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토 디 마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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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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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6년에 아스톤 빌라 FC 감독을 맡았다.
2. 선수 시절
2.1. 스위스 - 이탈리아 시절
부모는 이탈리아인이었지만 스위스 샤프하우젠에서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여기서 자랐다. 때문에 독일어 원어민이며, 나중에 샬케 감독 시절에 유창한 독일어로 인터뷰하곤 했다.
고향팀 FC 샤프하우젠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1991년 FC 취리히, 아라우를 거쳐 SS 라치오로 이적한다. 아라우에서는 리그 우승을 맛본 적이 있으며 스위스 리그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다. 당시 라치오의 구단주였던 세르지오 크라뇨치의 공격적인 투자의 타겟이 되었고 디 마테오는 라치오에 새 둥지를 트게 된다.
1996년까지 라치오에서 활약한 그는 갑작스럽게 첼시 FC 행을 선택하는데, 이는 당시 라치오의 감독이었던 즈데넥 제만과의 마찰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1995-1996 세리에 A 24라운드에서 라치오는 인테르에게 0:1로 패배하는데, 경기 직후 제만 감독은 디 마테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이 틈을 노린 첼시의 루드 굴리트 선수 겸 감독[1] 이 디 마테오에게 오퍼를 했고, 결국 디 마테오는 스탬포드 브릿지로 이적한다.
2.2. 첼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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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홈 데뷔전이었던 미들즈브러와의 경기에서는 골을 터뜨리면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당시 중하위권이던 첼시는[2] 당시 시즌 팀 역사상 프리미어리그 최고 성적인 리그 6위까지 성장했으며, 1997년 FA컵 결승전에서는 42초만에 골을 터뜨리며 구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FA컵 결승전 역사상 최단 기간 골로 이름을 남겼다.
디 마테오는 데니스 와이즈, 단 페트레스쿠(루마니아 출신의 윙어, 현 크라스노다르 감독)와 함께 미드필더진을 이끌었으며, 그의 중거리 슈팅은 항상 상대에게 위협적이었다.
디 마테오의 영입과 더불어 이탈리아의 지안루카 비알리(현 스카이 스포츠 이탈리아의 해설자), 지안프랑코 졸라(현 첼시 어시스턴트), 노르웨이의 토레 안드레 플로, 98 프랑스 월드컵의 주역인 프랑스의 마르셀 드사이, 디디에 데샹, 프랑크 르뵈프, 에마뉘엘 프티[3] 등과 같은 유럽 용병들의 첼시 행이 계속 이어졌고, 여기에 네덜란드의 명 공격수 하셀바잉크, 바우데베인 젠던[4] 등까지 영입하면서 첼시의 비잉글랜드 선수 수집은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이탈리아-프랑스-네덜란드 커넥션의 첼시는 6위-4위-3위-5위-6위-6위-4위-2위의 성적을 거두었을 정도로 잘 나갔다. 주제 무리뉴가 첼시에 온 이후의 성적은 첼시 FC 참조.
2000년 구 웸블리에서의 마지막 결승에서도 골을 넣으면서 FA컵의 사나이로 이름을 날렸지만, 2000년 9월 28일 2000-01 시즌 UEFA 컵 1라운드에서 스위스 클럽 FC 생 갈렌과의 경기에서 정강이와 종아리 뼈가 부러지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다. 19개월에 이르는 재활기간을 거치며 복귀를 꿈꿨지만 그 부상은 결국 디 마테오가 유니폼을 벗게 만들었다. 결국 디 마테오는 2002년 2월 19일 은퇴를 선언했다. 2002년 아스날 FC와의 FA컵 결승에서는 선수단을 인솔하는 역할을 맡을 정도로 그의 은퇴는 팬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2.3. 국가대표 경력
디 마테오는 이탈리아 국적을 지녔지만 스위스 출신이었기 때문에 국대 승선에 항상 어려움을 겪었다.[5] 그래도 실력은 인정받았기 때문에 유로 96에서도 이탈리아 국대에 승선했었다. 하지만 첼시로 떠난 후에는 이탈리아 국대 승선에서 번번히 물을 먹었다. 결국 명성에 비해서는 A매치 출전 횟수는 34경기로 적은 편.
3. 지도자 경력
3.1.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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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시절.
은퇴 후에는 런던에서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경영했으나, 후에 축구계로 복귀하여 밀턴케인스 던스 FC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팀을 풋볼 리그 1(잉글랜드 3부 리그) 3위에 올리는데에는 성공했으나 PO에서 패배하며 승격에는 실패했다. 이후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의 감독을 맡으면서 부임 첫해에는 팀을 EPL로 승격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2010년 9월에는 이 달의 감독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나, 박싱 데이#s-2 기간을 버티지 못하고 팀이 부진하자 결국 2011년 1월 경질되었다.
3.2. 첼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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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첼시 감독의 부름을 받고 첼시의 수석 코치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3월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면서 감독대행 직을 맡게 되었다.
당시 사기가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던 첼시는 디 마테오가 부임한 직후 180도 달라졌는데, 디 마테오의 첼시 감독 데뷔전이었던 FA컵 버밍엄 시티전 승리 후 레스터 시티, 토트넘 핫스퍼, 리버풀 FC를 꺾으면서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SSC 나폴리를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8강 진출에 성공하고, 8강에서 벤피카를 꺾었고, 4강과 결승에서 FC 바르셀로나와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6] '''팀 역사상 첫 챔스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감독 대행이 '''더블'''을 기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리그 성적은 6위에 그치면서 아쉬운 성적을 거두었지만, 이 순위는 이전 감독이었던 안드레 빌라스보아스의 성적 부진이 너무 컸던 탓이며, 당시 선수단의 체력을 감안했을 때 챔피언스리그와 리그 중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챔스를 선택한 디 마테오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옳은 선택 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했기 때문에 첼시는 6위의 성적에도 불구하고 12-13 시즌 챔피언스리그에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출전이 가능하게 되었고, 결국 4위인 토트넘은 유로파리그로 내려가는 그야말로 안습한 상황이 발생하였다.
전술상으로는 무리뉴 감독이 보여줬던 전술과 비슷한데, 보아스 감독과는 달리 디 마테오 감독은 살로몬 칼루와 하미레스를 윙으로 중용하였고, 후안 마타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위치를 약간 조정하였다. 그리고 로테이션을 상당히 잘 돌리는 편에 속한다. 11-12 시즌 막판의 살인 일정에서도 컵 대회 2개를 우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선수단에게 적절한 양의 휴식을 분배했기 때문이었다. 다비드 루이스-게리 케이힐, 하울 메이렐레스-존 오비 미켈-프랭크 램파드 등을 적절히 돌려 쓰고, 후반기 들어 체력이 빠진 마타에게는 적절한 상황에서 교체해주면서 체력 안배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사실 감독치고는 나이가 꽤 젊은 편이라 선수단과의 친밀함을 유지했으며, 선수단의 지지를 받고 있고 성적이 나왔기 때문에 많은 팬들은 그가 정식 감독이 되기를 바랐다. 확실히 선수단을 이끄는 방법은 정말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디 마테오는 챔스 결승전 전날 선수들이랑 가족들을 소집해서 각자의 어린 시절이 담겨진 영상을 틀어줬다. 그 후 선수들이 삶에서 축구를 선택한 순간을 다시 되새겼고 정신적으로 무장을 시켜주면서 챔스 우승에 대한 목표의식을 고양시켜주었다.
2012년 6월 13일,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정식 감독 첫 시즌인 12~13 시즌 초반 리그에서 8경기 7승 1무을 달리며 순조롭게 진행중이었으나 그러나 계속 부진하면서 2012년 11월 21일 유벤투스와의 챔스경기에서 3:0으로 완패한 후 경질됐다.(공홈). 이 결정에 대해 첼시 서포터들은 맹렬히 반발. 조금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클럽의 레전드이자 클럽을 최초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으로 이끈 감독을 해임하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분위기다. 게다가 후임 감독으로 라파엘 베니테스를 선임했는데 라이벌인 리버풀 FC의 감독이었다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현재 평가가 매우 미묘한 감독인지라 팬들은 더욱 아쉬워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어느정도 디 마테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게 중론. 라니에리 이후 중도 경질된 감독들의 목록을 보면 챔스에서 치명적인 삽질을 한 경우가 많았다.[7] 디 마테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유벤투스를 홈에서 못 잡은 것이 치명적이었던 셈.[8]
거기에 오프 시즌에 전력 보강이 공미 위주로 치우쳤다는 우려를 낳았고, 토레스 원톱에 스터리지 서브를 구상했는데 이로 인해 로멜루 루카쿠가 웨스트 브롬위치로 임대를 갔다. 그런데 토레스가 부진하고 스터리지야 원래 탐욕 넘치는 선수다 보니 공격진에 구멍이 뻥 뚫렸고, 또한 중미에서도 미켈 - 하미레스 - 에시엔 - 램파드 - 메이렐레스가 포화상태다 보니 에시엔을 레알 마드리드로 임대보낸건 그렇다 치더라도 하울 메이렐레스를 터키로 보낸 것은 큰 실수였다는 것이 중평이다.
11-12 시즌 대행 시절에는 로테이션을 자주 돌렸으나, 12-13 시즌 들어서는 베스트 11를 고집하는 모습도 많은 비판을 받았다. 감독 대행 시절 리그가 원채 성적이 나빠서 굳이 올인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는 걸 감안해야 하긴 하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전에서 2명이 퇴장당하고 석연찮은 치차리토의 결승골에 무너지자 이에 욱한 디 마테오가 며칠 뒤 케피탈 원 컵에서 주전들을 대거[9] 내보내 이기는 모습에서 경기에서 승리했지만, 그 뒤로 공미들의 체력이 쭉쭉 빠지면서[10] 팀의 성적 부진에 큰 기여를 한 꼴이 되어버렸다.
결론적으로 디 마테오가 정식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를 보면 딱히 잘 한 건 보이지 않는 셈. 여전히 강팀을 맡길 감독으로서는 부족한 모습을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디 마테오를 경질하고 후임으로 베니테스를 데려왔다는 것이 첼시 팬들에게는 큰 불만이었고 베니테스 부임 이후 한 달 동안은 베니테스에 대한 야유가 엄청나게 쏟아졌고[11] 전반 16분만 되면 첼시 팬들은 디 마테오의 선수 시절 등번호(16)를 기리는 기립 박수를 보낸다.
3.3. FC 샬케 04 감독
첼시 감독에서 경질된 이후로 1년 넘게 백수 상태이다. 이는 계약상 첼시가 2014년 여름까지 디 마테오가 새로운 팀을 맡지 않는 이상 주급 13만 파운드(약 2억 2천만원)을 그대로 보존해 줘야 하기 때문으로, 이 때문에 이제껏 디 마테오 감독에게 관심을 보여온 팀들도 이 정도의 높은 주급을 대신 보존해줄 엄두가 안 나 포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나마 웨스트 브롬위치 알비온 FC가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지만, 주급 문제와 함께 디 마테오를 잘랐던 피어스 구단주와의 관계 개선도 걸려 있다.
2014년 10월 7일 FC 샬케 04가 옌스 켈러 감독을 경질하고, 디 마테오가 새로운 감독으로 선임됐다고 발표했다. 첼시 감독직에서 경질되고 약 2년여만에 감독직에 복귀하게 됐다.
2015년 3월 11일 챔피언스리그 16강. '''레알 마드리드와의 2차전에서 3:4로 이겼다.''' [12] 상당히 헤매다가 점차 전력이 안정화되어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분데스리가에서는 이렇다 할 모습도 없고 팀은 내외부적인 불협화음으로 나락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러다가 마지노선인 챔스 진출권 사수도 못하고 끝나자 샬케에서 최악의 영입이란 비난을 듣고 1년도 안돼서 경질 통보를 받고 쫓겨났다.
3.4. 아스톤 빌라 FC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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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3일 풋볼 리그 챔피언십으로 강등된 아스톤 빌라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마침 같이 2부로 떨어진 뉴캐슬의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이 디 마테오 부임 전에 뉴캐슬 감독직을 유지하기로 결정하면서 라파엘 베니테스와 함께 풋볼 리그 챔피언십에만 챔피언스 리그 우승 경험이 있는 감독이 2명인 상황이 연출되었다.
2부리그 팀임에도 16/17 시즌 여름 이적시장에서 무려 5000만 달러(약 500 억원)을 선수 영입 비용에 사용했으나 10월 2일 기준으로 리그에서 1승만을 거두고 있는 상황. 리그 19위까지 추락하여 리그 1(3부리그) 강등까지 바라볼 상황이라 결국 10월 3일, 경질되었다.
4. 이야깃거리
- 올드 트래포드에서는 패배한 적이 없다. 또한 펩 과르디올라가 감독으로 있는 팀인 바르셀로나와 뮌헨에 패배 한 적이 없다. 분데스리가 19라운드에서 1:1로 비기면서 1승 2무 무패기록을 지켜냈다.
- 사진에서 보는 대로 소년 분장을 한 박명수와 상당히 닮았기 때문에 한국 한정 소년명수란 별명을 갖고 있다. 요즘은 더 줄여서 그냥 명수형으로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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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선수. 유로 88 우승 멤버이자 유럽 최우수 선수 1회, 세계 최우수 선수 2회 수상 .[2] 1990-1991시즌부터 차례대로 14-14-11-14-11-11등에 그쳤다.[3] 흔히들 프랑스 커넥션은 아르센 벵거의 아스날이 강하다고 하는데 사실 첼시가 대략 10여년 전에 시도했었다. 후에도 말루다, 아넬카, 카쿠타 등의 프랑스 선수들이 첼시를 거쳐갔다.[4] 리버풀에서 뛰던 그 선수 맞다.[5] 은근히 이탈리아 축구팀은 순혈주의가 강하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자국 국적을 가져도 자국에서 태어나 성장하지 않으면 국대 승선이 어려웠다. 마리오 발로텔리와 같은 흑인 선수들은 더더욱 차별받았었던 시절.[6] 바이에른 뮌헨과의 결승전은 정확히는 무승부이다. 승부차기 승리로 우승했다.[7] 무리뉴는 로만과 싸운 뒤 조별예선에서 비기자 사임, 그 후임이었던 그랜트 감독 대행도 결승에서 패배 후 재계약 실패, 빌라스-보아스도 나폴리 원정에서 참패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질.[8] 홈에서의 1차전 전반전에만 오스카가 2골을 넣으며 앞서갔으나 전반 막판과 후반전 실점하며 2:2로 비기고 말았다.[9] 맨유도 주전들이 몇 명 나오긴 했지만 어린 선수들이 첼시보다 더 많이 나왔다.[10] 시즌 초반 좋은 모습을 보이던 아자르는 그 뒤로 골골대었고 후안 마타는 오프시즌에 쉬지도 못한 상태였다. 이 작은 결정이 팀의 한 시즌을 망쳐버리고 말았다. 케피탈 원 컵은 상위 팀들에게는 사실상 후보 선수나 어린 선수들의 기량 점검 차원에서 주전 멤버들에게 휴식을 부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이기면 좋고 져도 상관없는 대회였다. 첼시는 이 시즌에 클럽 월드컵까지 병행해야 해서 경기 일정이 매우 빡빡했기에 이 대회에서 탈락하는 것이 더 좋았다. 하지만 이 경기를 잡기 위해 3일 전에 리그 경기를 치루었던 주전 선수들을 대거 투입했고, 이 경기를 기점으로 첼시의 경기력은 하락세를 타기 시작했다. 결국 케피탈 원 컵 우승도 실패했고, 클럽 월드컵 우승에도 실패했다.[11] 한동안 RAFA OUT이라 쓰여진 걸개와 응원문구가 스탬포드 브리지를 뒤덮었다. 다만 베니테스 감독은 유로파 리그를 우승해 첼시가 무관으로 시즌을 마치는 것을 막았고, 리그 3위를 기록해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티켓도 따냈다. 클럽 월드컵을 우승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어쨌든 소방수로서 주어진 임무는 잘 수행했다 평가할 수 있다.[12] 1골만 안 먹혔으면 되려 샬케가 8강 갔을 점수다.