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루 페헤이라

 

'''파울로 페헤이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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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베스트팀'''




'''첼시 FC 앰버서더'''
'''Chelsea Football Club'''
''' 이름 '''
'''파울루 페헤이라'''
'''Paulo Ferreira'''
''' 본명 '''
파울루 헤나투 헤보슈 페헤이라
(Paulo Renato Rebocho Ferreira)
''' 출생 '''
1979년 1월 18일 (45세) /
포르투갈 카스카이스
''' 국적 '''
포르투갈
''' 신체 '''
183cm
''' 직업 '''
축구선수 (라이트백[1] / 은퇴)
축구코치
''' 소속 '''
''' 선수 '''
GD 이스토릴 프라이아 (1997~1999)
비토리아 FC (2000~2002)
FC 포르투 (2002~2004)
'''첼시 FC (2004~2013)'''
''' 매니저 '''
'''첼시 FC (2013 ~ )'''[2]
''' 국가대표 '''
62경기(포르투갈 / 2002~2010)
1. 소개
2. 클럽 경력
2.1. 포르투갈 시절
3. 국가 대표
4. 기타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5.3.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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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포르투갈의 풀백. 2000년대 중반 통곡의 벽이라 불릴 정도로 탄탄한 수비진을 갖춘 첼시의 주전 라이트백이었고 강력한 수비력, 활발한 오버래핑, 준수한 외모, 그리고 깔끔한 패스와 크로스 능력을 보유한 선수였다. 또한 클럽에 대한 충성심이 꽤나 남다른 선수였다.

2. 클럽 경력



2.1. 포르투갈 시절


포르투갈 세군다 리가의 팀인 이스토릴 프라이아에 입단했으며, 2000년 포르투갈 프리메이라 리가비토리아 FC에 입단, 1부 리그에 데뷔했다. 이적 후 첫 시즌에만 34경기나 출장하면서 상당한 이목이 집중되었으며, 2002년에는 FC 포르투로 자리를 옮겨 뛰었다. 포르투갈의 빅 클럽이었던 FC 포르투에 쟁쟁한 수비 자원을 모두 제치고 주전 자리를 꿰차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2003-04 시즌, 그는 주제 무리뉴 감독이 이끄는 FC 포르투의 일원으로서 리그 우승, 챔피언스 리그 우승, 컵 우승에 기여했다. 그리고 2003 UEFA BEST 11에 미첼 살가도, 릴리앙 튀랑, 하비에르 자네티 등의 레전드들을 제치고 선정되었다.
2004-05 시즌부터는 같은 팀의 히카르두 카르발류와 함께 감독 무리뉴를 따라 첼시 FC로 이적[3]. 그리고 무리뉴 사단이 이끄는 '''첼시 제국이 시작되었다.'''

2.2. 첼시 FC


입단 초 등번호는 20번. 첼시에서의 첫 시즌인 2004-05 시즌, 첼시는 승점 95점[4], 실점은 단 15점[5]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우승했으며, 페레이라는 리그에서 29경기를 출장하며 프리미어 리그 라이트백의 최강자로 불릴 만큼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당시 윌리엄 갈라스-존 테리-히카르두 카르발류-'''페헤이라'''의 철의 포백은 프리미어 리그 공격수들의 무덤이라 불릴 만큼 탄탄했다.[6]
2005-06 시즌에도 철의 포백의 일원으로 좋은 활약을 보여준다. 그 다음 시즌인 2006-07 시즌부터는 칼리드 불라루즈, 제레미 은지탑, 라사나 디아라 등의 영건들과 경쟁하는 과정속에서 주전에서 밀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맨유와의 FA컵 결승전[7]에서 120분간의 혈투 끝에 첼시가 FA컵에서 우승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 첼시 입단후 네번째 시즌인 2007-08 시즌부터는 마이클 에시엔, 줄리아누 벨레티에 이은 3옵션정도의 선수가 되면서 폼이 많이 떨어지기에 이르지만, 경기에 출장할때는 그래도 괜찮은 수비력을 보여주며 2008년 2월, 새로이 5년 재계약에 사인한다. 이후, 2008-09 시즌, 국가대표 동료인 데쿠가 첼시에 입단하였는데 주로 20번을 주로 다는 데쿠를 위해 20번을 데쿠에게 양보하고 페헤이라는 그 앞번호인 19번을 달게 된다. 이후, 데쿠가 첼시를 떠난 뒤에도 페헤이라는 은퇴할 때까지 19번을 그대로 유지한다.
2008-09 시즌은 부상에 시달리는 통에 별로 활약을 못해 먹튀 소릴 들을 뻔했으나 그 다음 시즌 애슐리 콜, 브라니슬라프 이바노비치, 조제 보싱와[8] 등이 싹 드러누워 버리자 유리 지르코프와 함께 풀백 땜빵요원으로 나와 2009-10 시즌엔 20경기에 출장[9]하면서 더블(리그, FA컵)에 기여한다. 특히 풀백자원들이 싹 나가리 되버린 상태에서 치른 맨유전, 그것도 올드 트래포드에서 치른 경기에서 전성기를 보는 듯한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다.
2010-11 시즌 초기에는 많은 출전 기회를 얻었으나[10],이바노비치와 보싱와의 복귀 후 다시 벤치로 밀려났다. 이 시즌 후반에는 선발출전이 거의 없었지만, 초반에 많이 벌어놓은 것과 교체출장 경기수를 합해 29경기 출장을 기록하며 첼시 FC에서 200경기를 기록했다.
2010-11 시즌이 끝나고 카를로 안첼로티가 경질당한 이후 안드레 빌라스보아스가 감독으로 오고 보아스는 후안 마타, 하미레스, 다니엘 스터리지 등의 어린 선수들을 중용하고 알렉스, 디디에 드록바 등의 고참들을 벤치로 내리는 세대교체를 단행한다.[11] 페레이라 또한 세대교체라는 명목으로 벤치를 달구는 신세가 된다. 그런데 성적이 계속 안나오고 선수와 감독간의 불협화음이 계속해서 커지자,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보아스를 경질하고 수석코치였던 로베르토 디 마테오를 임시감독으로 선임한다. 감독이 달라져도 페레이라의 입지는 그렇게 큰 변화는 없었지만, 2011-12 챔피언스리그 8강전이었던 벤피카와의 원정경기에서 출장하여 좋은 폼을 보여주며 첼시의 4강행을 이끈다. 블랙번과의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오랜만에 나와 홈 팬들에게 박수를 받은 그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후보멤버로 포함이 된다. 그리고 첼시는 기적같은 경기를 보여주며 우승을 거머쥐고, 그는 커리어 통산 챔피언스리그 우승 2회라는 기록을 세운다.
페레이라의 계약은 2013년 여름에 종료되고, 첼시는 그와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결국 그는 2012-13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2013년 5월 19일 시즌 마지막 경기였던 에버튼과의 홈경기[12]에서 교체출장하며 그는 첼시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뛰게되고, 경기 종료 후 유로파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고 피치로 나와 팬들에게 인사를 했다. 은퇴식은 2013년 5월 23일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이루어졌다. 첼시에서 남긴 기록은 217경기 출장, 2골 기록.
[image]
자신의 딸을 품에 안고 은퇴를 발표하는 페레이라.
은퇴 후에도 여전히 첼시에 남아 스탭직을 맡고 있으며, 에디 뉴튼과 함께 첼시에서 여러 구단으로 임대 간 선수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미 나단 아케, 안드레아스 크리스텐센, 루이스 베이커 , 마르코 마린 등 임대 생활을 했던 여러 선수들이 에디 뉴튼과 파울로 페레이라의 임대 선수 관리에 대해 큰 도움이 됐다고 칭찬을 했다.

3. 국가 대표


상당히 오랜기간동안 포르투갈 수비의 한 축을 담당했다.
탄탄하고 일관성 있는 수비력을 발휘하며 페레이라는 포르투와 계약한지 6개월 만에 국가대표로 데뷔했다. 그는 2000년에 빌라 파크에서 잉글랜드와의 친선경기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첫번째 메이저 대회였던 UEFA 유로 2004에서 국가대표로 뽑히지만, 그리스와의 개막전에서 많은 실수를 범하면서 명단에서 제외되다시피하고 포르투갈이 준우승에 그치자 욕을 진탕 얻어먹었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도 다시 한번 뽑혀 설욕할 기회를 얻었고 준결승전인 프랑스와의 경기에 후반 교체출장했지만 게임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고, 지단의 PK 결승골로 패배한 포르투갈은 독일과의 3~4위전을 치르게 된다. 이 경기에선 선발로 나왔으나 슈바인슈타이거의 중거리슛 두방과 자책골을 더한 스코어 3:1로 포르투갈은 대패하게 된다.
UEFA 유로 2008에도 또 국가대표로 뽑히게 되고, 포르투갈은 이번엔 8강전에서 또 독일한테 3:2로 깨져 귀향한다. 페레이라는 이 경기를 포함해 4경기에서 모두 왼쪽 풀백 선발로 나왔다.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에도 어김없이 본선 멤버로 포함되어, 코트디부아르 와의 조별예선 첫경기에서만 출장한다. 이 경기는 득점없이 비겼고, 포르투갈은 그 대회 챔피언 스페인과 16강부터 만나서 1:0으로 패배한다.
그리고 2010년 8월,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며 국가 대표 커리어를 마감한다. 그는 총 62경기에서 뛰었고, 메이저 대회 4개에 출전했다.[13]

4. 기타


요즘 해외축구팬들에겐 생소한 이름이겠지만, 예전엔 상당히 잘생긴 외모와 좋은 실력으로 많은 해외축구팬들의 사랑을 받은 선수 중에 하나이다.
[image]

또한 2008-09 시즌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가 감독으로 선임된 후 데쿠를 영입했을 때, 그에게 자신의 번호였던 20번을 양보하고, 자신은 19번을 다는 것에 아무런 불만을 내비치도 않았다. 거기에다 첼시에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가 영입된 후 2010-11 후반기, 2011-12 시즌 동안 극악의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엄청난 욕을 처먹으며 페레이라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그가 직접 증언했다. 요약: 적응하거나 받아들여야 할 때 많은 조언을 해주었고, 언제나 열심히 훈련한다 등
UEFA 베스트 일레븐에도 들어간 선수였지만 말년엔 경기에 몇번 나오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자존심이 상할 법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등번호 변경도 흔쾌히 받아들이고, 주급삭감도 감수하고, 급할땐 포르투갈어를 쓰는 선수들을 위해 통역까지 해주면서 구단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인 대단한 멘탈을 가진 선수였다.
그리고 UEFA 유로파 리그, UEFA 챔피언스 리그를 각각 2회씩 우승한 흔치않은 기록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주제 무리뉴는 페레이라를 일컬어 '''"평점 10점을 받기는 어렵지만 언제나 7점은 받을 수 있는 선수."'''라 평했다. 이슈메이커와는 거리가 멀었고 준수한 기량에 더불어 성실함과 멘탈로써 꽤 평탄한 선수생활을 커리어 내내 해오며 여러 우승경력을 쌓은 점을 생각하면 꼭 들어맞는 평가라 할 수 있겠다. 선수생활을 은퇴한 후에도 계속 첼시에 남아 임대선수들을 관리하면서 구단에 이모저모 공헌하며 제 몫을 해주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첼시에 있거나 거쳐간 선수들 중에서 이만한 인생의 승리자도 아마 드물 것이다.

5. 수상



5.1. 클럽



5.2. 국가대표



5.3. 개인


  • UEFA BEST 11(1): 2003

[1] 주 포지션은 라이트백이지만 레프트백으로도 뛴적이 있으며 말년 시기에는 센터백을 땜빵한 적도 있었다.[2] 앰버서더 및 기술코치 역임[3] 이적료는 약 20m[4] 역대 프리미어리그 최다 승점이였다. 2003-04 시즌 무패우승이었던 아스날도 첼시의 승점은 넘지 못했다가 17-18시즌 맨시티(100점)에게 기록을 넘기게 되었다.[5] 이것 또한 역대 최소 실점으로, 2020년 현재까지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6] 또한 당시 UEFA 유로 2004에서 크게 활약하고 EPL로 넘어와서도 엄청난 활약을 선보이면서 본격적으로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던 페트르 체흐와 수비형 미드필더의 교과서라 불린 클로드 마켈렐레의 활약도 역대 EPL 최소 실점에 크게 기여하였다.[7] 여담으로 이 경기는 새로 개장된 뉴 웸블리 스타디움에서의 첫 경기였다.[8] 이분은 이 다음시즌까지만 해도 공수를 겸비한 최고의 윙백이었다.[9] 리그에선 13경기[10] 시즌 중반 센터백들이 부상으로 누워버린 통에 익숙하지 않은 자리에 대신 센터백으로 출전하게 된 경기도 있었다. 이 때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며 패배를 막지 못했는데, 이 시점 후로 점점 늙어가는 나이가 맞물리며 점점 페레이라의 자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11] 보아스는 이런 과정속에서 불만이 쌓인 램파드, 드록바, 테리 등의 고참들과의 불화로 지휘봉을 내려놓게 된다.[12] 이 경기에는 챔스 직행 or 플레이오프행이 달려있는 중요한 경기였는데, 그 토레스가 결승골을 넣으며 2013-14 시즌 챔스 직행권을 따낸다.[13] 출처 - 첼시의 숨어있는 레전드: 파울로 페레이라 (Paulo Ferreira) (We Are The Blues: 첼시 팬 포럼) |작성자 파페옹[14] 포르투갈의 슈퍼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