지의 범죄에 대해 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해 불문에 붙였고 그녀는 그 부부와 35년을 일했다.
- 루돌프 회스의 손자[5] 라이너 회스는 할아버지의 자서전을 읽고 반나치주의자가 되었다고 하며, 이후 그는 현재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아 직접 사죄도 하고 반나치 강연도 하고 있다.
[1] 알베르트 슐라게터(Albert Schlageter)로 슐라게터는 당시 프랑스가 점령했던 루르 지역에서 테러를 벌여서 나치 등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게 지지를 받는 상황이었다.[2] 회스는 이름까지 개명한 이후 정원사로 활동하였으나 영국 정보부가 회스의 아내에게 회스의 소재를 밝히지 않으면 아들을 소련에 포로로 보내겠다고 협박했고, 결국 회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회스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지만 끼고 있던 결혼반지에 회스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체포되었다.[3] 목을 단숨에 부러뜨리는게 아닌 질식사 형태로 죽는 사형 방법이다. 현대에 와서는 이란 같은 가장 전근대적인 국가가 존재하는 중동에서나 본보기로 행하는 사형 방법이다. 즉, 죽는 순간에마저도 목이 졸려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으라는 이야기. 비단 루돌프 뿐만 아니라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된 나치 전범 모두 이런 방식으로 고통스럽게 사형당했다.[4] 그들은 수정의 밤 당시 독일을 빠져나온 유대인 부부였다.[5] 차남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